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0년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가 하 느님의 가르침을 받고 세운 새로운 종교. 최제우는 새로 운 종교를 내세우면서 무엇보다 서학(西學) 즉 천주교를 가장 먼저 의식하였고 그것에 맞서 동학이라고 하였다. 그는 당시 국정이 어수선하고 어지러웠기 때문에 "유교 와 불교가 이미 운을 다하였다" 고 보았는데, 이러한 현 실 판단은 19세기 초부터 문란해진 조선의 정치적 · 사 회적 혼란을 반영한 것이다. 당시 대다수 조선인은 서학 에 대하여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고 아편전쟁(1840-1842) 으로 말미암아 더욱 증폭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동 학은 종래의 불교와 유교를 부정하고 새로 들어온 그리 스도교에 저항하는 종교로 등장하였다.
〔형성과 성장〕 1824년 지금의 경북 월성군 견곡면 가 정리(月城郡 見谷面 柯亭里)에서 태어난 최제우는 1861 년부터 동학을 펴기 시작하였는데 뜻밖에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랐다. 그러나 서학을 막으려는 정부는 동학을 서 학으로 몰아 박해하였다. 최제우의 뒤를 이은 해월(海 月)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은 지하에 숨어서 동학을 지도하였다. 그는 1880년(고종 17)에 최제우가 지은 한 문체의 《동경대전》(東經大全)을 출판하였고, 이듬해에 는 긴 한글 가사(歌辭)들을 엮은 《용담유사》(龍潭遺詞)
를 출판하였다. 이 두 책은 동학의 경전(經典)으로 이 책 의 출판은 동학의 교세가 커졌다는 것과 앞으로 더욱 커 질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의미한다.
신앙 자유를 위한 청원 운동 : 교세가 커지자 동학 교 도들은 1892년(고종 29)부터 신앙 자유를 위한 운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신원' (伸寃)이라고 부르는 이 운동은 교조(敎祖) 최제우의 억울한 죄를 씻음으로써 신앙 자유 를 요구하는 운동이었는데, 처음에는 지방 장관이나 임 금에게 호소하는 청원 운동 형태로 나타났다. 그들은 충 청 감사 조병식(趙秉式, 1823~1907)에게 교조의 억울한 죄를 씻어 주고 신도들에 대한 관리들의 불법적인 침해 를 막아 달라는 청원서를 올렸다. 그러나 감사 조병식은 "동학은 정부가 엄금하는 것이므로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차디찬 반응을 보였다. 이에 동학 지도층은 좀 더 강력한 청원 운동을 펴나갔다. 동학 지도층은 각처의 동학 교도에게 공문을 보내어 11월 1일에 전라북도 전 주의 삼례(參禮)역에 모이게 하였다. 이리하여 몇천 명 의 동학 교도들은 시위를 하면서 전라 감사 이경직(李耕 稙, 1841~1895)에게 강경한 청원서를 올렸다. 그러나 그 역시 차디찬 반응을 보였을 뿐이었다. 이렇게 되자 동학 교도는 분노하여 흩어지지 않고 다시 강경한 청원서를 올렸다. 그 동안에 각처에서 교도들이 잇따라 모여들어 그 수가 1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 르자, 감사 이경직은 동학 교조의 죄를 씻는 일은 정부에 서 할 일이고 자기 관내의 관리들에 대해서는 동학 교도 들을 불법적으로 침해할 수 없게 하겠다고 다짐하였다. 이로써 동학 지도층은 어느 정도 뜻을 이루었다고 생각 하고 교도들을 해산하였다.
