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철학의 가장 기본적인 범주 가운데 하나. 이것은 천지 만물의 본원(本源) · 본체 · 법칙 · 원리 · 운동 변화 의 과정 · 정치 원칙 · 윤리 규범 등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매우 오랜 기간을 거쳐 변천해 오는 동안, 도' 는 동양 철학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할 정도로 그 영향이 매우 컸다.
〔어원과 파생된 의미〕 허신(許愼)의 《설문 해자》(說文 解字)에서는 "도란 다니는 길이다. '다니다' 와 '머리' 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나로 도달하는 것을 도라 이른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유희(劉熙)는 《석명》(釋名)에서 "도는 밟는다〔蹈〕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또 고문에서 '도' 자의 형태는 도(導, 이끌다)자와 가깝다. 그러므로 도는 처음에 인도한다는 도(導)와 밟는다는 도(蹈)의 의미로 쓰였다. 도 자의 모양이 인간의 머리[首]와 발[足]로 걸어감을 본뜬 것은, 머리는 발의 가고 멈춤(行止, 즉 辵)을 이끌어 줄 수 있음을 의미한 것이다. 그러므로 머리는 단순히 추상적인 사유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항상 걸어감과 합하여 현실 속에서 밟아감으로써 그 추상적 사유를 구체화시킨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도' 는 추상적인 원리 · 법칙을 뜻할 때도 있는 동시에 구체적인 운동 · 변화의 과정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오대징(吳大徵)의 설명에 따르면, 갑골 문자(甲骨文字)에 나타난 도' 자는 행(行)이 한 글자 안에 수(首)와 지(止)가 겹친 모습으로 되어 있으며, 행(行)은 처음에는 네거리를 그린 상형 문자였다고 한다. 이것은 십자로를 가리킨 것으로 여러 갈래의 길이 뻗어 나가는 출발점을 뜻한다. 또한 십자로 위에 선 사람이 길을 떠나기에 앞서 갈 방향을 결정하려고 잠시 멈추고 있는 것이 지(止)의 모습이라고 한다. 지금은 아직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결정이 안된 여러 갈래[多岐]의 길은 어디에도 통하여 있지만, 한 줄기 길을 분명히 선택하여 그리로 이르러야[達] 한다. 그래서 《설문》에서는 "하나로 이르는 것을 도라 이른다" (一達之謂道)고 하였다. 즉 일정한 방향으로 일정한 지점을 통달하는 것이 바로 길이다.
도의 원시적 의미는 사람이 다녀서 이루어진 길을 뜻 하였다. 이러한 원래 의미가 남아 있으면서도 사회의 변천과 언어 문자의 발전에 따라 그 의미도 더욱 풍부하게 되었다. 그 원시적 의미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도는 확실히 정해진 방향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사람이 왕래하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이다. 이로부터 사물의 운동 · 변화가 반드시 나가야 하는 추세, 즉 법칙성 또는 규율성(規律性)이란 의미가 파생되었다. 둘째, 도는 굽지 않고 곧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이 길을 따라서 곧바로 가야만 비로소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편차가 생길 수 있다. 이로부터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 · 방향이란 의미가 파생되었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이 '술' (術)이다. '술' 도 길이긴 하되 구불구불 복잡한 길이므로 전문가가 아니면 도달하기 어렵다. 학술 · 기술 · 예술 등이 모두 그렇다. 셋째, 도는 출발점과 종착점이 연결되어 있고 일정한 거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목적지에 도달하려면 이 노정(路程)을 거쳐야 한다. 이로부터 사물이 운동 · 변화하는 데 거쳐야 하는 과정(過程)이라는 의미가 파생되었다. 넷째, 도는 어디에도 통하여 걸림이 없다. 장자(莊子)는 "도는 통하여 하나로 된다" (道通爲一)고 하였고, 장횡거(張橫渠)는 "만물을 두루 통하게 하는 것을 도라고 일컫는다" (通萬物而謂之道)고 하였다. 이로부터 도는 텅 비어 아무런 형체가 없는 것〔無形 같지만 만물이 다 거기에서 유래된다(所共由)라는 의미가 파생되었다. 다섯째, 도는 사람이 다니는 길이다. 길을 가는 것을 우리는 다닌다' [行]라고 한다. 사람을 다니는 길로 끌어들이는 것을 도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도는 '인도한다' , '도리' 道理)라는 의미가 파생되었다.
〔의미와 전개] 도는 거쳐가는 수단으로 사용될 때도 있고 도달해야 할 목적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궁극적인 목적의 도를 경도(經道) 또는 구경도(究境道)라 하고, 이 경도를 실현하는 방법 · 수단으로서의 도를 권도(權道) 또는 방편도(方便道)라고 한다. 그러면 최후의 목적이 되는 도는 무엇이며 이것을 실현하는 수단의 도는 무엇인가? 최대 최고의 도는 하나로 관통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뿐이며 둘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이해의 제한을 받게 되며 이 때문에 일정하게 제한된 의미를 가지게 된다. 도를 자연과 인간 중 어느 중심으로 파악하느냐에 따라 천도(天道)와 인도(人道)로 구별하는데, 도가는 전자에, 유가는 후자에 주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유가(儒家) : 주로 《논어》, 《맹자》, 《순자》, 그리고 《중용》, <역전> 등에 나타난다. 《논어》에서 공자는 "나는 도에 뜻을 두었다" (志於道)든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朝聞道 夕死可矣)고 할 정도로 구도적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공자가 듣기 원했던 도는 천도가 아닌 인도만을 가리킨다. 그의 제자 자공(子貢)이 일찍 이 말하길 "선생님이 성과 천도를 말씀하신 것을 들을수가 없었다" (夫子之言 性與天道 未可得而聞也, 《論語》 公治長 편)라고 하였다. 공자가 하늘[天]을 언급하였으나 천도는 탐구하지 않았으며 그가 말한 도는 바로 사람의 길[人道] 즉 인(仁)이었다. 공자는 "나의 도는 하나로 꿰뚫었다" (吾道-以貫之)고 하였는데, 증자(曾子)의 해석에 따르면 그것은 충서(忠恕)였다. 이것은 '인' 을 실천하는 두 가지 구체적인 방법으로 《중용》에서도 "충서는 도에서 멀지 않다" '(忠知道不遠)고 하여 역시 충서가 도를 나타내는 가장 가까운 방법임을 확인하였다.
