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교

道敎

〔라〕Taoismus · 〔영〕Tao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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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교가 상정한 심판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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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교가 상정한 심판 모습.

후한(後漢) 말 신선설(神仙說)을 배경으로 여러 신앙과 사상을 수용하여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된 종교. 도(道)를 표방한다.
〔발 생〕 전국 시대(기원전 403~221)부터 불로 장생을 추구하는 신선설이 생겨났는데, 이는 중국 고대의 산악 신앙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 신선설에서 중국의 원초적 신앙 형태인 무술(巫術), 자연 숭배 등의 초능력적인 면과 섞여 불사약을 연조(煉造)하고 혼령을 불러내는 방술(方術)이 생겨났다. 신선설을 배경으로 하는 방술은 전국 시대에 이미 성립되어 민간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방술을 행사하는 방사(方士)는 진시황(秦始皇, 기원전 246~210) 때부터 제왕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한 무제(漢武帝, 기원전 141~87) 때에는 제왕의 측근에서 떠나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러므로 방술은 상층 사회에 깊게 뿌리내리게 되었고, 호소할 곳 없는 일반 백성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아 종교적인 힘을 발휘하였다. 전한(前漢) 말부터 민간에는 전설상의 임금 황제(黃帝)와 《도덕경》(道德經)의 저자로 알려진 노자(老子)를 초인적인 존재로 여기고 이들을 신선으로 받드는 황로 신앙(黃老信仰)이 대두하였다. 황로 신앙은 방사들의 조작된 선전과 참위설(讖說)의 유행으로 확산되었다. 황로 신앙에 신선 방술이 덧붙여져 그 내용이 조정 · 확대되고 새로 유입된 불교의 영향을 받아, 도교라는 종교 형태를 갖춘 교단이 성립되었다.
〔특 징〕 도교는 교조(敎祖)나 개산조(開山祖)를 알 수없는 자연 발생적인 종교이다. 노자를 교조로 내세운 것은 종교로서의 체제를 갖추려는 의식이 생겨난 이후이다. 도교는 신선설을 중심으로 도가(道家), 역리(易理), 의술, 음양, 오행, 점성(占星), 참위 등의 법술과 무술적인 신앙을 포함하는 종교이다. 또한 불교의 체제와 조직을 본받아 교단을 형성하였고, 불로 장생과 현세의 복리를 추구한다. 도교는 이와 같이 유교 · 불교는 물론 서로 다른 여러 신앙을 큰 마찰 없이 받아들였다. 그 결과 도교라는 이름으로 행하여지는 신앙이나 행사의 내용은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도교는 또한 신선설과 연결되어 불로 장생을 목적으로 함에 따라 건강 관리를 중요시하였다. 심리적으로는 사과신적(司過神的) 신앙과 주술적인 방법이 도입되었고, 물리적으로는 호흡 조절〔調息 또는 胎息〕, 곡식 먹지 않기(酸穀〕, 호흡에 맞춘 관절의 굴신〔導引〕, 그리고 남녀 방사의 조화〔房中〕 등의 방법이 채택되었다. 여기서 질병 치료에서 불로 장생에까지 이르는 도교 의학이 성립하였다. 이는 금단(金丹)의 사용으로 드러났다. 금단은 실제로 납과 수은 같은 광물에다 여러 가지 보조 약품을 섞어 가열하여 만든 것으로, 복용하면 생명을 잃게 되는 독극물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 금단의 연조를 연금술 같은 물리 화학적인 방술에서 수련적인 단학(丹學)으로 전환하였다. 그 결과 도교의 금단도(金丹道, 금단을 연조하는 방법)는 연금술적인 외단(外丹)과 수련적인 내단(內丹)으로 나뉘어졌고, 내 · 외단의 통섭(統攝)이라는 방향으로 이론 체계를 세웠다.
비승, 은화 및 시해 : 선단(仙丹)을 먹거나 수련을 통해 공행(功行)을 쌓아 득도하거나 신선이 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이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찬란한 것은 신선이 되어 천상 선계로 올라가는 비승(飛升)이다. 환진인(桓眞人)은 도교의 큰 인물인 도홍경(陶弘景, 456~536)의 등외(等外) 제자로 있었다. 진실한 마음으로 공행을 쌓아 스승 도홍경을 제치고 선계 천존(天尊)의 부름을 받은 그는, 동자(童子)가 이끄는 선가(仙駕)와 의장(儀仗)의 영접을 받고 동자가 주는 선단을 마시고 선가를 타고 선계로 날아 올라갔다. 또 당(唐) 말 신라인 유학생 김가기(金可記)는 내단 수련에 성공하고 공행이차서 미리 정해진 날짜에 당 나라의 장안 종남산(終南山)에서 선계의 의장에 둘러쌓여 선단의 복용이라는 절차를 거치지 않고 대낮에 만인이 보는 가운데 천상 선계로 곧장 날아 올라갔다. 이 밖에도 이러한 비승의 예는 꽤 많이 전해진다. 은화(隱化)는 비승처럼 유별나게 신선이 되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되는 것이다.
