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의 개항을 전후하여 전개되어 나간 조선 후기 지식인들의 채서 사상(採西思想). 일명 오도 서법론(吾 道西法論) . 세상 만물을 형이상(形而上)의 도(道)와 형 이하(形而下)의 기(器)로 구분하는 것은 <주역> 이래의 동양 사상으로, 여기에서 '동도' (東道)란 전통의 윤리 · 사상과 제도를 지켜 나간다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서 기' (西器)란 개화(開化)에 필요한 서양의 기술 문명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이 중에서 어느 것에 더 비중을 두느냐 하는 문제는 주장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 지만, 일반적으로 그 두 가지는 이 · 기(理氣)와 같이 불 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기원과 대두〕 조선의 동도 서기론은 개항 이후에 나 타난 신사조라는 점에서 중국에서 양무 운동(洋務運動) 의 기치로 내세운 중체 서용론(中體西用論)이나 일본의 화혼 양재론(和魂洋才論)과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 그러 나 그 먼 기원은 이미 서양 문물이 전래되기 시작한 18 세기 지식인들의 움직임에서 찾을 수 있다. 서양의 천 문 · 역법을 수용하고자 하는 조정 일각에서의 노력과 북 학론자(北學論者)들의 중체 서용 사상이 바로 동도의 입 장에서 서기를 채용하려는 움직임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에 성호학파(星湖學派)의 인물들 사이에서 제기된 동도 서기의 입장은 18세기 후반부터 천주교 신앙 운동이 일 어나면서 변질되었고, 이것이 정치 문제와 관련되면서 오히려 서용(西用)이나 서기(西器)의 움직임을 완전히 봉쇄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따라서 아직 이 시기 에는 동도 서기론이 본격적으로 제기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일부 지식인들의 주장 안에서 그 러한 요소가 찾아진다고 할지라도 19세기의 동도 서기 론과는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의 동도 서기론은 개항 이후 이용 후생(利用厚
生)의 논리가 강하게 제기되면서 서양 세력의 침탈을 극 복하는 방향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박규수(朴 珪壽, 1807~1876) 같은 경우는 1872년에 중국을 다녀온 뒤 양물(羊物)의 수용을 통한 부국 강병이 우선임을 주 장하게 되었다. 이것은 지우인 윤종의(尹宗儀, 1805~ 1886)가 아직 척사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것 과는 아주 다른 입장이었다. 박규수의 제자인 김윤식(金 允植, 1835~1922) 또한 1866년에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발생하자 서양의 무기 제조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 다. 그는 또 1881년 영선사(領選使)로 중국에 갔다가 이 듬해 7월 귀국한 뒤에 지은 고종의 교서 가운데서 다시 서양의 과학 기술을 수용해야 한다고 적극 주장하였다. 동도 서기론자의 대표적 인물로 김윤식을 꼽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또 1881년 신사 유람단(紳士遊覽團) 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한 안종수(安宗洙)는 귀국 후 《농정 신편》(農政新編)을 편찬하여 서양 농법의 채용을 주장하였고, 신기선(申箕善, 1851~1909)은 이 책의 서문 을 통해 동도 서기론의 입장을 드러내게 되었다. 곽기락 (郭基洛, 1825~?)이 최초로 동도 서기론을 조정에 상소 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확산 과정과 의미〕 동도 서기론이 널리 확산된 것은 1882년 7월과 8월에 내려진 고종의 교서를 계기로 해서 였다. 이때 지석영(池錫永, 1855~1935)은 서양의 과학 기 술을 적극 도입하자는 상소를 올렸으며, 박기종(朴淇鍾, 1824~1898)과 변옥(卞盞)도 같은 유의 상소를 올렸다. 그러면서 이러한 주장이 재야로까지 확산되어 홍산의 조 성교(趙聲敎), 광주의 조문(趙汶), 서울의 고영문(高潁 聞) 등이 연달아 문호 개방론과 서기 이용론, 기선 건조 론, 기술 교육론을 상소하였다. 그 결과 1882년 10월에 는 고종의 분부로 민간인도 화륜선(火輪船)이나 풍범선 (風帆船)을 구입하여 사용할 수 있다는 조치가 내려지게 되었고, 1883년에는 김명균(金明均)이 삼청동에 기기국 (機器局)을 설립하였으며, 같은 해 3월에는 50여 명의 학생이 동경으로 가서 서양의 문물에 대해 배우게 되었 다. 뿐만 아니라 원산에 최초의 근대 학교인 원산 학사 (元山學舍)가 설립되어 동도 서기적인 교육이 실행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동도 서기론이 널리 확산되면서 신기선이나 안종수 등은 점차 이용 후생, 부국 강병을 주장하는 개화 사상가들에 동조하는 방향으로 나갔고, 서양 문화에 대 한 선별 수용의 입장에서 개화 정책의 추진에 일정한 기 여를 하게 된다. 이로 인해 그들은 적극적인 개화 사상가 들과는 달리 천주교나 프로테스탄트와 같은 서도(西道) 를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1884년의 갑신정변(甲申政變) 이후 개화파의 동조 세력으로 몰려 유배형을 당함으로써 동도 서기론의 움직임은 일시 중지될 수밖에 없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기술 문명을 수용하려는 채서의 노력은 이후에도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계속되었다.
결과적으로 동도 서기론은 내적인 측면에서 전통을 옹 호하려는 보수성과 외래적인 측면에서 서양의 문물을 수 용하려는 진보성을 조화시킨 논리였다. 그러나 서기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는 서도가 바로 서기 안에 내재 되어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 한계성도 있었다. 또 그 것은 단순히 사상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고 실천 운동으 로 이어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점에서 '개항 이후에 불 어닥친 서세 동점(西勢東漸)의 역학 구조를 스스로 극복 해 보려는 전통 지식인들의 내적 쇄신 과정' 으로 설명되 기도 한다. 물론 당시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서양 세력 의 침탈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동도 서기론자들에게만 있 던 것이 아니었다. 이항로(李恒老, 1792~1868) 계열의 위 정 척사론자들,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이나 박영효 (朴泳孝, 1861~1839)와 같은 개화 사상가들의 노력 또한 이와 같은 극복의 과정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동도 서기론자들이 전통의 윤리와 제도를 중시하면서 서기 수 용을 주장한 반면에 개화 사상가들은 서도(西道)까지 용 인하고 있었다는 점이 다르다. 뿐만 아니라 위정 척사론 자들이 서도와 함께 서기의 수용까지 배척한 점 또한 동 도 서기론자들의 입장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 위정 척사)
※ 참고문헌 《高宗實錄》/ 《日省錄》/ 《承政院日記》/ 《續陰晴史》 韓治欣, <開港當時의 危機意識과 開化思想〉, 《韓國史研究》 2집, 1968/ 洪淳昶, 《韓末의 民族思想》 探求堂, 1975/ 李光麟, 《韓國開化 思想 史研究》, 一潮閣, 1985/ 權五榮, 〈東道西器論의 構造와 그 展 開>, 《韓國史市民講座》 7집, 1990. 〔車基眞〕
동도 서기론
東道西器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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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