맹자는 공자의 '인' 을 계승하여 이것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본성〔性〕 이기 때문에 이 본성에 의하여 행위하는 것이 인도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맹자는 "인이란 것은 사람됨이다. 그것을 합하여 말하면 도이다"(仁也者 人也 合而言之 道也, 《孟子》 盡心 장)라고 하였다. 맹자는 특별히 의(義)를 들어 인간이 나갈 길(義 八路也)임을 밝혔으므로 그가 말한 도는 인의(仁義)에서 나온 도이다. 《중용》은 또 인의의 도덕적 본성과 연관시켜 "본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한다"(率性之謂道)고 하였다. 공자·맹자가 말한 도는 인도이다. 그래서 맹자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도는 둘이다. 인과 불인일 뿐이다" (道二 仁與 不仁, 《孟子》 離婁 장)라고 했으며, 이 인도를 표준으로 삼아 이단(異端)을 배척하였다. 이 인도가 정치에 응용되면 군신의 도〔君臣之道〕가 되며, 가정에 적용되면 자도(慈道) · 효도(孝道)가 되며, 사회에 활용하면 붕우의 도[朋友之道]가 된다.
이러한 도 의 개념은 도가(道家)와 음양가(陰陽家)의 영향을 받은 《역전》에 이르면, '인도' 뿐 아니라 천지 만물의 도까지도 흡수하여 포함시키게 된다. 《역전》은 "한번 음으로 되었다가 한 번 양으로 되는 것을 도라고 일컫는다" (一陰一陽之謂道)고 하였는데, 도는 음양이 서로 작용하는 법칙(또는 규율)을 뜻한다. 일음 일양(一陰一陽)하는 도는 천지 만물의 운동 변화 과정 속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하늘과 땅〔天地)이 하나의 큰 음양이며, 음양의 교합(交合) 운동은 천지 만물의 생멸 변화를 촉성시킨다. 인류 사회 중에도 부부 · 부자 · 군신 사이에도 역시 음양 관계가 있으므로 군신 · 부자 · 부부의 인의의 도가 있는 것이다. 《역전》에서는 "하늘의 도를 세우는 것을 음과 양이라 하고, 땅의 도를 세우는 것을 유와 강이라 하고, 사람의 도를 세우는 것을 인과 의라 한다" (立天之道 曰陰與陽 立地之道 曰柔與剛 立人之道 曰仁與義, <說卦傳>)고 하였다. 이것이 후세에 매우 깊은 영향을 끼친 삼재(三才)의 도이다. 또 "형체 위(초월)의 것을 도라 이르고 형체 아래(내재)의 것을 기(器)라고 이른다" 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謂之器, 〈繫辭上傳〉). 위[上]는 밖에' , '앞에' 또는 '초월하여 올라간다' 등의 뜻을, 아래[下]는 '안에' , '뒤에' 또는 '내재하여 내려온다' 는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역전》은 '형이상' 과 '형이하' 로 법칙적인 의미의 도와 구체적 사물의 기를 구별하였다. 이러한 '도기관' (道器觀)은 뒤에 신유가(新儒家, Neo-Confucianism)의 본체론과 우주론을 형성하는 터전을 마련해 놓았다. 《역전》에서는 "일음 일양(一陰一陽)을 도라고 한다" 는 것으로 도의 내재 함의(含意)를 규정하였고, '형체 위의 것을 도라 한다' 는 것으로 도의 특징을 서술하였으며 또한 태극(太極)의 개념도 제시하여 우주 만물의 생성 근원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순자(荀子, 기원전 313~238)는 유가를 중심으로 도가의 천도 자연을 흡수하여 천도와 인도를 명확히 구분하는 도론(道論)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그는 도에 대하여 총체적으로 이렇게 정의를 내렸다. "대체로 도란 것은 만물을 변화시키고 이루게[遂成] 하는 까닭이다"(夫道者 所以變化遂成萬物也, 《荀子》 哀公 편). "만물은 도의 한
귀퉁이이다" (萬物爲道一偏, 《荀子》 天論 편). "대체로 도란 것은 본체는 늘 그러하면서 변화를 모조리 드러낸다. 한쪽 모퉁이로는 그것을 일컫기에는 부족하다(夫道者 體常而盡變 一隅不足以擧立, 《荀子》 解蔽 편). 도는 만물을 변화시키고 생성시키는 원인 · 이유이므로 그 자체[體]는 항상 변화가 없지만 모든 만물의 변화 속에서 작용하여 그 변화를 드러내는 것이다. 순자는 하늘 · 땅 · 사람은 제각기 늘 그러한 것〔常)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하늘은 상도를 가지고 있다. 땅은 상수를 가지고 있다. 군자는 상체를 가지고 있다" 天有常道 地有常數 君子有 常體, 《荀子》)고 하였는데 여기서 천도와 인도가 나뉘어진다. 순자가 말하는 하늘은 자연을 뜻하므로 천도는 자 연 법칙이라는 의미가 파생된다. 순자에 의하면, "자연의 운행은 상도(常道)를 가지고 있어 성인(聖人)인 요(堯) 임금을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폭군인 걸(桀) 임금을 위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天行有常 不為堯存 不爲桀亡, 《荀子》). 그러나 인간의 사회 생활 가운데는 서로 쟁탈이 일어나므로 인간의 자연적 욕구를 제약하고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를 조절하기 위하여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준칙을 제정하였는데, 이것을 도 또는 예(禮)라고 하였다. 도란 사람들이 공동으로 따르고 지켜야 할 사회 규범으로, 순자는 "도란 것은 하늘의 도가 아니고 땅의 도가 아니다. 인간이 도로 삼은 것이고, 군자가 도로 삼은 것이다" (道者 非天之道 非地之道 人之所道也 君子之所道也, 《荀子》 儒效 편)라고 하였다. 순자는 그리스의 소피스트처럼 자연과 인위를 명확히 구분하는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가 말하는 천도(physis)와 인도(nomos)의 구별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도가(道家) : 노자(老子, 기원전 580?~500) , 장자(莊子, 기원전 369?~286)의 사상에 나타난 도는 자연(天)이라는 의미의 천도(天道)로서 본체론적 · 우주론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사상은 《역전》에 앞서 생겨난 것이다. 노자는 "말할 수 있는 도는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道可道 非常道, 《道德經》 1장)라고 하였는데, 상도(常道)는 말로 표현될 수 없는 초월적인 것이다. 이 도는 네 가지 내용을 가지고 있다.
