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 교회

東方敎會 〔라〕Ecclesiae Orientales

〔영〕Eastern Churches

글자 크기
3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예우상 로마 주교 다음가는 대권을 갖는다고 결정한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1 / 9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예우상 로마 주교 다음가는 대권을 갖는다고 결정한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동로마 제국 지역에 있던 교회들로부터 시작해서 1054년 교회의 대분열 때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 교 회와 갈라져 나간 동방의 모든 교회. 동방 교회들의 특징 은 사도 교회와의 연속성, 독자적 전례, 그리고 지역 교 회의 권위 강조 등인데, 오늘날 동방 교회는 다음 세 가 지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동방 독립 교회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권 위를 인정하지 않는 교회들이다. 주로 단성설주의자(單 性說主義者)들과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인데, 오늘날 시 리아 · 아르메니아 · 콥트 · 에티오피아 · 인도(말라바르) 의 교회들이 이에 속한다. 이들의 교회 역사는 사도 시대 (1세기) 혹은 속사도 시대(1세기 후반~2세기 초)까지 소급 되는데, 그중 시리아 교회는 특별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 다. 이는 초대 시리아 교회는 그 전통을 안티오키아를 통 하거나, 사도 바오로가 전한 헬레니즘화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고, 팔레스티나로부터 직접 전수받았
기 때문이다. 시리아 교회는 동 · 서 시리아로 나뉘는데, 서시리아는 단성설자들이며, 동시리아는 네스토리우스 주의자들이다.
둘째, 동방 교회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명예상의 권위를 인정하는 단위 교회들을 말한다. 단위 교회란 한 개체가 아니라 어느 지역의 교회가 자체 내 조직상으로 치리(治理)되는 교회들을 말한다. 오늘날에는 15개의 단위 교회가 있다. 콘스탄티노플 교회(현 터키의 이스탄 불),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교회, 안티오키아 교회(현재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 본부가 있다), 예루살렘 교회, 러시아 교회, 그루지야 교회, 세르비아 교회, 루마니아 교회, 불 가리아 교회, 키프로스 교회, 그리스 교회, 알바니아 교 회, 폴란드 교회, 체코슬로바키아 교회, 미국 교회. 이외 에도 크레타 · 핀란드 · 일본 등에도 자치를 누리는 소규 모 단위 교회, 즉 명목상은 모교구(母敎區)에 예속되나 자체 대주교에 의해 완전히 독립을 유지하는 교회들이 있다.
셋째, 동방 가톨릭 교회는 로마 교황의 관할권하에 돌 아와 서방 교회와 연합해 있으며 자신들의 고유 전례를 인정받고 있는 교회들을 말한다.
〔분열의 역사] 동방(로마에서 보았을 때 동부, 곧 팔레스티 나와 동유럽, 북아프리카 지역 등을 말함)에는 로마 시대 이 전부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소아시아의 에페소, 그리스의 아테네 등 정치 · 문화 · 교 역 · 학문의 중심지들이 여러 군데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유래한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동부 지역인 시리아· 소아시아 · 그리스 · 이집트 등지로 전파되고, 로마 제국 의 국경을 넘어 갈데아 지방과 아르메니아 등지로 확산 되면서 자연히 앞서 말한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몇 개의 그룹이 형성되었다. 특히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는 그 신자수와 신학적 권위로 쌍벽을 이루었다. 400년경
