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체코슬로바키아, 서쪽으로는 프랑스와 베넬룩스 3국, 남쪽은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북쪽은 북해 · 덴마크 · 발 트해와 접하고 있으며, 면적은 35만 6,910k㎡이다. 수 도는 베를린(Berlin) , 인구는 약 8,021만 명(1993). 인구 의 대부분은 게르만족이고, 종교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 트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로 남부와 서부에 분포한 가 톨릭 신자수는 2,859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35.6%를 차지하고 있다. 3세기경에 처음으로 그리스도교가 전래 되었으며, 그 뒤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점차 이교(異 敎)로 전락하였으나 6세기에 다시 프랑크와 영국으로부 터 그리스도교가 전래되었다. 그리고 종교 개혁에 의해 독일은 프로테스탄트와 소수의 가톨릭으로 분리되었는 데,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회의와 1648년 베스 트팔렌 강화 조약에 의해 이를 해결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과 독일 민주 공화국 (동독)으로 분리되었다가 1990년 10월 3일 마침내 통일 하였다.
〔초기~종교 개혁〕 로마 제국 시기 : 로마 제국은 활발 한 정복 활동으로 벨지움 지역, 라인 강 지역을 로마화하 였고, 후에 새로이 정복된 다뉴브 강 남쪽 지역인 라에시 아(Raetia)와 노리쿰(Noricum) 지역도 로마화하였다. 그 결과 이 지역들은 로마 제국 내의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 로 그리스도교의 선교 지역이 되었다. 2세기에 걸친 평 화 기간 동안에 그리스도교는 여러 곳에 선교의 발판을 마련하였는데, 이는 그리스도교인들의 무덤, 순교자들의
묘, 순교 기념물, 비문 등에 의해 명백히 입증된다. 3세 기 말과 313년 밀라노 칙령 이후 로마 제국의 전 영토 내에서 그리스도교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쾰른, 트리어, 마인츠, 밀라노, 아퀼레이아 등 여러 곳에 거대한 교회 조직이 만들어졌으며 작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들도 존속 하게 되었다.
게르만 민족들의 개종 : 이들 지역에서 로마화된 게르 만인들은 3세기 이래 남동쪽으로 이동을 계속해 왔던 대 (大)게르마니아(Germania Magna)의 이교 부족들과 적대 관계에 있었다. 로마 제국 내로 깊숙이 이동한 민족들은 그리스도교와 그 문화의 영향을 피할 길이 없었다. 이들 민족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교와 접하게 된 것은 서고트 족이 다뉴브 강 저지대를 따라 국경 분쟁을 일으키고 있 을 무렵이었다. 341년 이후 고트인들의 주교 울필라스 (Ulfilas)는 당시 서고트인들이 아리우스파 황제와 동맹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부족민들을 아리우스파의 그 리스도교로 인도하였다. 아리우스파는 스페인 지역의 서 고트족에 남아 있었는데, 이들로부터 동고트족의 수에 비 · 반달 · 롬바르드 · 부르군디족 등의 다른 민족들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동고트족과 반달 왕국은 6세기에 멸망 하였고, 서고트족과 롬바르드 왕국은 600년경에 개종하 였다.
5세기 말경, 골(Gaule, 현재 프랑스) 지역에서 클로비스 (Clovis)의 세례를 계기로 가톨릭으로 개종한 프랑크족들 은 로마의 지배를 완전히 몰아냈다. 8세기에 부르군디 · 서고트 · 수에비족 등이 빠른 속도로 프랑크 왕국에 흡수 되었고, 알라만 · 바이에른 · 튀링건 · 작센족 등도 프랑 크족의 군사 및 선교 활동의 결과로 그리스도교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프랑크 왕국은 켈트족 및 다른 선교 사들에게는 선교의 기반이요, 출발점이 되었다. 6세기 초 바이에른인들, 700년경에 동프랑크 왕국, 그리고 7 세기에 알라만족들은 프랑크 및 켈트족 선교사들의 노력 으로 완전히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조 직은 '독일인의 사도' 인 성 보니파시오(St. Bonifatius)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루어지게 되었다.
다른 앵글로-색슨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독일 지역 에서의 선교 활동과 교회의 조직은 보니파시오의 노력으 로 거의 완성되었다. 그는 교황에게 충성할 것을 선언하 였고 프랑크의 궁재(宮宰)로부터 지지를 얻었으며, 독일 지역에서 대주교와 교황 사절로서 현재도 존재하는 교구 조직을 바이에른에 만들었다. 프랑크 교회의 개혁가로서 교회 재산의 국유화, 주교와 사제들의 도덕적 타락을 막 기 위해 노력한 그는, 헌신적으로 선교 지역들을 자립시 키고 프랑크 교회를 부활시켰으며 프랑크인들로 하여금 스스로 게르만족들 중에서 그때까지 이교도로 남아 있던 색슨족들을 개종시키게 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일련의 남 · 여 수도원들이 설립되었다.
