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1821 ~ 1881)

Dostoevsky, Fyodor Mikhailov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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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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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

러시아 소설가. 저널리스트. 1821년 모스크바에서 자 선 병원 의사인 미하일 안드레예비치의 아들로 태어났 다. 시골 마을 사제의 아들이었던 그의 아버지 미하일은 이후 귀족 후손의 칭호를 받고 툴라현의 작은 마을에 영 지를 얻어 정착하였다. 어머니 마리야 표도로브나 네차 예바는 상인의 딸로, 엄격하고 난폭한 성격의 아버지와 는 달리 매우 신앙심이 깊었는데,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런 어머니로부터 신앙적인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에 이 미 복음서와 카람진(Karamzine)이 쓴 러시아 역사를 읽었
다.
1833년 드라슈코 프 기숙 학교에 입 학하였던 도스토예 프스키는 1837년부 터는 체르마크 사립 기숙 학교에서 공부 했다. 이곳에서 그 는 항상 창백한 얼 굴로 무언가를 진지 하게 생각하는 학생 이었으며,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았 다. 이 무렵 그는 호
머, 세익스피어, 볼테르, 괴테, 쉴러 등과 같은 외국 작 가들의 작품과 카람진, 푸시킨, 레르몬토프, 고골 등과 같은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을 즐겨 읽었다.
1837년에는 폐결핵으로 어머니 마리야가 사망하였 고, 도스토예프스키가 존경하던 시인 푸시킨도 결투로 인해 사망하였다. 이 두 사람의 사망 소식은 그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한편 그의 아버지는 아내가 죽은 뒤, 도 스토예프스키와 그의 형을 페테르스부르크 공병 학교에 입학시켰다. 동료들과는 달리 항상 자기 자신에 몰두해 있었으며, 늘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소외된 존재였 던 그는 그곳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1843년 이 공병 학교를 졸업하고 페테르스부르크 공병단 제도국에 배치되었으나, 1844년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육군 중 위로 제대하였다.
1844년 도스토예프스키는 프랑스 작가 발작의 《예브 게니 그랑제》를 번역하였고, 1845년 자신의 최초의 장 편 소설 《가난한 사람들》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하 였다. 이후 도스토예프스키는 《분신》(1846), 《여주인》 (1847), 《백야》(1848) 등의 작품을 저술하였다. 한편 1846년 처음으로 간질 발작 증세가 나타난 후, 평생 동 안 간질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육체와 영혼을 괴롭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847년부터 페트라셉스키(Petra- chevski)가 주관하는 사회주의 서클에 참여하여 농노제의 폐지, 검열 제도의 철폐, 그리고 재판 제도의 개혁을 요 구하는 토론에 가담하였다. 그러던 중 1849년 페트라셉 스키 서클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자 동료들과 함께 체포 된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사형 집행 직전, 황 제의 특사에 의해 감형되어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게 되었다. 그에게 4년 간의 유형 생활은 큰 고통이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인식을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형 직 후 병사로 근무하던 시절 그는 마리야 이싸예브나라는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 1857년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하 였다.
1859년 모든 형기를 마치고 페테르스부르크로 돌아 온 그는 활발한 문학 활동을 재개하였다. 그는 평론가이 자 소설가였던 형 미하일과 함께 잡지 《브례마》(Vremya) 와 《에포하》(Epokha)를 발간하였으며, 시베리아 유형 생
활의 경험을 반영한 《죽음의 집의 기록》(1861~1862)과, 인간 심리의 본능적 · 비이성적인 면을 다룬 《지하 생활 자의 수기》(1864)를 발표하였다. 1862년 처음으로 외국 여행을 한 그는 독일 · 프랑스 · 스위스 · 이탈리아 · 런던 을 방문하였고, 런던에서는 게르첸과 만나기도 하였다. 이 서구 여행의 체험을 바탕으로 《여름의 인상에 대한 겨울의 메모》(1863)라는 글을 저술하였는데, 여기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서구 문명과 제도를 날카롭게 비판하 였다.