에는 로마 제국의 동부 지역에 약 1천만 명의 그리스도 교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오랜 박해가 끝나고 콘스탄틴 대제는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동방의 비잔티움으로 옮긴 뒤(330), 그 이름을 콘스탄티노플로 바꾸었다. 이후 콘스탄티노플은 황제의 후광을 업고 영향력을 증대시켜 끝내는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를 능가하는 정치 · 문화 ·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따라서 이 새로운 제국 수도의 주교 위상이 문제 로 대두되었다.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는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는 예우상 로마 주교 다음가는 대권을 갖는다고 결정하였고, 로마 · 콘스탄티노플 · 알 렉산드리아 · 안티오키아 · 예루살렘의 총대주교좌를 공 인하였다. 이들 총대주교좌들은 각각 그 주변 교회들을 지휘하여 거의 자립적인 교구들을 형성하였고 각 교구별 로 고유한 전례와 관습들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러면서 도, 신앙 교리의 완전한 일치로서 서로를 하나의 그리스 도교로 통일시키고 있었다. 이후 451년 칼체돈에서 열 린 제4차 공의회에서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위상 을 재확인하였다. 그로 인해 599년 콘스탄티노플 대주 교는 이전 공의회들의 결정을 근거로 '전세계 총대주교' (ecumenical patriarch)라는 직함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5세기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네스토리우 스는 그리스도 안에 분리된 두 개의 위격(位格, persona) 즉 신격과 인격이 있다는 설을 주장하다가 에페소 공의 회(431)에서 단죄되고 추방되었다. 네스토리우스의 제자 들은 페르시아 지방으로 피신하여 그곳에 자파의 교회를 세웠다. 그 뒤 네스토리우스파는 인도와 중국에까지 전 파되었으나 타멜란의 박해로 위축되었고, 일부는 16세 기경에 가톨릭으로 귀의하였다. 또 나머지 일부는 이 란 · 이라크 · 시리아 · 인도 · 미국 등지로 퍼져 현재 10 만여 명이 있다. 한편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에 반대하는 에우티케스는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완전히 그리스 도의 신성에 흡수해 버리는 그리스도 단성설(單性說, monophysitism)을 주장하여 칼체돈 공의회(451)에서 단죄 되었으나, 이집트 · 시리아 · 에티오피아 · 아르메니아에 서는 이 단성설을 추종하는 이교가 생겨났다.
그 외에도 로마 교회와 동로마 교회는 전례 언어로 각 기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관습과 제 도의 차이, 니체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의 문구(filioue) 와 신학적 차이 등 사소한 분쟁들이 잇따라 발생하여 양 교회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중 대한 정치적인 차이도 나타났다. 당시 롬바르디족의 침 입으로 위협을 느낀 로마 교황 스테파노 2세(752~757)는 동로마 제국 황제의 보호를 받지 못하자 754년에 프랑 크족의 피핀에게 도움을 청하였으며, 그 후 레오 3세 (795~816) 교황은 로마에서 피핀의 아들 카알 대제에게 황제 대관식을 거행해 주었다. 그로 인해 교황은 교황령 을 건립할 수 있었으나 이는 이탈리아에서의 동로마 제 국령의 손실을 가져와 동로마 제국인들을 격분시켰다. 이렇게 되어 로마는 프랑크족의 영향 아래 들어갔으며 콘스탄티노플과의 거리는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863년에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포시우스(Photius) 에 대한 교황의 파문 사건이 일어났다. 858년 예수 공현 축일에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이냐시오는 당시 동로마 황제 미카엘 3세의 큰아버지인 바르다스(Bardas)를 부도 덕한 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공적으로 영성체를 거절하였 다. 이에 황제 미카엘 3세는 이냐시오를 추방하고 포시 우스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 앉혔다. 그러자 이냐시 오를 추종하던 많은 성직자, 수도자들은 스미르나의 메 트로파네스(Metrophanes) 대주교의 지도 아래 이레네 (Irene) 성당에서 모임을 갖고 포시우스를 총대주교좌의 침입자로 규정, 그의 파문을 선언하였다. 