다만 비승의 경우처럼 죽음의 형식을 취하지 않고 곧장 신선이 되어 선계로 날아 올라가는 예는 그리 흔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밖에 다른 길이 없다면 아쉬울 것이므로 죽는 형식만 취하고 실제로는 죽지 않고 신선이 되는 길을 터놓았다. 시해(尸解)가 그것이다. 금 · 목 · 수 · 화 · 토(金木水火土) 오행에 따라 각기 다른 방법이 있었다. 예를 들면, 검시해(劍尸解)는 평소 지니고 다니던 검을 임종하는 자리에 세워 놓고 임종을 하면, 사람은 신선이 되어 선계로 올라가고 지켜 보는 가족은 그 검이 시신으로 보여 그것을 매장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행의 금시해(金尸解)에 속하는 것이다.
36천과 동천 복지 : 도교는 신선설에 기초하여 불로장생과 연결되는 선단, 불로초, 신비한 의약, 각 계층의 신선, 초능력이 따르는 각종 도술, 천상과 지상의 수많은 선계 등의 환상적인 경지를 개척하였다. 건강하게 장수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공통된 욕구이다. 도교에서 개척한 불로 장생과 연결되는 환상의 세계는 허황되기는 하지만 그 나름대로 위안과 희열을 가져다 주므로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 있었다.
도교에서 천계(天界)는 욕계 육천(欲界六天), 색계 십팔천(色界十八天) 무색계 사천(無色界四天), 상사천(上四天 또는 四梵天), 삼청경(三淸境), 대라천(大羅天) 등 모두 36천(三十六天)이 있다. 맨 아래의 욕계 육천에 사는 사람은 1만 년을, 색계 십팔천에 사는 사람은 1억만년을, 무색계 사천에 사는 사람은 억겁 년(億劫年)을 산다. 상사천부터는 사람을 죽게 하는 삼재(三災)가 없어서 그야말로 장생 불사하여 무량수를 누린다. 득도하여 신선이 되어 천계에 오르면 수명은 이처럼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대라천에는 도교의 최고신인 원시 천존(元始天尊)이 있다. 그 아래 옥청(玉淸, 清微天, 元始天尊), 상청(上淸, 禹餘天, 靈寶天尊), 태청(太淸, 大赤天, 道德天 尊)으로 이루어진 삼청경에는 각각 중앙과 좌우의 세 궁전이 있고 그 궁전에는 선왕(仙王), 선공(仙公), 선경(仙 卿), 선백(仙伯) 선대부(仙大夫)가 있어 현세의 궁정 조직과 같다.
또 지상에도 십주(十洲), 삼도(三島), 십대 동천(十大洞天), 삼십육 동천(三十六洞天) 칠십이 복지(七十二福地) 등 선진인(仙眞人)이 사는 동천 복지(洞天福地)로 불리는 여러 낙원이 있다. 이러한 선진인이 사는 천지간의 선계와 그 밖의 속계가 있는데, 선계와 속계 사이에는 내왕이 있다고 한다. 이 밖에 성수 신앙(星宿信仰)을 받아들여 북극성(北極星, 玄天上帝), 북두성(北斗星, 北斗神君), 남두성(南斗星, 南極長生大帝), 문창성(文昌星, 文昌帝君), 삼태성(三台星) 등을 경배한다. 도교에서 받드는 신은 성황신(城隍神) , 토지신 삼관(三官), 사어(四御), 재신(財神), 문신(門神), 조신(竈神), 왕령관(王靈官), 관제(關帝), 낭낭(娘娘), 용왕, 팔선(八仙), 여조(呂祖), 마조(媽祖) 등이다.
