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의식(儀式)인 전례는 3~5세기에 걸쳐, 특히 4세기 전반에 그리스도교 제국의 보호를 받으면서 눈부 시게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인 간의 심리적 법칙에 따라 각 지역의 고유한 문화에 맞춰 서로 다른 양식으로 제도화되었다. 곧 전례는 이러한 지 방화(地方化)의 과정을 거치면서 주요 도시들을 각각 그 들의 언어권에 따라 '아랍-시리아권, 그리스어권, 라틴 어권' 으로, 그리고 지정학적 위치에 따라 '안티오키아- 시리아, 알렉산드리아-이집트, 콘스탄티노플 및 그 근교 지역, 로마-중남부 이탈리아, 밀라노-북이탈리아' 등으 로 구분하여 그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여러 나라로 전파된 전례는 동일한 언어와 지역, 문화 안에서 다시 다양한 형태로 분류되어 각기 그 나름대로 의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중요한 중소 도시의 교회 들은 모두 중심 교회의 모범을 따르게 되었다. 따라서 동 방 전례는 사도 전승과 충분한 자유가 인정되는 배경 안 에서 총대주교좌의 전례를 따를 수 있었으며, 어떤 일정 한 지역 안에서 자체적으로 새로운 전례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I . 기원과 발전
동방 교회의 전례는 자주 '의례' (儀禮, ritus)라는 용어 와 함께 설명되었다. 그것은 로마 교회에서 예식 거행 때
나 특별한 방식의 제한된 의미 속에서 동방 전례 전통의 복잡함과 풍요로움을 정돈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된 것 이다.
동방 전례의 기원을 알기 위해서는 실제로 각 동방 교 회의 생활에 기초를 두고 있는 초기의 복잡한 규범과 제 도적 · 문화적 전통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우선 동 방 전례는 초창기 지역 교회에 기초하고 있는 교회 행정 의 내용을 요약한 옛 교부 법규(Ordinamento Patriarcale Antico)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처음에는 많은 주요 도시 주위에 집중화되었지만 나중에 점차 총 대주교좌 주위에 집중화된 것이다. 이러한 지역의 책임 자를 로마 제국 시대에는 '총대주교' (patriarca : 알렉산드 리아, 안티오키아,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 또는 '가톨리코 스 (katholikos : 동시리아의 셀레우치아-크테시폰테, 아르메니 아, 제오르지아)라고 불렀다. 일반적으로 총대주교는 주교 좌 설정, 주교들의 선출과 이동, 전례 생활의 확립(기도 양식이나 축일의 도입, 단식에 대한 날짜, 관습, 규칙 등), 성직 자와 평신도의 규율에 대한 자율권 등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고전 시대(3~4세기)〕 이 시기의 동방 전례는 지정 학적 위치에 따라 다음의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안티오키아-시리아 전례 : 안티오키아 역사의 영향을 받은 모든 지역에서 이 전례를 사용했다. 이 전례에는 유 대 계통과 헬레니즘적인 요소들이 집중되어 있는데, 그 것은 다시 '안티오키아-예루살렘' , '동시리아' (메소포타 미아, 페르시아), '아시아-비잔틴' 전례로 분류된다. 이 전례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문헌들 중 가장 오래된 것으 로 <디다케>(Didache), , <사도 전승>(Traditio Apostolica) , <사도 헌장>(Constitutiones Apostolorum), <주의 증언> (Testamentum Domini)과 몇 개의 안티오키아 형태의 성찬 기도 등이 있다. 그 밖에 안티오키아-예루살렘 지역에 대한 가장 오래된 교부들의 자료로는 요한 그리소스토모 의 세례 교리 교육(Catechesi), 몹수에스티아(Mopsuestia) 의 테오도로가 쓴 교리 강론과 에테리아 여행기(CC, 29~45), 예루살렘의 치릴로(Cyrilus)의 세례 교리 교육 과 신비 교육, 나르사이(Nasai)의 강론 등이 있다.
또 이 전례에서의 언어는 주로 서방 지역과 도시에서 사용된 그리스어와 에데사(Edessa) , 니시비(Nisibi)의 영 향으로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사용된 아랍어이다.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성찬 기도들은 내용이 짧고, 유대 기도 형태인 베라카(Berakah)에 나타난 구조 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교적 교의는 아직 크게 발전하 지는 못하였지만, 로고스(Logos)의 사명, 구원 역사, 하 느님의 영광, 교회론적 사상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위에 언급한 고대의 모든 문헌들은 전례 주년, 축일, 전례일, 성무 일도, 성사와 단식에 대한 규범, 교리 교육과 교계 제도에 대해 다른 방법 안에서 많은 내용들을 언급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 전례 : 고대 이집트 전례에 대한 자료들 은 안티오키아 전례의 자료들과 비교해 볼 때, 그 양이 생각보다 훨씬 적다. 이로 미루어 보면 알렉산드리아 교
부들은 교의에만 우선적으로 전념하였을 뿐, 전례 예식 에 대해서는 별로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으로 생 각된다.