이에 맞서 포시 우스 추종자들은 859년 봄 교회 회의에서 이냐시오 추 종자들에게 파문을 선언하였으며, 이냐시오가 다시금 주 교좌를 차지하고자 하면 그에게도 파문을 내리겠다고 경 고하였다. 동시에 교황에게 포시우스의 총대주교좌 착좌 를 알렸다. 교황 니콜라오 1세(858~867)는 두 명의 특사 를 보내어 진상을 파악하고자 했으나, 특사들은 교황에 게 유보된 판결을 내리는 등의 전권을 남용하면서 이냐 시오 파문에 동조하였다. 그러나 이냐시오의 추종자들은 이러한 특사들의 판결에 불복하고 로마에 직접 탄원하였 다. 그로 인해서 863년에 개최된 로마 교회 회의에서는 포시우스를 파면하고 그의 성직자로서의 모든 지위를 박 탈하는 한편, 이냐시오와 그의 추종자들의 지위 복구를 명령하였으나 황제는 이에 불복하였다. 결국 867년 여 름에 개최된 콘스탄티노플의 교회 회의는 니콜라오 교황 을 '이단자요, 주님의 포도밭의 파괴자' 라 규정하고 파 문을 선언하였다. 이로써 동방과 서방의 교회 분열은 완 연해졌다. 그러나 그 해 9월 미카엘 황제가 살해되고, 그 와 함께 통치하던 바실리오 1세가 독자적으로 통치하게 되면서 포시우스를 강제로 사직시키고, 이냐시오를 복직 시켰으며 로마와의 관계를 회복하였다. 그로 인해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869)에서는 포시우스와 그의 추종 자들을 파문하였고, 그들에게 서품을 받았던 사람들은 모두 평신도로 돌아가게 하였다. 877/878년에 이냐시 오 총대주교가 사망하자 포시우스는 총대주교좌에 복귀 할 수 있었고, 이때 사라센의 위협에 직면하여 비잔틴의 도움을 필요로 하던 교황 요한 8세는 포시우스를 합법적 인 총대주교로 인정함으로써 동 · 서양 교회의 분열은 일 단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교회의 제도 · 법률 · 전례와 신학에 있어서, 언어와 국민성의 차이로 인한 서 로의 격차는 너무 커, 동 · 서방 그리스도교 사이의 유기 적인 일치를 이루지는 못하였다.
1053년 체룰라리우스(Michael Caerularius, 1043~1058) 총대주교는 콘스탄티노플의 라틴 전례 교회들과 수도원 들을 폐쇄하고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의 사용, 사제의 독 신, 신경(信經)에 필리오궤(flioque, ···와 성자에게서)를 삽입한 것 등을 비난하였다. 이에 동조하여 불가리아의 아크리다(Achida) 레오 대주교도 '서방 교회 사람들은 반은 유대인이며 반은 이교도들' 이라고 선언하였다. 이 에 교황 레오 9세는 1054년 초에 훔베르트(Humbert) 추 기경, 교황청 상서원장(尙書院長)인 로트링건의 프리드
리히(후에 스테파노 9세 교황이 됨), 그리고 아말피의 베드 로 대주교를 교황 사절단으로 하여 콘스탄티노플에 파견 하였다. 그들은 교황의 절대적 수위권에 의거하여 재치 권상의 로마 수위권과, 제병에 누룩을 넣지 않고, 사제가 독신을 지키는 등의 서구의 관습만이 오로지 유효하고 전통에 맞는 것이라고 하며 이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 였다. 그러나 체룰라리우스 총대주교는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신도들을 선동하여 교황 사절들을 위협하였다 훔베르트 추기경은 1054년 7월 16일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에서 체룰라리우스 총대주교와 모 든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보는 가운데 중앙 제단 위에 파 문 교서를 놓고 "하느님께서 보시고 판단하실지어다" (Videat Deus etjudicet)라고 외친 후 로마로 돌아갔다. 결 국 황제 콘스탄틴 9세의 모든 중재 노력은 허사로 돌아 가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체룰라리우스 총대주교도 867년의 포시우스 총대주교의 격렬한 선언을 되풀이하 고 교황 사절을 파문하였다. 이렇게 하여 동 · 서방의 교 회의 대분열이 시작되었다. 게다가 팔레스티나 성지를 탈환하고자 하던 십자군들의 갑작스런 콘스탄티노플 점 령과 라틴 제국의 건설(1204) 등 동방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는 분열을 더욱 조장하였다. 따라서 그 후 양 교회의 일치를 위한 수많은 시도들, 특히 제2차 리 용 공의회(1274)와 피렌체 공의회(1439)는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일련의 서방과의 분열 중에도 동방 교회는 선 교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치릴로와 메토디오에 의한 슬라브족에 대한 선교는 불가리아(864)와 키예프 러시아(988)를 개종시켰으며 세르비아 교회를 설립시켰 다(1220).
