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 제국

東 - 帝國

〔라〕Imperium Romanum Orientale · 〔영〕Eastern Roman Emp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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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대제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사이의 성모와 아기 예수(하기아 소피아 성당 모자이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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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대제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사이의 성모와 아기 예수(하기아 소피아 성당 모자이크) .

5세기 중반 이후 로마 제국의 서쪽 부분은 게르만 민 족에 의해 유린되어 소멸되었고, 동쪽 부분은 계속 남아 지리적 조건과 시대적 요청에 맞는 하나의 독특한 문명 권으로 전환되어, 1453년 오스만 투르크족에 의해 멸망 될 때까지 지속된 제국.
동로마 제국의 역사는 비잔티움(Byzantium)의 운명과 함께하여 '비잔틴 제국' 이라고도 한다. 비잔티움은 아시 아와 유럽이 만나는 곳이며 흑해와 지중해를 좌우로 두 고 있어서 고대부터 교역상 · 전략상의 요충지로 알려져 왔다. 이미 기원전 7세기 전반에 보스포러스 해협 남단 에 있는 칼체돈을 식민지로 만든 메가라인들은 몇 년 후 유럽 쪽에 또 하나의 식민지를 건설하였는데, 그 후 이곳 을 메가라 원정군 대장 비자스(Byzas)의 이름을 따서 비 잔티움'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비잔티움이 로마의 관심
을 끌게 된 첫 번째 이유는 제정 성립을 전후하여 수도를 동쪽으로 옮기려는 움직임 때문이었다. 로마시는 전제 군주주의를 불신하는 공화제와 원로원의 전통이 강하였 고, 더욱이 시리아와 다뉴브 강 지역으로부터 떨어져 있 어서 제국 통치상 그 위치가 적절하지 못하였다. 두 번째 로는 막사(幕舍) 황제 시대(235~284)에 급속히 촉진된 동서 분할 통치를 들 수 있다. 284년에 즉위한 디오클레 시아누스 1세(Diocletianus I, 284~305)는 제위(帝位) 계 승 방법을 개혁하여 2명의 아우구스투스(augustus, 正帝) 에게 통치권을 분산시켜 각각 로마 제국의 동쪽과 서쪽 을 관할하게 하고 아우구스투스의 사망시 체사르(caesar, 副帝)가 계승하도록 하였다. 비록 2명의 아우구스투스가 하나의 로마를 함께 통치한다는 원칙이었지만 아우구스 투스를 2명 임명한 것은 그리스적 동방과 라틴적 서방 사이의 통치상의 분리를 인정한 조치였다.
동로마 제국의 시작은 콘스탄틴 대제(Constantinus, 324~ 337)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는 330년 로마 제국의 수도 를 비잔티움으로 옮겨 '새로운 로마' (Nova Roma)를 창 건하였고 자신의 이름을 따라 '콘스탄티노플' 이라 불렀 다. 그 후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1 , 379~ 395) 황제가 두 아들에게 동서 로마를 나누어 통치하게 하면서 로마 제국은 완전히 둘로 분리되었다.
로마 제국이 종교적 · 문화적으로 위기를 겪은 4세기 는 로마 역사의 전환기였다. 그리스도교가 국교가 된 이 후 이교 문화와의 조화는 하나의 큰 과제였다. 원래 그리 스도교는 콘스탄틴 대제가 313년에 공포한 밀라노 칙령 에 의해 공인되었고, 325년 제1차 니체아 공의회를 개 최하여 아리우스주의(Arianism)를 물리쳤다. 392년 테오 도시우스 1세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정한 이래로 그리 스도교와 이교적 헬레니즘은 점차 상호 융합하여 마침내 그리스도교적 · 그리스적 · 동방적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 다. 이 문화권이 이른바 비잔틴 문화이며 그 중심은 콘스
탄티노플(비잔티움)이다.
〔9세기까지의 역사적 변천〕 테오 도시우스 이후 동로마에는 유능한 황제가 나오지 않았으나 6세기에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527~565) 는 영토를 확장하여 옛 로마의 영광 을 회복하고 문화를 진흥시켰다. 매 우 근면하여 '잠자지 않는 황제' 라 는 별명을 얻은 유스티니아누스는 아름다움과 지성을 겸비한 서민 출 신의 황비 테오도라(Theodora)의 적 절한 보좌를 받았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정책은 하나의 국가, 하나의 법, 하나의 교회로 요 약할 수 있다. 그는 첫째로 옛 로마 제국 시대와 같은 넓은 영토를 되찾 고자 하였다. 벨리사리우스(Belisa- rius), 나르세스(Narses) 등을 파견하 여 아프리카의 반달 왕국, 이탈리아
의 동고트 왕국, 스페인의 서고트 왕국을 점령하였다. 또 한 외교와 타협을 통해 6세기 중기까지 발칸 반도의 여 러 민족과 소아시아를 복속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동 로마 제국은 옛 로마 제국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영토 의 팽창을 성취하게 되었다.