〔교단의 성립과 변천〕원시 교단 : 후한 말 환관의 횡포와 부호들의 발호로 인한 정치적인 혼란으로 일반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의지할 곳이 없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도교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태평도(太平道)와 오두미도(五斗米道)가 생겨났다. 후한 순제(順帝, 125~144) 때에 우길(于吉 또는 干吉)이 《태평 청령서》(太平淸領書)를 터득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종교 집단을 만들고 책 이름을 따서 '태평도' 라고 하였다. 우길의 뒤를 이은 장각(張角)은 조직을 정비하고 도서(道書)와 부적(符籍), 참회(懺悔) 등을 사용한 질병치료로 많은 무리를 얻었다. 그 뒤 그는 왕실을 타도하고 자기가 천하를 잡으려고 무장 봉기하였다. 이것이 황건적(黃巾賊)의 난이다. 난이 진압되고 장각이 전사한 뒤 태평도는 곧 몰락하였다.
한편 장능(張陵, 또는 張道陵, ?~178)은 후한 환영제(桓靈帝, 147~189) 때에 태평도보다 늦게 오두미도를 시작하였다. 그래서 오두미도가 태평도를 계승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장능은 만년에 유학을 버리고 장생법을 배워 황제의 구정 단법(九鼎丹法)을 터득하였다. 또 사천(四川) 학명산(鶴鳴山)에서 도서의 저술과 수도에 전념한 끝에 많은 신이 강림하여 신출정일맹위법(新出正一盟威法)을 그에게 전수하였다고 한다. 이 법으로 질병을 고쳐 준 장능은 수많은 신도를 얻었고 쌀과 비단을 바치는 법과 신도를 통할하는 직책을 만들었다. 장능의 손자 장노(張魯)가 오두미도를 계승하여 교법과 조직을 완성하고 왕국을 방불하는 조직화된 종교 집단을 만들었다. 장노는 조부 장능을 천사(天師)라 하고 오두미도를 천사도(天師道)라고도 불렀다. 또 부친 장형(張衡)을 사사(嗣師), 자신을 계사(系師)라 하여 삼장(三張)으로 합칭하기도 하였다. 천사도의 교세는 장노가 조조(曹操, 155~220)에게 죽임을 당하자 약화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정일교(正一敎)의 전신으로 도교의 정통 자리를 지키면서 내려왔다. 태평도와 오두미도는 부적과 도록(道籙)을 존중하므로 부록파(符籙派)로 불리기도 한다.
금단 연조에 주력하는 이 계열의 도인들을 단정파(丹鼎派)라고 부르기도 한다. 복용하면 불로 장생하는 신선이 된다는 선단 또는 금단으로 불리는 영약(靈藥)의 연조가 선진(先秦) 시대부터 전하여지지만, 후한 말기 오(吳)의 위백양(魏伯陽, 147~167?)이 지은 《주역 참동계》(周易參同契)가 금단도를 천명한 대표적인 도서로 받들어졌다. 위백양은 《주역 참동계》의 방법에 따라 연조한 금단을 먹고 죽었다가 되살아나 다시 약을 먹고 진인(眞人)이 되었다고 한다. 진(晉)의 갈홍(葛洪, 283~343)이 지은 《포박자》(抱朴子) <금단> 편에는 금단도가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그는 후한 말기의 좌원방(左元放)으로부터 그의 종조(從祖) 갈선공(葛仙公)과 갈선공의 제자정군(鄭君)을 통해 전해진 《태청단경》(太淸丹經) 3권, 《구정단경》(九鼎丹經) 1권, 《금액단경》(金液丹經) 1권 및 구결(口訣)을 전수받아 금단도에 통달할 수 있었다고 서술하였다.
북송 초기 장군방(張君房)의 《운급칠첨》(雲笈七籤)에도 금단의 연조 방법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금단은 원래 외물의 도움을 받아 불로 장생을 추구하는 것으로 곧 외단(外丹)인데, 독성이 심한 광물의 합금으로 연조하기 때문에 복용하면 목숨을 잃을 위험이 있었다. 후세의 도사들도 금단을 연조하였는데, 그 금단으로 인해 황제들까지도 목숨을 잃고는 하였다. 이러한 위험을 극복하고 금단도를 유지하기 위하여 수련을 통해 체내에 단을 이룩한다는 본성적(本性的)인 내단(內丹)으로 전환되었다. 이후 금단도는 내 · 외단을 통섭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교학(敎學)의 성립 : 남북조 시대에도 천사도는 변화를 거듭하면서 상층 사회와 민간에 두루 전파 · 신봉되었다. 천사도는 진(晋) 나라 때 《상청경》(上淸經)을 받드는 상청파(上淸派)가 생겨 전승되었다. 특히 남조의 송(宋) 도사 육수정(陸修靜, 406~477)은 대량의 도경을 수집 · 정리하였으며, 배례(拜禮) · 송경(誦經) · 사신(思神)의 세 가지 방법으로 수도하여 마음을 닦고 행실을 깨끗이 하기를 강조하여 도교의 신학적인 수준을 높였다. 상청파의 도법은 양대(梁代) 도교 학자로 연단과 의약에 조예가 깊었던 도홍경에게 전수되어 그에 의해 도교의 신학이 집대성되었다. 그는 강소(江蘇)의 모산(茅山)에 은거하며 육수정의 도경 정리 사업을 계속 추진하고 도교의 교학 체계와 금단도까지도 정비하여 모산종(茅山宗, 또는 茅山派)의 창시자가 되었다.