그러나 부패한 지방 관리와 향리 및 토호가 여전히 동 학 교도들을 못살게 굴었다. 특히 그들은 힘없는 백성들 을 동학 교도로 몰아 재산을 함부로 빼앗기까지 하였다. 이에 많은 백성들이 동학에 가담하게 되어 그 기세가 한 층 커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동학에서는 신앙 자유가 절
실히 필요하게 되었고, 동학 지도 층은 이제 직접 정부를 상대로 청 원 운동을 펴기로 하였다. 충청도 보은군 장내리(報恩郡 帳內里)에 모임 장소인 도회소(都會所)를 마 련하자, 각지의 교도들이 몰려와 서 어려운 실정을 호소하였고, 지 도층은 이를 바탕으로 1892년 12월에 간곡한 청원서를 올렸다. 그러나 썩을 대로 썩은 지방 행정 을 정부도 통제할 수 없음을 안 지도층은 교도들의 뜻에 따라 임 금에게 직접 청원서를 올리는 방 법〔伏閤上書〕을 택하였다. 1893 년(고종 30) 2월 서울에 몰래 들어 간 청원 대표단 40여 명은 같은 달 11일(양 3월 29일)에 광화문(光 化門) 앞에 엎드려 임금에게 직접
청원서를 올렸다. 이것은 매우 대담한 운동이었고 대단 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중앙 정부도 크게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을 뿐만 아니라 서울에 있던 각국의 외교관들 도 지나칠 정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동학 교도들이 서울에 들어가 궁 앞에서 집단적으로 임금에게 직접 호소하자, 정부는 어리둥절하여 사흘 만 에 대표들을 달래어 돌아가게 하고 보름 뒤인 2월 26일 에는 모든 동학의 움직임을 아예 금지 · 엄단하라는 엄명 을 내렸다. 이 소식을 접한 동학 지도층은 각지의 교도들 을 보은군 장내리에 모이게 하였다. 3월 11일부터 2만 명이 넘는 동학 교도가 모여들었다. 이 보은 시위 운동은 규모와 조직으로 보아 무력 운동의 바로 전 단계이며, 구 호는 외국 세력의 배격에 중점을 두었다. 이는 서울에서 의 직접적인 청원 운동을 통해 우리 나라에서의 외세의 움직임, 특히 외세의 배격에 대하여 온 국민이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에 놀란 정부는 한 편으로 청주에 군대를 파견하고 또 한편으로는 양호 선 무사(兩湖宣撫使) 어윤중(魚允中, 1848~1895)을 보내 동
학 교도들을 달래게 하였다. 뜻밖에 사태가 잘 진전되자 교도들은 정부의 정책 변화를 기대하면서 4월 3일에 모 두 흩어졌다. 이같이 그 힘이 커감에 따라서 동학에 대한 금지령은 사실상 효력을 상실하였으며, 이에 따라 동학 세력은 더욱 확대되어 갔다.
군사 행동 : 이와 같이 확대되고 조직화된 동학에 가 담한 농민들이 대규모적인 군사 행동을 일으킨 것은 고 종 31년(1894)의 일이었다. 1894년 1월 10일 호남 고부 (古阜) 지방의 동학 접주(接主, 한 지방 교도를 거느리는 우 두머리) 전봉준(全琫準, 1854~1895)은 동학 교도와 일반 농민 1천여 명을 거느리고 고부 군청을 습격하였다. 그 런데 이를 수습하러 보낸 안핵사(按覈使) 이용태(李容 泰)가 일방적으로 동학 교도들을 처벌하였다. 이것에 자 극받은 호남 각지의 동학 교도들은 3월 하순 호남 일대 에서 전면적인 무력 투쟁을 펼쳤다. 동학 농민군은 전봉 준을 비롯한 동학 접주들의 지휘를 받아 지방 관군과 서 울에서 온 관군을 쳐부수고 4월 28일에 전주를 점령하 였다. 이러한 충격적인 사태를 접한 정부는 허둥지둥 청
과 일본의 군대를 불러들였다. 이렇게 되자 정부와 동학 지도층은 서로 나라의 위급함을 느끼고 서둘러 화해하였 고 동학 농민군은 해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은 미리 짜놓은 계획대로 서울로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불법으로 경복궁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일본은 흥선 대 원군(1820~1898)을 앞세워 정권을 세우고 6월 23일 청 일 전쟁을 일으켰다. 이렇게 되자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접주들은 9월에 다시 동학 농민군 10만여 명을 전주 삼 례역에 집결시켰다. 거의 같은 시기에 충청도 일대에서 도 의암(義庵) 손병희(孫秉熙, 1861~1922)를 비롯한 동 학 접주들이 동학 농민군 10만 명을 청산(靑山, 지금의 忠北 沃川郡 青山面)에 집결시켰다. 호남쪽의 남접군(南接 軍)과 호서쪽의 북접군(北接軍)은 일단 충청도 논산(論 山)에서 합류하여 공주쪽으로 북진하였다. 동학 농민군 들은 일본군과 정부군에 맞서서 싸웠으나 몇 차례 결정 적인 타격을 받고 12월에 모두 흩어졌다. 그리고는 그들 은 이듬해부터 펼쳐지는 반일 의병 운동(反日義兵運動) 에 중요한 몫을 하게 되었다.