두 번째 사업은 행정 체제의 재정비였다. 그의 팽창 정 책은 막대한 재정적 뒷받침을 필요로 하였으나, 무거운
과세에 저항하는 민중 반란(니카 반란, 532)이 있은 후에 는 정부의 조세 정책을 개혁하였다. 동시에 행정 제도의 대부분을 중앙 정부의 직접 관할하에 두고 군주의 전제 적 권한을 강화하였다. 셋째로 유스티니아누스의 업적 가운데 유럽 문명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법전 편 찬 사업이었다. 528년 그는 트리보니아누스(Thriboniaus) 와 테오필루스(Theophilus) 등 10명의 법률가들로 위원회 를 구성하여 새 법전을 편찬하게 하였다. 528~534년에 이르는 이 법전 편찬 사업은 네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유스티니아누스 법령집》(Codex Justinianus) : 529년에 10권으로 공포되어, 534년에 최종 형태로 수정 보완되 었는데(12권, Codex repetitae praelectionis), 당시까지의 모 든 황제 칙령들이 정리 · 요약 · 수록되어 있다.
《학설휘찬》(學說彙贊, Digesta 또는 Pandectae, 530~533) : 고전 시대 이래의 법학 저술을 시대순으로 발췌하여 50 권으로 만들었다.
《법학제요》(法學提要, Institutiones, 533) : 법학 입문으 로서 간결한 편람 또는 법학도의 텍스트이며 4권으로 편 찬되었다.
《신칙법》(新法, Novellae leges): 유스티니아누스 황 제에 의해 공포된 법령집이다. 라틴어로 편찬된 앞의 세 저서와는 달리 그리스어로 편찬되었는데, 이는 당시의 현실적인 요청에 부응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 《신칙법》 은 유스티니아누스의 입법에 관한 최종의 업적으로서 당 시의 동로마 제국 역사에 대한 중요한 자료이다. 유스티 니아누스는 이 네 부분을 하나로 통합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으나 그의 생존 중에는 이루어지지 못했고, 로마법 연구가 부활된 12세기에 와서야 《로마법 대전》(Corpus Juris Civilis)으로 완성되었다.
이상과 같은 유스티니아누스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 가 죽은 후 후계자들은 주로 국가 재정의 파탄으로 서쪽 영토의 대부분을 상실하였고, 동쪽 부분만을 유지했을 뿐이었다. 또한 모든 제도들은 해체되었고 565~610년 까지는 무정부 상태, 빈곤, 질병이 휩쓰는 암흑기가 도래 하였다. 610년 헤라클리우스(Heraclius, 610~640)가 즉위 하면서 헤라클리우스 왕조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는 페르시아와의 전쟁, 슬라브족의 발칸 반도 진출 등 대외 문제로 인해 군사력의 약화, 재정적 곤란이 발생하였고 특히 새로운 이슬람 세력은 동로마 제국에 대한 위협으 로 등장하였다. 711~717년 무정부 상태가 된 후 이사 우리아(Isauna)가의 레오 3세(Leo Ⅲ 717~741)가 즉위하 였다.
레오 3세는 726년 성화상 공경을 금지하는 칙령을 공 포하였고 성화상을 제거하도록 조치하였다. 성화상 문제 는 원래 신학적인 이유에서 시작되었으나, 곧 정치적 · 사회적인 분야에까지 파급되었다. 성화상 숭배 금지는 제국 내의 이슬람교도들과 유대교도들을 유화시키려는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었으며, 이 두 교파와의 화해는 로 마 제국 통치상 중요하다고 믿고 있었다. 이러한 성화상 파괴는 사회 개혁과 연결되어 특히 토지 재산이 많았던 수도원이 탄압받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당시 로마 교
황 그레고리오 2세(715~731)는 성화상 파괴에 대해 반대 의 뜻을 밝혔으며, 그의 후계자인 그레고리오 3세 (731~741)도 로마 교회 회의를 소집해 성화상 파괴론자 들을 교회에서 축출하였다.