1453년에 이르러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투르크의 침략으로 함락되었다. 그러나 이슬람교도 정복자들은 그 리스도교에 관대함을 보여 제국 내의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에게 위임하여 다스
리게 하였다. 그러나 선교 행위는 사형으로 다스렸다.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교도들에게 정복당하고, 총대 주교도 그들의 관리로 전락되자 러 시아는 스스로를 로마 제국의 후계 자, 즉 '세 번째 로마 라 주창하며 동방 교회 내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 행하고자 하였으며, 콘스탄티노플로 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교회를 이루 며 발전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는 선교사들을 아시아 · 알래 스카 등지로 파견하여 그 세력을 확 장하였다.
19~20세기에 들어오면서 오스 만 제국의 점진적인 붕괴로 발칸 반 도 내에는 유고슬라비아 · 루마니 아 · 불가리아 · 알바니아 · 그리스 등의 독립된 단위 교회들이 설립되
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혁명과 제2차 세계대전 이 후 발칸 반도와 동부 유럽의 공산화로 동방의 교회들은 큰 시련을 겪었으며 그로 인한 수많은 피난민들은 서부 유럽과 아메리카 지역에 새로운 동방 교회의 공동체를 건설하였다.
〔신학과 영성〕 동방에서는 지적으로 신(神)을 인식하 는 신학과, 실천적으로 신을 탐구하는 영성이 서로 배제 되지 않고 완전한 일치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동방 교회 (451년 칼체돈 공의회 이후로 단죄된 단성설자들은 포함하지 않 는)의 신학과 영성은 구체적으로 부정 신학(否定神學, apophaticism), 신화(神化), 정적주의(靜寂主義, quietism) 등 세 가지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먼저 부정 신학은 인간들의 인식은 유한하며, 완전하
지 못하므로 무한하고 초월하신 하느님을 인식함은 불가 능하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속성에 관해 "하느 님은 ··이시다"라는 긍정보다 "하느님은 ··· 아니시다" 라는 부정의 서술을 통해 보다 정확히 하느님을 탐구하 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부단한 부정 (否定)과 심신(心身)의 정화가 요구된다. 신화(神化)는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 남용으로, 하느님께 대한 불순 종으로 파괴된 모든 피조물 사이의 질서의 궁극적인 재 건(로마 8, 19-21)을 의미한다. 인간은 원조의 타락으로 인해 하느님과의 닮음(창세 1, 27)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따라서 인간은 혼(魂)만 갖고 있고, 영(靈)이 결여된 존 재이므로 육적이며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에 의해 재획득되고, 그것에 의한 재창조는 인간을 진실로 살게 하는 것, 즉 새로운 피조물 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정적주의는 사막이나 황야에서 정적 속에 하느님을 관상(觀相)하고, 다시 직관(直觀)의 높은 단계에까지 고양되는 영적 실천이다. 이의 한 방법 으로 호흡 중에 부단히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바치는 '예수의 기도'가 있다.
〔교 리〕 동방 교회에서는 교리나 전례 등에 있어서 초 대 교회의 사도적 신앙을 보존하여 오고 있음을 주장한 다. 따라서 스스로를 정통 교회, 즉 '정교회' (正敎會, Orthodox Church)라고 부른다. 동방 교회는 동방과 서방 이 합동으로 개최하였던 초기 7회의 공의회, 즉 제1 · 2 차 니체아 공의회(325, 787), 제1~3차 콘스탄티노플 공 의회(381, 553, 680), 에페소 공의회(431), 칼체돈 공의회 (451)까지만을 진정한 공의회로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외의 공의회들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한, 동방 교회 중에서 우스주의자들이나 단성설주의자들의 교 리는 나머지 동방 교회들과 서방 교회 모두에게 배척되 고 있다.
성서와 성전 : 동방 교회는 서방 교회와 마찬가지로 성서와 성전(聖傳)에 가르침의 근거를 두고 있다. 성서 는 구약성서 49권과 신약성서 27권 모두 76권의 성서를 사용한다. 구약성서 중 에즈라서는 A · B권, 마카베오서 는 A · B · T권 그리고 예레미야의 편지는 한 권으로 되 어 있다. 구약의 제2 경전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제2 경 전은 동방 교회에서 교의적 · 신학적 권위를 지니지 않는 다.