카롤링거 왕조과 오토 제국 시기 : 보니파시오에 의해 만들어진 메로빙 왕조의 교회 지배, 그리고 로마와의 결 속은 카알(Karl, 768~814) 대제의 제국 교회의 기초가 되 었다. 교황 레오 3세에 의해 800년에 황제로 대관된 카
알 대제는 마인 강 상류와 알프스 지역의 슬라브인들과 색슨인들에게까지 선교사들을 파견하였고, 이교인들로 부터의 신앙 수호 · 교회의 행정 정비 · 문화 활동의 진작 에 주력하였다. 각 지역에 주교구와 대주교구들이 만들 어졌고, 카알 대제가 주교들을 그의 국왕 사절로 이용함 으로써 주교들의 지위가 강화되었다. 그는 스스로 공의 회에서 교리 문제(삼위 일체 논쟁, 성화상 논쟁)에 관한 결 정을 내렸으며 전례와 수도원의 규칙을 통일하였다. 무 엇보다도 카알 대제는 정신 생활의 진작과 성직자와 대 중의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수많은 법령들 을 통해서 설교, 주일의 준수, 대성당과 수도원 및 본당 부설 학교를 준비하였다. 그의 로마 황제로서의 대관은 로마 제국의 부활을 의미하였으며 독일을 유럽의 종교 적 · 문화적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앞으 로 수세기에 걸쳐서 독일이 교권과 속권 간의 갈등에 보 다 깊숙이 개입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카알 대제가 사망하자 내란이 계속되어, 843년의 베 르뎅(Verden) 조약에 의해 동프랑크와 서프랑크는 결정 적으로 분열되었다. 갈리아를 중심으로 라틴적 전통이 강한 서프랑크 즉 프랑스와, 게르만적 전통이 강한 동프 랑크 즉 독일이 제각기 독립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911년에 루드비히 왕이 죽자 카롤링거 왕조의 혈통이 끊어지고, 그 해에 동프랑크 제후들의 추대에 의해 프란 켄 공(公) 콘라트가 왕위에 올랐다. 비로소 독일 국가는 독일인이 스스로 그들의 왕으로 뽑은 콘라트 1세의 즉위 로 탄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콘라트 사망 후 하인리히 1세가 즉위하여 작센 왕조가 일어나고, 936년 하인리히의 아들 오토 1세(Otto I , 936~973)가 모든 제후들의 동의를 얻어 왕위에 올랐 다. 오토 1세는 제후들에 의한 국내 분립을 극복하고 왕 권을 강화하기 위해 교회와 왕권을 결합하여 교회를 왕 권의 지주로 삼는 제국 교회 정책을 실시하였다. 한편 교 회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로마 교황과의 제휴가 필요했기 때문에 교황의 요청에 의한 원정을 포함하여 2차에 걸친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오토 1세는 962 년에 교황으로부터 로마 황제로 대관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신성 로마 제국' 의 시작이다. 그 후 13세기 전반 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황제 시대로 불린 독일 민족 우위 의 황금 시대가 지속되었다.
한편 소위 카롤링거 문예 부흥은 비록 그것이 독창적 이거나 예술적인 면에서 뛰어나지는 못하였으나 고대의 문화를 부흥시키는 중요한 운동이었다. 알쿠인(Alcuin)의 감독 아래 있던 아헨(Aachen)의 궁정 학교와 투르(Tours) 의 수도원 학교는 수세대 동안 관리들과 교회 지도자들 의 양성 기관이었다. 수도원에서는 가치 있는 고전을 필 사하였으며 당대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수도자들이었다. 또한 신학적으로도 예정론에 바탕을 둔 아우구스티노의 이론을 보호하고자 하였으며, 삼위 일체에 관한 논쟁을 해결하려는 독자적인 시도가 있었다.
독일은 전례와 예술적인 면에서도 공헌하였지만, 법률 분야에서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많은 기부금으로 축적 된 교회의 재산은 필요시 왕이 사용할 수 있는 특별 재산 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국왕의 영향력은 주교들과 고 위 성직자들이 거대한 봉토의 관리자로서 점차 정치적 책임과 주권을 부여받아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처럼 보 였다. 이러한 발전은 오토 1세 치하에서 절정에 달하였 다. 이교적 공국(公國)들의 지방 분권적 경향들과의 투 쟁에 있어서 국왕은 주교들과 대수도원장들의 확고한 지 지를 얻었다. 국왕은 그들에게 국왕의 특권을 관대하게 부여하였다. 특히 백작들의 칭호와 권위를 부여하고 그
들에게 왕국의 중요한 직책을 위임하였으며, 명백히 제 한적이긴 하나 경제적 · 군사적 의무의 실행을 요구하였 다. 세속 재산과 주권을 가진 주교에 대한 서임권과 그에 부수되는 교회 재산의 봉건화는 국왕에 의한 영적 권위 의 상징물(지팡이 또는 반지)의 부여로부터 기인되었다. 그러한 서임은 교회의 재산과 봉토의 지배권을 시사할 뿐 아니라, 영적 권위의 독립을 부정하고 국왕의 특권으 로부터 그 권위를 도출하는 것으로 보이게 함으로써 교 회가 국왕에게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신성 로마 제국 : 962년 신성 로마 제국이 탄생된 후 카알 대제의 후계자들이 제국의 통일을 계속 유지하지 못하여 4왕가, 즉 작센(Sachsen) · 잘리어(Salian) · 호헨슈 타우펜(Hohenstaufen) · 합스부르크(Hapsburg) 가(家)에 의 해 차례로 통치되었다. 이탈리아와의 결합, 로마의 지배 로 구현되는 소위 '황제 정책' 은 제국 교회 정책과 더불 어 역대 독일 국왕들의 전통적인 정책이 되었다. 오토 대 제는 작센 왕가의 중요한 통치자들 중 한 명으로 그 동안 유지되어 온 로마 교회와 제국 간의 일치에 긴장감을 조 성하고 주교들을 그의 주요한 지지자로 만들었다. 황제 정책은 잘리어 왕가의 하인리히 3세(1039~1056) 때에 절 정에 달하였다. 그는 로마에 대한 과격한 간섭을 일삼아, 4명의 교황을 바꿔 세움으로써 교황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 대인 하인리히 4세(1056~ 1106) 때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의 사이에 성직 서임권 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하인리히 4세로 하여금 교황에게 파문의 사면을 받도록 만든 '카놋사의 굴욕' 이다. 성직 서임권 투쟁은 그 뒤 1122년의 보름스 정교 조약에 의해 타협되었으나, 황제의 권위는 크게 후 퇴하여 제국 교회 정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호헨슈타우펜 왕조의 프리드리히 1세(赤髮帝, Barba- rossa, 1152~1190)가 황제적 세계 지배 이념을 다시 강력히 추진하려 하였을 때, 다시 속권과 교권 간의 격투가 일어 났다. 그는 알렉산델 3세 교황(1159~1181)과 대항하였고 투쟁은 1177년까지 20년이나 계속되었다. 교권과 속권 의 마지막 대결은 프리드리히 2세(1215~1250)와 교황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황제는 약속한 십자군 운동을 이행 하지 않았고 오히려 남이탈리아 정복 계획에 열중하여 교황령을 위협하였다. 때문에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은 1228년과 1239년 두 차례 그를 파문하였다. 사실 황제 의 목적은 로마를 정복하여 제국의 수도로 만드는 것이 었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곧 교황직에 대한 정면 도전이 었다. 이후 로마 교회와 호헨슈타우펜 왕가는 수차례 접 전하였다. 그 결과 호헨슈타우펜 왕가는 완전히 쇠퇴하 였고 로마 교회도 역시 크게 세력이 약화되었다. 대신 이 제는 프랑스가 유럽의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 다.
