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동 본당

東山洞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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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소속 본당. 전남 여수시 공화동 1117 소 재. 1934년 6월 29일에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평화의 모후. 관할 구역은 동산동, 공화동, 관문동, 수정동, 덕 충동, 종화동, 고소동, 중앙동, 군자동과 여천군의 돌산 읍, 남면. 〔교 세〕 1969년 1,222명, 1972년 1,300명, 1975년 1,420명, 1980년 1,684명, 1984년 1,857명, 1990년 2,367명, 1994년 2,722명. 〔역대 신부〕 초대 이민두(李敏斗) 타데오(1934. 6~1954) , 2대 브랜든(P. Brandon, 부) 파트리치오(1954~1961. 8), 3대 던(J. Dunne, 도) 요셉(1961.8~1962), 4대 로한(P. Lohan, 한) 파트리치 오(1962~1965) 5대 김정용(金正容) 안토니오(1965~ 1966), 6대 페냐(A. Peria, 배) 알로이시오(1966-1967.5), , 7 대 샤베즈(J. Chavez, 강) 요셉(1967. 5~1968), 8대 콘트레 라스(F. Contreras, 고) 피덴시오(1968~1970.4), 9대 김정원 (金正元) 토마스(1971. 1~1973. 4), 10대 김충호(金忠浩) 미카엘(1973.4~1976. 11), 11대 김용배(金容培) 안드레아 (1976. 11~1981. 9), 12대 장용복(張容福) 미카엘(1981. 9~1985.6), 13대 박상수(朴常洙) 고스마(1985. 6~1988. 2) 14대 송종의(宋鍾儀) 야고보(1988. 2~1989. 8), 15대 서상 채(徐相彩) 유스티노(1989. 8~1994. 2), 16대 조동인(趙東 仁) 요한(1994. 2~1997. 2), 17대 장홍빈(張洪彬) 알로이 시오(1997. 2~현재) .
〔설립과 발전] 1930년에 이동관(타데오)이 여수에 첫 복음을 전한 뒤, 1934년에 여수시 동산동 296번지에서 본당이 설립되었다. 당시는 전라남도 감목 대리구의 설 정과 더불어 골롬반회 선교사들의 진출로 여수에도 전교
의 열도가 차차 무르익을 때였다. 이러한 배경 아래 여수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이민두 신부는 일제 시대 와 광복 시기, 한국 전쟁을 겪는 동안 꾸준히 전교 사업 을 지속해 온 여수 본당사의 산 증인이다. 그는 신자수 약 20명으로 시작하여,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일제에 불 법 수감되어 고초를 겪다가 8 · 15 광복으로 풀려나자 다시 부임하여 본격적인 전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2대 브랜든 신부는 1948년에 임시로 부임하여 1950년까지 신자들을 돌보며 여순 반란 사건으로 어려운 때에 여수 를 떠나지 않고 목자로서 신자들에게 많은 힘과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1954년에 정식으로 부임하여 그 해 10 월에 현 소재지인 여수시 공화동 1117번지의 520평과 1118번지의 362평을 매입한 후 먼저 1956년 7월에 강 당과 사제관 건립에 착수하여 완공하였다. 마침내 1958 년 10월 7일에는 건평 128평의 성전 공사를 완공하고 헨리(H. Henry, 玄海) 주교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하였 다. 당시 우뚝 솟은 종탑과 파란 함석의 뾰족 지붕으로 된 성당 건물은 여수 지방의 명물이었다. 브렌든 신부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여수시의 지리적 발전 계획을 예측 하고 서교동 지역에 본당을 분리하려는 계획에 착수하였 다. 그래서 여수 본당이라는 명칭은 1961년 자(子) 본당 의 설립을 계기로 동산동 본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1961년 8월에 3대 주임으로 부임한 던 신부는 수녀들 을 초청하고자 본당에 수녀원을 설치할 것을 희망하여 강당 일부를 개조하였고, 이에 예수 성심 시녀회 김 바르 톨로메오 수녀 외 두 명의 수녀가 부임해 왔다. 