초대 교회 때부터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의 교훈(기록과 구전)과 세계 공의회(ecumenical council) 그리고 세계 공의 회가 인정한 일반적인 지역 공의회 교부들의 기록과 교 회 생활과 전례 등의 성전은 성서과 함께 동등한 가치와 중요성을 지닌다. 성전은 성서를 선정하는 데 그 증거를 제공하였고 성전의 빛 속에서 성서를 해석할 수 있다고 여긴다.
삼위 일체 : 동방 교회에서는, 하느님은 본질에 있어 서는 한 분이나 위격에 있어서는 삼위(三位)라는 '성삼 자' (聖三者, 동방에서는 '삼위 일체' 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교리를 신봉한다. 삼위의 각 위는 완전한 하느님이신 동 시에 다른 위격들과는 구별된다. 성부는 태어나신 분이
아니고 성자는 성부로부터 태어나시고 성령은 아버지로 부터 좇아 나신다. 바로 이 점이 동방과 서방의 쟁점이 되는 부분이다.
제1차 니체아 공의회와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서 동방과 서방이 합동으로 신경(信經, 니체아-콘스탄티노 플 신경)을 작성하였는데, 이 신경에는 위에서와 같이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좇아 나신다" 라고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후에 서방은 여기에 "...와 성자에게서" (filioque) 라는 말을 첨가하여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좇아 나 시고" 라고 수정함으로써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서방에서 는 이 문구를 삽입했을 때 다만 해석으로 생각하였으나, 동방에서는 신경의 변조라고 하며 서방을 이단자라고 하 였다. 또한 동방 교회는 부활을 교회 생활과 예배의 중심 으로 여긴다. 부활은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가 또한 참 하 느님이심을 증거하는 선포이며, 죽음에 대한 승리를 나 타냄으로써 우리도 부활하여 영생에 참여하리라는 확신 을 주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성모 마리아 : 동방 교회는 서방 교회와 마찬가지로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피조물 중에서 가장 높은 찬양 과 영광을 받는 분으로 공경한다. 따라서 동방의 전례에 서는 성모 마리아의 호칭이 자주 나오는데 세 가지 주요 호칭은 "천주의 모친" (에페소 공의회에서 공인), "평생 동 정녀"(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공인), "온전히 거룩 하신 분" (공인된 교리는 아니지만 동방의 전체 신자들이 널리 받아들이고 있음)이다.
동방 교회에서는 성모의 원죄 없는 잉태〔無染始胎〕를
부인하지는 않으나, 서방 교회처럼 신조화하지는 않았 다. 그리고 성모의 원죄 없는 잉태는 안나의 태중에 잉태 될 그 시각으로 한정하지 않고 원조의 범죄 때부터 새로 운 하와로 준비되어 왔고, 그것이 신약 시대에 가시화되 었을 뿐이라고 해석한다. 또한 서방 교회의 '성모 승천' 을, 동방에서는 '성모 안식' 으로 8월 15일에 기념하고 있으나, 이 축일 역시 교리로는 선포하지 않았다. 왜냐하 면, 성모 마리아가 임종한 후 하늘로 들어올려져 영광을 받은 것은 원죄 없는 잉태와 마찬가지로 교회의 내적 전 승이지 사도들의 공적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 므로 동방 교회에서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지극한 공경 을 하지만 서방 교회와 같이 공적인 신조로 선포하지 않 는다.
〔전례와 생활〕 교회법 : 성서와 초기 일곱 차례의 공의 회에서 결정된 사항들, 그리고 탁월했던 여러 교회 지도 자들의 글에서 발췌한 글들을 종합하여 《동방 교회법전》 을 만들었는데, 그 최종적인 형태는 9세기경의 포시우스 총대주교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옛날의 동로 마 교회는 물론 현대의 동방 교회, 그리고 각 지역의 단 위 교회들은 이 동방 교회의 일반 원리를 기초로 하여 상 황에 맞도록 응용하고 있다.
행정 : 동방 교회는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교회들로써 구성되며 지역 교회들은 교회의 공동적인 업무들에 있어 독자적인 발언권을 갖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콘스 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역사적 이유로 인해 (예루살렘이 나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등의) 다른 동료 총대주교 들 중에서 영예의 지위에 있지만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교회에 권한을 행사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동방 교회는 동방 가톨릭 교회를 제외하고는 로마 교황의 '명예적 수 위권' 만을 인정하고 '통치권적 수위권' 은 배척하고 있 다.