1864년 아내와 형의 잇따른 사망으로 실의에 빠진 도 스토예프스키는 그 슬픔을 달래기도 전에 출판 사업을 하던 형이 남긴 거액의 부채를 떠맡아, 부채를 갚고 친척 을 부양하기 위해 집필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 1867년 두 번째 아내 안나와 결혼하고, 채권자들을 피 해 외국으로 떠났으나 이 4년 간의 외국 생활도 도박으 로 인해 궁핍하기만 하였으며, 그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죄와 벌》(1866), , 《백치》(1868) 《악령》(1871~1872) 등과 같은 대표작을 저술하였다. 한편 외국 생활 동안 그는 디 킨스, 휴고, 졸라, 호프만 등과 같은 유럽 작가들의 영향 을 받게 되었다.
귀국 후 도스토예프스키는 잡지 《시민》의 편집장으로 잠시 활동했으며, 《미성년》(1875), 《작가의 일기》(1876) 불후의 걸작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완성하였다. 폐기종을 앓아 왔던 그는 모스크바의 푸시킨 동상 제막
식에서 기념 강연으로 명성이 절정에 이르게 되었을 때, 안타깝게도 간질, 폐기종, 폐결핵 등의 병이 악화되어 1881년 1월 숨을 거두었다. 현재 페테르스부르크의 알 렉산드르-네프스가야 수도원의 치흐빈스코예 묘지에 묻 혀 있다.
〔작품 세계〕 《가난한 사람들》(1845)은 도스토예프스키 의 데뷔작으로, 이 작품을 통해 그는 문단에 널리 알려졌 다. 제목이 말해 주듯이 이 작품은 도시 빈민들의 삶을 소재로 하고 있는데 마흔이 넘은 하급 관리인 마카르와 고아가 되어 갖은 고난을 겪고 있는 불쌍한 처녀 바르바 라가 주고받는 감미롭고 순결한 편지를 통해, 작가는 가 난하고 학대받는 인간들에 대한 강한 애정과 연민을 보 여주었다. 바르바라에 대한 마카르의 사랑은 이성(異性) 에 대한 단순한 사랑이나 동정이 아니라 진실한 인간미 이며, 자기 희생의 정신이었다. 네크라쏘프와 벨린스키 는 이 작품을 절찬하였다. 특히 벨린스키는 고골의 《외 투》와 이 작품을 비교하면서, 삶의 부조리를 보여 주는 비판적 사실주의 작품으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도스토예 프스키는 고골의 테마를 반복하여 사용하지 않았고, 휴 머니증적인 측면에서 또 심리적인 측면에서 다루고 있 다.
두 번째 작품인 《분신》(分身, 1846)에서 도스토예프스 키의 예술 세계는 더욱 성숙해 갔다. '분신' 의 테마는 호 프만과 같은 독일 낭만파 작가들이 즐겨 사용하였던 것 으로, 그들이 '분신' 의 테마를 철학적인 의미로 사용하 였다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심리학적 의미로 사용하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작품의 부제를 '성 페테르스부르크 서사시' 라고 붙였는데, 이것은 고골의 '페테르스부르크 소설들' 과의 연관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주인공 골라드 킨의 분신을 통해 작가는 페테르스부르크를 지배하고 있 는 관료주의를 비웃고, 그러한 공간 속에서 잉태되는 심 리적 부작용을 보여 주었다. 작품 속에서 작가는 페테르 스부르크를 소외된 공간, 인간적 접촉이 결여되어 있으 며, 기능에 의해 인간이 평가되는 새로운 러시아의 수도 로 묘사하였다. 이후 작품들 속에서도 페테르스부르크라 는 도시는 문화적 상징으로 등장했다. 《여주인》(1847) 《백야》(1848) 또한 대도시의 밑바닥에서 숨쉬고 있는 고 독한 영혼의 내적 생활과 그러한 영혼의 환상과 몽상을 보여 주고 있다.