4세기의 알렉산드리아 전례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문 헌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성 아타나시오의 친구인 트무이 스의 <세라피온 성찬 기도>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아토스 (Athos) 산의 사본이다. 발리제(Der Balizeh)의 파피루스 는 오늘날 드물게 남아 있는 이집트의 성찬 기도문 중에 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4세기에 쓰여진 이 성찬 기도문 은 글레멘스, 에르마, 세라피온과 디다케 같은 아주 오래 된 문헌들을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서, 본문에는 불변의 알렉산드리아 형태인 2개의 성령 강림 기도(축성 때와 성 찬 제정문 후의 일치 성령 강림 기도)가 포함되어 있다. 이 성찬 기도문의 형태와 선택은 매우 자유로우며, 성서 구 절과의 유사점이 없다.
〔결정적인 전례 형성 시대(5세기 이후)〕 동방 전례 그 룹들은 옛 교회의 지정학적 위치에 따라 형성되었으며 특별한 교회들(예루살렘, 가빠도기아)과의 관계 속에서 발 전되었다. 5세기 무렵부터 동방 전례는 새로운 변화와 일치하지 못하는 교의와 문화적 · 사회적인 여러 가지 복 잡한 문제 때문에 세분화되면서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동시리아(네스토리우스파라고 잘못 호칭됨)는 431년 에페소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메소포타미아와 페르 시아, 로마의 국경 지대에 고립되었다. 마찬가지로 서시 리아와 콥트, 아르메니아에서는 451년 칼체돈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점차 민족 언어를 사 용하여 그들만의 고유한 전통을 창조하였다. 신자들이 칼체도니아(동방 교회)와 반(反)칼체도니아(그리스도 단성 설) 중에 어느 것을 추종하는지에 따라 구분되는 이중의 계급 제도를 새로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비록 일 치하던 전례가 분열되었지만, 그 후에도 이 전례 그룹들 은 오랜 사목적 경험 또는 전통적인 교회 회의, 그리고 초기 4세기 동안의 신학적 문헌에서 유래하고 있는 특성 및 공통의 제도들을 계속 보존하였다.
안티오키아는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좌 들의 법적인 분열에도 불구하고, 그 전례적인 면에 있어 서 여러 교회에 끊임없이 작용하였다. 예루살렘도 아르 메니아, 제오르지아,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발전과 개혁 에 대해 계속해서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로마의 유명한 수도이면서 공의회의 굳건한 기반인 콘스탄티노플도 로 마 국경 지대의 여러 곳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처럼 5~6세기에 걸쳐 이교(離敎) 분열이 일어난 뒤에는 다 시 새로운 주요 전례 그룹들이 등장하였다.
동시리아 그룹 : 410년의 셀레우치아-크테시폰테 (Seleucia-Ctesifonte) 시노드로부터 자율권을 가진 동시리 아 그룹은 에페소 공의회를 배척하고, 484년부터 몹수 에스티아의 테오도로 교의를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대략 8세기 이상 지속되어 온 서시리아-헬레니즘과 비교하여 볼 때 교회론적 고립 상태에 있었지만, 그 후 그들의 계 속적인 전교 활동을 통해 열정적인 전례는 아시아의 여 러 국가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전례는 고전적 특성을
띠고 있다.
반칼체도니아 그룹 : 헬레니즘화된 셈족(유대인), 아르 메니아, 콥트, 에티오피아 문화의 서시리아로 구성되었 기 때문에 매우 세분화되었다. 제도나 교의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안티오키아의 영향을 받았지만, 전례에 있어서 는 비잔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또 점차적으로 민족과 동일시되면서 초기의 특징들을 계속 발전시켜 나갔다.
칼체도니아 그룹 : 콘스탄티노플 및 예루살렘 총대주 교좌, 그리고 안티오키아와 칼체도니아에 밀착된 알렉산 드리아 총대주교좌의 부류들을 포함하고 있다. 전례에 있어서는 대체로 비잔틴 전례적인 요소를 더 많이 갖고 있다.
II . 동방 전례의 주요 중심 지역
역사적으로 동방 전례가 확장되어 간 주요 중심 지역 은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에데사, 가빠도기아, 알렉산드 리아였다. 그 밖에 또 다른 중심 지역으로는 에페소와 타 크리트(Takrit), , 시리아의 거대한 수도원-성 요한 다마 세노가 살았던 팔레스티나에 있는 마르 사바(Mar-Saba) 수도원은 결정적으로 그리스 비잔틴 전례를 형성하였다 -과 콥트, 아르메니아, 제오르지아 등이 있었다.
예루살렘 : 예루살렘은 사도 전례와 함께 사도좌였다. 70년에 로마인들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모든 동방에서는 물론, 콘스탄티노플의 큰 영향을 받아 서방에서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전례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예 루살렘에서는 적어도 5세기까지 그리스 공동체뿐만 아 니라 시리아어를 사용하는 공동체, 그리고 작지만 기반 이 튼튼한 유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동시에 공존하였 다.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기초되었고, 서방 언어로 '거룩 한 무덤' 이라고 잘못 불려졌던 아나스타시스(Anastasis) , 골고타(Golgota)와 마르티리온(Martyrion) 부근, 예루살렘 에 위치한 다른 여러 교회들 즉 성 시온, 최후의 만찬 장 소(Cenacolo), 올리브 산 위의 임보몬(Imbomon), 예수 그 리스도가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추측되는 동굴 엘레오나 (Eleona), 예수의 죽음의 고뇌 장소인 게쎄마니 부근, 베 들레헴의 예수 탄생 교회와 베다니아에 있는 라자로 무 덤 위에 세워진 교회 라자리온(Lazarion) , 그리고 예수 그 리스도와 마르타가 만났던 장소 등등에서는 교회의 풍부 하고도 화려한 전례를 창조하고 구성하였다. 이와 같이 예루살렘에서는 다른 모든 그리스도교가 이끌어 내거나 모방할 수 없는, 예를 들면 '성주간' , 부활의 장소인 아 나스타시스에 위치한 '대성전 봉헌 축일' , 주님의 영광 스러운 '십자가 축일' 등과 같은 전례 주년이 거의 결정 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밖에 예루살렘에서는 3세기 말경에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되는 <성 야고보 성찬 기 도>가 사용되었다.