첫째, 천지 만물의 근원이며 모체이다. 노자에 의하면 도는 천지에 앞서서 생겨났으며(先天地生, 《道德經》 4장) 만물을 낳은 모체이다. "도는 팅 비어 있으면서 그것을 써도 아마도 마르지 않을 것이다. 연못같이 깊어 만물의 마루[宗]인 것 같다" (道沖而用之 或不盈 淵兮 似萬物之宗, 동 4장)는 것이다. 그는 "도는 낳고 덕은 기른다 ··· 그래서 만물은 도를 높이고 덕을 귀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다" (道生之 德畜之 ··· 是以萬物莫不尊道而貴德, 동 5장)고 하였으며, 도에서 만물이 나오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동42장)고 하였다.
둘째, 되돌이킴(反)이 도의 움직임이다(反者 道之動) . 도는 천지 만물을 낳지만 또 그 가운데 존재하면서 만물의 운동 변화를 드러낸다. 도는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순환 · 반복하는 운동 형태로 또 하나는 서로 전화(轉化)시키는 형태로 드러난다. 노자에 따르면, 도는 "억지로 이름붙여 크다고 하였다. 크면 가버리고 가버리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되돌아온다" (强爲之名日大 大日逝 逝日遠 遠曰反, 동 25장). 이렇게 도는 부단히 갔다가 되돌아오는 운동을 끝없이 되풀이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와 무〔有無〕, 어렵고 쉬움[難易], 길고 짧음〔長短〕, 높고 낮음〔高下〕, 음과 성(音聲〕, 앞과 뒤〔前後〕, 화와 복[禍福]이 모두 상대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셋째, 도는 무위(無爲)의 도이다. 노자는 "도는 언제나 무위하면서도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후왕(侯王)이 그것을 지킬 수 있으면 만물은 장차 저절로 변화될 것이며 ··· 천하는 장차 저절로 안정될 것이다"(道常無爲而無 不爲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 天下將自足, 동 37장). 그래서 노자는 이 무위의 도로써 천하에 임하여(以道蒞天下) 백성들을 간섭하지 말라고 하였다. 도를 위하는 것은 쓸데없는 인위적 간섭을 자꾸 덜어내고 덜어내어 무위에까지 이르는(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無爲, 동 48장) 것이다.
넷째, 도는 도덕이다. 즉 인생 수양의 최고 경계이다. 덕은 도로 말미암아 얻은 것(由之乃得)이므로 무위 자연의 도를 몸소 얻은〔體得〕 성인은 공을 이루고도 그곳에 머물지 않으며(功成而不居), 어떤 일을 하고도 그것을 믿고 으스대지 않는다(爲而不爲). 그리고 상덕(常德)을 가진 사람은 무위하되 그 무엇 때문에 함이 없다(無爲而無以爲, 동 38장). 무이위(無以爲)의 이(以)자는 '~을 가지고' , '~때문에' , '~을 할 목적으로 등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사랑은 하되 어떠한 이유(~때문에), 목적(~할 목적으로), 또는 불순한 의도(~을 가지고) 등이 없이 순수하게 한다는 말이다. 노자는 이것을 자(慈)라고 표현하였다.
이러한 네 가지 도의 내용은 세 가지 특징으로 요약된다. ① 초월성 : 도는 눈여겨 보아도 보이지 않고 귀기울여 들어도 들리지 않고 만져도 얻지 못하는(視之不見 聽之不聞 搏之不得, 동 14장) 초감성적인 것이다. ② 실재성 : 도가 비록 황홀하게 아무런 형체가 없고 감각되지 않는다 해도 황홀한 가운데에 꼴이 있고 어떤 것〔物〕이 있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道之爲物 惟恍有惚 惚兮恍兮 其中有象 恍兮惚兮 其中有物, 동 21장). ③ 운동성 : 도는 언제나 존재하면서도 또 끊임없이 운동하고 있다. 도는 "홀로 서 있으면서 다른 것으로 바뀌지 않으며 두루 운행하면서도 위태롭지 않다. 천하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 (獨立而不改 周行而不殆 可以爲天下母, 동 25장).
장자는 노자의 사상을 계승하여 "도는 깊고도 아득하여 언어로 말하기 어렵다" (夫道 窅然難言哉, 《莊子》 知北遊 편)라고 하였으며 아무런 형체가 없을 뿐 아니라 무궁한 것으로 그 작용은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다. 그 도는 어디에나 통하여 있고 있지 않는 곳이 없으며 스스로 근본이 되어 천지가 있기 전부터 존재하여 왔다(夫道 自本 自根 未有天地 自古以固存, 《莊子》 大宗師 편). 이것은 서양 철학의 자기 원인(自己原因, causa sui)과 비슷하다.
장자의 도는 크게 세계의 근원과 최고의 인식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먼저 세계의 근원으로서의 도의 특징은 여섯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 절대성 : 도는모든 만물이 매여 있는 곳(萬物之所繫)이며 변화가 의존하는 곳(一化之所待)이지만 도 자체는 스스로 근본이 되는 것이다(自本自根). ② 영원성 : 도는 옛날부터 본래
존재하고(自古以固存) "도에는 시작과 끝이 없지만 사물에는 삶과 죽음이 있다”(道無始終 物有死生, 《莊子》 秋水 편). 도가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하다고 하여 플라톤(Platon)이 생각한 것처럼 시간 · 공간을 초월해 있는 것 이 아니다. ③ 초월성 : 도가 인간의 감각 경험 밖에 벗어나 있다는 의미이다. "도는 들리지 않는다. 들리면 도가 아니다. 도는 보이지 않는다. 보이면 도가 아니다"(道不可聞 聞而非道也 道不可見 見而非道也, 《莊子》 知北遊 편). 도는 감각과 지식을 초월한 어떤 것이다. ④ 보편성 : 도는 어디에도 있지 않음이 없다(無所不在)는 뜻이다. 동곽자(東郭子)가 장자에게 "도란 것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질문하니 장자는 어디에도 있지 않는 곳이 없다" (所謂道惡乎在 莊子曰無小不在, 《莊子》 知北遊 편)고 대답하였다. ⑤ 무구별성(無區別性) : 도는 구별이 없이 한데 뒤섞여 한결같은 것이다. 즉 이것과 저것은 따로 구별지어 놓는 경계[封]가 없다는 말이다. "대체로 도는 처음부터 경계가 없었다" (夫道 未始有封, 《莊子》 齊物論 편). ⑥ 무목적성(無目的性) : 도에는 인격이 없을 뿐 아니라 의지 · 감정 · 목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미 그러하나 그것이 그러함을 알지 못하는데 이것을 도라 한다" '已而不知其然 謂之道, 《莊子》 齊物論 편). 도가 만물을 생기게 하고 변화시키는 것은 모두 무위 자연의 과정이고 무의식 · 무목적적인 것이다.