성화상으로 인한 대립은 성화상 파괴를 주장한 마지막 황제 테오필루스 1세(Theophilus I, 829~842)가 죽은 후 미카엘 3세(Michael Ⅲ, 842~867)가 황제로 등극하면서 서 서히 수그러지고, 황태후 테오도라가 제국을 통치함에 따라 843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교회 회의에서는 성 화상 공경이 부활되었다. 여기에 동방의 여러 총대주교 들(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도 가세함으로써 1 세기 이상 계속된 성화상 논쟁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동서 로마 교회의 분열〕 800년 카알 대제(742?~814) 가 '로마인들의 황제' 로 등극하는 대관식 거행은 로마 교황과 동로마 제국 간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으며, 동 서 교회가 분리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5세기 이 래 현실적으로 로마 제국은 없어졌으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군사 정책 등에서 표현된 바와 같이 단일 제국이 라는 관념은 지속되었다. 그렇기에 카알 대제의 대관은 역사적 의의가 있으며, 이로 인해 일부 고대 사가들은 적 어도 800년까지를 '로마 제국 후기' 라고 보고 있다.
교황 레오 3세는 성화상 파괴를 맹렬히 반대하였지만 동로마 황제에 대항할 만한 힘은 없었다. 그래서 프랑크 왕국에 기대하는 바가 컸다. 프랑크 왕국도 역시 제국 내 에 침투하여 왕국을 세운 이래 무력으로 여러 지방을 정 복했으면서도 국왕으로서의 권위를 합리화할 정신적 지 주가 필요하였다. 이리하여 교황과 프랑크 왕국과의 상 호 이해는 일치되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콘스탄틴 4세를 폐위시킨(797) 황 태후 이레네가 유일한 지배자였다. 그러나 여자가 통치 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로마 제국의 전통에 어긋나는 일 이었다. 따라서 교황 레오 3세는 카알 대제를 동로마 제 국 레오 4세의 합법적인 후계자요, 단일 제국의 황제로 간주하게 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입장에서 볼 때 카알 대 제의 대관식은 합법적 통치자에 대한 하나의 반란인 셈 이었으나 대립은 오래가지 않았다. 동로마 제국은 812 년에 카알 대제가 '로마인들의 황제' 임을 공인하였다. 결국 상황은 동서 로마 제국이 양립한 5세기로 되돌아간 듯하였지만, 카알 대제 사후에 프랑크 왕국은 내분 때문 에 삼분되었다. 10세기 전반에는 왕국의 전통마저 완전 히 소실됨으로써 로마 제국의 전통은 10세기 후반에 "게 르만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 으로 연결되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 배경 아래 미카엘 3세(Michael Ⅲ, 842~867) 황제 치세에 일어난 포시우스 사건으로 동서 교회의 분리는 촉진되었다. 황태후 테오도라는 847년 이냐시오(Ignaius, 799~877)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 임명하였는데 856년의 쿠데타로 테오도라가 실권하고 미카엘 3세가 친정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이냐시오는 사임의 압력을 받았고 2년 후에는 대학 교수인 평신도 포시우스(Photius, 810~895)가 총대주교로 선임되었다. 이 후 두 사람을 지지하는 파당이 조직되어 사사건건 대립
함으로써 마침내 황제는 문제 해결을 위해 교회 회의를 개최하였다. 861년 콘스탄티노플 교회 회의에 초청받은 교황 니콜라오 1세(Nicolaus I , 858~867)는 사절을 보내 이냐시오를 지지하였으나 회의는 포시우스를 인정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 결정에 반대한 로마 교황은 863년에 로마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이냐시오를 콘스탄티노 플 총대주교로 복귀시켰다. 그러나 미카엘 3세는 로마 회의의 결정에 불복하고 로마 교황이 비잔틴 교회의 내 정에 간섭하였다고 비난하였다. 또한 그는 콘스탄티노플 교회는 로마의 보편 교회의 주도권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으며 그가 죽기 직전인 867년에 소집된 종교 회의에서 로마 교황의 이단적 교리와 불법적 간섭을 크 게 비판하고 나섰다.
최종적인 동서 교회의 분리는 11세기 중엽에 있었다. 11세기 초 노르만 민족이 동로마 제국의 영토인 이탈리 아 남부를 점령하였을 때 교황 레오 9세(1049~1054)는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이 지역에까지 확장하고자 하였 다. 우선 교황은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틴 9세(1042~ 1054)와 군사 동맹을 체결하려고 했다. 동로마 제국의 황 제는 무능하고 부패하여 교회와 귀족 계급의 세력 증대 를 막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콘스탄티노플 총대 주교 미카엘 체룰라리우스(Michael Caerularius, 1043~1058) 는 자신의 관할 지역인 남부 이탈리아까지 교황 세력이 확장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동로마 제국과 교황청 간의 상호 협조 관계 수립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물론 여기에 는 오랫동안의 역사적 배경도 있었다. 로마 교황과 콘스 탄티노플 총대주교는 남부 이탈리아의 교회들이 라틴 전 례와 비잔틴 전례를 사용하도록 각기 독려하여 왔다. 더 욱이 로마 교황청은 보편 교회로서의 권위를 주장한 반 면, 비잔틴 교회는 전통적 자치권을 고수하는 동반자로 서의 위치를 유지하려는 강한 열망을 지니고 있었다.