안티오키아 : 안티오키아는 동로마 교회 소속의 유명 한 도시이다. 사도 시대의 전교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이 니시비와 에데사를 향해 페르시아의 전 지역에 전교하였
던 것에 비해, 안티오키아는 가빠도기아 · 콘스탄티노 플 · 아르메니아 · 제오르지아 등에 영향을 주었다. 이 지 역에서는 구조적 · 논리적으로 보다 완전한 <안티오케 나>라고 부르는 성찬 기도를 사용하였다.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로 불린 성 요한 그리소스토모(389)가 받아들인 그리스어로 된 <사도들의 성찬 기도>의 기원은 대략 3세 기 말경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것은 9세기부터 는 <성 요한 그리소스토모 성찬 기도>라고 불렸는데, 오 늘날 비잔틴 교회에서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리스-헬 레니즘 문화의 국제적인 도시인 안티오키아에서 많은 시 민들이 그리스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가빠도기아 : 가이사리아(Caesarea)의 수도로, 가빠도 기아 교부들의 신학에 큰 영향을 끼친 성 바실리오 예식 을 거행하는 장소이다. 가빠도기아는 때때로 콘스탄티노 플 전례 자체에 영향을 준 안티오키아에 의해 하나의 고 유한 전례를 이루었다.
알렉산드리아 : 안티오키아와 함께 광대한 전례 중심 지였던 알렉산드리아는 모든 외부의 영향에 대해 개방적 이었다. 따라서 매우 넓은 지역에 새로운 전교의 중심지 가 될 수 있었다. 이미 4세기 중엽의 성 아타나시오 시대 에 남부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지역에까지 전교하였다. 또한 안티오키아처럼 교리 교육과 신학 학파로 유명한 장소였으며, 사상과 정신 문화에 있어서도 거대한 못자 리 역할을 하였다. 전례에는 당연히 그리스어가 사용되 었지만, 6~7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 그리스도 단성설에 적응하기 위하여 부분적으로 대중 언어인 콥트어를 사용 하게 되었다.
그리스어, 콥트어, 아랍어는 오늘날에도 알렉산드리아 의 옛 전례 언어로 남아 있다. <성 마르코 전례>라는 새로 운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는 전형적인 알렉산드리아의 성 찬 기도는 대략 3세기 말경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셀레우치아-크테시폰테 : 5세기부터 네스토리우스파 교회의 총대주교인 가톨리코스의 좌(座)였다. 이 교회는 무엇보다도 정치적 이유 때문에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좌 의 예속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했으며, 고유법적인 제도가 주어져야 했다.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는 고대의 제도 안에서, 에우프라 테(Eufrate)에서 북경(北京)과 자바에 이르기까지 매우 넓은 영토를 복음화하였다. 네스토리우스파의 전형적인 성찬 기도는 성 토마스 사도의 두 제자라고 생각되는 <마르 아다이(Mar Addai)와 마르 마리(Mar Mari)라는 이 름으로 불려지고 있는데, 이들은 가톨릭 칼데아와 말라 바르 성찬 기도와 공통적이다. 이 성찬 기도의 구조는 모 두 초기 형태로서 그 시기는 3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
Ⅲ . 전례 그룹
서로 다르면서도 일치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는 동방 전례는 다음과 같은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두 가지 전 례 그룹은 안티오키아 형태(서시리아, 동시리아, 비잔틴, 아
르메니아)와 알렉산드리아 형태(콥트, 에티오피아)로 나눌 수 있으며, 성찬 기도의 기본적 구조의 근거에 따라 다음 세 가지 전례 그룹으로 구분된다. 안티오키아 형태(서시 리아, 비잔틴, 아르메니아), 알렉산드리아 형태(콥트, 부분적 으로 에티오피아), 동시리아 형태(동시리아, 즉 마르 아다이와 마르 마리). 또 동방 전례 그룹 분포의 역사적 · 지리적 도 표는 위의 표와 같다.
동방에서는 의례와 전례가 항상 일치하고 있다. 현재 까지의 동방 전례는 안티오키아 그룹과 알렉산드리아 그 룹으로 크게 구분되는데 이를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안티오키아 그룹 : ① 동시리아 : 네스토리우스파, 칼 데아(가톨릭), 말라바르(가톨릭) ② 서시리아(시리아 안티 오키아 의식) : 시리아 야곱파(그리스도 단성설), 시리아 안 티오키아(가톨릭), 인도의 시리아 야곱파, 말란카르파(시 리아 가톨릭). ③ 서시리아(마론 의식) : 시리아 마론파. ④ 비잔틴 : 그리스 비잔틴, 슬라브 비잔틴, 아랍 비잔틴(또 는 멜키트), 알바니아 비잔틴, 우크라이나 비잔틴, 디아스 포라 비잔틴. ⑤ 아르메니아(아르메니아 의식).