민회 운동과 활동의 자유 : 동학 운동은 본래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것이었는데 무력 투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무력 투쟁에서 결정적으로 타격을 받은 동학은 지하에 숨어서 종교 활동을 펄 수밖에 없었다. 1898년 (광무 2) 제2대 교주 최시형이 정부군에 잡혀 교수형을 받고 의암 손병희가 제3대 교주로 동학을 이끌어 나갔 다. 당시 정부는 러시아와 일본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어 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어수선한 사회 현실 속에서도 동 학은 지하에서나마 꾸준히 교세를 늘려 나갈 수 있었다. 1901년(광무 5)에 손병희는 일본으로 건너가 국내외의 정세를 살피면서 그곳에서 국내 교도들을 지도하였다.
1904년 2월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우리 나라는 일본 세력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그 동안 일본에서 국제 정세 를 살피면서 때를 기다리던 손병희는 국내 교도들에게 민회(民會)를 만들어 단결할 것을 지시하였고, 1904년 4월경 만들기 시작한 민회는 7월에 그 이름을 중립회(中 立會)라고 하였다. 8월경에는 다시 진보회(進步會)라고 개명하였다. 이 무렵부터 진보회는 적극적으로 개화 운 동을 펴나갔지만, 이 회가 동학의 무리에 의해 만들어졌 다는 이유로 정부나 지방 관리들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 았다. 그러나 진보회는 오히려 세력이 더욱 커져 국내 전 역에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정부도 더욱 강경하여 진보 회 회원들이 모일 때 해산시켜도 응하지 않으면 가까운 군대에 알려 "무력으로 무찌를 것"(剿討砲刑)을 전보로 전국에 명령하였다. 이때 일진회(一進會)는 10월 23일 에 정부에 글을 올려 진보회 회원을 "무력으로 무찌르 라"는 명령을 철회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 뒤에 도 일진회는 대표 2명을 정부 당국에 보내어 이 명령을 철회하도록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마침내 정부는 11월 에 전국에 명령을 내려 그 동안 갇혀 있던 진보회 회원을 모두 풀어 주게 하였다. 이로써 진보회가 비로소 국가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또한 이것은 동학 교도들이 비로소 자유롭게 종교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기
도 한다.
그런데 일진회는 일본 군부 세력을 뒤에 업고 있었다. 당시 진보회에는 적어도 11만 명을 헤아리는 회원이 있 었는데, 12월에 일진회는 진보회를 꾀어 하나로 합쳤다. 이때부터 일진회는 '2천만의 참된 대표' 라고 큰소리를 치면서 본격적인 친일 활동을 하였다. 마침내 1905년 11월 6일에 일진회는 '한국이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한 다는 선언서' 를 발표하였다. 11월 18일 이른바 을사 보 호 조약이 강제로 맺어져, 한국은 외교권을 빼앗기고 일 본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일진회의 친일적인 정체가 드러났고, 이러한 일진회에 휘말리게 된 동학 교 도들이 가야 할 길도 분명해졌다. 일본에 있던 손병희는 12월 1일 서둘러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라고 고치고 이 듬해 1월 귀국하여 천도교 체제를 새로 마련하기 시작하 였다. 9월에는 일진회에서 일하던 이용구(李容九)를 비 롯한 62명을 내쫓고 천도교를 민족을 위한 종교로 발전 시키는 데 힘썼다. 그러므로 글자 그대로의 동학 시대는 1905년 11월 말로 끝났다고 보아야 한다.