한편 북조에서는 북위(北魏)의 도사 구겸지(寇謙之, 365~448)가 신천사도(新天師道)를 내세워 도교를 철저히 개혁하였다. 그는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부터 운중음 송신과지계(雲中音誦新科之誡)를 받아 천사도 개혁의 사명을 부여받았으며, 천사의 지위까지 주어졌다. 신선설을 중심으로 한 신천사도에서는 불로 장생을 목적으로 복이(服餌), 복기(服氣), 도인, 벽곡 등의 양생법을 채택하였다. 그는 불교의 체제 · 의식 · 조직 등을 모방하고, 유교의 예도(禮度)를 강조하였으며, 도가의 청허(淸虛)등을 끌어들이고, 노자를 도교의 시조로 삼았다. 또한 조미(租米), 전세(錢稅)와 방중술 같은 오두미도의 폐단을 없애 청정한 도교를 확립하려고 하였다. 말하자면, 신천사도는 부록파와 단정파의 교법을 조정 · 융합한 것이다. 게다가 그는 최호(崔浩, ?~450)의 도움으로 북위 태무제
(太武帝, 440~451)가 귀의하자 도교를 국가 종교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신천사도의 단계에 이르러 처음으로 도교가 완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수 · 당(隋唐) 시대 : 수 왕조에서도 도교의 교학을 연구하는 현도관(玄都觀)을 설치하고 《현도관 일체경》(玄都觀一切經)을 완성하는 등 도교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수를 거쳐 당대 도교는 북조의 신천사도와 남조의 교학 체계를 종합하였다. 이때 도사 왕원지(王遠知, 530~635)와 반사정(潘師正, 586~684)은 국가의 도교 정책을 이런 방향으로 유도하였다. 당대에도 도교를 중요시하였는데, 이것은 도교 교단을 국가의 행정 지배 아래에 예속시키려는 정책의 일환이었다. 당은 도교 교단을 국가에 예속시켜 15,000명이 넘는 도사를 양성하여 2천 곳이 넘는 전국의 도관(道觀)에 배속시켰다. 그리고 배속된 도사들은 주로 국가를 위해 양재기복(禳災祈福)하는 재초(齋醮)를 거행하였고 기타 도교의 행사와 습속을 관장하였다. 그리고 당 황실은 자신의 조상으로 받드는 노자(老子, 李耳)에게 태상 현원 황제(太上玄元皇帝)라는 존호를 올리고, 노자의 <도덕경》을 민가에 두루 보급하고 과거의 과목으로 넣기까지 하였다. 또 그들은 도교 연구 기관인 숭현학(崇玄學)을 설치하고, 도력(道曆)을 제정하였다. 그 결과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난 도교는 민간을 대상으로 하는 종교적 · 사회적인 성격은 퇴색하고, 국가가 관장하는 관방 도교(官方道敎)가 되었다.
안사(安史)의 난(755~763)으로 도교 교단에 대한 당 왕조의 규제가 약화되자, 도교는 다시 서민화의 현상을 나타났다. 당 말기에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고 도교에 큰 영향을 끼친 도사로는 종리권(鍾離權)과 여암(呂喦)이 있다. 종리권은 한대 이래로 생존했던 인물로 보는 전설이 있다. 그는 여러 가지 진결(眞訣)과 도법을 얻어 마지막에는 공동산(崆峒山)에서 옥갑비결(玉匣秘訣)을 얻어 진선(眞仙)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여암을 가르쳐 도인으로 도화(度化)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고, 신라인 유학생 승려 자혜(慈惠), , 최승우(崔承祐), 김가기를 종남산 광법사(廣法寺)에서 만나 많은 도서와 비결을 주고 내단 수련을 위한 도법을 전수하였다고 한다. 종리권은 도교에서 정양 제군(正陽帝君)으로 받들어진다. 여암은 종리권에 의해 도화되었으나 다시 여러 가지 도법과 비결을 얻어 마침내 초능력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는데 특히 민간에서 받들어졌다. 여암은 순양 연정 경화 부우 제군(純陽演正警化孚佑帝君)으로 받들어진다. 이들은 수련적인 도교를 개발하여 전진교(全眞敎) 등 후대에 생겨난 도교유파의 북오조(北五祖)에 들어가 조사(祖師)로 받들어지기까지 하였다. 오대(五代)의 도교는 서민화의 경향이 더욱 뚜렷해졌다.