알렉산드리아 그룹(콥트 의식) : ① 콥트(그리스도 단성 설, 또는 가톨릭), ② 에티오피아(그리스도 단성설, 또는 가톨 릭) .
IV . 각 전례에 대한 설명
〔안티오키아 그룹〕 동시리아 : 동시리아 전례를 따르 고 있는 여러 지역에 그리스도 신앙이 전파된 것은 신앙 의 초기 여명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리고 메 소포타미아나 인도에 있어서 그 기원은 토마스 사도와 관련이 있다. 이 교회 형성에는 지리적 조건 이외에도 시 리아어가 많은 영향을 끼쳤다. 안티오키아에서 파견된 선교사들(그리스인, 그중에서도 특히 시리아어를 사용하는 사 람들)은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파하였다. 그러므로 '동방' 또는 '페르시아'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네스토리우스파, 칼데아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교 회는 약 5세기 동안이나 안티오키아 모(母) 교회와의 관 계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페르시아 교회는 페르시아인들의 박해, 정상적인 관계 유지의 어려움, 그리고 디아스포라(das- pora) 상황에서 살고 있었던 교회의 내적 감독상의 어려 움 때문에 일련의 시노드 결정에 따라 서방 교회, 즉 안 티오키아 교회로부터 영원히 분리되었다. 그 시노드는 다음과 같다.
① 셀레우치아-크테시폰테 시노드(410) : 이사악 (Ishaq) 주교의 주재로 이루어진 시노드로서 제1차 니체 아 공의회에서 결정된 사항들이 채택되었다. 수위(首位) 대주교좌가 새로 셀레우치아-크테시폰테에 정착하였으 며, 따라서 페르시아 주교들은 유일하게 안티오키아와 관계를 가졌던 가톨리코스라는 수위 대주교의 지시를 따 라야 하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셀레우치아-크테시폰 테 시노드는 동시리아의 행정, 윤리상의 혼란 때문에 서 방 교회로부터 자극을 받았다. 따라서 콘스탄티노플에서 파견된 마이페르캇(Maiferkat)의 주교 성 마루타(Maruta) 가 주재하게 되었다. 또한 페르시아 왕은 여러 가지 정치 적인 상황 때문에 가톨리코스에 의해 결정된 사항들을 잘 따랐으며, 가톨리코스에게 세속적인 권력을 부여하기 도 하였다.
② 마르갑타(Markabata) 시노드(424) : 가톨리코스 다 드-이스호(Katholikos Dad-Isho')의 주재로 이루어진 시노 드. 서방 교회는 더 이상 동방 교회의 문제에 개입할 수 없으며, 현재의 가톨리코스만이 유일한 총수이자 절대적 인 총대주교라고 언급하면서 독립을 선언하였다.
③ 벳-하팟(Bet-Hapat〔Grundishapur〕) 시노드(484) : 바 르-사우마(Bar-Sauma)의 주재로 이루어진 시노드. 네스 토리우스파의 교의를 받아들이고 있는데, 실제적으로는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 교의를 받아들였다. 따라서 에 페소 공의회나 칼체돈 공의회와 관련된 서방 교회의 교 의들을 부정하였으며, 그와 함께 사제 독신제를 폐지하 였다.
④ 셀레우치아(Seleucia) 시노드(486) : 벳-하파 시노드 에서 언급한 모든 사항들을 보다 확고하게 결정하였다.
⑤ 바바이(Babaj) 총대주교가 주재한 시노드들(498, 499) : 네스토리우스파 교회의 위치를 보다 강화하였다. 동시리아 교회는 그들의 전교 확장에 있어서 확실히 자 유로워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모든 유물과의 관계를 상실하였다. 그 후 동시리아 교회는 내 적으로 급속하게 발전할 수 있었는데, 6~7세기경부터 는 그 발전이 멈추어 더 이상 변화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
전교의 필요성 때문에 반드시 그 지방의 백성들이 사 용하는 언어로 성서와 전례서들을 번역해야만 했던 상황 안에서,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는 교회 안에서의 복음화와 토착화에 독특한 반응을 보였다. 동시리아 전례는 급격 하게 발전하여 이미 5~6세기에 그 전례의 양식이 갖추 어졌으며, 실제적으로 오늘의 형태로 자리잡았다. 따라 서 이 전례에는 아직까지 알려져 있지 않은 자료들과, 또 매우 오래되고 중요한 자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 전례의 가장 오래된 고전적인 자료는 <아다이와 마리 (Addai Mari) 성찬 기도>인데, 옛 필사본들에서 나타나 고 있는 성찬 기도의 구조를 살펴보면 축성 기도(성찬 제 정문)의 형태가 없다. 비록 동시리아 교회는 지리적으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떨어져 있었지만, 서시리아와 그리 스-비잔틴의 영향을 비교적 많이 받았다. 교회의 내부에 는 다른 장소와 분리된 지성소(至聖所)가 있었고, 그 가 운데에는 성문(聖門)이 설치되었다. 동시리아 전례의 성 가들은 그 음량이 매우 풍부하면서도 오래된 것이었다.
