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가르멜회의 수녀. 포교 사업의 수호자로 축일은 10월 1일. 본명은 마리 프랑스와즈 테레즈 마르탱(Marie Françoise Thérèse Martin)이며, 소화(小花) 데레사라고도 부른다.
〔생 애〕 아기 예수와 성안(聖顔)의 성녀 데레사(Saint Thérèse de l’enfant-Jésus et de la sainte face는 1873년 1월 2일에 프랑스 알랑쏭(Alençon)에서 루이 마르탱(Louis Martin)과 젤리 게랭(Zelie Guérin)의 아홉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비교적 유능한 시계공이었던 아버지 루이는 35세 때에 27세의 착실한 공예사 젤리를 만나 결혼하였다. 결혼 전 수도원에 입회하려고 했으나 라틴어를 모른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였고,젤리 역시 수도원에 입회하기를 희망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거절당하였다. 이 둘의 결혼 생활은 마치 오누이처럼 다정하였다고 한다. 데레사의 가족은 교회의 성사 생활에 열심하였으며, 특히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러한 성가정의 화목한 분위기는 건강이 비교적 허약한 데레사의 다정 다감한 성격과 성실한 신앙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데레사는 자서전에서, 가르멜에 들어오기까지의 자신의 영혼의 내력을 세 시기로 구분한다. 첫 시기는 어머니가 죽기 직전까지의 행복했던 어린 아기시절, 둘째 시기는 그녀의 자서전에서 '시련의 겨울' 이라 묘사된, 리지외로 이사한 후 외로움과 쓸쓸함 속에서 혹독한 세심증을 경험한 8년(1877~1885) 동안의 시기, 그리고 1886~ 1888년의 깊은 내적 회심의 경험을 통해 수녀원에 입회하게 되는 시기이다.
데레사의 가족은 어머니가 죽은 후 즉시 리지외로 이사하였고, 데레사는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녀는 똑똑하고 명석한 편이었으나, 수줍음이 많고 소극적인 성격으로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데레사가 열 살 때인 1883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석 달 동안 심하게 앓았는데, 때로는 경련과환각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며, 의식을 잃기도 하였다. 그녀는 '미소의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던 중 성모님께서 미소 지으면서 이 병이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고 한다.
후일 데레사는 1886년 성탄 전야 미사 직후 '완전한 회심' 을 체험했다고 썼다. 그녀는 자신의 영혼 안으로 애덕이 넘쳐 드는 것을 체험하였고, 또한 이웃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잊어야 할 필요를 깨달았다고 한다. 며칠 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그린 상본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영혼 속에서 불타 오르는 열망, 즉 다른 영혼들을 돕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 머무르며 필요한 영혼에게 그리스도의 구원의 성혈을 전해 주기로 결심하였다. 이 체험은 데레사를 온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켰으며, 그녀의 삶을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갔다. 이 시기에 데레사는 특수한 사도적 신비주의를 체험하게 되었다. 회개를 거부하던 어느 살인 죄수가 사형 직전 십자고상에 세 번 친구(親口)하고 형을 받은 것은, 하느님이 그 죄수의 회개를 위해 기도한 자신의 염원을 들어 주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녀의 생애 말년에 회개하고 죽은 그 죄수를 자신의 첫 아들' 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하느님을 위해 고통당하고 죄인의 회개를 위해 헌신하고 싶은 열망을 지닌 데레사는 14세에 리지외의 맨발의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기를 청하였다. 한때는 선교사가되어 자신의 삶을 선교 사업에 헌신하기를 희망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관상 수도원에 입회하여 이교도들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였다. 이 가르멜 수녀원에는 이미 데레사의 두 언니, 마리(Marie)와 폴린느(Pauline)가 입회해 있었다. 그러나, 그 수녀원에서는 데레사에게 21세가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통보하였다. 데레사와 그녀의 아버지는 교구의 주교에게 그녀가 수녀원에 받아들여지도록 도와 달라고 청하기도 하였고, 또 그녀와 언니 셀린느(Céline) 그리고 아버지가 함께 로마를 순례하면서, 교황 레오 13세에게 개인적으로 수녀원에 입회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이때 교황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입회하겠지" 하고 대답하였는데, 그녀가 1888년 4월 9일 리지외의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한 것은 나이 15세 때였다.