교회와 국가 사이의 이와 같은 분쟁에도 불구하고 독 일 교회는 큰 생명력을 보여 주었다. 그리스도교는 독일 로부터 덴마크 · 스웨덴 · 아이슬란드 · 보헤미아 · 헝가 리 그리고 카렌타니아로 전파되었다. 엘베 강 유역의 슬 라브족에 대한 선교는 오토 1세에 의해서 추진되었고 호
헨슈타우펜 가(家) 치세에 이르러 성공하였다. 2차 십자 군 원정 이후, 독일의 지배자들은 1세기 이상 십자군을 주도하였으며 속인 및 성직 제후들의 많은 수가 이에 열 정적으로 참여하였다.
독일의 수도회들은 문화와 종교 생활을 유지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시토회 수도자들과 탁발 수도회 들은 빠른 속도로 전 독일에 퍼졌다. 시토회 수도자들과 프레몽트레 수도자들은 북쪽과 북동쪽에서 식민지 개척 과 개발에 특별한 인정을 받았다. 번영하는 도시들에서 는 탁발 수도회들(도미니코회, 프란치스코회)이 영혼의 구 제를 위해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그들은 성공적으로 청 빈 운동을 지도하여 당시 부상되던 이단과 급진주의들을 오히려 교회 안으로 이끌어 들였다. 대 알베르토, 토마스 아퀴나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강의를 했던 쾰른의 도미니코회 연구 총본부는 새로운 철학과 신학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종교 개혁 이전의 위기 : 서구 대이교 동안 거의 전 독 일은 로마 교황을 지지하였다. 한동안의 중립 이후 황제 와 선거후(選擧候)들은 교황 에우제니오 4세(1431~1447) 를 지지하였는데, 그는 그 보답으로 교황의 보호와 재정 적 강요들을 제한하려는 독일의 요구에 동의하였다. 빈 협약(1448)은 1803년의 '국유화' (seculaizaation)까지 계 속해서 효력을 가지고 있었다. 다음 수십 년 동안에 걸쳐 서 황제들과 교황들은 대부분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였 다. 프랑스와 대조적으로 독일은 더 이상 공의회 우위설 (conciliarism)의 교리를 촉진시키지 않았었다.
한편 교회의 진정한 개혁이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지만 공의회가 개혁을 수행하기에는 너무 미약하였 다. 여러 왕들과의 협약은 단지 몇 가지 문제를 해결하였 을 뿐, 오히려 더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후스파 군대 의 독일 침공 이후에 종말론적, 혁명적 사상들이 널리 유 포되었다. 다른 한편 교황권은 대 터키전의 긴급성에 완 전히 몰두해 있었고, 교회를 건축하고 장식하는 데 많은 돈을 소비하였다. 베네딕도회 회원들과 탁발 수도자들은
교회가 재산을 남용하는 것에 반대하고 개혁을 주장하였 다. 그러나 재속 사제들은 철저한 교육과 신앙적 훈련이 부족했고 축첩(蓄妾)이 확산되었다. 고위 성직자까지도 재산과 헌금 분쟁에 지나치게 개입했으며, 정치에 연루 되고 종종 완전히 세속적 생활을 영위하였다. 더구나 신 학은 다양한 학파들 사이의 분쟁에 몰두하였다. 유명론 (唯名論)의 부활과 더불어 신앙과 이성 사이의 중세적 조화의 파괴, 은총과 미사의 희생에 대한 교리가 약화되 었다.
그러나 많은 심각한 남용들에 반대하여 일어난 움직임 들은 비록 피상적이었지만 거대한 신앙의 부흥이었다. 수많은 새로운 교회가 도시와 농촌에 세워졌다. 새로운 인쇄 기술로 인해 기도서 및 교리서가 만들어졌고 성서 는 전체 혹은 일부가 독일어 번역판으로 인쇄되었다. 공 주 생활 형제회(The Brethren of the Common Life)은 특히 보 다 진보된 학교 교육에 헌신하고 깊은 신심을 나누고자 하였다. 묵주 기도와 삼종 기도 같은 새로운 형태의 기도 가 급격히 파급되었고 독일어 성가가 매우 열정적으로 불려졌다. 상류 사회에서는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이 새로운 과학 사상들을 신앙과 교회에 대한 충성과 연결 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종교 개혁 이전 시기의 신심은 너무나 주관적이었고 성직자들이 세속적 생활에 의해 오 염되어, 공식 기관으로서의 교회와 그 가르침으로부터 점차 분리되는 경향을 초래하게 되었다.