다음 최고 인식으로서의 도의 특징은 무차별성과 신비성 두 가지로 요약된다. 최고 인식으로서의 도는 처음부터 어떤 것도 아직 있지 않다고 생각한 데서(以爲未始有物) 만물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경지를 말한다. 도는 내용이 전혀 없는 무차별의 경지인데 이것을 언어로 표현하여 시비(是非)가 생겨나 어떤 체계가 생겨나면 도는 감추어져 드러나지 않게 된다(道隱於小成, 《莊子》 齊物論 편). 이렇게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신비한 도를 파악하는 것을 일러 장자는 보광(葆光)이라 하였다. 장자는 또 이것과 저것, 피차의 대립을 없애는 것을 도의 지도리 즉 도추(道樞)라 하였다. 그리하여 만물[物]과 나[我]를 초월하고, 옳고 그름을 초월하고 감정을 초월하는, 또는 사람들로 하여금 최대의 즐거움을 얻게 한다. 마치 물고기가 강과 호수의 고마움을 잊고 살듯이 우리는 도술(道術)의 경지에서 잊어 버리고 산다(魚相忘乎江湖 人相忘乎道術, 莊子》 大宗師 편)는 것이다.
법가(法家) : 전기 법가인 상앙(商鞅), 신불해(申不害), 신도(愼到) 등은 천지 자연의 운행 법칙이 있다고 생각하고 이것을 도라고 하였다. 후기 법가인 한비자(韓非子, 기원전 280~233)는 노자의 도 사상의 영향을 받고 법(法) · 술(術) · 세(勢)를 결합시켜 "도로 인하여 법을 온전히 하는" (因道全法) 사상을 완성하였다. 한비자가 생각하는 도는 다음 세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첫째, "도란 만물이 그러한 바이다" (道者 萬物之所然, 《韓非子》 解老 편). 도는 우주 만물의 본체이므로 세상의 만물은 도에서 말미암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노자와 비슷하지만 다른 면도 있다. 한비자는 도가 천지에 앞서 생겨난 신비한 것이 아니라 천지와 함께 생겨난 인식할 수 있는 객관 존재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오직 천지가 갈라지면서 함께 생겨났지만 천지가 사라져 흩어짐에 이르러 죽지 않고 쇠퇴하지 않는 것을 상(常)이라 한다. ···· 그것을 억지로 이름하여 도라 하였다. 그러나 논할 수 있다(唯夫與天地之剖判也具生 至天地之消散也 不死不衰者謂常 ························· 强之曰道 然而可論, 《韓非子》 解老 편). 둘째, 도란 온갖 결〔理)이 법칙으로 삼는 것이다(道者 ··· 萬理之所稽也, 《韓非子》 解老 편). . 만물은 각기 결을 가지고 있는데 도는 만물의 결을 모조리 다 살핀다(萬物各有理 而道 盡稽萬物之理). 여기서 처음으로 도를 즉 살결[肌理], 나뭇결[木理] 같은 결로 해석하였는데 뒤에 송명 유학에서는 도보다는 리(理)가 더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한비자가 말하는 '리' 는 사물의 무늬결[紋理]을 뜻하지 만물의 근원인 최고의 존재 원리를 가리키지는 않는다. 한비자는 도는 만물이 갖추고 있는 각종의 특성과 그 조리[理]의 총체인 것이다. 셋째, 도는 상벌의 도이다. 그는 대체로 상벌을 도로 삼는 것은 이로운 기구이다(夫賞罰之爲道 利器也, 《韓非子》 內儲說 上 편)라 하여 형벌을 엄하고 무겁게 하는 것이 국가를 안정시킬 수 있는 방법[道]이라고 생각하였다. "상벌은 반드시 알려야 한다. 그것을 아는 것이 도가 극진히 발휘되는 것이다"(賞罰必知之 知之道盡矣, 《韓非子》 八經 편)라 하여 통치자가 상벌의 도를 알고 장악함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불교(佛敎) : 수당(隋唐) 시대에는 불교가 성행하여 도를 둘러싸고 유가 · 도가와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불교는 도교와 논쟁을 벌이는 동안 노자의 상도(常道) 위진 현학(魏晉玄學)의 "뜻을 얻으면 언어를 잊어 버린다" (得意忘言)는 사유 성과를 받아들여 "지극한 도는 언어를 끊어 버린다" (至道絶言)는 명제를 제시하였다. 다시 말해 불교의 도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임을 밝힌 것이다. 불교의 도는 인과(因果)를 통할 수 있는 도, 중도(中道), 그리고 보리도(菩提道) 또는 열반도(涅槃道) 등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① 도는 인과를 통할 수 있다 : 수(隋)의 지의(智顗)는 "도란 통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원인으로 이와 같은 결과를 얻었고, 이와 같은 결과로 이와 같은 원인에 보답하였다. 원인을 통하여 결과에 이르렀고, 결과를 통하여 원인이 보답받았다. 그러므로 도라고 이름붙였다" (道者也 以如此因 得如此果 以如是果 酬如是因 通因至果 通果 酬因 故名爲道, 《無量壽佛經優婆提舍願生偈》. 이것은 인과응보의 연관성으로 도의 뜻을 밝힌 것이다. 세친(世親)이 쓰고 현장(玄奘)이 번역한 《대방광불 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는 "깨달음의 결과(佛果)까지 통하여 이르렀다. 그러므로 도라 이름지었다" (通至佛果 故名道)고 하였으며, 《아비달마 구사론)(阿毗達磨俱舍論)은 "도의란 무엇을 말함인가? 열반의 길을 말한다. 이것을 하면 열반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道義云何 謂涅槃路 乘此能 往涅槃故)고 하였다. 불교의 통할 수 있는〔能通) 도는 선악과 인과 응보, 그리고 수행과 궁극 목표인 열반(Nirvana), 나아가서 이 세상과 내세를 통하게 하여 그 관계를 밝혀 준다.
