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나투스주의

— 主義

〔라〕Donatismus · 〔영〕Donat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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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경 아프리카 라틴 교회에서 일어난 이교. 디오클레시아누스(Dioclesianus) 황제의 박해 결과로 발생된 교회 분열의 한 양상이다.
카르타고의 주교인 멘수리우스(Mensuris)의 뒤를 이어 대부제 체칠리아누스(Caecilianus)가 주교직을 계승하도록 선출되어 311년 압통가(Aptunga)의 펠릭스 주교에 의해 주교로 서품되었는데 이 주교 서품이 무효임을 주장하는 세력들이 생기게 되었다. 이로 인해 312년 누미디아 지방의 주교 70명이 카르타고에 모여 회의를 하게 되었다. 이 회의 결과, 박해 때에 배교를 한 펠릭스 주교에 의해 주교로 서품된 체칠리아누스의 서품은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배교자 펠릭스는 성서를 이방인들에게 넘겨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주교직이 상실되었고, 그러한 펠릭스에게 주교 서품을 받은 체칠리아누스도 주교품에 오를 자격을 갖추지 못하였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그들은 마요리누스(Majorinus)를 대립 주교로 선출하게 되었다. 3년 동안 주교직을 수행한 마요리누스의 뒤를 이어 315년 수완이 뛰어나고 대담한 성격의 소유자인 도나투스(Donatus)가 카르타고의 주교가 되었는데, 그의 이름에서 '도나투스주의' 라는 용어가 유래되었다.
도나투스주의의 추종자들은 펠릭스가 배교자였기 때문에 그의 안수가 효력이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에는 분명히 성사(聖事)의 유효성 이론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은 확실한 이론의 신학을 지니지 못하였으며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이 주장하는 역사 문제도 자신들이 적용하는 이론 원리에 따라 수시로 변하였다. 결국 그들이 주장하는 이론은 다음 두 가지 점에 그 확실성을 두고 있다. 공적으로 드러난 죄인들, 특히 독직(瀆職)의 사제와 주교들은 교회에 속하지 않으며, 참된 교회 밖에서 행해지는 성사는 유효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논리로 자신들의 이론을 정당화시켰고, 보이는 교회는 거룩하고 순결해야 하며 타락하고 부패한 구성원들이 있음으로 해서 교회는 더럽혀진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죄를 범한 사람들은 교회 구성원이 될수 없으며 교계 제도에 있어서도 위치를 상실할 뿐 아니라 권한도 상실하기에 그러한 자는 성사를 집행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것은 성무 집행자의 내적 성화가 은총의 성직 수여 조건을 결정한다는 것으로 무척이나 위험한 이론임에 틀림없다. 만일 배교자들 혹은 이들과 접촉한 모든 신자들을 교회 밖에 있는 자들로 생각하였다고 해서 교회가 더 거룩해지고 성사의 유효성이 더 나아지고 성무의 이론적인 측면을 더 발전시켰다고 볼 수 있는가? 교회의 순수성에 있어서 공적으로 드러난 잘못보다 드러나지 않은 잘못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공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잘못을 범한 죄인이 그 자체로 교회의 품에서 제외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결국 도나투스파는 이러한 질문에 명쾌한 대답을 주지 못하고 편협한 사고에 머무르게 된다. 즉 부분에 치우친 교회론을 전개함으로써 교회를 아프리카로 제한해 버리는, 즉 협소한 교회상을 드러내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들은 가톨릭이라는 단어가 보편성을 띠기보다는 순수성, 거룩함, 성사의 완전한 소유라고 봄으로써 그들 자신이 설정하고 발전시킨 이론이 자체적으로 설득력을 잃게 된다. 이것이 도나투스파의 이론이다. 이 이론은 교회와 성사 집행의 유효성에 관한 오류로 요약될 수 있다. 신학적으로 매우 빈약한 이론을 지니며 다른 이단이 때로는 로마를 반대하는 민족 저항주의적인 성격을 띤 반면 이 이론은 그렇치도 못하였다.
313년 이후, 도나투스파들은 로마 교회와의 마찰을 중재해 주도록 콘스탄틴 황제에게 요청하였다. 이것은 종교적 질서의 문제에 세속의 권력이 개입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들은 후에 이 점을 후회하게 된다. 그 동안 콘스탄틴 황제는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중재에 나서게 되었고, 그 해 10월 2일 멜키아데스(Melchiades, 310~314)교황 때 라테란에서 첫 번째 교회 회의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체칠리아누스를 반대하여 제소된 모든 고발이 제대로 증명되지 못하였고 평화를 위한 여러 가지 조처가 제시되었으나 도나투스파들은 이를 모두 거절하고 황제에게 다시 조사를 해주도록 청원하게 되었다. 다시 이루어진 조사에서도 펠릭스 주교가 배교자가 아니었음이 증명되자, 이러한 모든 결정에 도나투스파가 강하게 반발하였다. 콘스탄틴 황제는 316년 밀라노에서 도나투스주의 추종자들을 단죄함으로써 체칠리아누스가 무죄임을 암시적으로 드러내며 힘으로 굴복시킴에 따라 많은 추종자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로부터 도나투스파는 서서히 몰락하였는데 그 결정적 원인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도나투스파 내부의 분열이다. 372년경 로마 황제권을 찬탈하고자 피르무스를 지지한 자들의 이탈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별로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였고, 392년에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극한주의를 추종하는 100명이 넘는 주교들이 새로운 이단을 형성한 것이 치명적이었다. 두 번째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영향과 활동이다. 370년부터 이단에 맞서서 이성과 사실에 입각한 논리를 전개하기 시작한 그는, 유화적인 면과 논리적인 면을 보이면서 흩어진 많은 이들을 모았다. 특히 411년에 열렸던 카르타고 교회 회의에서는 가톨릭과 도나투스파가 한자리에 모여 3일 동안 열띤 논쟁을 벌였는데, 황제의 특사인 마르첼리누스(Mar-cellinus)가 도나투스주의를 단죄함으로써 많은 도나투스 추종자들이 교회에 다시 들어오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이단의 수가 줄어들기는 하였지만 7세기까지 계속되다가 아랍인들의 아프리카 침공으로 완전히 몰락하였다.
(→ 아우구스티노 ; 콘스탄틴 대제)
※ 참고문헌  A.G. Hamman, Les martyres de la grande persécution, Paris, 1979, pp. 59~641 W.H.C. Frend, Martyrdom and persecution in the Early Church. A study of a conflict from the Maccabees to Donctus, Oxford, 1965/ J.P. Brisson, Autonomisme et christianisme dans l'Afrique romaine de Septime Sévère a I'invasion vandale, Paris, 1958/ S. Lancel, Actes de la conférence de Carthage en 411, Sch 104~105, Paris, 1972. 〔金泰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