전례력 : 부활을 중심으로 하여 구성되며 서양 음력인 율리오력을 따라 축일의 날짜를 정한다. 전례력은 9월 1 일에 시작되며 '부활 대축일' 이외에 성모님의 축일과 주님의 축일로 나누어지는 12 대축일이 이어진다. 동방 에서는 성탄 대축일을 전통적으로 1월 7일에 지내왔으
나, 현대에 부적합한 면들이 드러나, 현재는 지역에 따라 그레고리오력을 받아들여 서방과 같이 12월 25일에 기 념한다. 한국 정교회도 12월 25일에 성탄 대축일을 지 내고 있다.
수도 생활 : 수도원은 본래 세속을 떠나 기도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나 은둔자들을 위한 은신처였으나 후에는 신앙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동방 교회 수도 생활의 중심 지인 그리스 아토스(Athos) 산의 수도원들은 남자 수도자 들만으로 수도원 공화국을 이루고 있는데, 그곳에 소장 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귀중한 필사본들과 종교적 유물 들로 인해 그 자체가 하나의 박물관을 이루고 있다. 아토 스 산은 10세기에 수도자들의 사회가 이루어졌고 14세 기 말경에는 많은 수도원들이 설립되어 콘스탄티노플 총 대주교의 관할하에 운영되게 되었다. 동방 교회의 수도 원 제도는 4세기경 성 바실리오가 제정한 규칙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서방 교회와 마찬가지로 수도자는 평수도
자와 성직 수도자로 구분된다.
성화(이콘) : 교회에서의 성화(聖畵)의 사용은 전통적 으로 불문율로 되어 있다. 7세기 때 성화상 파괴 논쟁을 겪은 후 제2차 니체아 공의회(787)에서는 "성인들에게 예배드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인들을 공경하기 위해 성 인들의 상(像)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오직 하느님만 이 예배의 대상이 되신다"라고 선언하였다. 따라서 성화 는 "우리가 표하는 공경이 우리 앞에 있는 화폭으로 가 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체로 가는 것이다"라고 한 성 바실 리오의 가르침처럼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상으로서, 신자 들로 하여금 하느님, 그리고 성인들과 대화할 수 있도록 도와 준다. 그러나 동방 교회에서는 서방처럼 입체적인 조각품을 볼 수 없고 대개 평면적인 그림(이콘)인데 간혹 반입체(半立體)의 부조가 허락되기도 한다.
전례와 성사 : 전례는 동방 교회의 신앙에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서방 교회와 마찬가지로 일곱 가 지의 성사를 보존하고 있는데, 서방 교회와 차이가 나는 독특한 면들은 다음과 같다. ① 세례 및 견진성사 : 초대 교회 관습대로 침례, 즉 세 번 물에 완전히 담그는 세례 성사를 베푼다. 세례 후 즉시 주교가 아닌 일반 사제가 견진성사를 집행한다. 곧 이어 새 영세자는 성체와 성혈 을 영한다. 어린 아기에게도 세례, 견진, 성체 · 성혈성사 를 동시에 집행한다.
② 고해성사 : 어린이들이 죄가 무엇인지를 알 만한 나이 대개 6~7세가 되면 고해성사를 받아 세례 후에 지 은 죄의 사함을 받도록 인도한다. 그러나 서방처럼 고해 실 등에서 거행하지 않고 지성소 앞의 성화상(聖畵像) 벽(iconostasis) 앞에서 공개적으로 거행한다. 사제와 고해 자는 서거나, 때로는 십자가와 복음서가 놓여져 있는 상 을 마주하고 함께 앉는다. 이어 사제는 이 고해성사에서 심판관은 주님이시고, 자신은 다만 증인이며, 하느님의 심부름꾼임을 명확히 강조한다. 그리고 고백을 듣고 질 문을 하거나 충고를 한다. 이어 고해자는 무릎을 꿇거나 머리를 숙이고, 사제는 머리 위에 영대를 얹고 사죄경을 왼다.