교황 레오 9세는 두 교회의 협력 관계를 수립하기 위
해 사절단을 파견하였으나 그 자세는 매우 고답적(高踏的)이었다. 따라서 협상은 난관에 부딪혔고 콘스탄티노 플 총대주교는 협상이 결렬되도록 유 도하였다. 마침내 1054년 여름, 교 황 사절단은 체룰라리우스와 그 추종 자들에 대한 파문서를 놓고 로마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 파문서는 황제 콘스탄틴 9세의 명령으로 소각되었 고,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된 교회 회의는 로마 교황 사절단을 파문하였 는데, 이것이 1054년 그리스도교 세 계가 동서로 갈라서는 결정적인 분기 점이 되었다.
〔쇠 망〕 9세기 후반에 시작된 마케 도니아 왕조 시대(867~1081)의 역사 는 867~1025년과 1025~1056년 으로 양분된다. 제1기는 동로마 제국 이 정치적으로 가장 화려하였던 시기
이다. 이때 동로마 제국은 아랍인 · 불가리아인 · 러시아 인들과 싸워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고 시리아에까지 세력 을 확장하였다. 1025년 이후의 제2기에는 강력한 통치 자가 나타나지 않아 궁중 혁명이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마침내 1056~1081년의 무정부 상태를 초래하고 말았 다.
동로마 제국은 1081년 콤네누스(Comnenus) 가의 집 권으로 일시적으로나마 기운을 회복하였고 대내적 질서 가 확립되어 사상적 · 예술적 활동이 번성하였다. 그러나 이즈음에 일어난 십자군 전쟁이 동로마 제국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1095년부터 시작된 제1차 십자군 원정 은 이교도들에 대한 그리스도교 세계의 최초의 조직적인 공격이었다. 그것은 중앙 유럽, 이탈리아, 동로마 제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유럽의 남쪽, 스페인에서부터 러시 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친 역사적 사건이 었다. 그러나 2세기 이상 계속된 십자군은 본래의 의도 를 크게 벗어나는 일이 허다하였는데 제4차 십자군도 그 하나의 예라 할 수 있다. 제4차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 을 점령, 약탈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 결과 동로마 제국 은 해체되었으며 그 자리에 서방의 여러 민족들이 군소 국가를 수립하였다. 또한 동로마 제국의 전통을 이은 그 리스계 국가들도 각각 니카이아, 트레비존드, 에피루스 에 세워졌다. 세 나라 가운데 라스카리스(Lascans) 가의 테오도루스 1세(Theodorus I , 1204~1222)가 세운 니체아 제국(1204~1261)은 민족적 통일과 동로마 제국 재건의 중심이 되었다. 일종의 동로마 제국의 망명 정부였다고 할 수 있다.
1261년 니카이아 제국의 미카엘 8세(1261~1282)는 콘 스탄티노플을 다시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고, 동로마 제 국의 영토를 어느 정도 회복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노 플은 퇴락과 황폐함을 면치 못하여 그 이전의 영화를 되 찾기는 어려웠다. 팔라에올로구스 왕조는 거의 2세기에
걸쳐 제위를 차지하여 동로마 제국 역사상 최장의 왕조 (1261~1453)가 되었다. 그러나 제국의 역사는 안으로는 끊임없는 반란과 밖으로는 아시아계 민족들과 투르크족
의 공격을 받아 불안정하였다. 15세기 중반에 이르러 동 로마 제국의 영토는 콘스탄티노플 및 주변의 트라키아를 유지하는 데 그쳤으며 마침내 1453년 오스만 투르크족
에 의해 함락되고 말았다.
〔문화의 특색〕 비잔틴 문명의 화려함은 제국의 광범위 한 상공업으로 축적된 경제적 부(富)에서 유래하였다. 산업은 사치품, 금속 제품, 유리 제품 등에 이르는 광범 위한 것이었으나 특히 직물은 주요 산업이었다. 동로마 제국은 경제적 활동을 국가에서 장려 · 규제하였으며, 흑 해 및 지중해를 무대로 한 무역을 강력한 해군력으로 보 호하였다.