② 중도 : 삶과 죽음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깨달아 아는 방법을, 천태종(天台宗)의 지의(智顗)는 중도로서 설명하였다. 그는 "심성은 공(空)도 아니요 가(假)도 아니지만 공가(空假)의 법을 파괴하지 않는다. 만약 이와 같이 비추어 볼 수 있다면 심성에 중도가 통달되고 이제(二諦)를 원만하게 비추게 된다. 만약 마음에서 중도와 이제를 볼 수 있으면 일체 제법(諸法)의 중도 · 이제를 볼 수 있을 것이다. ··· 중도가 바르게 직관되면 깨달은 눈[佛眼)이고 일체 종지(種智)가 만약 이 직관에 거주한다면 정혜(定慧)의 힘이 같게 되고 또렷하게 불성(佛性)을 보며 대승(大乘)에 안주하고 걸음걸이가 평정하고 그 빠름이 바람 같아 저절로 살파약해(薩婆若海, 즉 일체 종지 또는 반야바라밀)에 흘러들어 갈 것이다" (心性非空非假 而不壞空假之法 若能如是照了 則于心性通達中道 圓照二諦 若能于自心見中二諦 則見一切諸法中道二諦 ··· 中道正觀則是佛眠 一切種智 若住此觀 則定慧力等 了了見佛性 安住大乘 行步平正 其疾如風 自然流入薩婆若海, 《修習止觀坐禪法要》)라고 하였다. 이것은 불교의 중관학(中觀學)의 입장에서 중도를 설명한 것이다. 심지어 유식종(唯識宗)의 현장도 중도를 논하였으며 그의 수제자인 규기(窺基)도 "보태고 빼는 두 쪽을 멀리 떠나면 유식의 뜻이 이루어지고 중도에 꼭 들어맞게 될 수 있다" 遠離增滅二邊 唯識義成 契會中道, 成唯識論》 권7)하였다. 극단적인 양쪽을 깨뜨리고 중도를 세우는 것이 유식종의 도를 위한다는 것이다.
③ 보리도 : 법장(法藏)은 보리도가 최고의 지혜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보리, 이것은 도, 깨달음을 말한다. 우리가 사자를 볼 때 즉 일체의 유위의 법이 다시는 허물어짐에 의존하지 않고, 본래 적멸(寂滅)하며 취하고 버림을 떠나 있어 즉 이 길에서 살파약해에 흘러들어감을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라고 이름붙이었다" (菩提 此云道也 覺也 謂見獅子之時 即見一切有爲之法 更不待壞 本來寂滅 離諸取舍 即于此路 流入薩婆若海 故名為道, 燁嚴金獅子章》 . 여기서 말하는 보리는 깨달음의 지혜를 가리키며 보리도는 성불하는 경계로 나아가는 길 또는 과정을 말한다. 선종(禪宗)의 육조(六祖) 혜능(慧能)은 비록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주장하였으나 그의 제자 법해(法海)가 기초한 《단경》(壇經)을 보면 그는 '보리도' 를 주장했음을 알 수 있다. 혜능이 말하기를 "나는 ···· 한마
디 말을 듣자 크게 깨달았고 진여불성을 갑자기 보았다. 이 때문에 이 가르침을 후대에 유행시켜 도를 배우는 자로 하여금 보리를 돈오(頓悟)하게 하고 본성으로부터 돈오하게 할 것이다"(我 ··· 一聞言下大悟 頓見真如本性 是故將此教法 流行後代 令學道者頓悟菩提 令自本性頓悟, (壇經》)라고 하였다. 그가 말한 보리도 역시 성불 경계로 가는 길을 말한다. 그는 또 세속 생활을 떠나지 않고 도를 찾으라고 주장하기도 하여 "세간(사람)이 도를 닦으면 일체가 모조리 방해하지 않으며, 언제나 자기의 허물을 보면 도와 곧 서로 합치된다"(世間若修道 一切盡不妨常見自己過 與道即相當, 《壇經》)고 하였다. 이것은 불교의 도가 세속화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한 것이다.
신유가(新儒家) : 이것은 불교와 노장을 비판하면서 유학을 새롭게 해석한 송원명청 시대에 일어난 이학(理學) · 심학(心學) · 기학(氣學)을 모두 포괄한다. 도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세 가지 서로 다른 학파가 생겨났는데, 정이(程頤, 1033~1107)와 주희(朱熹, 1130~1200)는 이(理)로써, 육구연(陸九淵, 1139~1193)과 왕수인(王守仁, 1472~1529)은 심(心)으로써, 장재(張載, 1020~1077)와 왕부지(王夫之, 1619~1692) 등은 기(氣)로써 각각 도를 해석하였다.
① 정주학(程朱學)의 도 : 다음 다섯 가지로 그 내용을 간추릴 수 있다. 첫째, 도는 형이상의 이치(理)를 가리킨다. 정이는 《역전》의 "일음 일양을 도라고 한다"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도는 음양이 아니다. 일음 일양하는 까닭이 도이다" (道非陰陽 所以一陰一陽道也, 《遺書》 권3). "음양은 기이다. 형이하이다" (陰陽氣也 形而下也, 論道器》 粹言 권1)라고 하였다. 정이에 의하면, 만물이 그렇게 되게 하는 까닭[所以然]으로서의 도는 형이상의 이치[理]이며, 음양은 형이하의 기운[氣]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소이' (所以) 자를 덧붙여 도(道)와 기(器)를 형상(形上) · 형하(形下)로 나누는 근거로 삼았다는 것이다. 주희도 정이설에 근거하여 "그러나 태극은 꼴〔象〕이 없고 음양은 기를 가지고 있으니 어찌 상하의 다름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도와 기의 구별이 되는 것이다"(然太極無象 而陰陽有氣 別安得無上下之殊哉 此所爲道器之別也, 《周子全書》 권3, 太極圖說 附辯)라 하였다. 음양은 형기(形器)이고 도는 형기를 초월한 '소이연' (所以然)으로서의 이(理)인 것이다. 이것은 도를 '이' 로 풀이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둘째, 도는 형체도 없고 소리와 냄새도 없는 본체이다. 이정(二程)은 말하기를, "대개 상천의 때에는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데 그 본체는 역이라 하고 그 이치는 도라고 한다" (蓋上天之載 無聲無臭 其體則謂之易 其理則謂之道, 二程遺書》 권1)고 하였고, 주희는 "도는 본래 몸[體]이 없다. ··· 저 소리 없고 냄새 없는 것이 바로 도이다" (道本無體 ··· 那無聲無臭便是道, 《朱子語類》 권36)라고 하였다.