그 후 24세의 나이로 죽기까지, 9년 반 동안 데레사의 수도원 생활은 지극히 평범한 것이었다. 다른 수녀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성격이 까다롭고 질투심 많은 곤자가의 마리아(Marie Gonzague) 원장 수녀에 의해서 생긴 공동체의 내부 분열로 고통을 당하였다. 데레사는 수도원 내부에서 벌어지는 여러 갈등들을 멀리하고, 자신의 기도 생활에 열중하였다. 수도원 규칙에 충실하고 자신에게 부여된 작은 직무들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그녀가 이룬 하느님과의 친밀감과 충실성은 그녀의 자서전이 출판되기 전에는 그 어느 수녀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
1893년 데레사는 수련장 서리로 임명되어 4년 간 직무를 수행하였다. 이 시기에 그녀는 '작은 길' 이라는 자신의 고유한 영성을 갖고 살았다. 이 '작은 길' 은 교황베네딕도 15세가 "우리가 특별히 바라고 원하는 것은 세계의 모든 신자들에게 성녀 아기 예수의 데레사의 비결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말한 바로 그것이다. 그녀의 '작은 길' 에는 새로운 것은 없다. 오히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이상으로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따라 걸어야 하는 길인 것이다. 그것은 어떤 삶의 방법이 아니라 영혼이 하느님 앞에 서서 지니는 가장 순수한 태도를 의미한다.
죽기 18개월 전에 처음으로 결핵의 증세가 나타났지만, 죽기 얼마 전 병상에 눕기까지 데레사는 수녀원의 기본 의무들을 충실히 지켰다. 고통에 시달리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신앙의 시련을 겪었으며, 1897년 9월 30일 "나의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며 숨을 거두었다.
그녀가 죽은 지 일년 후 가르멜 수녀회의 통상 관습대로 그녀의 자서전이 비공식적으로 출판되어 여러 가르멜 수녀원에서 읽혀졌고, 이자서전을 요구하는 부수가 점차 늘어나자 공식적으로 이를 출판하였다. 그 후 15년 동안 여러나라 언어로 번역되었고, 세계 여러 나라에 수백만 권이 넘게 보급되었다. 데레사는 원래 자서전을 쓸 의도는 전혀 없었다. 생애 말년에 자신의 '작은 길' 을 가르쳐야 할 소명을 깨달은 데레사는, 처음에 이것저것 여러 편지글들을 모아서 구성한 자서전을 언니 폴린느(예수의 아네스원장 수녀)에게 선물하였고, 두 번째로 엮은 영적인 자서전은 언니 마리(성심의 마리아 수녀)에게 주었고, 세 번째는 곤자가의 마리아 원장 수녀에게 주었다. 이 글들은 편지의 형식으로 아주 우아하고 문학적이다. 낭만적이며 지극히 개인적인 언어를 통해 영혼의 순수성과 영적인 예민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세계 여러 곳에서 일어난 데레사에 대한 반응은 놀라운 것이었다. 교황 비오 11세는 이 반응을 "폭풍과 같은 열광"이라 불렀다. 데레사의 자서전이 널리 보급되고, 여기저기에서 그녀의 전구(轉求)로 영적, 물질적 은혜를 얻었다는 보고들이 수없이 날아왔고, 그녀를 찬양하는 수천 통의 편지가 리지외로 날아왔다. 시성을 위해서는 적어도 사후 50년을 기다려야 하는 교회 관례를 무릅쓰고, 교황 비오 11세는 데레사를 "성덕의 으뜸이며 기적의 천재"라 부르며 약 50만 명의 순례객들이 로마에 모인 가운데, 그녀가 죽은 지 28년이 지난 1925년 5월 17일 데레사를 성녀로 선포하였다.