1849년에 페트라셉스키 서클 사건으로 체포된 후, 1859년 페테르스부르크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10년 간 의 시베리아 유형 기간은 그의 작품 활동에는 공백기였 지만, 그에게 있어 귀중한 시간이었다. 그는 유배 생활을 통해 민중과 접하게 되었고, 유배 생활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깊은 종교적 인간으로 변해 있었다. 도스토예프스 키는 유배 생활의 경험을 내용으로 하는 《죽음의 집의 기록》과 《지하 생활자의 수기》를 1861년과 1864년에 각각 발표하였다.
시베리아에서의 강제 노역 경험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 《죽음의 집의 기록》은 자신이 매일 함께 생활하였 던 죄수들과의 접촉을 통해 받은 인상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작품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순순히 체념한 평민들 이야말로 민중의 진정한 대변인이며, 비록 죄수이지만 러시아 농민의 강하고 소박한 신념을 아직도 저버리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하 생활자의 수 기》는 그 당시 체르니세프스키가 발표하였던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작품에 대한 반박의 성격이 강하다. 인간 의 이성에 의한 이상 사회의 건설과 사회 개조의 가능성 을 주장하였던 체르니셰프스키에 반하여, 고립된 채 공 상과 상상으로 소일하는 주인공을 통해 인간의 본성이란 비합리적이고 복합적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즉 인 간은 본질적으로 선한 존재가 아니며, 한쪽에 악의 요소 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에게 있어 이성에 의 한 이상 사회는 결국 "수정 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작품 속에서 제기하고 있는 인간 내부에 공존하는 모순 된 두 개의 요소—이성과 본능, 선성과 잔인성, 인내와 반항 의식, 우월감과 열등감의 이중적 성격—는 이후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같은 작품들 속에서도 나타난다.
1864년 이후 도스토예프스키는 첫 아내의 죽음과 형 의 죽음, 그리고 잡지사의 경영난 등으로 고통을 받았다. 이 시기 그가 겪은 경제적 궁핍은 그를 창작에 몰두하게 하였고, 따라서 《죄와 벌》, 《백치》, 《악령》 등과 같은 걸 작들이 이 시기에 저술되었다.
《죄와 벌》(1866)은 라스콜리니코프라는 한 젊은 대학 생의 살인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그는 비범인 (非凡人)에게는 범죄란 있을 수 없다는 초인 사상에 입 각해 과연 자신이 초인 계층에 속할 수 있는지를 실험해 보기 위해 탐욕스러운 전당포 주인 노파를 살해하지만, 결국은 소냐라는 청순한 창녀의 설득으로 자수하고, 그 녀의 사랑과 헌신을 통해 새로운 삶을 찾는다는 내용이 다. 작품의 제목이 의미하는 바처럼 《죄와 벌》에서 도스 토예프스키는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여, 무한한 자유를 얻고자 하는 한 젊은 대학생의 자기 인식을 향한 여정을 보여 준다. 즉 자유의 길은 쉽게 죄에 이르게 되고 쉽게 시련과 고통에 빠지게 되나, 죄를 범한 인간은 그 죄에 대한 고뇌와 고통을 통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마침내 속죄로 자유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죄와 벌》 에서도 페테르스부르크라는 도시는 심리적으로 인간이 소외된 도시로 나타나는데, 그곳의 찌는 듯한 더위, 습 기, 더러움은 주인공을 정신적으로 병들게 한다고 묘사 하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868년에 또 하나의 거작 《백치》를 발표하였다. 이 소설은 그가 유럽 여행을 하던 중, 빈곤 과 간질 발작에 시달리면서 완성한 작품이다. 도스토예 프스키가 이 작품을 집필한 동기는 아름다운 긍정적 인 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였는데, 그는 작품 속에서 허무 주의와 물질 문명의 폐해에 빠져 있던 당시의 러시아 사 회를 구원할 구원자의 형상으로서, 주인공 므이시킨을 등장시킨다. 그러나 조화와 화해를 초래할 아름다운 인 간 므이시킨의 패배로 끝이 나는 이 작품을 통해 도스토 예프스키는 세상의 허위, 위선에 대한 반항과 절규를 표
현하였다.