셋째, 도는 자연계의 필연성이며 자연 법칙과 사회 규범을 뜻한다. 정호(程顥, 1032~1085)는 "천(天)의 자연을 말한 것을 일러 천도라 한다”(言天之自然者 謂之天道, 《遺書》 권11)고 했는데, 천도란 자연 법칙을 가리킨다. 그런데 주희는 "무릇 도를 말하는 자는 모두 사물의 당연한 이치를 말하는데, 사람이 함께 거쳐야 하는 곳이다" (凡言道者 皆謂事物當然之理 人之所共由者也, 《論語集註》 學而 편)라 하여 사람이 거쳐야 하는 당연한 이치 즉 사회규범을 도라고 보았다.
넷째, 도는 인 · 의 · 예 · 지 · 신(仁義禮智信)의 본성이다. 도와 성은 사실은 같고 이름은 다르다. 이정(二程)은 인 · 의 · 예 · 지 · 신을 "합하여 말하면 모두 도이다. 나누어서 말해도 모두 도이다" (合而言之 皆道也 別以言之 亦皆道也, 《遺書》 권25)라 하였다. 주희는 "도는 널리 말한 것이고 성은 자기의 몸 위에서 말한 것이다. ···· 도 는 사물에 있는 이치이고 성은 자기에게 있는 이치이다. 그러나 사물의 이치는 모두 나의 이 이치 가운데 있다. 도의 골자가 성이다"(道是泛言 性我自家身上說 ···· 道是在物之理 性是在己之理 然物之理都在我此理之中 道之骨子便是性, 《朱子語類》 권100). 그리고 주희는 《중용》의 "본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한다" (率性之謂道)를 해석하면서 "인간의 성을 따르면 인간의 도가 되며, 소의 성을 따르면 소의 도가 된다" (率人之性 則為人之道 率牛之性則爲牛之道, 동 권62)고 하였는데, 인간이 "그 인의예지의 성을 따르는 것을 말하면 본래 도가 아님이 없다" (則循其仁義禮智之性而言之 固莫非道, 동 권62)고 하였다.
다섯째, 도는 인륜 도덕이며 삼강(三綱) 오상(五常) 등 도덕 관념과 행위 규범이다. 주희는 "도가 천하에 있는 것은 사실 하늘이 명령한 본성에서 근원하여 군신 · 부자 · 형제 · 부부 · 붕우 사이에서 행하여진다" (道之在天下 其實原于天命之性 而行于君臣 父子 兄弟 夫婦 朋友之間, 《朱子公文集》 권78)고 하였고, 또 "내가 말하는 도란 군신 · 부자 · 부부 · 곤제 · 붕우의 마땅히 그래야 하는 실리이다" (吾之所謂道者 君臣 父子 夫婦 昆弟 朋友 當然之實理也, 《論語或問》 권4)라 하였는데, 군신 · 부자 · 부부 · 형제 · 붕우는 바로 인간의 오륜이며 이 오륜 사이에 행하여진 실리가 곧 도라는 것이다.
정주학파는 이와 같이 도를 이로 해석하여 설명하였는데, 양자의 관계를 살펴보면 도가 곧 '이' 라는 점에서 양자가 다 형이상이요 형이하인 기(器), 그리고 기(氣)와 서로 대조적이다. 총체적으로 보면 동일성은 갖고 있으나 세 가지 점에서 다르다. 첫째, 도는 넓고 크며 이는 정밀하다. 둘째, 도는 전체를 가리키는 통명(統名)이고 이는 부분을 가리키는 세목이다. 셋째, 도는 공공(公共)의 이치이고 이는 사물마다의 이치이다. 진순(陳淳)은 "도와 이는 대개 하나의 물건이다. 그러나 두 자를 분석하면 역시 분별이 있어야 한다. 도는 사람이 통행하는 곳에서 글자를 세웠다. 이(理)와 대조하여 말하면 '도' 자는 비교적 넓고 '이' 자는 비교적 알차다. 이에는 확실히 바뀌지 못한다는 뜻이 있다" (道與理方槪只是一件物 然析為二字 亦須有分別 道是就人所通行上立字 與理對說 則道字較寬 理字較實 理有確然不易底意, 《北溪字義》)라하였다.
② 육왕학(陸王學)의 도 : 송대의 육구연, 명대의 왕수인은 심으로 도를 말하고 도가 마음속에 있다고 주장하여 심학에서 본 도의 특징을 네 가지로 설명하였다.