(1500~1789년) 호헨슈타우펜 왕조가 로마 교회와 성직 서임권을 두고 투쟁을 거치는 동안에 지방 제후들 의 세력은 점차 강대해져서 이른바 영방(領邦)을 차지하 고 국가 주권을 획득한 제후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들 은 왕권(황제권)이 강화되는 것을 기피하였고 마침내 호 헨슈타우펜 왕조가 단절되자 독일에는 황제가 없는 대공 위 시대(大空位時代)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1273년 스 위스의 소영주 합스부르크 가(家)의 루돌프가 즉위함으 로써 대공위 시대는 끝나고 15세기부터 제위가 세습되 어 16세기 초부터 독일은 유럽사의 중심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가의 세력 : 황제 막시 밀리안 1세의 손자들인 카알 5세 (1519~1558)와 페르디난트 1세(1558~ 1564)는 스페인-부르군디-합스부르 크 유산을 신대륙의 식민지와 함께 소 유하였다. 그 시기의 주요 외교 문제 는 발르와 왕가에 대한 독일의 반대였 는데, 1498년 이후 발르와 왕가는 이 탈리아에서 수위권을 위한 투쟁에 몰 두했으며 산발적 군사 원정을 통하여 제국의 서쪽 국경으로 침투했다. 15 세기 중엽 이래 제국의 동쪽 측면은 모스크바 제국과 투르크족의 끊임없 는 침입에 노출되어 있었다. 1495년 에는 대내적 개혁을 위해 최고 재판소 (supreme court)와 황실 재판소(imperial
chamber ofjustice)가 설치되었다. 영방 국가의 끊임없는 권력 신장은 제국의 중앙의 권위에 위험한 요소였으며 영방 국가의 조직화와 지방주의는 제국의 통제를 약화시 켰고 종종 그것을 완전히 질식시켰다.
종교 개혁의 필요성 : 이 시기의 종교적 · 지적 사상의 갈등은 화합될 수 없었다. 개인 신심은 강해졌지만 다른 한편 교회 생활에 있어서 놀라울 정도로 명백한 쇠퇴의 조짐들이 있었는데, 특히 신학적 열정의 감소와 많은 재 속 및 수도회 성직자들의 학문과 도덕의 부재가 나타났 다. 독일에서의 강한 반로마적 감정은 교황 레오 10세 (1513~1521)와 그의 계승자들이 철저한 교회 개혁을 계 속 지연시켰기 때문에 증대되었다. 1458년에 처음으로 구체화된 독일 국민의 불평은 아우크스부르크(1518) · 보 름스(1521) · 뉘른베르크(1522~1523) 의회에 의해서 반복 적으로 강화되었으며, 독일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대중들 에게 국민 감정으로 전달되었다.
마르틴 루터의 역할 : 이와 같은 교회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은 교회 개혁의 요소로 작용하여, 결과적으로 프로 테스탄트 개혁은 유럽을 포괄하는 운동이 되었다. 그것 은 정치적인 보장을 얻었으며 상당한 격려를 받았다. 마 르틴 루터의 친구들과, 후원자들인 현자(賢者) 프리드리 히(Friedrich the Wise)와 헤세의 필립 백작, 크리스토프 공 과 많은 다른 제후들은 영토 확장을 위해 종교적 힘을 이 용하였다. 광대한 교회 재산의 몰수는 권력 강화의 주요 수단이 되었다. 종교 개혁의 대중적 성격은 루터가 사회 적 해방을 실현하기 위해서 종교 개혁의 원리들로 인정 했던 농민들로부터 등을 돌리게 되면서, 결국은 농민 전 쟁에서의 패배와 더불어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
독일에서 종교 개혁이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분야는 언어와 학교, 민족 문화였다. 정신적 영역에서 그것은 많 은 지적 힘들을 자유롭게 하였고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 은 개인 양심에 의한 종교적 자유였다. 그러나 그것은 교 회 개혁의 원래 목적을 크게 달성하지는 못하였다. 왜냐 하면 광대한 지역(라인 공국들, 남부 독일)은 아직 가톨릭
신앙을 굳게 고수하고 있었으며, 개혁 운동 내부에 분열이 일어났 기 때문이다(츠빙글리, 칼뱅, 재세례파, 소시니아 파, 반삼위 일체파).
신앙적 논쟁 : 루터 와 멜란히톤(Melan- chthon)의 발자취를 따 른 운동은 멜란히톤 사 후에 곧 다른 그룹으로 나누어졌다. 그 후 세 대의 신학자들은 아리 스토텔레스 철학의 결 합을 위해 루터의 변증 법적 신학적 언어의 흔 적을 없애 버렸다. 이
것은 루터파의 정통 속에 교리의 스콜라적 견고함을 가 져왔다. 특별한 교회 제도의 형성과 기존 교회로부터의 종교 개혁의 교리적 고립은 루터의 날카로운 반교황적 논쟁에도 불구하고 점차 명백하게 되었다. 가톨릭측이 취한 대부분의 방어 수단은 시작부터 장애를 갖고 있었 다. 가톨릭측은 혁명적 사상에 대한 평가를 전반적으로 잘못하고 있었다. 1520년 로마로부터 요한 에크(J. Eck) 가 가져온 칙서 <주여 일어나소서>(Exsurge Domine)에서 루터에 대한 파문의 위협은 상황의 심각성을 분명히 해 주었다. 그러나 교황청에 의해 사용된 수단들은 교회 개 혁을 위한 긴급한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었다.