1872년에 발표한 《악령》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혁명 사상과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시대적으로 혁명 운동의 기운이 고조되고, 사회적 갈등이 첨예화된 시기에 발표한 이 작품 속에서 도스토 예프스키는 그 당시의 혁명 운동과 유물론 사상, 사회주 의 사상을 비판하고 공격한다. 작가는 표트르의 혁명 사 상, 키릴로프의 인신론, 샤토프의 러시아 메시아주의, 스 초판의 자유주의 사상 등, 그 당시의 정신을 대표하는 여 러 사상들을 신봉하는 주인공들이 파멸의 길로 빠져 가 는 모습을 통해, 러시아 사회의 정신적 공허 상태, 혁명 조직과 사상의 병리를 지적하였다.
1880년에 도스토예프스키는 불후의 대작인 《카라마 조프가의 형제들》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에는 도스토예 프스키의 종교관이 잘 나타나 있으며, 《죄와 벌》에서 이 미 제기하였던 인간의 자유의 문제를 더욱 심도 있게 다 루고 있다. 탐욕적인 표도르 카라마조프와 그의 세 아들 드미트리, 이반, 알료샤를 중심으로, 유산 상속과 그루센 카라는 여인을 둘러싸고 벌어진 존속 살인을 통해 신과 인간의 문제를 다룬 이 작품 속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유의 개념을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첫 번째 자유는 선악 선택의 자유로 이것은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고 난 후, 인간에게 벌로서 짐 지워진 자유이다. 두 번 째는 신의 품안에서의 자유, 종교적인 자유를 뜻한다. 인 간 정신의 자유의 문제, 신의 문제를 그는 대립적이고 융 합되지 않는 목소리들을 통해 표현하였고, 이러한 도스 토예프스키의 소설을 가리켜 바흐찐은 다성악적 소설이 라고 하였다. 즉 독립적이고 융합되지 않는 다수의 목소 리들과 의식들, 그리고 각기 완전한 가치를 띤 목소리들 의 진정한 다성악(polyphony)이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핵심적 특성이라는 것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종교적, 그리스도교적 주제는 크게 두 개의 대립하는 목소리로 나타나는데, 이 반의 목소리로 표현되는 대심문관의 논리와, 알료샤의 수기 속에서 메아리치는 조시마 장로의 사상이 바로 그 것이다. 이반은 신이 창조한 세계는 고통과 좌절로 가득 차 있고 신 존재는 인간 이성이 만든 관념에 불과하며, 지상에서의 조화, 즉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용서하며, 용서받는 조화로운 세상을 부정한다. 이러한 이반의 사 상은 작품 속에 삽입된 이반의 극시 <대심문관>에 잘 나 타나는데 16세기 스페인의 세빌리아 지방에 재림한 예 수를, 자신의 논리로써 힐책하는 대심문관은 예수가 인 간에게 부여한 선악 선택의 자유로 인해 인간은 오히려 고통을 겪게 되었으며, 따라서 자신은 이러한 자유를 인 간들로부터 빼앗고, 그 대신 행복을 가져다 주었노라고 주장한다. 반면 그리스도가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 그리 고 진정한 행복의 개념은 조시마 장로의 목소리에 의해 표현된다. 조시마 장로의 사상과 그의 일생에 관한 이야 기는 알료샤의 수기 속에 나타나는데, "모든 사람이 모 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말 속에 조시마 장로의 사상이 내포되어 있다. 그는 지상의 모든 고통에 대해 우리 모두
가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조시마 장로는 신분이 낮고 가난하다고 남을 학대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복음서의 가르침에 따라 스스로 모든 사람들의 하인이 되라고 설 교한다. 또한 조시마 장로는 자유를 인간의 욕구 충족으 로 보지 않는다. 그는 인간이 자유를 욕구 충족으로 왜곡 시킴으로써 자유를 얻는 대신 욕망의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으며, 하느님을 섬기는 대신 과학과 자신들의 이성 을 섬김으로써 죄악과 고통이 가득 찬 세상이 되어 버렸 다고 주장한다. 조시마 장로에게 있어 자유는 신의 품안 에서의 자유였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도스토 예프스키는 자신의 긍정적인 종교관을 보여 주면서, 신 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없이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믿음 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영향] 농노제적 구질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적 제관 계가 대신 들어서려는 과도기의 러시아에서 그 시대적 모순을 고민하며, 그 고민하는 자신의 모습을 전적으로 작품에 반영하였던 도스토예프스키가 사망한 후, 세계의 사상가들과 문학 비평가들은 그를 다양한 각도에서 평가 하였다. 