첫째, 도는 마음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육구연은 "사람은 누가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겠는가? 도는 밖에서 찾지 말라. 근심은 그것을 해치고 그것을 잃어버리는 데 있을 뿐이다" (人孰無心 道不外索 患在狀賊之耳 放失之 耳, 《陸九淵集》, 與舒西美)라고 하였다. 사람마다 마음을 가지고 있고 도는 이 마음에 있으니 밖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행위의 좋고 나쁨은 행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도에 합치되는지 여부에 달 려 있다고 하여 "만약 마음이 도에 있는 때는 넘어져도 반드시 여기에서 하고 아무리 급해도 반드시 여기에서 한다" (若心在道時 顛沛必於是 造次必於是, 《語錄》 下)고 하였다. 왕수인은 "이 심체가 바로 이른바 도이다. 심체 가 밝아지면 곧 도가 밝아진다. 다시 둘이 없다" (這心體 即所謂道 心體明即是道明 更無二, 傳習錄》 上)라 하였으며, 또 "만약 안을 향해 찾아 구하여 깨우친다면 자기 심체를 볼 수 있다. 즉 어느 때 어느 곳이든 이 도가 아님이 없다 ······················· 마음이 곧 도이며 도가 곧 하늘이다. 마음을 알면 도를 알고 하늘을 안다. 또 말하길 제군이 이 도를 실제로 보려고 하면 반드시 자기의 마음 위에서 몸소 알아야지 밖에 의지하여 구하여야 비로소 얻는 것이 아니다" (若解向裏尋求 見得自己心體 即無時無處不是此道 ···· 心即道 道即天 知心則知道知天 又日 諸君要實見此道 須從自己心上體認 不假外求始得, 《習錄》 上)라고 하였다. 왕수인에 의하면, 심체는 양지(良知)를 가리킨다. 심체가 도이므로 그는 "대체로 양지가 곧 도이다. 양지가 사람의 마음에 있음을 성현뿐만 아니라 일상인이라 하더라도 이와 같지 않음이 없다. 만약 물욕에 이끌려 가려지지 않고 양지만 따라간다면 발휘하여 쓰이며 유행되어 나가는 것이 도가 아님이 없다" (夫良知即是道 良知之在人心不但聖賢 雖常 若無物欲牽蔽 但循著良知發用流行將去 即無不是道, 《傳習錄》 中)라 하였다.
둘째, 도는 천지 만물의 법칙이며 항상 오래갈 뿐이다. 육구연에 의하면, 마음과 합일된 도는 천지 만물이 반드시 따라야 할 법칙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도가 우주를 꽉 채우고 있다. 천지는 이것을 따라서 움직인다"(此道充塞宇宙 天地順此而動, 《陸九淵集》, 與黃康年)라 하였다. 왕수인은 "천지의 도는 언제나 오래며 그치지 않을 뿐이다" 天地之道 一常久不已而已, 《五經億說》 13수)라 하였다. 왕수인이 말하는 천도는 마음과 떠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곧 하늘이다" (心卽天)는 명제하에 "마음이란 천지 만물의 주체이다. 마음이 곧 하늘이다. 마음을 말하면 천지 만물이 모두 거론된다" (心者 天地萬物之主也 心即天 言心則天地萬物 皆擧之矣, 《陸九淵集》, 答季明德)고 하였다.
셋째, 도는 인의 도덕이며 군신 부자의 도로서 천하가 반드시 따라야 할 상도(常道)이다. 육구연은 "우리 유학의 도는 천하의 상도이다. 어찌 따로 묘한 도가 있겠는가(吾儒之道乃天下之常道 豈是別有妙道, 《陸九淵集》, 與王順伯)라 하였다. 또 이 도는 천하가 함께 거치는 곳이며 이 백성이 날마다 쓰는 것인데 도는 하나일 뿐이라고 하였다. 이 도가 "사람에게 있으면 인의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의란 사람의 본심이다"(在人仁義 故仁義者 人之本心, 《與越監》)이라 하였다. 왕수인은 심(心) . 성(性) · 명(命) 세 가지가 합일된 것을 상도라고 일컬었다.
넷째, 도는 기(器)와 일치하며 일[事]과 떨어지지 않는다. 왕수인은 도와 사물의 관계를 "사물이 곧 도이며 도가 곧 사물이다"(事卽道 道即事)라고 보았다. 왕수인에게 있어서 물(物)은 마음 밖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물이란 일어난 일이다. 무릇 의(意)가 발동한 곳에는 반드시 그 일이 있다. 의가 있는 곳의 일어난 일을 물(物)이라 한다" (物者事也 凡意之所發 必有其事 意所在之事謂之物, 《大學心》)고 하여 지향성(intentionality) 개념과 비슷한 의(意)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도는 기(器)와 일치하게 된다. 도와 기는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를 떠나 도를 구하면 도는 분명치 못하게 된다. 이것은 정주학에서 소이연(所以然)으로서의 도와 사실로서의 기를 형상 · 형하로 나눈 것을 심학의 입장에서 비판한 것이기도 하다.
③ 기학(氣學)의 도 : 기 철학은 송대의 장재(張載, 1020~1077), 명대의 왕정상(王廷相, 1474~1544), 그리고 청대의 왕부지(王夫之, 1619~1692)와 대진(戴震, 1723~1777)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기(氣)로써 도를 해석하였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명대에는 심학이 크게 유행하였지만, 이학의 입장에서 심학을 비판하고 기학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나흠순(羅欽順, 1465~1547)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도기 분리' (道器分離)를 주장하는 정주학의 '일음 일양' 의 소이(所以) 자(字)를 제거함으로써 "도가 기를 떠나지 않는다" (道不離器) . 그리고 "기에서 이를 알아낸다" (就氣認理)는 명제를 주장하여 기학으로 가는 길을 닦아 놓았다. 그렇다고 나흠순을 기학자로 볼 수는 없다.
기학자들이 도를 해석하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도는 기의 운동 변화의 과정이다. 장재는 "태허로 말미암아 하늘의 이름이 생겼고, 기화로 말미암아 도의 이름이 생겼다"(由太虛 有天之名 由氣化 有道之名, 《正蒙太 和》), 또 "태허는 기가 없을 수 없고 기는 모여서 만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만물은 흩어져 태허로 되지 않을 수 없다”(太虛不能無氣 氣不能不聚而爲萬物 萬物不能不散而爲太虛, 《正蒙太和》)라 하였다. 장재가 말하는 도는 바로 기가 모였다 흩어지는 변화의 과정을 가리킨다. 대진은 끊임없이 기가 변화하는 과정을 도라고 보고 "도는 다닌다(行)와 같다. 기의 변화가 흘러 다니며 쉬지 않고 낳고 또 낳는다. 이 까닭에 그것을 도라고 하였다" (道 猶行也 氣化流行 生生不息 是故謂之道, 《孟子字義疏》 中).