송 · 원(宋元) 시대 : 송대의 진종(眞宗, 997~1021)과 휘종(徽宗, 1100~1126) 때 도교는 국가의 비호를 받아 관방 도교의 색채를 띠었다. 그러나 당 황실에서 노자를 승상한 것과는 달리, 송 황실에서는 조신(祖神, 또는 수호신)인 조현랑(趙玄朗)에게 호천 옥황 대제(昊天玉皇大帝)라는 존호를 올렸다. 이로써 최고신의 호칭으로 천존 (天尊) 대신 옥황(玉皇)이 정착되었다. 진종 때부터 전국 각지에 만수궁관(萬壽宮觀)을 설치하여 천자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게 하고, 각지의 도관에는 국가에서 제거(提擧)를 파견하여 그 보호와 관리를 담당하게 하였다. 그리고 《대송 천궁 보장》(大宋天宫寶藏)과 《만수 도장》(萬壽道藏) 같은 대규모의 도교 일체경(一切經)을 편찬하였으나, 지금은 모두 전해지지 않는다. 그 내용은 대체로 장군방의 《운급 칠첨》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북송이 금(金)에 멸망한 뒤 남송 대에 국가는 극도로 쇠약해졌다. 이 시기에 정명도(淨明道), 태일교(太一敎), 진대도교(眞大道敎), 전진교, 그리고 무당도(武堂道) 등 새로운 도교 교파가 생겨났다. 이들 새로운 교파들은 삼교 혼합(三敎混合)이라는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원대(元代)에는 세조(世祖, 1260~1294)가 천사도를 정일교(正一敎)로 개칭 · 보호하였고, 전진교도 번성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원 태종 10년(1238)에 어전에서 불교와의 교리 논쟁이 있은 뒤부터 도교는 대체로 퇴색하였다.
명 · 청(明淸) 시대 : 명 태조(太祖, 1368~1398)는 즉위한 뒤 도교 교단을 통제하는 현교원(玄敎院)을 설치하였다. 다시 이를 도록사(道錄司)로 개편하여 통제를 강화하였고, 각 지방에 도기사(道紀司)를 두어 도교 교단의 행정을 관할하게 하였다. 그리고 도사의 최고 칭호로 사용하던 천사가 천자의 권위를 침범한다 하여 진인(眞人)으로 고쳐 쓰게 하였다. 헌종(憲宗, 1164~1187) 때에는 국가에서 공공연하게 도사와 불승의 도첩(度牒, 면허장)을 팔아 도사와 불승의 질적 저하를 초래하였다. 한편 명조정에서는 정명도와 정일교의 지도자들을 도교 교단의 최고 행정 관직인 우정일(右正一), 좌정일(左正一)에 임명하여 도교 교단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화북 지방을 전진교가, 강남 지방을 정일교가 각각 나누어 맡게 하였으나, 실제로는 전진교의 세력이 매우 약화되고 정일교가 주도권을 잡았다. 정통(正統) 10년(1445)에 편찬 · 간행된 《정통 도장》(正統道藏) 5,305권과 만력(萬曆) 35년(1601)에 편찬 · 간행된 《속도장》(續藏) 180권이 유일한 도교 일체경으로 오늘날까지 전해 오고 있다. 청 황실의 차가운 태도로 정일교는 약화되었고, 전진교도 금단도에 기울어져 도교 교학의 지도적인 지위를 상실했다. 청대의 도교는 대체로 삼교 혼합의 방향이 두드러지고 서민화의 경향이 실질적으로 뚜렷해진 점이 특징이다.
