독일 교회사가. 도미니코 수도회 수사 신부이며 중세의 문서 소개와 주역(註譯)에 공헌하였다. 세례명은 요셉. 1846년 1월 16일 알프스 산악 지대인 티롤(Tirol)에서 교사이자 오르간 연주자인 아버지 요한 데니플레와 어머니 안나에게서 출생하여, 학생 시절 그라츠(Graz)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회에 들어가기로 결심하였다. 1866년 사제로 서품되고, 그라츠, 로마 성 토마스 신학교와 성 막시민(Maximin)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870~1880년 그라츠에서 철학과 신학부의 강사로 지내면서, 교사와 설교자로서 그리고 수도회 수도자로서의 임무에 충실하였다.
교황 레오 13세가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새로운 전집 간행을 위임하였을 때, 이 일을 위임받은 위원회의 의장인 치글리아바(Zigliava) 추기경은 그의 협력자로 데니플레를 로마로 데려왔다. 데니플레는 토마스 아퀴나스 전집 간행에 전력을 기울였고, 1883년에는 레오 13세 교황으로부터 교황청 문서장(로마 교황의 보조 공문서 보관인 3명 중의 한 사람)으로 임명받았다. 이 직위는 역사가로서 데니플레가 지속적인 연구 노력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바티칸의 근거 자료를 활용할 수 있었고, 또 당시 로마에 있던 여러 역사 기관의 지도자들과 깊은 유대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그는 파리 대학의 역사 등 중세 대학에 관한 획기적인 연구와, 중세 교회의 문서 소개와 주역에 공헌했고, 에를레(F. Ehrle)와 함께 《중세 문학사 및 교회사 문서》(Archiv füir Literatur und Kirchengeschichte des Mittelalters, 7권, 1885~1900)를 발간했다. 1899년 파리 대학 연구를 마무리하고 로마로 되돌아온 후에는 루터에 관한 연구와 자료 수집을 위해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기록 보관소와 도서관들을 탐구하였다. 1885~1890년에는 영국 · 스페인 · 프랑스 · 포르투갈 등지로 연구여행을 떠나기도 하였는데, 결국 1905년 6월 10일 캠브리지로 가는 도중 뮌헨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저작과 사상〕 데니플레는 개인적으로 음악 이론과 더불어 문학 활동도 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을 바탕으로 한 신학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그의 열성적인 연구는 중세 철학과 신학의 이해에 근본 토대가 되었다. 그는 소위 신(新)스콜라학의 관점을 통한 스콜라학의 해석으로부터 신비학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독일 신비주의에 가장 정통한 사람이 되었다. 최초의 작품인 《영적 삶》(Dasgeistliche Leben, 1873)은 신비가들의 2,500개의 잠언 모음집이며, 빌헬름 프레거(Wilhelm Preger)에 대한 날카롭고 합법적 비판인 《중세의 독일 신비학의 역사》(Geschichteder Deutschen Mystik im Miitelalter, 1874)에서는 독일 신비학 연구에 있어서의 오류를 제거하려는 데니플레의 단호함이 엿보인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원천 자료에 직접적인 접근을 꾀한 것이다.
그의 비판적 인식 안에는 현대적인 신학, 교부들과 스콜라학자, 시대와 지역사, 독일 중북부의 언어와 변증법이 들어 있다. 그의 방법은 아리스토텔레스-스콜라학적 방법을 역사에 적용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파리 대학과 탁발 수도회 사이에 마찰이 있었을 때, 파리 대학의 역사가 지금까지 그것의 의미에 상응하는 적절한 서술을 하고 있지 않음을 확신하고, 다섯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1400년까지의 중세 대학의 탄생》(Die Entstehung der Universität des Miitelalters bis 1400, 1885) , 《중세 대학의 제도사》(Die Verfassungsgeschichte mittelalterlicher Univer-sitäten) , 《파리 대학의 탄생》(Entstehung der Universität Paris) , 《13세기 말까지의 파리 대학의 발전》(Entwicklung der Universität Paris bis zum Ende des 13. Jahrhunderts), 《탁발 수도회와 파리 대학의 논쟁》(Der Streit der Universität Parismit den Bettelorden) 등이 그것이다.
후에 그는 파리 대학의 도서관장인 에밀 샤틀랭(Emil Chatelain)과 함께 두 권의 책을 더 발행하여, 파리 대학이 중세 철학과 신학 연구의 요지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음을 확실히 하였다. 한편 루터에 관한 저술들을 발표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는데, 《기초 문헌에 의한 루터와 루터교》(Luther und Luthertum in der ersten Entwicklung quellenmäßig dargestellt, 1904)는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격분을 표출하는 것이었다. 가톨릭 연구가들(S.Merkle, H. Grauert)도 그의 비판을 만류하지 않았다. 그 밖의 저서로 《가톨릭 교회와 인류의 목표》(Die Kath. Kirche u.das Ziel Der Menschheit, 1872), 《영적 청빈》(Das Buch vongeistl. Armut, 1877), 《타울러의 개종》(Taulers Bekehrung, 1879) 등이 있다.
〔평가와 의의〕 역사가로서 데니플레의 업적은 주로 중세 후기 사상가에 관한 연구에 있다. 이러한 것으로 신비주의와 스콜라 철학의 역사에 관한 연구와 총서들이 있고, 이러한 그의 저서들은 중세 대학의 역사에 관한 연구의 선구적 역할을 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루터에 관한 연구는 그의 주된 전공 연구 영역이 아니었지만, 가장 유명한 저서 중의 하나가 되었다. 루터에 관한 그의 저서는 비판과 논의의 대상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루터를 퇴폐기의 한 결과로 보고 있다. 데니플레의 루터 연구 업적은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로마 서신에 관한 루터의 논평 사본을 발견해 소개한 데 있다.
※ 참고문헌 H. Rumpler, 《NCE》 4, p. 764/ A. Walz, 《LThK》 3, pp.227~228/J. Köhler, 《TRE》 8, pp. 490~493. 〔金吉洙〕
데니플레, 하인리히 조이제 Denifle, Heinrich Seuse(1846~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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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

하인리히 데니플레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