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4년에 서방 교회와 결정적으로 갈라진 동방의 이 교회(離敎會).
가시적인 분열은 6세기 이후부터 이단들의 출현으로 시작되었다. 네스토리우스주의를 수용한 페르시아 교회 는 멀리 중앙 아시아 지역에까지 전파되었고, 아르메니 아인 · 시리아인 · 콥트인 · 에티오피아인들은 그리스도 단성설(monophysitism)을 수용하였다. 시리아인들 중 레 바논의 마론인들은 그리스도 단의설(monothelitism) 이단 에 합류하였다. 동방 교회에서 이교가 발생한 데에는 여 러 가지 정치적 · 종교적인 원인이 작용하였다.
동 · 서방 교회는 콘스탄틴 대제가 제국의 수도를 비잔
티움으로 옮긴(330) 이후 갈라서기 시작하였다. 로마는 가톨릭 교회의 본산이었으나 게르만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됨에 따라 동로마 교회 와는 차층 소원한 관계에 이르게 되었다. 더구나 이슬람 세력이 그리스도교의 근원지였던 팔레스티나 · 시리아 · 이집트 등을 정복하게 되자, 동로마 제국은 쇠퇴하게 되 었고 동시에 서구와 점점 더 멀어지게 되었다.
교회의 일치를 위협한 또 다른 원인은 이단의 발생이 었다. 특히 4세기의 아리우스주의, 5세기의 네스토리우 스주의와 단성설은 중동 지방의 분열을 가속화시켰는데 이 같은 현상은 5세기에 이미 고착화되어 여러 교회로 분열함에 따라 국가 단위의 교회로 구조화되고 말았다. 이집트 · 에티오피아 · 시리아 · 아르메니아에는 단성설 의 교회들이 생겨났고,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 등지에 는 네스토리우스주의 교회들이 생겨났다. 중앙 아시아로 진출한 네스토리우스주의 교회(景敎)는 멀리 몽고와 중 국에까지 전파되었다. 이렇듯 가톨릭 교회는 짧은 기간 동안에 소중하고 오래된 지역을 거의 잃게 되었다. 더욱 이 이슬람이 출현한 뒤부터는 동방을 모조리 잃다시피 하였다.
동로마 교회의 분열에 결정적 원인을 제공한 것은 교 황의 수위권 문제였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좌는 다 른 동방의 주교좌들에 비하여 뒤늦게 생겼지만, 서방의 로마처럼 동방 지역의 최고 주교좌임을 주장하였다. 이 미 381년의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통하여 로마 에 버금가는 명예적인 수위권을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주장은 알렉산드리아 같은 매우 오래된 교회들의 불만을 야기시켰다. 593년에는 총대주교가 자신을 제국의 총대 주교라고 칭하자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은 이를 오만한 칭 호라고 비난하면서 교황 자신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 라고 칭하였다. 이와 같이 베드로의 후계자를 구심점으 로 한 교회의 일치가 점차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성화상 논쟁과 카알 대제의 대관식, 그리고 서방 교회에서 니체 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 덧붙인 문구(filique) 역시 두 교회의 대립을 가중시켰다.
두 지역 교회의 구체적인 결별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 교의 인선을 둘러싼 문제와 발칸 반도의 선교 관할권 문 제로 인한 논쟁에서 시작되었다. 교황 니콜라오 1세 (858~867)와 그 후임 교황들은 이를 계기로 전세계 교회 에 대한 관할권을 확고히 하려 하였으나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였다. 포시우스(Photius) 총 대주교와 황제는 로마의 개입에 몹시 불만을 느꼈고, 노 르만(바이킹)족들의 이탈리아 남부 지역 점령에 따라 오 해와 불신이 증폭되어 가던 중, 1054년에 이르러 완전 한 결별이 이루어졌다. 새로 취임한 총대주교 미카엘 체 룰라리우스(Michael Caerularius)는 정치적인 야심가였다. 그리스 교회에 속한 것으로 간주되던 이탈리아 남부 지 역에 라틴 교회의 세력이 확장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그 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라틴 교회와 수도원에 비잔틴 전례를 강요하였다.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 위하여 교황 레오 9세(1049~1054)는 훔베르트 추기경과 몬테 카시노
수도원 원장인 프리드리히와 아말피의 주교 베드로를 교 황 사절로 파견하였다. 황제는 이들을 정중하게 맞아 해 결을 모색하였으나, 총대주교는 이들과의 접견을 회피하 였다.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시간만 허비하던 중 교황의 서거 소식에 접한 교황 사절들은 이를 빨리 해결 하기 위하여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제대 위에 총대주교 의 파문서를 올려 놓고 떠났다(1054. 7. 16). 이에 대한 맞 대응으로 체룰라리우스 총대주교는 시노드를 소집하여 파문서의 저자와 그 추종자들을 그 해 7월 24일 파문하 였다.
〔일치의 노력〕 당시에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아무도 인식하지 못하였다. 역사적으로 상호간의 논쟁과 화해가 반복되어 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러리라고 생각할 정도 였다. 실제로 1274년의 제2차 리용 공의회와 1439년의 피렌체 공의회를 통하여 화합과 일치의 노력이 이루어졌 으나, 신자 대중의 동의가 없는 상태에서 주로 정치적인 동기에서 이루어졌으므로 그 동기가 사라짐에 따라 무위 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교에 따른 여파는 심각하여 동방 지역의 교회는 각 민족들의 정치적 변화와 더불어 독자적인 총대주교좌 단위로 분열을 거듭하게 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일찍부터 이슬람 세력에 의하여 아시아와 동부 아프리카에 대한 선교의 길이 막힘으로써 가톨릭 교회는 7세기 이후 거의 1천 년 동안 아시아 민족들과
접촉할 기회를 잃어 유럽에 국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현대에 이르러 요한 23세 교황(1958~1963)의 일치 운 동으로 화해와 일치의 계기가 마련되었고, 이후 아테나 고라스 1세 총대주교와 바오로 6세 교황이 1964년과 1967년에 예루살렘과 로마에서 우호적인 회동을 가졌으 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날 무렵인 1965년 12월 7 일, 로마와 이스탄불에서 동시에 발표된 선언으로 화해 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 동방 교회 ; 포시우스)
※ 참고문헌 Hergenröther, Photius, Patriarch von Konstamtinopel, vol. 4, Regensburg, 1867~ 1869/ W. Norden, Das Papsttum und Byzanz, Berlin, 1903/ A. Michel, Humbert und Kerularios, vol. 2, Paderborn, 1924~1930/ M. Jugie, 《DTC》 14, pp. 1312~1468/ F. Dvronik, The Photian Schism, Cambridge, Eng., 1948/ -, The Eastern Schism, Oxford, 1955/ B.R. Ostrogorsky, Die Union Zwischer der Griechischen und der Lateinischen Kirche auf dem II konzil von Lyon, 1274, Bonn, 1964/ A. 프란츤, 최석우 역, 《교회사》, 분도출판사, 1988. 〔金學烈〕
동방 이교
東方離教
〔라〕Schisma Orientale · 〔영〕Eastern Sc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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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

아리우스파를 단죄한 제1차 니체아 공의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