종교는 비잔틴 문화의 주요한 배경으로서 교육, 문학, 미술 등에 뚜렷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미술가들은 오리 엔트적 문화 전통과 그리스도교 정신을 적절히 조화시켜 밝은 채색과 장식성을 띤 화려한 예술품들을 창작하였 다. 비잔틴 건축은 초기 로마의 건축 양식을 채택하여 아 치, 궁륭(穹窿), 원개(圓蓋) 등을 광범위하게 사용하였 으며, 내부 장식에 있어서는 로마보다는 중동 지역의 특 색을 살려 풍부한 색채를 많이 사용하였다. 비잔틴식 교 회 건축으로서 가장 웅장하고 화려한 것은 이스탄불의 하기아 소피아(HagiaSophia) 성당이다. 교회 내부를 장식 한 아름다운 모자이크는 비잔틴 미술의 가장 특징적인 회화 양식이라 할 수 있다. 모자이크는 채색 유리 조각이 나 작은 돌들을 시멘트로 붙여 놓았으며, 배경은 금분으 로 칠한 것이 많았는데, 르네상스 이후의 사실적 회화에 비해 대체로 비사실적이며 원근법을 무시하고 정면성(正 面性)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모자이크는 벽화로서 가 장 놀라운 장식적 효과를 나타내며 유리나 돌의 반짝거 리는 표면은 다른 회화 양식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을 지 니고 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이탈리아 재정복 시기에 라벤나(Ravenna)에 세워진 성 비탈레(San Vitale) 성당과 성 아폴리나레 누오보(San Apollinare Nuovo) 성당의 모자 이크가 가장 우수한 예이다.
동로마 제국에서는 라틴어가 점차 쇠퇴하고 6세기에
는 그리스어가 공용어로 채택되었으므로 고전 그리스의 사상과 학문이 보존될 수 있었다. 예컨대 그리스 고전 작 가들, 특히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호머, 소포클레스 등의 작품과 문헌을 수집 · 연구 · 주석을 통해 후에 서방 세계에 전달되었다. 동로마 제국에서의 학문 연구는 중 세 유럽의 경우와는 달리 수도원이나 성직자 계급의 활 동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일반 대학이나 학자들이 참여 하는 광범위한 것이었다. 초기에 최대의 대학은 아테네 대학이었으나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에 폐교된 이래로는 콘스탄티노플 제국 대학이 이를 대신하여 유능한 지식인 들을 정부와 교회에 배출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그리스, 오리엔트, 로마, 이슬람 등의 영향을 받아 동유럽 문명권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서유럽과도 부단한 통 상과 교류를 하여 서방 문화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 비잔틴 제국 ; → 교회사 ; 동방 교회 ; 성화상 논쟁 ; 로마 제국 ; 서로마 제국)
※ 참고문헌  J.M. Hussey, The Orthodox Church in the Byzantine Empire, London : Clarendon Press, 1986/ M. Angold, The Byzantine Empire 1025~1204 : A Political History, London : Longman, 1984/ A. Kazhdan · G. Constable, People and Power in Byzantium, Dumbarton Oaks, Washington D.C. Center for Byzantine Studies, 1982/ R. Browning, The Byzantine Empire, New York : Scribner, 1980/ Cyril C. Mango, Byzantium, The Empire of New Rome, London : Weidenfeld & Nicolson, 1980/ Donald M. Nicol, The Last Genturies of Byzantium 1261~1453, New York : Hart-Davis, MacGibbon, 1972/ H.W. Haussing, A History of Byzantine Civilization, trans. by J.M. Hussey, New York : Praeger, 1971/ R. Macmullen, Constantine, London : Dial Press, 1970/ A.A. Vasiliev, History ofthe Byzantine Empire, vol. 2, Madison : Univ. ofWisconsin Press, 1968/ D. Talbot Rice, Byzantine Art, rev. ed. : London : Penguin, 1968/ J.W. Barker, Justinian and the Later Roman Empire, Maidson : Univ. of Wisconsin Press, 1966/ Speros Vryonis Jr., Byzantium and Europe, New York : Harcourt, 1967/ Tamara Talbot Rice, Everyday life in Byzantium, New York : Batsford, 1967/ A. Grabar, Byzantium from the Death of Theodosius to the Rise ofIslam, trans. by Stuart Gilbert · James Emmons, London : Thames, 1966/ Steven Runiman, The Fall of Constantinopel, London : Cambrige Univ. Press, 1965. 〔車河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