러시아의 신비주의 철학가 블라지미르 솔로비예 프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심오한 사상가로 평가하였다. 1900년대의 상징주의 비평가 메레즈코프스키는 그를 인 간 영혼을 투시한 종교적 명상가로 평가하였다. 이후 유 럽에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을 프로이드적 심리 분석의 통찰력을 가진 심리 소설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한편 1929년 미하일 바흐찐은 '도스토예프스키 시학의 문제' 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세계를 독립적이고 융 합하지 않는 다수의 목소리들과 의식들의 다성악이라고 특징지었다. 이처럼 다양한 평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문 학 세계의 다면성과 이원적인 모순성, 난해성과 신비성 을 단적으로 입증해 주는 것이다.
평생 동안 그를 괴롭혔던 간질병, 사형 직전에 구사일 생으로 목숨을 구함으로써 느꼈던 죽음의 심연, 지옥과 같았던 시베리아 유형 생활, 궁핍한 삶 등 이러한 고통과 번민의 생애를 통해,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 내부에 존 재하는 모순성을 발견하였다. 그러한 내적 모순성은 그 의 작품 속에서 때로는 본능과 이성의 모순으로, 때로는 신성과 악마성의 모순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한편 그의 삶과 작품 세계에 있어, 신의 존재와 신앙의 문제 또한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살 았던 시기는 그리스도교 문화가 위기에 빠진 시기였으 며, 개인주의적 방종과 그리스도교적 진리와의 충돌은 1860년대와 1870년대 도스토예프스키의 여러 대작에 서 심오하게 다루어졌다. 그는 서구 자본주의와 사회주 의 모두를 신에 대한 인간의 배반이 빚어 낸 결과라고 결 론지었다. 즉 유럽의 문명은 신의 길, 즉 신인(神人)을 거부하고 그 대신에 인간의 우상화, 인신(人神)을 선택 하였다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상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의 여러 사상가들과 문학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고 그 명성 은 20세기에 절정에 달하였다. 블라지미르 솔로비예프 와 더불어 그는 20세기 초 러시아 지성인 사이에서 종교
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하였다. 20세 기 초에 사상을 정립하고 혁명 이후에는 해외에서 계속 저술 활동을 폈던 베르자예프, 불가코프, 메레즈코프스 키 등과 같은 러시아 관념 철학자들과 종교 사상가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또한 샤르트르나 카뮈와 같은 서구의 실존 사상가들도 그에게 서 영향을 받았다. (→ 러시아)

※ 참고문헌  Andrej Walicki, Trans Hilda Andrews-Rusiecka, A History of Russian Thought from the Enlightment to Marxism, Stanford, Calif., Stanford Univ. Press, 1979/ C.A. Moser, The Cambridge History of Russian Literature, Cambridge Univ. Press, 1992/ Donald Fanger, Dostoevsky and Romantic Realism,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 Press, 1967/ Roger B. Anderson, Dostoevsky-Myth of Duality, Gainesville, University of Florida Press, 1986/ Victor Terras, A History of Russian Literature, New Haven and London, Yale Univ. Press, 1991/——, Handbook of Russian Literature, New Haven, Conn., Yale Univ. Press, 1985/ ——, A Karamazov companion, Madison,Winsconsin, University of Winsconsin Press, 1981. [金炫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