카알 5세 황제의 대응 : 16세기의 전반부에 가톨리시 즘을 옹호하는 주도권은 주로 카알 5세 황제와 가톨릭 제후들에게 있었다. 의회는 종교적인 문제를 종교 회의 또는 독일 국민 회의로 돌렸던 반면에 황제와 가톨릭 인 사들은 정치적 세력을 이용하는 그 운동을 억압하고자 하였다. 결과적으로 교회의 분파들 가운데 정당이 형성 되었고, 복음주의적 제후들은 토르가우와 슈말칼덴 동맹 에서 그들에게 활력을 주었다. 황제는 1530년까지 프랑 스와의 전쟁에서 제국으로부터 고립되고, 투르크인들에 의해 위협받고, 프로테스탄트의 지지에 의존하였다. 그 러나 작센의 모리츠가 이끌었던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의 배신으로 더 많은 양보를 해야 했는데, 그것은 처음에 파 사우 조약(Treaty of Passau, 1552)에서 그리고 다시 아우크 스부르크 종교 회의(1555)에서 교회의 현상태를 인정하 고 신앙 고백의 이중주의를 보증하였다.
영방 교회들 : 독일 제후들 사이에 공통적으로 수용된 기본적 원리인, '영주의 종교는 그 국민의 종교 (cuius regio, eius religio)는 그들로 하여금 루터주의 또는 가톨리 시즘을 그들이 통치하는 지역의 종교로서 선택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이것은 단지 두 개의 신앙 고백의 공존에 일 시적인 기초를 주었을 뿐이며 후에 종교 전쟁들에 의해 서 반복적으로 흔들리게 되었다. 종교 개혁에서 가톨리 시즘의 문학적 · 신학적 방어는 요한 에크, 요한 코클레 우스(Johannes Cochlaeus)와 같은 논쟁적인 신학자들에 의 해서 주도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 개혁의 근본적인 문제에 거의 침투하지 못하였고, 신앙 문제의 토론은 트 리엔트 공의회(1545~1563)가 가톨릭 사상을 각성시키고 개혁을 도입할 때까지는 무력하였다.
가톨릭의 각성 : 예수회의 꾸준한 노력은 독일에서 가 톨릭 신앙의 여러 가지 새로운 면들을 구축하였다. 가톨 리시즘이 부활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자각이 매우 강화 되어 점차 새로운 영감이 성장될 수 있었다. 그것은 전체 유럽 문화의 마지막 단계인 바로크 문화를 낳았다. 이러 한 내부의 영적 각성은 반종교 개혁 운동과 손을 잡게 되 었다. 그것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지도자는 바이에른의 알브레히트 5세(Albrecht V, 1550~1579)와 빌헬름 5세 (William V 1579~1597)였다. 또한 트리어의 야곱 폰 엘츠 (J. von Eltz)와 밖르츠부르크의 율리우스 에흐터 폰 메스 펠브룬(J.E. von Mespelbrunn) 등에 의해서 교회 정신이 새 로운 활력을 얻게 되었다.
30년 전쟁 : 제국 그 자체 내에서 종교적 정당들이 확 대되었다. 한편 새로운 신앙 고백인 루터주의는 정치적 맥락 내에서 제3의 신앙 고백인 칼뱅주의에 의해서 크게 약화되었는데 칼뱅주의는 특히 선거후 영토에서 정치적 영향력이 있었다. 16세기 말경 제국 체제는 무력화되었 다. 여러 신앙 고백에 의한 정치적 갈등들은 신앙 고백 조약으로부터 30년 전쟁의 재난으로 그들을 이끌었다. 30년 전쟁은 유럽 전역을 포함하는 세력 투쟁으로 확산 되었다. 유럽의 문화적 전통이 이 전쟁에서 파괴되지는 않았지만, 커다란 사회 경제적 쇠퇴가 그 후 수십 년 동 안 이어졌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정치의 중심은 제국 에서 지방으로 옮겨졌고 그것은 지역 주민들이 그 지역 제후들의 종교 선택에 의해 계속해서 영향을 받아야 한 다는 원리를 폐지하였다.
세속적 절대주의와 가톨릭 교회 : 베스트팔렌 조약은 제 영방(領邦)의 국가 주권을 승인하여 독일의 영방 체 제를 완성시켰다. 합스부르크 가는 오스트리아의 가령 (家領)을 확대하는 데만 전념하고 독일 제국 전체의 통 치를 소홀히 하였기에 영방 주권을 중심으로 하는 지방 분립의 경향은 날로 더하였다. 결국 합스부르크 가의 오 스트리아는 하나의 영방으로 전락하게 되었는데 그 오스 트리아와 패권을 다투게 된 것은 호엔졸렌 가의 프로이 센이었다. 브란덴부르크의 변경백(邊境伯) 호엔졸렌 가 는 17세기 초에 그로이센 공령(公領)을 상속받고 대선 거후 프리드리히 빌헬름(1640~1688) 때에 중산주의 경제 정책을 채택하는 한편, 부국 강병과 관료제의 정비에 주 력하였다. 1701년부터 프로이센 군주는 왕호(王號)를 허용받아 프로이센 왕으로 부르게 되었다. 계몽 전제 군 주로 알려진 그는 산업 입국에 힘쓰면서 행정 기구를 정 비하고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등 진보적인 치적을 올 렸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즉위 후 곧 오스트리아 계승 전 쟁과 7년 전쟁에 돌입하였는데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났 다. 이후 독일은 성격을 달리하는 두 국가, 즉 세력 기반 을 독일 밖에 두어 비독일적이며 가톨릭적이고 군주제적 인 오스트리아와, 독일적이고 프로테스탄트적이며 군국 적 · 관료적인 프로이센이 서로 대립하는 이원주의로 특
징지워진다.