16세기의 동시리아 교회에서는, 라반 호르미즈드 (Rabban Hormizd)의 유명한 수도원의 아빠스이며 네스토 리우스파 총대주교로 선출된 마르 요한 술라쿠아(Mar Johannan Sulaqua)가 1552년에 비로소 로마와 화해를 하 는 일이 있었다. 로마는 그들과의 통교(通交)를 위해서 네스토리우스파 그룹들을 분리하였다. 로마와 화해하고 난 뒤의 동시리아 전례를 '칼데아' 라고 하는데, 이 칼데 아 교회는 동시리아의 길고도 복잡한 변화의 결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밖에 매우 복잡한 변화가 있었던 인도 교회의 상황 을 살펴볼 때, 메소포타미아 교회는 지리적으로 인도에 가까웠다. 따라서 동시리아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인도 에 속하게 되었으며, 인도 교회는 모두 네스토리우스파 가 되었다. 그러나 16세기에 포르투갈인들이 인도에 들 어와서 말라바르(Malabar) 해안의 인도 그리스도인들을 라틴화하기 시작하였다. 1599년 예수회 회원들에 의해 주재된 디암페르(Diamper)의 시노드는 시리아 전통의 옛 전례서들을 폐기하면서 극단적으로 라틴화된 상태를 받 아들여 혼합 의식을 만들어 냈다. 일반적으로 '시리아 말라바르' (Siro malabarese)라고 알려진 예식도 실제로는 이런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결과이다.
1907~1908년 사이에는 시리아에 있는 일부 말라바 르인들이 네스토리우스파의 공동체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미 1653년과 1751~1771년 사이에 말라바르 그리스 도인들 중 일부분은 디암페르 시노드에서 결정된 사항들 에 대해 반대하고 있었으며, 그 대신 시리아 안티오키아 야곱파 총대주교좌를 중심으로 한 신앙과 예식을 받아들 였다. 그러나 그들 중에 일부는 곧 이어 1772년에 '시리 아 독립 교회' 로서 행동을 취하였다.
1840~1880년 사이에 영국 개종주의의 영향을 받은 인도의 야곱파에서는 마르-토마' (Mar-Thomit) 교회 또 는 '성 토마의 시리아 교회' 가 분리되었다. 그리고 다시 1961년에는 이 교회에서 급진적인 프로테스탄티즘을 받 아들인 '성 토마 복음 교회' 가 분리되었다. 결국 1930년 에 인도 야곱파에서는 마르 이바니아스(Mar Ivanias)라는 고위 성직자의 주도로, 로마와 일치하는 동시리아 안티 오키아의 '말란카르' (Malankarese) 의식이 형성되었다. 인도에서의 동방 교회의 복잡한 양상을 도표화하면 다음 과 같다.
처음에 동시리아 전례에서는 <12 사도 성찬 기도>를 사용하였으나 에페소 공의회 이후 네스토리우스주의에 기울어지면서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와 네스토리우 스〉라 불리는 성찬 기도를 사용하였다. 성서 독서는 성 찬의 전례와 일치되면서 모두 4개의 독서(2개의 구약과 성 바오로 서간과 복음)를 사용하고 있다. 동시리아 교회가 로
마 교회와 일치되고 나서부터 그 전례는 칼데아 전례라 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그것은 라틴 예식에서 사용하는 세례 · 견진 · 고해 · 병자 성사 등의 여러 가지 성사 양식 을 도입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처럼 라틴화된 상황 안 에서 동시리아 전례는 고전적인 성격과 간결성, 세 가지 시간(저녁, 밤, 아침) 기도에 대한 상징적 의미, 에페소 공 의회 이전의 마리아에 대한 교의의 특징 등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다른 전례들과 비교하였을 때, 순교자들을 기 념하는 의미가 계속적으로 훨씬 더 강조되었다.
인도 역시 라틴화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전례에 라틴적 인 요소가 많이 도입되었다. 즉 라틴 예식에서의 제의, 제구, 기도 방식, 누룩 없는 빵, 신자들의 단형(單形) 영 성체 등을 도입하였으며, <12 사도 성찬 기도>와 <아다 이 마리 성찬 기도>에 라틴적인 요소를 삽입하였다. 또 한 성직자들을 위해 성무 일도를 개인적으로 바치게 하 였다. 그 밖에 전례에서는 마라야람(Malayalam)이라는 지역 언어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실제적으로 중요한 전례 개혁이라 할 수 있다.
서시리아 : 5세기 무렵에 일어난 그리스도에 대한 논 쟁으로 교회 안에서의 분쟁은 매우 급진적으로 전개되었 다. 따라서 교회는 에페소 공의회(431), 칼체돈 공의회 (451)에서 결정된 그리스도론의 수용 여부에 따라 구분 되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파들은 이 두 공의회를 모 두 배척하였고, 그리스도 단성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칼체돈 공의회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교(離敎) 동기는 무엇보다도 국가적인 상황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좌의 많은 그리스도교 단체들은 그리스인들에 반대하여 시리아 문화와 언어를 사용하였으며,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그리스인들에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서로마 제국은 실제적으로 그리스 문화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2개의 본성을 잘못 분리하여 그중 에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간성이 매우 강조되자, 그리스 도 단성설로 기울어져 고유한 제도를 가진 교회가 성립 되었다. 처음으로 동일한 장소(좌)에 두 명의 주교(가톨릭 주교와 그리스도 단성설을 인정하는 주교가 각각 1명씩)가 있 었다. 그리스도 단성설 주교인 야고보 바라디(Ja'aqov Ba- radi, +578)는 '야곱파' 라고 불리는 신자들을 위해 새롭고 많은 교계 제도들을 성별하였다.