〔우리 나라의 도교〕 단군 신화와 신선설 : 우리 나라에는 고대부터 도교를 수용하기에 적합한 산악 신앙, 신선설 및 그것들과 연관이 있는 각종 방술이 있었던 것으로 전하여진다. 천제 환인(桓因)의 아들인 환웅(桓雄)이 3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강림한 곳은 태백산 정상의 신단수(神檀樹) 밑이었다. 환웅의 아들로 태어난 단군(檀君)을 근본으로 이 땅의 신선 사상이 전개되고 선파(仙派)가 생겨났다. 단군 신화에 언급된 홍익 인간(弘益人間)이라는 이념은 한국 신선 사상의 특징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 선파에서는 공을 이루면 하느님께 조알한다(功完朝天) 하여 자기에게 부여된 사명을, 선을 돕고 악을 멸하는(扶善滅惡) 방향에서 완수하면 하늘에 올라가 신향(神鄕)으로 돌아간다는 소박한 신선관을 갖고 있었다. 후세 선파에서 내세운, 환인과 환웅에 연결시켜 결청지학(潔淸之學), 연양지도(鍊養之道), 인간 선사(人間善事), , 신도묘덕지훈(神道妙德之訓) 등으로 표현되는 단군의 정신과 교훈은 인간 만사의 도리와 우주 삼라 만상의 이치를 포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고구려의 도교 도입 : 《삼국유사》 보장 봉로(寶藏奉老) 조에 인용된 《고려 본기》에 따르면, 고구려 말기인 7세기 전반에 고구려 사람들은 다투어 오두미도를 신봉하였다. 당의 고조(高祖)는 이 소문을 듣고 영류왕 7년(624)에 고구려에 도사를 파견하여 천존상(天尊像)을 보내고 《도덕경》을 강론하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도교가 고구려에 전래되었으나 국가 종교로 정착하지는 못하였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보장왕 2년(643)에 왕은 당시의 실권자 연개소문(淵蓋蘇文)의 건의로 당의 태종(太宗)으로부터 숙달(叔達) 등 도사 8인과 《도덕경》을 얻어 도교를 국가 종교로 받아들이고 유교 · 불교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하였다. 보장왕은 불교 사원을 도관으로 만들어 도사들을 그곳에 거처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국가를 위해 재앙을 없애고 복을 기원하게(消災祈福) 하였다. 도사들은 남하(南河)의 용(龍)을 명하여 초승달 형세의 평양성을 만월성으로 개축하고 용언성(龍堰城)이라 하는 등 각종의 도교 제례를 거행하였다. 도사가 주도하는 이러한 의식 중심의 도교를 과의적(科儀的)인 도교라 한다. 즉 도교가 고구려에 정식으로 도입되어 국가를 진호(鎭護)하는 소임을 담당하는 성격이 뚜렷하였다. 이때 당에서 도입한 도교는 모산파의 교학과 신천사도의 체제를 융합한 국가가 통솔하는 성격의 도교였을 것이다. 도교의 이런 성격은 도교를 강화하여 당시의 종교계를 국가에서 지배하려는 연개소문의 의도와 합치한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에서 도교가 강화되자 고구려 사회에서 기반을 굳히고 있던 불교는 심한 타격을 입고 국외로 흩어졌다. 그러다가 연개소문이 죽고 고구려가 멸망하자 도교는 자연 사라지게 되었다. 고구려 사람들이 건국한 발해(渤海)에 도교가 유입되었는지는 아직까지 규명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다.
신라 시대 : 통일 시대 이전에도 신라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도교에 대한 이해가 꽤 깊었다. 당시 도교 문화를 다룬 중국의 책들이 신라에 많이 전해졌고 민간에는 도를 얻어 신선이 되기를(得道仙化) 원하는 사람들도 있었음을 당시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진평왕 9년(589)의 기록에 따르면, 귀가 자제 대세(大世)와 구칠(仇柒)은 오월(吳越)에 건너가 훌륭한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아 도를 얻어 신선이 되려고 배를 타고 중국을 향해 떠나갔다. 한편 고구려에 도입된 도교가 통일 신라 시대에 남아 있는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신라 말기 최치원(崔致遠, 857~?)의 《계원필경》(桂苑筆耕)에 그가 당에서 지은 청사(靑詞) 등 도교 제례인 재초(齋醮)의 각종 제문이 여러 편 실려 있을 뿐이다.
