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영)Kingdom of Denm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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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랄드 왕이 세운 유틀란드의 암석에 새겨진 십자가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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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랄드 왕이 세운 유틀란드의 암석에 새겨진 십자가의 그리스도.

유럽 북서부의 유틀란드(Jutland) 반도와 동쪽 해상의 483개의 섬으로 형성된 입헌 군주국. 공식 명칭은 덴마 크 왕국(Kongeriget Danmark). 서쪽으로는 북해(北海), 동쪽으로는 발트해(Balic Sea)가 있으며, 독일의 북부, 노르웨이의 남부, 스웨덴의 서부에 위치해 있다. 면적은 43,092k㎡, 인구는 518만 7천 명(1993)이며, 수도는 코펜하겐(Kobenhaven), 언어는 덴마크어이며, 종교는 국교인 루터교가 약 88.2%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가톨릭과 유대교이다. 덴마크 왕국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초기 바이킹 시대인 800년경, 즉 프랑크 왕국의 카알 대제 때이 며, 11세기 말에는 크누트(Knut) 대제가 덴마크와 잉글랜드 및 노르웨이의 왕위를 겸하는 대왕국을 건설하였다. 1357년 노르웨이, 스웨덴과 '칼마르 동맹' (Kalmar Union)을 맺고 통합을 이루어 세력의 절정기를 맞이하였으나, 이 동맹은 1523년에 해체되었다. 1660년에 절대 군주제가 확립되었으나, 1766~1808년에 크리스티안 7세가 자유주의적 개혁을 시작하면서 자유주의 체제가 형성되고, 1849년에는 입헌 군주제 수립과 자유 헌법 제정이 있은 후, 자유주의 체제가 더욱 강화되었다.
초기 선교 시대 : 덴마크가 처음으로 그리스도교와 접촉을 하게 된 것은 7세기 이래 덴마크 무역 중심지인 유틀란트의 리브(Ribe)와 슐레스윅(Schleswig)의 헤데비(Hedeby)에서 도르스타트(Dorstad)의 상인 플리즈란드인(Frisian)들이 무역을 하면서부터이다. 그 후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이 상인들을 따라 덴마크로 들어왔는데, 최초의 선교사는 710년경에 덴마크 아간티르(Agantyr) 궁전에 왔던 우트레히트(Utrecht)의 성 빌리브로르도(St. Willibrord)이다. 823년 랭스(Reims)의 대주교 엡보(Ebbo)가 덴마크로 짧은 선교 여행을 하였지만, 선교 역사에 전환점을 이룬 것은 프랑크의 도미니코회 성 안스가리오(Anschar)가 루이 황제의 정치적인 지지를 받고 덴마크를 복음화시킬 임무를 받았던 826년에 와서이다. 그는 개종한 덴마크 왕 헤랄드 클락(Harald Klak)과 더불어 2년 동안 그리스도교를 전교하였다. 831년에 안스가리오가 최초의 주교로 서임되었고, 디에든호펜(Diedenhofen)의 라스타그(Reichstag)에 함부르크 교구가 탄생되었다. 이듬해 교황 그레고리오 4세가 그를 함부르크 교구의 대주교로 임명했으나, 845년에 바이킹에 의해 교구가 파괴되어, 교구좌를 브레멘(Bremen)으로 이전하였다. 그 후 안스가리오는 헤데비와 리브에 두 포교지를 세웠는데, 이로써 그는 덴마크 선교의 창시자이자 북유럽의 사도로 간주되고 있다. 960년에는 헤랄드 블루투스(Harald Bluetooth) 왕이 개종하고 강력하게 그리스도교를 장려하였다. 북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그리스도 상(像) 그림과 룬(rune) 문자가 새겨진 유틀란트의 거대한 암석 각문(岩石刻文)에, 그는 "헤랄드 왕이 이 돌을 세웠다. 헤랄드 그는 덴마크와 노르웨이 모두를 점령하였고 덴마크인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기록해 놓게 하였다.