17세기 이후 시리아 그리스도 단성설의 일부 그룹들 은 로마와 일치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는데, 오늘날 이 부 류를 시리아 안티오키아라고 부른다. 안티오키아의 옛 총대주교좌는 공식적으로 그리스어를 사용하였지만, 점 차 많은 그리스 문헌들이 시리아어로 번역되기 시작하였 다. 따라서 시리아어는 무슬림의 침입 후에 공식적인 언 어로 인정되었으며, 동시에 아랍어가 전례에 새로 도입 되기도 하였다.
서시리아 전례(안티오키아)는 안티오키아-시리아 총대 주교좌의 고유한 것이었는데, 여기에 시리아 정교(그리스 도 단성설)와 시리아-안티오키아(가톨릭)가 다시 세워졌 다. 안티오키아 의식은 고대의 자료들과 함께 음악적으
로 풍부한 유산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와 함께 다른 여러 문화에서도 많은 유산을 받아들여 그리스도교 세계에 영 향을 주었다. 서시리아 교회는 그 내부가 구멍이 뚫린 벽 으로 닫힌 지성소, 금실로 수놓은 제단, 그리고 장엄한 의식을 위한 제단으로 이루어졌다. 특별한 형태로 건축 된 이 교회 안에서의 모든 의식은 오직 제단에서만 거행 되었다.
서시리아 전례에 있어서 가장 특징적이면서도 많이 사 용된 성찬 기도는 <성 야고보 성찬 기도>이다. 이 기도는 원래 그리스어로 되었는데, 6~7세기 이후부터 시리아 어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시리아 성찬 기도는 70개 이 상으로 알려져 있는데, 현재 사용되고 있는 미사 경본 안 에는 약 7~12개의 성찬 기도가 있다. 그리고 성서 독서 는 모두 6개(3개의 구약, 사도행전이나 서간 중 1개, 그리고 바오로 서간, 복음)로 이루어져 있다. 성무 일도는 전례 문 학적인 구성에 있어서 조금 다른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 기 때문에, 모든 전례에서는 일반적으로 시편을 사용하 고 있다. 서시리아 전례의 예식들은 성령의 역할이 매우 강조되고 있다. 서시리아 교회는 오늘날 시리아 정교와 시리아 가톨릭으로 나누어지는데, 대부분이 시리아 정교 에 해당된다. 그리고 남 인도에는 17세기까지 시리아 정 교가 있었는데, 1932년에 로마와 일치를 이루면서 시리 아 말란카르파라 불리는 교회가 창설되었다.
마론파 : 안티오키아의 자치적인 분파인 마론파 교회 는 콸라엣 알 마디크(Qala'at al Madiq) 수도원 주위나 아 파메아(Apamea) 근처 오론테(Orone)의 높은 계곡에 위 치한 성 마론(Marone) 수도원 주위에서 형성되었다. 그 곳을 중심으로 해서 칼체도니아 신앙을 충실히 따르는 시리아 그리스도인을 하나로 일치시켰으나 바로 이 때문 에 그들은 그리스도 단성설로부터 큰 박해를 받았다. 그 결과 마론 의식과 민족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 후 무슬림
으로부터 박해를 받아 레바논으로 피신하였다. 1216년 부터 마론인들은 십자군 전쟁 시기에 로마 교회와 계속 적으로 교류하여 차츰 라틴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이 과 정 중에 전례의 개혁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특히 전례 력과 전례복, 기도 양식 등은 라틴 교회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았다. 제단 앞에 있었던 칸막이가 없어졌고, 성찬 의 전례에서 사용하는 빵도 누룩이 없는 것으로 바뀌었 다. 사제들은 파이노(phaino) 대신에 라틴 제의를 걸쳤고, 성유는 라틴 교회에서처럼 올리브 기름에 발삼향을 혼합 하여 사용하였다. 또 1592년부터 아다이 마리와 관계가 있는 <성 베드로의 세 번째 성찬 기도>라고 불려진 옛 성 찬 기도가 없어지게 되자, 18세기부터 <로마 교회의 성 찬 기도>라는 이름의 로마 전문을 다시 만들어 사용했다.
성사 집행에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십자 표시를 많이 하고, 분향과 도유(塗油)를 하였다. 그리고 성가는 전례 후렴이 매우 발달하였다. 시간 전례는 서시리아와 비교 해 볼 때 단순화되었으며, 여러 전례 시기에 다양한 내용 들이 별로 준비되지 않았다. 이것은 오늘날 단지 영적 독 서 책이나 매우 간단한 평일 전례서로 대치되었다. 그리 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미사 전례에 있어서 평신도와 성직자가 공동 참여하는 형태의 대화 미사가 여러 지역에서 도입되었다. 전례에는 주로 아랍어가 사 용되었는데, 간혹 시리아어를 사용하는 지역이 있기도 하였다.
비잔틴 : 비잔틴 전례는 팔레스티나, 안티오키아 그리 고 가빠도기아 등지에서 사용된 전례에서부터 비롯된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안티오키아(오늘날 터키 동남부 지방) 그리스인들의 전례에 비잔틴적인 요소가 많이 있 었으며, 그 후에 비잔틴 제국의 수도였던 비잔티움(콘스 탄티노플)에서 더욱 발전되고 완성되었다. 따라서 그 전 례의 명칭도 '비잔틴 전례' 라고 붙은 것이다.