그 후 본 당과 인접한 여수시 공화동 1120번지에 215평의 대지 와 건물을 매입하여 수녀원을 옮겼다. 많은 어려움 끝에 수녀원이 완공된 것은 1972년 8월 25일인데, 이날 수녀 원 축복식을 갖게 된 후로 까리따스 수녀회 수녀들이 부 임해 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66년에 부임한 후 유치 원 개원을 추진한 페냐 신부는, 전에 성당으로 사용하였 던 건물을 개조하여 유치원 1학급을 교육청으로부터 설 립 허가받고 1967년 3월 13일에 백합유치원 개원식을 가졌다. 그러나 개원한 지 1년도 못 되어 화재로 폐원하 게 되었고, 1968년 12월 12일 75평 건평의 콘크리트 슬라브 2층 건물을 완공하여 1층은 유치원, 2층은 교리 실로 사용하기로 하고 1969년 3월 10일 유치원을 다시 개원하였다. 2학급으로 증설된 유치원은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한 유아 교육을 지역 사회에 널리 보급시켰다. 1969년 6월 20일에는 서교동 본당과 합동으로 여수시 여서동 100번지 3,486평의 임야를 여수 지역 천주교 공 동 묘지로 매입하였다. 또 1977년에는 노인들이 성당에 와서 편히 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성당 앞 뜰의 삼각진 터에 9평의 자그마한 슬라브 건물로 연탄 온돌방을 마련 하여 장기나 바둑을 둘 수 있게 하였고, 레지오 마리애 회합실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85년 12월 8일 에는 성당을 개축하여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한편 그 동 안 여수 지역 산업 발전과 더불어 팽창하고 있는 도시 개 발과 인구 증가에 따라 1987년부터 문수동 10-3번지의 부지 500평을 매입한 뒤 문수동 본당 신설을 추진하여,
1988년 1월 20일 분할하고 본당 관할 구역 신자 207명 을 문수동 본당으로 이적시켰다.
〔활 동〕 점차 본당 내 신심 단체 활동을 적극적으로 육 성하기 시작했으며, 또한 평신도들도 자발적으로 교회 일에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1970년 3월 9일에 사도회의 창립 총회를 개회하여 회칙을 인준하고 박종석을 회장으 로 선임하였다. 사도회에서는 성당 안에 장궤 의자를 설 치하는 것과 수녀원을 신축하는 것을 제일 먼저 계획하 였었고, 전 신자들이 성미 운동과 모금 운동을 벌여 장궤 의자를 설치하였다. 또 본당뿐 아니라 복음의 말씀을 접 하지 못한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주의 말씀을 전하려는 뜻으로 1977년 2월 6일에 <빛 가정>을 창간하였으며, 각 동별로 레지오 마리애를 조직하였다. 1992년 5월 29 일에는 본당 설립 60주년을 앞두고, 지역 복음화와 환경 보호를 위한 캠페인을 벌였는데, 이날 성모상을 모신 소 형 트럭을 꽃차로 장식하고서 성가와 로사리오를 바치고 환경 보호 구호를 외치며 여수 시내를 횡단하는 가두 행 진을 하였다. 1993년 6월 27일에는 여수시 충무동에 무 의탁 노인을 보호하는 '예리고의 집' 을 마련하여 축복식 을 거행하였다. 본당은 또 여수 · 여천 지역에 8개 본당 의 친목과 일치를 도모하는 '여수 여천 만남의 날' 대 잔치를 해마다 거행해 오고 있다. 1995년 사회에 범람 하고 있는 반(反)생명 문화 속에서 가정을 보호하고 가 정의 쇄신과 성화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고귀 함을 재인식하여 사랑과 생명의 문화를 창조하기 위한 목표하에, 가정 공동체의 성화와 사회의 복음화를 위한 선교 사명을 수행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사목 계 획 아래서 한 가정 한 사람 평일 미사 참례하기, 매주 토 요일 가족 마주 보기, 반 생명 문화 퇴치, 가족 중 미신 자 전교, <가정 권리 헌장> 준수 등 갖가지 운동을 전개 하고 있다. (⇦ 여수 본당 ; → 광주대교구)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천주교 광주대교구, 《광주대교구 50 년사》, 1990.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