둘째, 도는 태허(太虛) 또는 원기(元氣)를 본체로 삼는다. 장재에 의하면 "태허란 자연의 도이다" (太虛者 自然之道, 《張語錄》 中). 장재는 어떤 때는 도와 기를 한 몸으로 보아 "하늘의 기는 역시 도라고 할 수 있다" (天之氣也 亦可謂道, 《張子錄》 中)고 하였다. 그러나 왕정상은 원기를 도의 근본으로 보고 "천지의 앞에는 원기뿐이다. 원기 위에 어떤 것도 없다. 그러므로 원기는 도의 근본이다" (天地之先 元氣而已矣 元氣之上無物 故元氣為道之本, 《雅述》 上)라고 하였다. 그는 정주학파처럼 원기 위에 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원기 속에 도가 깃들여 있다고 보았다. 그는 "형체가 있어도 기이고 형체가 없어도 기이다. 도는 그 속에 깃들어 있다" 有形亦是氣 無形亦是氣 道寓其中矣, 《愼眞言 · 道體》, "그러므로 기란 것은 도의 몸이며 도란 것은 기의 도구이다"(故氣也者 道之體也 道也者 氣之具也, 《慎言 · 五行)라고 하였다. 왕부지에 의하면 도는 실제로 있는 태화의 기인 것이다. 그는 "태화의 인온(絪縕, 기가 부글부글 괴는 작용)이 태허가 되는데 몸이 있으면서도 형태가 없음으로 본성을 삼는다. 이것으로 생명을 넓고 크게 할 수 있으나 의존하는 데가 없다. 도의 본체이다" (太和絪縕爲太虛 以有體無形 為性 可以資廣生大生而無所倚 道之本體也, 《張子正義注》라고 하여 기가 가득한 태화를 도의 본체로 보았다.
셋째, 도는 형태가 없는〔無形〕 음양이다. 장재는 "물은 하나로 하면서 몸을 둘로 하는 것이 기이다"(一物兩體 氣也, 《正蒙兩參》)라고 하였다. 장재에 의하면 몸을 둘로 함은 바로 음양을 가리킨다. 그는 "일음 일양은 형기(刑器)로 구속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을 도라 하였다" (一陰一陽不可以形器拘 故謂之道, 《橫渠易說 · 繫辭》 上)고 하였으며, 또 "음양은 합일되어 도에 간직되어 있다" (陰陽合一 存乎道, 《正義 · 誠明》)고 하여 일음 일양하는 그 자체를 도로 본 것이다. 음양의 도와 형기(形器)는 전자가 형체가 없는 데 비해 후자는 형체가 있다. 장재의 기 철학에서는 도와 기, 형상과 형하, 무형과 유형은 모두 기에 통일되어 있다. 대진도 역시 도는 음양지기(陰陽之氣)의 통일체로 보고 '일음 일양 그 자체가 도라고 하였으며, "천도는 음양 오행일 뿐이다" (天道 陰陽五行而已, 《諸言》 上)라고 주장하였다.
넷째, 도는 기(器)와 떠날 수 없으며 심지어 도는 기(器)의 도이다. 왕부지에 의하면, 도기(道器)는 하나의 형체에 통일되어 있어 도와 기는 서로 맞대어 떨어지지 않는다. 그는 "이 하나의 물건을 거느리는데 형이상이라면 도라 하고 형이하라면 기라 한다" (統此一物 形而上則謂之道 形而下則謂之器)고 하여, 도와 기는 같은 사물의 다른 규정으로 보았다. 그는 도와 기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천하는 오직 기일 뿐이다. 도란 기의 도이다. 기란 도의 기라 일컫을 수 없다" 天下惟惟器而已矣 道者 器之道器者 不可謂道之器也, 《周易外傳》 권5)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 기가 없으면 그 도가 없다.... 아직 소와 말이 없으면 부리는 도〔御道)가 없고··············· 아직 아들이 없으면 아버지의 도가 없다... 도는 있을 수 있지만 없는 것이 많다" (無其器則無其道 ··· 未有牛馬而無御道 ··· 未有子而無父道 ··· 道之可有而且無者多矣, 동 권5)고 하여 정주의 '도체 기용설' (道體器用說)을 비판하고 '기체 도용설' (器體道用說)을 주장하였다.
〔가톨릭의 도〕 현대 중국의 가톨릭 자연 법학자이면서 철학자인 오경웅(吳經熊, John, CH Wu)은 신약성서의 요한 복음 1장 1절을 번역하면서 "태초에 도가 있었다" (太初有道, 《新經全書》) 하였다. 서양의 로고스(logos)를 도(道)로 해석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중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구절에서 길은 바로 도를 말한다. 이는 보편되고 공번된 교회의 길이며 성교(聖敎)의 길이다. 마테오 리치에 의하면, 천주의 바른길은 오직 하나뿐(天主正道惟一)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중국에 당시 기존했던 삼교(三敎)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당시의 유 · 불 · 도교는 제각기 하나는 유〔誠有〕를 숭상하고 다른 하나는 공(空)을 높이고 또 다른 하나는 무(無)를 중시하여 삼교(三敎)가 합일하기에는 물과 불을 합치시키는 것같이 어렵다는 것이다. 또 그 가르침마다 본래 계율이 같지 않아 한 쪽은 살생을 경계하는데 한쪽은 희생을 사용하여 제사를 지내게 한다. 그렇다면 이 셋을 다 포함한 자는 이것을 지키려면 저것에 어긋난다. 지켰는데 어긋나고 어긋났는데 지켜지니 , 어찌 어지러운 가르침의 극치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삼교를 따르느니 차라리 아무런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이 낫겠으며 좇을 만한 가르침이 아무것도 없다면 반드시 따로 바른길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삼교를 따르는 이는 스스로 그 가르침은 넉넉하다고 하는데, 사실은 거기서 하나도 얻는 것이 없다. 참된 천주와 바른길을 배우지 않고, 남을 따라 죽으면서 꿈속에서 도를 말할 것인가? 대체로 참된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도가 그 참됨과 일치하였기 때문에 삶을 빛나게 할 수 있으며 그 하나를 얻지 못하면 뿌리가 깊이 내리지 못한다. 뿌리가 깊지 못하면 도가 안정되지 못하고 도가 안정되지 못하면 믿음이 독실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마테오 리치는 서문에서 "천주의 도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데 사람들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또 반성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천주의 주재를 알지 못한다" (天主道在人心 人自不覺 又不反省 不知天之主宰)고 하였다.
※ 참고문헌 唐君毅 《中國哲學原論Х原道篇) 《說文解字》 韋政通, 《中國哲學辭典》 張立文, 《道》 劉笑敢, 《莊子哲學及其演變》 羅整菴, 《困知記》. 〔鄭仁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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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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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는 '사람의 길' 즉 인(仁)이라고 말한 공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