이 비잔틴 전례는 황제의 영토 확장에 따른 제국의 팽 창과 함께 지중해 연안, 다뉴브 강 하류 지역, 발칸 반도 의 국가들, 그리고 러시아를 포함한 슬라브 민족 국가에 까지 전파되었다. 그 후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등지 에서 교회의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하자 상대적으로 비잔 틴 교회는 그 영향력이 더욱 커졌으며, 결국 비잔틴 교회 는 여러 독립 교회들의 중심이 되었다. 마침내는 비잔틴 제국의 광대한 영역을 포괄하는 하나의 새로운 전례로서 비잔틴 전례' 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어만을 사용하던 이전까지의 관습은 상실되고, 비잔틴화된 여러 민족의 모국어를 자체 언어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9~11세기까지 콘스탄티노플에서 슬라브 국가로 파견 된 선교사들은 전례 언어로 그리스어 대신에 고대 슬라 브어를 사용하였다.
서부 시리아 역시 그리스어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대신 그들의 모국어인 시리아어를 11~17세기까지 사용 하였고, 그 후에는 다시 아랍어를 채택하였다. 러시아 교 회에서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그리고 게르만 민족의 영토 일부를 포함한 발틱 국가에 대해 전교하면서 그 지 방의 언어를 직접 전례 언어로 사용하였다.
러시아에서는 황제가 스스로를 차르(tsar)라고 불렀고, 또 여러 가지 비잔틴적인 제복과 의식 등을 도입하여 모 스크바를 제3의 로마, 즉 비잔틴 제국의 계승 도시로 선 포하였다. 그 후 1589년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모스크 바 대주교를 독립, 총대주교로 승격시켰다. 그 결과 비잔 틴 전례는 러시아 정교회와 그리스 정교회라는 두 가지 핵심으로 구성되었다.
비잔틴 전례는 신학적으로 그 의미가 깊을 뿐만 아니 라 매우 열성적이다. 따라서 모든 예식이 항상 장엄하고 엄숙하게 거행된다. 의식에 함께 참여하는 주례자, 부제, 교우들은 각자 자기 직분에 따라 반드시 노래로 예식을 거행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의식을 공동으로 집전하였 으며, 또 성사의 집행이나 성무 일도에 있어서도 '사랑 과 일치' 의 의미로 공동 집전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비잔틴 교회의 특징은 풍부한 '이코노스타시스' (icono- stasis)인데, 예식 안에서 감추어진 신비가 바로 이 이콘 들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상징적인 의미로 축일이나 평 일에 항상 빛이 밝혀져 있는 것도 비잔틴 예식의 또 다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는 항상 분향을 많이 하고 초를 태우는 것이다. 비잔틴 전례의 성찬 기도 로는 <성 바실리오 성찬 기도>와 <성 요한 그리소스토모 성찬 기도>가 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성 바실리오 성 찬 기도〉는 중세에 폐지되었다.
오늘날 약 200만 명의 신자들이 비잔틴 전례를 따르
고 있으며, 실제적으로 거의 전세계에 이 전례가 전파되 어 의식이 거행되고 있다.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 안티 오키아,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좌에서는 물론이고, 그 밖에 그리스와 크레타(Creta) 키프로스, 러시아, 불가리 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폴란드, 알바니아, 체코슬로바 키아, 제오르지아, 핀란드, 헝가리, 에스토니아, 레토니 아,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레바논, 이라크, 페르시아, 중국, 일본, 극동 아시아 등지에서도 비잔틴 전례에 따라 예식이 거행되고 있다.
아르메니아 : 3세기 무렵에 이미 성 제오르지오(St. Georgius)는, 가빠도기아의 가이사리아에서 이주하여 아 직 통일되지 않은 그룹들 사이에 아르메니아 교회를 형 성하였다. 아르메니아 교회는 안티오키아와 콘스탄티노 플, 그리고 동시리아의 영향도 함께 받았다. 드빈(Dvin) 아르메니아 교회 회의는 506년에 그리스도 단성설을 받 아들였다. 아르메니아 전례는 비잔틴 전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그 전례 건축에 있어서도 대체로 엄격하고 엄숙하였다. 그리고 제의의 종류, 전례 동작과 성가 등도 다양하였다. 아르메니아 전례의 몇 가지 특징 들은 성작에는 포도주만 붓고, 누룩 없는 빵을 사용하며, 사제들이 공동으로 미사를 집전하고, 성탄 축일과 예수 의 세례 축일을 같은 날에 거행하고 있다는 점 등이다.
〔알렉산드리아 그룹〕 콥트 : 본래 콥트라는 말은 아랍 어로 이집트인이라는 의미의 '알-굽트' (al-gubt)에서 유
래하였다. 초기 사도 시대 교회와 그리스 언어, 전례를 다루고 있으며, 여기에 또 알렉산드리아의 글레멘스, 오 리제네스, 성 아타나시오, 성 치릴로와 여러 다른 인물들 이 관련되어 있었다. 특히 콥트어를 사용하는 이집트 백 성들과 헬레니즘을 반영하는 문화 사이에는 항상 긴장감 이 유지되고 있었다.