948년 슐레스윅, 리브와 아루스(Aarhus)에 브레멘-함부르크의 아달닥(Adaldag) 대주교 관할로 최초의 덴마크 관구가 설치되었다. 하지만 덴마크 국민들의 실제적인 개종은 960~1060년에 이루어졌다. 이때 크누트 2세는 덴마크의 주교들과 사제들을 방문함으로써 열심히 그리스도교 문화와 수도 생활을 장려하였다. 후계자 스벤드 에스트릿슨(Svend Estridson) 왕 때에 이르러 덴마크는 8개의 관구를 갖게 되었으며, 그의 아들 크누트 4세는 성직자들을 대단히 존경하여 교회의 건설에 협조적이었다. 그러나 교회법과 십일조 규정 준수를 강력히 주장하다가 오덴스에 있는 성 알반(St. Alban) 교회에서 반란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후에 그는 순교자이자 국가의 수호 성인으로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의 형제 에릭(Eric) 1세는 교황 우르바노 2세로 하여금 북부에 독립적인 교회 관구를 설정하도록 촉구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그는 켄터베리의 안셀모 대주교에 의해 지지를 받았으며, 1104년에 덴마크 북부는 브레멘-함부르크의 관구로부터 분리되고, 그곳에 룬트 관구가 설정되었다.
황금기와 쇠퇴기 : 룬트 관구 최초의 대주교 아스거(Asger)와 에스킬(Eski)은 덴마크 교회가 국가 지배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도록 계속적으로 노력했으며, 그레고리오의 개혁 사상을 실행했다. 가톨릭이 황금기를 맞이한 것은 1157~1182년의 발데마르(Waldemar) 때였다. 로마 교회에 충실했던 에스킬, 모범적인 정치가이자 교회적인 인물인 압살론(Absalon), 철학과 신학을 라틴어 시로 표현한 앤더스 Sunesen)과 같은 사람들이 이때 교회의 장상들이었다. 교회와 국가 간의 조화는 덴마크로 하여금 가장 번영한 국가가 되도록 도와 주었으며, 정치적 · 문화적으로도 절정기에 다다랐다. 그러나 1~1340년에는 잠정적인 쇠퇴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특히 야곱 에어란슨(J. Erlansen) 대주교와 엔스 그랜드(J. Grand)는 교회의 독립과 자유 옹호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러한 것들은 국가의 입장에서는 국가의 힘을 소진시키고 번영과 진보를 질식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유능했던 발데마르 아터닥(W. Atterdag)과 그의 딸이자 현명하고 헌신적인 여왕 마르그레테(Margrete) 통치 시기(1340~1412)에는 다시 번영을 이루는 동시에 교회는 외적으로나마 다소 개선되었다. 성모 신심이 증진되었으며, 1470~1517년에 프란치스코회가 엄격한 생활을 준수하는 등, 그 당시 수도원에서는 바젤 공의회의 개혁 의도가 그대로 단행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직자들 사이에는 악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거의 예외 없이 주교 관구와 참사회의 높은 지위는 모두 귀족들이 차지하였다. 이렇게 교회와 정치가 혼합됨으로써 로마 교황청과 덴마크 왕정 간의 주교 위치와 교회의 독립성은 약화되었다. 한편 일부 계열이 낮은 성직자들은 가난하였는데, 이들의 가난은 이른바 성직자들 사이에서 '성직자 프롤레타리아' 를 창출하는 계기가 되었고, 후에 이들은 루터교의 개혁에 연합하게 되었다. 마지막 가톨릭 신자 왕인 크리스티안(Christian) 2세가 루터의 개혁 이념에 찬동하자, 주교들과 귀족들은 로마로부터 분리된 국가 교회를 세우려고 하는 동시에 1523년에 크리스티안 2세를 국가로부터 추방하였다. 1523~1533년에 프리드리히(Friedrich) 1세는 루터교로 관심이 기울어져, 점차로 루터교로 개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530년 코펜하겐 의회에서는 마침내 가톨릭 개혁 제안을 철회하게 되었고 동시에 수도원을 압류하고 성상 파괴의 파동을 일으켰다. 1534년 왕으로 선임된 크리스티안 3세는 덴마크에서 가톨릭을 완전히 봉쇄하고, 가톨릭 주교들을 감옥에 감금하였으며 교회 재산을 몰수할 것을 명령하였다.