계몽주의는 봉건 제도의 지적 몰락에 대해 프랑스와 영국보다 독일에서는 적게 영향을 미쳤다. 계몽주의는 그리스도교와 등을 돌리지 않고 그 도덕성을 인정하였 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적 신앙에 대한 교회의 주장을 거 부하였다. 반교회적 국가 개념은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 로 종교 문제에 있어서의 국가의 최고 권위를 강조했다.
엠즈(Ems) 국회에서 표현된 감독주의(監督主義) 운동 의 목표는 로마로부터 해방된 제국 교회가 아니라 주교 직의 재평가에 의한 교황의 권리와 주장의 축소였다. 독 일 제국 교회의 구조는 16세기의 쇠퇴 이래 18세기에 다시 문화적으로 번영하였고 주교좌 성당의 참사회를 포 함하였던 귀족들은 교황이 승인한 주교를 다시 선출하였 다. 제국 체제의 보수적 인사들인 제후 주교들은 황제에 의해서 강하게 선호되고 보호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 고 몇몇 라인-베스트팔렌 교구들이 독립적 · 반황제적 정치를 수행하는 것을 방해하지 못하였다. 그들 왕조의 집권과 더불어 쉔보른 가문의 주교들은 특히 문화적 문 제에 관심을 가졌다. 바로크 및 로코코 시기에 있어서 주 요한 가톨릭의 기여는 장식 예술, 특히 건축술에 있었다. 프랑스의 생 모르학파(Maurists)에 의해 영감받은 역사 연구는 남부 독일에서 근거지를 얻었고 성 블레즈의 수 도원장 마르틴 게르베르트의 작품 속에서 절정에 다다랐 다.
〔1789년~19세기〕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친 프 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지배는 분열된 독일에 큰 충격 을 주었다. 혁명의 파급을 겁낸 독일 제후는 프랑스와 싸 워서 패배한 뒤 라인강 왼편 지역을 빼앗겼으며 뒤이어 프랑스는 독일을 침공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을 쳐부수고 1806년에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의 연영방을 자신의 영역 안에 두는 라인 동맹을 결 성하여 마침내 신성 로마 제국은 해체당하게 되었다. 제 국의 멸망 후 독일에서 그 주요 수혜자들은, 수년 동안 교회 공국들의 몰락과 그들 재산의 국유화를 가속화하기 위해 프로테스탄트와 계몽주의의 선전을 오랫동안 이용 했던 속인 통치자들이었다. 1803년에 제국 대표의 입법 은 교회 공국들과 교회 재산은 몰수되고 대신 세속 군주 에게 주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가톨릭측에 있어서의 직 접적인 결과는 정치적 · 사회적 · 경제적 영향력의 커다 란 손실이었다. 1815년에 설립된 '독일 연합' (German Confederation)의 지도력은 압도적으로 프로테스탄트가 우 세한 프로이센에 주어졌다. 비스마르크의 지도 아래 덴 마크(1864)와 오스트리아(186)와의 전쟁을 성공으로 이 끈 후, 프로이센은 1870년에 독일 제국을 세웠다.
19세기 : 독일 가톨릭 신자들의 지적 위치와 관련하 여 중요한 점은 독일의 문화 생활에 있어서 프로테스탄 트가 지배적이었다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까지 가톨 릭의 지적 성취는 민족의 창조적 활동에서 소외되어 있 었다. 괴테 · 쉴러 · 헤겔 · 흴덜린 · 슐라이어마허 그리고 빌헬름 폰 훔볼트로 대표되는 독일 관념주의의 사상은 적어도 19세기 전반부까지는 교육받은 독일인들의 세계
관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들은 가톨 릭 사회로 스며들지는 못하였다. 이 시기 독일의 가톨릭 시인과 작가들은 고립된 채 살아갔다. 그러나 다양한 종 교적 신앙 고백의 경험은 가톨리시즘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과 가톨리시즘을 풍부하게 하였다.
가톨릭 신자들은 이 당시 가톨릭 대학들과 문화 센터 들이 없었기 때문에 명사 또는 성향이 비슷한 친구들 중 심으로 모였다. 그중에서 뮌헨 서클(The Munich Circle)은 그 구성원들의 다재 다능함과 사상의 독창성 그리고 그 들의 정치적 지위 등으로 인하여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 이었다. 평신도 신학자요 철학자였던 프란츠 폰 바아더 도 여기에 속해 있었는데 그는 가톨릭과 동방 교회들 사 이의 보다 긴밀한 관계를 추구하였다. 루이 1세의 치세 (1825~1848) 동안 바이에른은 가톨릭 생활의 중심이었으 며 베네딕도 수도원의 부흥기를 맞이하였다. 뮌헨은 1825년부터 하나의 신학부를 가지고 있었는데 튀빙겐의 그 신학부는 이미 1817년에 설립되어 《튀빙겐 신학 계 간지》(Tübinger Theologische Quartalschrift)가 발행되기 시 작하였었다.