4세기의 그리스도교론적 논쟁들은 분열의 원인이 되 기 시작하였다. 성 치릴로에 충실한 이집트 교회의 대부 분의 지역에서 칼체도니아에 반대하였던 것이다. 마찬가 지로 그리스도 단성설을 칼체도니아에 대한 이교의 뜻으 로 받아들였다. 결국 콥트, 즉 이집트인들과 그리스도 단 성설이라는 말은 동의어가 되었다. 시리아 그리스도 단 성설은 콥트인들에게 영성의 형태만이 아니라 저술의 성 과를 높인 시리아의 수도 정신에 있어서도 그 영향을 주 었던 것이다.
오늘날 콥트 교회는 신자수를 다 합친다고 해도 400 만 명 정도밖에 안되지만, 내적으로는 깊은 영성을 가지 고 있다. 콥트 전례에서는 그리스어 · 콥트어 · 아랍어를 사용하는데, 특히 그중에서도 콥트어와 아랍어를 더 많 이 사용하고 있다. 콥트 전례는 오랫동안 그리스의 영향 을 받았지만, 그 외에 시리아 그리스도 단성설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콥트 교회 안에는 신자석(navata)과 벽으 로 분리되어 있는 지성소가 마련되어 있는데, 그곳은 다 시 성직자석 · 귀족석 · 남자석 · 여자석 등 그 직급에 따 라서 앉는 자리가 구분되어 있다. 또한 성찬의 전례에 있 어서는 <성 바실리오 성찬 기도>가 사용되고 있다. 콥트 음악은 매우 풍부하며, 거기에는 많은 오래된 곡목들이 들어 있다. 또 콥트 의식에는 '향의 예식' 과 같은 특별한 형태와, 성사 자체의 실존적 부분인 참회의 전례와 유사 한 여러 형태들이 있다.
에티오피아 : 에티오피아 전례는 다른 전례와 비교해
볼 때, 그 기원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게 된 이 유로는 에티오피아 교회의 초기 역사가 서방과의 관계에 서 비롯된 인식 부족, 시대 안에서 분리되어 있고 접근하 기 어려운 상황, 그리고 특히 16세기에 에티오피아 그리 스도교 문화 유산에 대한 무슬림의 계속적인 파괴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 교회의 역사와 활동은 매 우 주목할 만한 것이다. 에티오피아에는 4세기 무렵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파견된 시리아 선교사들에 의해 처음 복음이 전파되었다.
최근에 와서 에티오피아 교회는 현대 과학의 모험적인 태도와 가톨릭 선교사들의 노력 때문에 비교적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에티오피아 교회는 영적인 지도자를 파견 한 알렉산드리아의 콥트 교회에 대해 법적으로 의존하였 다. 그러나 1951년부터 에티오피아 교회에서 자체적으 로 고유의 지도자를 선출하기 시작한 이후, 교회 안의 모 든 남녀 수도회는 매우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성직자의 경우에는 아직까지 예전 수준에서 별로 많이 발전하지 못하였지만, 대신 서방 교회와의 문화적 접촉을 통해 많 은 질적인 개혁을 이룩하였다. 에티오피아 교회는 무슬 림의 파괴로 인해 많은 필사본으로 된 자료들을 보존하 지 못하였는데, 다른 교회와는 달리 에티오피아 전례에 서는 위경(僞經) 텍스트를 많이 사용하였다. 그 밖에도 많은 성가곡들이 사용되었지만 아직까지 전례적인 의미 에서의 학문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에티오피아 성찬의 전례는 교회 내부의 중앙 제단과 외부 베란다로 둘러싸인 중심 공간, 그리고 둥근 나무로 이루어진 교회 공간에서 거행되고 있다. 회중은 창문을 통해 각 전례의 부분을 볼 수 있는데, 성가와 기도문들을 직접 들을 수 있는 베란다의 바깥쪽에 서 있는다.
전례 언어로는 아직까지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옛 에티오피아의 셈족 언어인 계즈(Ge'ez)가 사용 되고 있다. 전례가 거행되는 동안 즉석에서 성가를 부를 수 있으며, 이집트인들이 처음에 사용하였던 시스트로 (sistro)와 탐부리(tambun) 같은 악기들, 그리고 그와 함 께 옛날 전례 때의 춤들도 아직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또한 성찬 전례에 있어서는 모두 20개의 성찬 기도 중에 14개만이 사용되고, 그것은 또 영어로 출판되기도 했다. 이 성찬 기도들 중에 일부는 아마도 이집트의 시리아 수 도자들에 의해 도입되었을 것이다. 그 밖에 <사도 전승> 과 〈주님의 증언>을 새롭게 다듬은 두 개의 성찬 기도도 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모든 성찬 기도들 앞에 에티오 피아 전통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는 길고 복잡한 의식인 <전 성찬 기도>가 시행되고 있다. (⇦ 바실리오 전례 ; → 동방 교회 ; 비잔틴 전례)
※ 참고문헌 A. Adam, Corso di liturgia orientali, Queriniana, Brescia, 1985/ AA.VV, Anammesis 2 : La liturgia, panorana, storico generale, Marietti, 1978/ - Nuovo dizionario di liturgia, Paolina Roma, 1984/ A.G. Martimort, L'église en priére I : Principes de liturgie, Paris, 1983/ I.H. Dalmais, Le Liturgie Orientali, Queriniana, Brescia, 1985. 〔鄭義哲〕
동방 전례
東方典禮
〔라〕liturgia orientalis · 〔영〕eastern litur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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