③ 성체 · 성혈성사 : 서방과 달리, 성찬 예식 때마다
양형(兩形)으로 성체와 성혈을 영한다. 따라서 '성체성 사 라기보다는 '성체 · 성혈성사 라 부른다. 서방처럼 연 령 제한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세한 사람이면 누구나 영 할 수 있다. 성찬 예식에 사용되는 제병은 누룩이 들어 있는 빵-누룩을 넣지 않는 극히 일부의 교회들도 있지 만-을 사용한다. 성찬 예식에는 네 가지가 있다. 요한 그리소스토모 성찬 예식은 평상 주일과 평일에 거행하 며, 대(大) 바실리오 성찬 예식은 1년에 10회 정도 거행 한다. 또, 사도 성 야고보 성찬 예식은 야고보 축일(10월 23일)에만 거행한다. 마지막으로 미리 축성된 성체의 성 찬 예배 예식은 사순절의 수, 금요일과 사순 제5 주간 목 요일, 그리고 성주간의 월 · 화 · 수요일에 거행되며, 그 전 주일에 봉헌 · 축성되었던 성체와 성혈을 영한다.
④ 혼인성사 : 혼인 예식 중에 신랑과 신부에게 화관 (주로 그리스 지역)이나 왕관(주로 러시아 지역)을 씌우고 예 식상을 세 번 돈다. 이는 그 신랑 · 신부가 성령으로부터 받는 특별한 은총을 의미한다. 화관은 기쁨의 관이며 동
시에 순교의 관이기도 하다. 즉 결혼은 양쪽 모두에게 헤 아릴 수 없는 자기 희생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 랑, 신부는 포도주를 같은 잔으로 세 번씩 번갈아 마신 다. 이때부터 '모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눈다' 는 의미 이다. 이어 사제는 이들의 손을 잡고 예식상을 세 번 돌 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모든 성인들과 신랑, 신부의 영적 인 결합을 기원한다. 한 번의 결혼만이 인정되며 이혼은 불가능하다. 다만 간음 등의 죄로 인한 이혼은 인정된다.
⑤ 성유성사(聖油聖事, 서방 교회의 병자성사) : 성수요 일에 연례적으로 집전되지만, 사목상 필요에 따라서 수 시로 집전되기도 한다. 특히 주교의 본당 사목 방문 때 (주로 사순절 기간)에 인근 사제들과 공동으로 집전된다. 주교를 포함하여 7명의 사제들과 부제들이 공동 집전하 는 이 성유성사 중에 7회의 사도경(Apostles, 서간경)과 7 회의 복음경(4복음)이 봉독된다. 성당 중앙에 설치된 작 은 제단 위에는 밀(없을 때는 밀가루)을 담은 그릇에 7개 의 촛불을 밝히고 한 복음 봉독이 끝날 때마다 촛불을 하 나씩 끈다. 촛불이 다 꺼지면 도유(기름 바름) 예식이 집 행되는데 사제는 병자들의 눈 · 코 · 입 · 귀 · 가슴 · 손· 발 등에 축성된 기름을 발라 준다.
⑥ 신품성사 : 동방 교회에는 세 가지 주요한 성직이 있다. 즉 주교, 사제, 부제이다. 그 외에 차부제와 독서 직의 소(小) 성직이 있다. 동방 교회에서는 아무리 숫자 가 많아도 한 예식 중에 부제, 사제, 주교 각각 한 명 이 상은 서품될 수 없다. 서품권은 주교만이 가지며 주교의 성성은 서방과 마찬가지로 세 명 이상의 주교의 참석하 에 거행된다. 동방 교회에서는 부제품을 받기 전에 혼인 여부를 결정지어야 하는데 독신자가 부제품을 받으면 서 품 후 결혼할 수 없으며, 기혼자가 서품을 받으면 기혼인 상태로 성무 집행을 할 수 있으나 부인이 죽으면 재혼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사제는 기혼자와 독신자(수도자)로 구별된다. 주교는 독신 성직자들 중에서 선발되며, 기혼 자인 경우는 상처(喪妻)한 자로서 일정 기간 수도 서원 을 한 사람이어야 가능하다. 《동방 교회법전》에서는 원 칙적으로 사제는 30세, 부제는 25세 이전에 서품될 수 없다고 규정되어 있다. 여성은 사제로 서품될 수 없지만 차부제로 서품되는 경우도 있다. 여성 차부제는 교리를 가르치는 일 이외에 교회의 여러 직무에 봉사하며 헌신 한다.