독일 교회의 법률적 재조직은 로마 교황청과의 쌍무 협정, 로마로부터 나오는 일방적 교령 또는 독일 국가로 부터 나오는 일방적 칙령으로부터 결과되는 점진적 과정 이었다. 그래서 하나의 협약이 1817년에 바바리아와, 1855년에 오스트리아 그리고 1859년에 바덴과 맺어졌 다. 프로이센에서 교회 문제는 1821년의 교황 교서 Salute animarum〉에 의해, 또 하노버에서는 1824년의 교 서
가톨릭의 진보 : 1837년 쾰른에서의 회합으로 독일 가톨리시즘은 국민 생활에 있어서 사회적 · 정치적 잠재 세력을 인식하게 되었다. 특별히 트리어(Trier)의 성의 (聖衣, Holy Garment) 순례(1844년에 150만 순례자들을 모 음)는 국가 통제의 구속을 깨뜨리기 위한 가톨리시즘의 과시였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에 의해서 열렬히 환영된 1848년의 혁명은 가톨릭 운동에 새로운 힘을 보태 주었 으며 이로써 교회는 국가 통제로부터 상당한 자유를 얻 게 되었다.
언론 및 집회의 자유는 교회에 종교적 활동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열어 주었다. 마인츠에서 가톨릭 신자들은 비오 협회(Pius Associations)를 창설함으로써 주도권을 잡 았으며 가톨릭 신자들을 독일 가톨릭 연합 속에 결속시 키려 노력하였다. 최초의 '가톨릭 신도 대회' 가 마인츠 에서 개최되었으며 그 이후 이것은 독일 가톨릭 생활에 있어서 항구적인 제도가 되었다. 1848년 10~11월 밖 르츠부르크에 열린 독일 주교 회의는 독일 주교들의 최 초의 전체 모임으로서 오늘날까지 풀다(Fulda)에서 계속 되고 있다.
내적 갈등 : 전국적 규모의 항구적인 교구 연합 계획 은 국가 교회를 우려한 로마의 불신과 교구 지방주의에 의하여 실패하였다. 베센베르크(Ignaz von Wessenberg)의
전례 및 사목 개혁 계획과 히르셔(Hirscher)의 윤리 신학 은 거부되었다. 또 본의 헤르메스(Georg Hermes)와 빈의 귄터(Anton Günther)는 그리스도교 계시에 대한 독자적 신학적 이해에 도달하기 위하여 동시대의 철학 체제에서 출발점을 모색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같은 세기 중 엽 이후 스콜라주의를 선호한 로마 학파와 압도적으로 역사적이었던 독일 신학 간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러 한 불화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구가톨릭교(Old Catholics) 신자들의 분열을 초래하였다.
사회적 · 정치적 계획들 : 사회 운동에 있어서 아돌프 콜핑의 노력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또한 빌헬름 폰 케틀 러(Wilhelm von Ketteler) 주교는 대중에게 노동 문제를 각 성시켰으며 가톨릭 노동자 조합을 활성화하였다. 독일 가톨릭 신자들의 정치 조직은 1852년 프로이센 국회에 서의 가톨릭 중앙당의 의석에서 결실을 맺었으며 이 당 은 여러 주들의 의회에서 꾸준히 정치적 중요성을 증대 시켰다.
문화 투쟁 : 독일 가톨리시즘의 자각은 문화 투쟁 (Kulturkampf)으로부터 상당한 자극을 받았는데 그것은 비스마르크와 팔크에 의해 지도되었다. 이러한 투쟁을 직접적으로 자극하였던 것은 국가 개념으로서, 그것은 제국의 창설 이후 점차 강화되었다. 그러나 배후의 추진 력은 자유주의의 국민주의적 개념이었는데 《금서 목록》 이 발간되고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권을 선포하는 운동이 발전하자 교황 지상주의의 가톨리시즘을 국가의 적으로 간주하였으며, 비스마르크는 가톨릭 신자들을 애국심이 결여된 제국의 적으로 간주하였다. 그들에 대한 사회 적 · 정치적 차별은 대학과 정부의 행정 분야에서 매우 명백하였다. 비스마르크는 1871년 교단 조항, 1872년 학교 관리법, 예수회 금지 조처로 가톨릭에 대한 대탄압 을 시도하였으며 교황 비오 9세는 1875년의 교서로 이 조처들을 무효로 선언하였다. 그 와중에서 빈트호르스트 (Windthorst)가 이끌던 가톨릭 중앙당은 오히려 의석수가 증가하였다. 비스마르크는 너무 강한 가톨릭측의 저항에 직면하여 비오 9세의 사망(1878)을 계기로 점차 가톨릭 에 대한 금지법을 해제하게 됨으로써 문화 투쟁은 결국 비스마르크의 패배로 끝나게 되었다.
수도회들 : 독일 가톨리시즘의 영성은 예수회 · 구속주 회 · 프란치스코회 · 베네딕도회에 의해 결실이 맺어졌 다. 당시 독일에서 창설된 선교회 가운데에는 신언회(神 言會)와 상트 오틸리엔 베네딕도회가 있었고, 외국에서 창설되어 독일에서 번영한 선교회로는 팔로티회(Pallot- tines) · 마리안힐 선교회 · 살레시오회 · 백의의 선교사 (White Fathers) · 예수 성심 선교회(Sacred Heart Mission- aries) 등이 있었다. 교육과 양육에 헌신하는 여자 수도회 의 성장은 더욱 주목할 만하였다. 그것들은 뮌스터 자선 자매회(Sisters of Charity of Münster) · 로레토회(Ladies of Loretto) · 그레이 자매회(Gray Sisters) · 빈첸시오 자선 자 매회 (Vincentian Sisters of Charity) · 낭시의 보로메오회 (Borro- means of Nancy) · 글라라 파이회(Clara Fey) · 프란 치스카 셰르비에회(Franziska Schervier)를 포함하였다. 성
빈천시오 아 바오로회는 실제적 빈민 구호에 헌신적이었 고 1890년에 창설된 뮌헨-글라트바하의 연합은 독일 가톨릭 신자들의 사회적 · 정치적 교육을 시작하였다. 그 리스도교적 완덕을 실천한 인물로서 글레멘스 폰 드로스 테, 성 콘라트가 있다.