〔평 가〕 24세의 나이로 결핵을 앓으면서 죽기까지 데레사는 자신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특징짓는 영혼의 태도, 즉 '작은 길' 이라 불리는 영성의 길을 걸었다. 그녀가 말하는 것처럼 전능하신 하느님은 당신 성모의 어린데레사에게 놀라운 일을 하셨고, 그 놀라운 일들은 바로 데레사의 가장 작은 모습에서 드러났다. 인간적 장점들이 때로는 영혼을 교만하게 만들 수 있다는 약점을 알고 있기에, 데레사는 결코 자신의 장점에 의지하지 않았다. 그녀는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결코 낙담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어린아이들이 때때로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그 실수가 끼치는 해악은 그리 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또 그분께 온전히 의탁하면서 오직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을 기대하였다. 사실 데레사의 삶은 "내가 약할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 (2고린 12, 10)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데레사가 신비가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녀가 가르친 '작은 길' 은 신비주의와는 걸맞지 않은 듯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신비주의 전통 안에서, 데레사와 같은 비교적 어린 나이에 영혼이 철저하게 정화된 신비가를 찾아보기는 대단히 힘들다. 데레사는 세 살 때부터 결코 하느님의 명령을 거절한 적이 없다고 한다. 아주 작은 죄스러움과 불충실마저도 그녀를 못견디게 하였다. 어떤 때는 하느님을 위해 고통당하는 것만이 그녀의 최고의 기쁨이기도 하였다. 더욱이 생애의 말년 동안에 극심한 결핵의 고통을 겪으면서 신앙의 엄청난 시련을 견디어 냈다. '극심한 어둠' 의 경험은 그 고통이 너무나 커서 하늘 나라에 대한 인간적인 열망을 무참히 부수어 버렸다. 즉, 그녀가 겪은 '영혼의 밤' 은 이런 인간적인 열망들이 하늘 나라에 대한 참다운 열망으로 바뀌게 하였다. 데레사는 자신의 영혼을 밝혀 주시도록, 하느님이 자신의 내부에 들어오게끔 하였다. 이 사랑의 빛은 데레사가 온전히 숨겨진 영혼으로 남기를 원하게 하였고, 그녀가 죽은 후 영광스러운 모습이 드러나기전까지 온전히 감추어진 영혼으로 지내게 하였다.
그러나, 영혼을 변화시키는 하느님의 은총의 빛은 데레사의 영혼 깊숙이, 사랑하는 것만이 자신의 성소이고, 또 자신은 오직 사랑을 위해서만 살 수 있음을 깨닫게 하였다. 데레사는 14세 때부터 '사랑의 열' 을 체험하였고, 이 사랑의 열이 그녀의 영혼을 불타게 하였다. "사실은 내가 성당에서 십자가의 길을 시작하였을 때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불타는 화살로 찔린 듯한 아픔을 느꼈는데, 어찌나 격심한지 죽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사랑의 열을 어떻게 설명해야 될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집어다 통째로 불속에 던지는 듯하였습니다. 아아! 무어라 할 수 없는 그 불, 또한 동시에 이는 얼마나 기뻤던지! 나는 사랑에 탔습니다. 그것이 일 분이라도 아니 일 초라도 더 계속되었던들, 뜨거움에 못 견디어 죽고 말았을것입니다. 나는 그때 이런 경지를 자
주 경험한 성인들이 하신 말씀을 알아들었습니다." 끝내 그녀는 "오, 저의 사랑이신 예수님, 저의 성소를 마침내 찾았습니다. 저의 성소는 사랑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 사랑에 대한 깨달음은 예수가 명하신 사랑의 계명의 핵심이었고, 데레사는 그리스도가 사랑한 것처럼, 사랑의 온전한 순교자가 되기를 원하였다.
데레사는 로마를 순례한 것 외에는 고향인 알랑송을 떠난 적이 없다. 그러나 일평생 다른 영혼을 위해 보속하는 삶을 살았기에, 교황 비오 12세는 그녀를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더불어 '포교 사업의 수호자' 로 선포하였다. 또한 1944년 5월 3일에는 성녀 잔 다르크에 이어 프랑스의 제2의 수호자로 선포하였다. 이로써 자신을 한 알의 모래' 라 부른 데레사는 세계의 가장 유명한 성녀가 되었다.
그녀가 남긴 저서로는 《성녀 소화 데레사 자서전》(안응렬 역, 가톨릭출판사, 1960), 《성녀 소화 데레사의 마지막 남긴 말씀》(대전 가르멜 수녀회 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70)이 있다. (⇦ 소화 데레사)
※ 참고문헌 P. Desouvemont, 정대식 역, 《인간 데레사와 이웃》, 가톨릭출판사, 1981/ Jean Guitton, 정한교 역, <靈的天才, 예수 아기의 데레사>, <사목> 44호(1976. 3), pp. 21~34/ Conrad de Meester, 대전 가르멜 수녀원 역,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의 메시지, 빈손》, 가톨릭출판사, 1986. 〔沈鍾赫〕
데레사, 리지외의 (1873~1897)
〔라〕Theresia ab Infante Jesu · 〔프〕Thérèse de Lisieu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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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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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지외의 데레사 성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