〔가톨릭과의 관계〕동방 교회는 서방 교회와 다른 여 러 가지 관습이나 교리, 수위권 등의 문제로 대립하여 왔 다. 그럼에도 양 교회는 서로의 필요성에 의해 수차에 걸 친 재일치의 길을 모색해 왔다. 그러나 그 노력 중의 하 나였던 1439년의 페라라· 피렌체 공의회가 결국 실패로 끝난 후 예수회, 도미니코회, 카푸친회 등의 선교 활동에 힘입어 동서방 그리스도교인들의 재결합은 어느 정도 성 공을 거두기 시작하였다. 1596년의 브레스트-리토브스 크 연합은 교황의 수위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가톨릭 신자인 왕의 명령으로 두 명의 주교를 제외한 모든 우크 라이나 교회 주교들이 복종함으로써 실질적인 동방 가톨 릭 교회가 시작되었다. 물론 그전에도 작은 교회의 단체
들이 서방 교회와 일치를 이루었는데,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 있는 이탈로 알바니아인들과 12세기에 로마 와 일치한 마로니트(시리아-안티오키아 전례를 따르는 레바 논의 그리스도교인들)와 시리아-레바논 지역의 다수의 아 르메니아인들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1551년에는 다수의 네스토리우스파 교인들이 로마와 일치를 이루었고, 1595년에는 루테니아인들(동부 중앙 유럽인들)이, 1698년에는 트랜실베니아의 루마니아인들 이, 1724년에는 말카파 교인들(비잔틴 전례를 사용하는 시 리아 그리스도교인들)이 서방 교회와 일치했다. 이 동방 가 톨릭 교회들에서는 성직자들의 혼인이 인정되며 그들 고 유의 전례도 인정받고 보존된다. 다만 교리와 교황 수위 권은 받아들여야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 1965)가 채택한 <동방 교회에 관한 교령>에서도 교황은 동방 교회들의 전례를 보존하겠다는 선임 교황들의 보장 을 재확인하였다. "모든 동방 교회들은 자기들의 정당한 전례 의식과 자기 생활 규범을 언제나 보존할 수 있고 또 보존해야 하며, ··· 그러므로 동방 교회 자신들은 이 모든 것을 충실히 지켜야 하겠고, 날로 더욱 깊이 인식하고 더 욱 완전히 실천해야 하며, 만일 시대나 사람들의 환경 때 문에 부당하게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였다면, 다시 선조 들의 전통으로 되돌아가도록 힘써야 한다" (6항). 교회는 더 나아가 교황 요한 23세(1958~1963)와 바오로 6세 (1963~1978)의 일련의 조치들을 통해 그 동안 소원하였 던 동방 교회와 재일치를 모색하게 되었다. 특히 1965 년 12월 바오로 6세 교황은 동방 교회의 아테나고라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 만나 1054년 이후의 서로의 파문을 풀고 화해하였다. 1979년 11월 30일 콘스탄티 노플 대주교 디미트리오스 1세를 만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로마 가톨릭 · 정교회 합동위원회' 를 구성하여 동방 교회와 신학 대화를 시작하기로 합의하였다. 이후 로 양 교회에는 일치를 위한 여러 위원회가 조직되어 신 학, 교리 등 서로의 차이와 공통점을 연구하며 재일치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동로마 제국 ; 동방 가톨릭 교 회 ; 러시아 정교회 ; 그리스 정교회 ; 비잔틴 교회)
※ 참고문헌  Anthony M. Coniaris, Introducing the Orthodox Church, Minnesota Minneapolis(강태용 교회 입문 신앙과 생활》, 성 요셉출판사, 1986)/ 강태용 편, 《東方正敎會》, 도서출판 익산, 1991/
정하권, <동방 정교회>, 《가톨릭 사전》 Alexander Schmemann, The Historical Road of Eastern Orthodoxy, Holt, Rinehart & Winston, 1963/ G.A. Maloney, Orthodox Churches, 《NCE》 10/ J. Meyendorff, The Ortho- dox Church : It's Past and it's Role in the World Today. [張兢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