가톨릭 교회의 재생 : 16세기 말경 몇몇 도미니코회 회원들과 예수회 회원들이 덴마크 선교 가능성을 비밀리에 모색하던 중, 코펜하겐에 외국인들을 위한 가톨릭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즉 30년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 스페인, 프랑스, 독일 대사관이 코펜하겐에 세워졌고, 가톨릭 신자인 대사들이 개인 성당을 세울 특별 허가를 받았던 것이다. 1674년에 프레데리시아(Fredericia)에 두번째로 가톨릭 교회가 세워졌는데 이 역시 외국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프레데리시아에 거주한 외국인들이 그 도시 내에서만 예배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지만, 이후 1686년에는 성당과 학교를 세울 허락을 받았으며, 1767년에는 바로크식 성당이 세워졌고, 점차 알토나(Altona), 프리드리히슈타트(Friedrichstadt) 등 여러곳에 세워지게 되었다. 이때 덴마크인들은 오직 외국인 지역의 가톨릭 교회에만 들어갈 수가 있었다. 점차 많은 사람들이 개종하게 되어 1800년 이후 코펜하겐과 프레데리시아에서 신부들의 사목 활동이 전개되었고, 1849년에는 절대 왕정에서 입헌 군주제로 바뀌고 민주주의 헌법이 마련되자, 종교적인 신앙에 상관없이 모든 이에게 완전한 시민권이 승인되었다. 이리하여 가톨릭 신자들에게도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다.
1869년에 덴마크 지목구가 설정되었으며, 1892년에 교황 레오 13세는 덴마크 지목구를 대목구로 승격시키고, 요한네스 폰 에우크(J. von Euch)를 최초의 대목구장 으로 임명하였다. 그 후 교회는 날로 발전하여, 수도회와 병원 등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과 개종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에는 요셉 브렘스(J. Brems)가 대목구장이 되었고, 1923년에 지목구가 된 아이슬랜드(Iceland)의 교회는 1929년에 대목구가 되었다. 1938년에는 덴마크 인으로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테오도르 슈르(T. Suhr)가 브렘스를 이어 대목구장이 되었다. 슈르는 체계적인 조직화에 심혈을 기울여, 교회의 내적 발전에 주력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덴마크가 독일군에게 점령되었을 때 해외 가톨릭 교회의 원조를 받지 못한 덴마크 교회는 재정적인 곤란을 겪게 되었지만, 1946년에 설립되고 성 리오바 수녀회가 관리한 본당 사목자를 위한 연구소는 덴마크 대목구에 있는 대부분의 사회 사업 관련 업무를 다루었다. 이로 말미암아 덴마크 국민들에게 교회와 교황청의 영성적이고 도덕적인 의미에 대한 공식적인 관심이 일깨워지게 되었다. 1953년 4월 29일 덴마크의 대목구는 교황청 직속의 코펜하겐 대교구가 되었다. 1993년 현재 인구의 0.6%인 3만 명의 신자가 있으며 대교구 1, 본당 50개에 대주교 1, 주교 2, 신부 94(교구 소속 35, 수도회 소속 59) , 신학생 7, 수사 5, 수녀 318명이 있다. 1994년 현재 한인 공소 1개가 있으며, 한인 교포 신자는 12명이다.
※ 참고문헌  R.J. Feldman, 《CE》 3, pp. 458~461/ A.J. Otto, 《NCE》 4, pp. 766~7721 《EU》 7, pp. 21~22, 30/ 《EU》 Les Chiffres du Monde 1994, p. 190/ 1994 Catholic Almcmac, Our Sunday Visitor Publishing Division/ 《동아 원색 세계 대백과 사전》 9, 동아출판사, 1983, pp. 226~228/ 《한국천주교회 연감》,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4. [梁惠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