신라 시대에서 도교 관계의 가장 중요한 일은 수련 도교의 전래이다. 한무외(韓無畏)가 1610년(광해군 2)에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해동 전도록》(海東傳道錄)은 수련 도교가 한국에 전래된 경위를 다른 소책자이다. 신라말기 당나라에 유학하여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한 최승우와 김가기가 종남산 광법사에 갔다가 당에 유학 온 승려 자혜를 만나 도사 신원지(申元之)를 소개받았다. 신원지는 세 사람을 유명한 도교 인물인 종리권에게 천거하였고, 종리권은 그들에게 《청화비문》(靑華秘文), 《영보필법》(靈寶畢法) 등의 도서와 구결을 주어 도법을 전수하였다. 종리권은 그들에게 신라에 돌아가 도법을 전하도록 일러 주고, 800년 후에는 그 땅에 도교가 성하리라는 예언을 하였다. 최승우 등은 도사 신원지의 도움을 받아 종리권이 전수한 대로 석실에서 내단을 수련한 지 3년 만에 체내에 단을 이룩하였다. 김가기는 잠시 신라에 돌아왔다가 다시 당으로 돌아가 종남산에서 수도한 끝에 대낮에 만인이 보는 가운데 선계로 날라 올라갔다. 최승우와 승려 자혜는 신라로 돌아와 종리권으로부터 전수받은 수련 도교의 도법을 전수하였다. 그 도맥은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어져 지식인들 사이에 수련 도교가 널리 전파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관련된 신라 시대의 인물로는 최치원, 이청(李淸), 승려 명법(明法) 등이 있다. 또한 승려 현준(玄俊)이 당나라에 가서 배운 시해(尸解)의 비법을 《보사유인지술》(步推進引之術)이라는 책으로써 그의 생질인 최치원에게 전수하였다고 한다.
한편 김유신의 등에는 칠성문(七星文)이 있었는데, 그것이 칠요(七曜)에서 정기를 받은 표시라고 한 것은 도교적인 색조를 띤 사례라고 하겠다. 그리고 그가 중악 석굴(中嶽石窟)에서 하늘에 고하고 기도하자(告天祈祝)신이(神異)한 노인이 나타나 비법을 전수하였고, 열박산(咽薄山)에서 향을 피워 하늘에 고한(燒香告天) 끝에 그의 보검(寶劍)에 강령하였다. 그 방술과 강령한 보검이 삼한 통일을 성취하는 데 큰 힘이 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것은 도교 잡술을 연상하게 하는 일들이다. 김유신의 4대손 김암(金巖)은 숙위(宿衛)로 당나라에 가 있는 동안 그곳의 한 스승에게 음양가법(陰陽家法)을 배워 그 묘리를 스스로 터득하고 도교 잡술의 하나인 《둔갑입성법》(遁甲立成法)을 지어 스승을 감탄시켰다. 신라로 돌아온 뒤 김암은 사천 대박사(司天大博士)가 되어 황충(蝗蟲)을 구제(驅除)하는 등 기이한 행적을 남겼다.
고려 시대 : 고려에서는 '재초' 등 과의적인 도교 행사가 국가 관장으로 자주 거행되었다. 예종(睿宗, 1105~1122)은 고려 역대 군주 가운데서 도교 신앙이 가장 돈독하여 도교가 종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하였다. 그는 개성에 고려의 대표적인 도관인 복원궁(福源宮)을 건립하고 이곳에서 국가의 재초를 거행하게 하였다. 고려의 궁중에는 구요당(九濯堂), 대청관(大清觀) 소격전(昭格殿) 등 도관이 여러 군데 있었으나 복원궁 같은 규모를 갖추지는 못하였다. 복원궁 안에는 삼청상(三淸像)이 그려져 있고, 공행이 높은 도사 10여 명이 도교 행사를 맡아보게 하였다. 송의 국신사(國信使) 수행원으로 왔던 서긍(徐兢, 1091~1153)은 《고려도경》高麗麗圖經)에 복원궁에 관한 기사를 많이 실었다. 이러한 복원궁 건립에는 일재(逸齋) 이중약(李仲若, ?~1123)이 도관을 지어 국가의 재초를 지내라는 상소가 있었다. 예종은 이중약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것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이중약은 송에서 법사 황대충(黃大忠) , 주여령(周與齡) 등으로부터 도의 요체를 전수받고 돌아와 예종의 측근에서 도교 문제에 관한 자문을 하였던 것이다. 예종의 손자 의종(毅宗, 1146~1170)은 광망(狂妄)할 정도로 자주 재초를 지냈고 노인성제(老人星祭) 같은 자신의 장수를 위한 제례에 국고를 탕진해 가며 자주 거행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무신에 의해 폐위되었다.
고려 시대의 재초는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된 김부식(金富軾, 1075~1151), 이규보(李奎報, 1168~1241), 김극기(金克己), 이곡(李穀, 1298~1351), 그리고 정포(鄭誦, 1309~1345) 등 고려 문신들이 지은 재사(齋詞)와 청사(青詞)를 통해서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해동 전도록》에 나타난 고려 시대 수련 도교의 도맥은 시대가 분명하지 않으나 권청(權淸), 원(元)의 설현(楔賢), 명오(明悟), 조운홀(趙云仡) 등으로 이어졌다.