〔20세기〕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가톨릭 지도자들 은 제국 정부가 오랜 동안 가톨릭을 차별했음에도 계속 독일 정치 · 군사 지도자들을 지지하였다. 바이마르 공화 국(1919~193)에서 20%를 차지한 가톨릭 중앙당은 처 음으로 정부를 장악하고 수상들을 후원하였다. 비스마르 크 시대 이래 옹호해 온 노선을 따라서 사회적 입법이 개 선되었다. 뉴만과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으로 입교한 헤커 는 영적 교육자로서 큰 영향을 미쳤으며 아담 · 슈타인뷔 헬 · 틸만은 동시대의 문제의 관점에서 교의 및 윤리 신 학을 숙고하였다. 그러나 산업화의 결과로 대중들 사이 에 탈그리스도교적 경향이 널리 확산되었다.
나치스의 통치 시기 : 공산주의와 국가 사회주의는 이 러한 탈그리스도교적 집단의 지적 공백을 채워 주었다. 특히 국가 사회주의는 1933년 3월 아돌프 히틀러의 지 도 아래 정부를 장악하였다. 실업률 저하와 다른 국내 정 책에 있어서의 히틀러의 성공은 전체주의적 성격을 더욱 강화하였고 나치스는 마침내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의 재난을 초래하였다. 한편 독일 주교들은 국가 사회주의 에 끊임없이 경고하였다. 그러나 일단 나치가 집권하자 교회 당국은 교황청과 국가 사회주의 정부 사이에 체결 된 1933년 7월 20일의 정교 조약을 수용하였다. 비록 이 협약은 나치스에 의해 잘 지켜지지는 않았지만 이 협 약 때문에 나치 독재의 시기 동안 교회는 존재할 수 있었 다. 주교들은 가톨릭에 대한 권리 침해와 무자비한 탄압 에 자주 항의하면서도 많은 주교들과 무수한 가톨릭 평 신도들은 국가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박해 를 묵인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나치에 반대한 수많은 가톨릭 평신도와 사제들은 수용소 또는 감옥 형을 선고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 1945년 이후 그리스도교적 세 력들은 가톨릭 수상 콘라트 아데나워 치하(1948~1963)에
서 그리스도교 민주 연합으로 조직되었다. 그리스도교 민주당 당원들은 1948년 이후 공화국과 많은 주에 집권 당을 형성하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가톨릭 신자들은 교회 일치 운동에 더욱 강하게 참여하였고 저개발 국가 들과 국민들에 대한 책임감도 증대되었다. 지적 대화에 있어서 교회의 대학들은 토론과 훈련의 중심지가 되었 다. 동독에서는 공산주의의 통제하에 독일 민주 공화국 이 그리스도교 생활에 심한 압박을 가하였으며 고립화시 켰지만, 동독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의 힘은 마침내 독일 의 통일을 이루는 신앙의 횃불이 되었다.
〔현 황〕 1962년 조사에 의하면 독일은 전국적으로 6 개의 대교구와 19개의 교구였다. 당시 서독은 9,521개 본당에 신부 26,161명, 수사 12,260명, 수녀 87,391명 으로 신자들의 주일 미사 참석률은 44%였으며, 동독은 111개 본당에 신부 940명, 수사 400명, 수녀 4,280명 으로 주일 미사 참석률은 25%였다. 실상 동독 신자들은 증가하는 무신론자와 비밀 경찰들의 감시 가운데에서도 신앙을 지속하려는 노력을 계속하여 통일될 당시의 신자 수는 인구의 약 6%인 105만 명에 본당의 숫자도 800여 개로 증가되었다(독일 주교 회의 보도부). 동독이 이처럼 신앙을 보존하는 데에는 서독 교회가 매우 중요한 역할 을 하였다. 많은 서독 신자들은 해마다 몇 차례씩 생활에 필요한 필수품들을 소포로 보냈고 통일이 이루어진 지금 도 동부 지역 교회들과 자매 결연을 맺어 계속적인 지원 을 아끼지 않고 있다. 동부 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복지 사업, 사회 교육 사업, 단체 조직 계획, 유치원 설립, 상 담원 양성, 학교에서의 종교 교육 실시 등을 최대의 과제 로 삼고 이에 주력하고 있다. 1994년 현재 대교구 5, 교 구 18, 본당 12,945개에, 추기경 4, 대주교 6, 주교 94, 신부 22,025(교구 소속 16,728, 수도회 소속 5,297), 부제 1,597, 수사 2,257, 수녀 50,316명이다. 한인 교포 신 자수는 3,983명으로 5개의 본당과 21개의 공소에서 한 국인 신부 6명과 5명의 수녀가 신자들을 돌보고 있다. (→ 문화 투쟁 ; 베스트팔렌 강화 조약 ; 보름스 정교 조 약)
※ 참고문헌 V. Conzemius, 《NCE》 6/ 아우구스트 프란츤, 최석우
역, 《교회사》, 분도출판사, 1982/ Eusebius, The History ofthe Church from Christ to Constantine(편집부 펴냄, 《교회사》, 성요셉출판사, 1985)/ 요트 마르크스, 김창수 편역, 《가톨릭 교회사》 상 · 하, 가톨릭 출판사, 1981. 〔李庭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