도교 습속의 하나인 수경신(守庚申)이 민간뿐 아니라 궁중에서도 행하여졌다. 수경신은 경신일 저녁에 삼시충(三尸蟲)이 몸에서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그날 밤을 자지 않고 뜬눈으로 지새우는 것이다. 이것이 유행한 것은 잠자는 사이에 삼시충이 몸에서 빠져 나가 천상의 사과신(司過神)에게 그 사람이 저지른 죄과를 고해 수명을 단축시킨다는 풍습 때문이었다. 이는 후에 연회를 베풀어 노래와 춤을 즐기며 환락으로 밤을 새는 놀이의 하나로 변하였다.
조선 시대 : 조선 시대에도 국가가 관장하여 재초를 거행하는 과의 도교는 지속되었다. 한양으로 천도한 후에 도교 제례를 관장하는 소격전을 세우고, 도경의 낭송등을 시험하는 국가 고시를 통해 도류(道流)를 선발하여 도교 제례를 집행하게 하였다. 소격전은 후에 소격서(昭格署)로 축소되었으나 중종(中宗, 1506~1544) 때까지 존속하였다. 소격서 안에는 삼청전(三淸殿), 태일전(太-殿), 직수전(直宿殿), 십일요전(十一曜殿)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광조(趙光祖, 1482~1519) 등의 신진사류의 소격서 혁파 주장으로 중종은 소격서를 한때 없앴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 후에 다시 복구하였다. 임진왜란을 겪은 후에 소격서는 완전히 없어졌다.
조선 시대에도 소격서 혁파 전까지는 소격서와 참성단(塹城壇)에서 재초를 자주 거행했다. 여말 선초의 권근(權近, 1352~1409)을 비롯한 변계량(卞季良, 1369~1430), 윤회(尹淮, 1380~1436) , 이이(李珥, 1536~1584) 등의 문신들이 지은 재사와 청사들이 <동문선》과 문집에 남아있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군사들이 전한 도교 신앙 중의 하나인 관제(關帝) 신앙이 조선 조정에 받아들여졌다. 촉한(蜀漢)의 장수 관우(關羽, ?~220)를 신격화하여 숭상하는 관제 신앙은, 서울의 종로와 동대문, 남대문 밖에 각각 규모를 갖춘 관왕묘(關王
廟)를 지어 제례 행사를 거행하였고 민간에도 꽤 전파되었다. 수련 도교는 특히 김시습(金時習, 1435~1493)에 이르러, 홍유손(洪裕孫, 1431~1529), 정희량(鄭希良, 1469~?), 윤군평(尹君平) 등에 각기 다른 비결과 도법을 전수하여 그 도맥이 크게 퍼져 나갔다. 《해동 전도록》을 지은 한무외는 윤군평과 곽치허(郭致虛)를 거친 김시습의 삼전 제자로 되어있다. 조선 시대의 지식인들 중에는 수련 도교를 신봉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많았다. 수련 도교의 계통을 잇는 인물들 중 하나인 정렴(鄭礦, 1506~1549)은 《용호 비결》(龍虎秘訣)을 지어 초보적인 내단 수련법을 통한 질병 예방과 건강 유지를 위한 방법을 제시하였다. 또 허준(許浚, 1546~1615)은 수련 도교의 교설을 승상하여 도교의 이론으로 의학의 체계를 수립하고, 《동의 보감》(東醫寶鑑)을 편찬하여 도교 의학을 정립하였다. 권극중(權克中, 1560~1614)의 《주역 참동계 주해》(周易參同契註解), 서명응(徐命膺, 1716~ 1787)의 《참동계》의 상석(詳釋)과 《참동계》의 연구 자료를 부록한 《참동고》(參辰), 강헌규(姜獻奎, 1797~ 1860)의 《고문 참동계 양주해》古古文參同契兩註解)와 그가 편찬한 《참동계 연설》(參同契演說) 편자 미상의 《중묘문》(衆婢)과 《직지경》(直指鏡) 등의 수련 도교 계통의 책들이 많이 나왔다. 그리고 《태상 감응편》(太上感應篇), 《경신록》(敬信錄) 등을 비롯한 여러 가지 선서(善書) 즉 선음즐서(善陰騭書)와 그 언해가 민간에 널리 보급되었다. 그리고 조선 시대에는 수경신을 비롯한 여러 가지 도교 잡술이 궁중과 민간에 두루 행하여졌다.
(→ 도가 ; 단학 ; 도사 ; 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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