〔사 상〕 동학에서의 하느님 : 동학은 본래 하느님을 그 믿음의 대상으로 뚜렷이 내세우는 독자적인 종교이다. 그것은 오랫동안 하느님을 믿어 온 우리 민족의 자연적 인 종교 심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단군 신화(《三國遺 事》, 卷第一 紀異, 卷第二 古朝鮮)에 나타나는 환인(桓因)은 우리의 하느님이다. 부여국(扶餘國)에서 "12월에 하늘 에 제사를 지낸다" (《後書》, 東夷傳 扶餘國)라고 하였는데 이 하늘(天)은 우리의 하느님이다. "하늘에 제사지내는 예절이 (우리 나라에서) 어느 연대에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역시 천여 년 동안 고친 적은 없습니다" (《太宗 實錄》 권31 : 1416년 6월에 올린 卞季良의 上書). 여기서 말 하는 하늘도 우리의 하느님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믿어 오던 민족적인 신앙 전통 속에서, 동학은 그 하느님을 믿 음의 대상으로 내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민족적인 신앙 전통 속 에서 믿어 오던 하느님은 다른 많은 신들을 거느리고 있 었지만 동학에서는 오직 하나의 하느님만을 믿는다. 다 른 어떠한 신도 있을 수 없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는 오 직 천주(天主)만을 믿는 서학과 서로 통한다. 게다가 동 학에서도 하느님을 천주라고 불러 서학의 천주와의 관계 가 문제시되었다. 《용담유사》에 하느님이라는 말이 30 번이나 나오고 있는데, 한문으로 쓴 글에서만 '천주' 라 고 쓰고 있다. 사실 동학에서 말하는 천주는 하느님을 한 자말로 옮긴 것이다. 최제우에 따르면, 천(天)은 '하늘' 이고 주(主)는 존경의 뜻을 나타내는 '님' 이다(《동경대 전》, 논학문). 이에 대해 서학의 '천주' 는 라틴어 데우스 (Deus)를 한자말로 옮긴 것이다. 이 '천주' 라는 말은 중 국에 들어온 예수회 신부 루지에리(Ruggieri, 羅明堅)이 중국 조경(肇慶)에서 1584년에 출판한 《천주 실록》(新 編西竺國天主實錄)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이 말은 17세 기 초부터 서학의 책들이 우리 나라로 흘러들어옴에 따 라 알려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동학의 천주와 서학의 천 주는 서로 종교적인 바탕과 뜻을 달리하는 말이다. 즉
전자는 '하느님' 을 옮긴 말이고 후자는 '데우스' 를 옮긴 말이다. 그러나 다같이 유일신이라는 점에서는 서로 통 하는 점도 있다.
최제우는 처음에 서학의 '천주' 가 바로 자기가 믿는 하느님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서학 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최제우 의 하느님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오랜 신앙 전통을 바탕 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서학의 천주는 자기의 하느 님과 다르다는 쪽으로 판단을 내렸다. 사실 최제우가 생 각하는 하느님의 내용은 서학의 그것과 상당히 다르다. 그는 "마음을 닦고 기운을 바로잡는 것[修心正氣]은 오 직 내가 새로 정한 것이다" (《동경대전》, 수덕문)라고 자신 있게 말하였다. 이것은 마음〔心〕과 기운〔氣〕을 갈라 세 우는 이원적(二元的)인 생각을 전제한다. 곧 사람뿐만 아니라 하느님도 마음과 기운의 이원적인 존재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하느님의 마음을 통해 그 마음을 닦고 하느님의 기운을 통해 그 기운을 바로잡으라고 가 르치는 것이 그가 새로 정한 가르침 곧 동학이다. 그는 하느님의 기운을 지극한 기운〔至氣〕이라 하고 이것을 조 화(造化)라고도 한다. "개 같은 왜적 놈을 하느님께 조화 받아 일야(一夜)에 멸하고서"(《용담유사), 안심가). 이렇게 하느님의 기운(조화)은 무궁(무한)한 힘이다. 이에 대해 하느님의 마음〔天心, 天意〕은 모든 것을 두루 뚫어 보는 무궁한 슬기(앎)이다. "하느님이 뜻을 두면 금수 같은 세 상 사람 얼푸시 알아내네"(《용담유사), 몽중노소 문답가). 이렇게 하느님의 마음(뜻)은 한 순간에 세상 사람을 꿰뚫 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을 마음과 기운으 로 갈라 세워 이원적으로 보는 것은 우리 민족이 사람을 마음과 기운으로 갈라 이원적으로 보아 온 전통 사상 때 문이다.
종교적 목적 : 최제우는 "하느님만 믿어서라"라고 가 르쳤고, "열세자 지극하면 만권 시서(萬卷詩書) 무엇하 며" (《용담유사》, 교훈가)라고 강조하였다. 여기서 '열세자' (13자)란 21자로 된 주문(呪文)의 중심이 되는 대목으로 "하느님을 모시면 조화가 얻어지고 하느님을 길이 잊지 않으면 만사가 깨달아진다"라는 의미이다. 수운에 따르 면 주문은 "하느님을 지극히 위하는 글"(《동경대전》, 논학 문)이다. 이것은 결국 하느님을 모시라는 가르침이다. 하 느님을 모시면 조화를 얻을 수 있고 만사를 깨달을 수 있 다는 것이다. 곧 무궁한 기운과 무궁한 슬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모시는 일이 방법이라면 무궁 한 기운과 슬기는 그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모시는 것' 〔侍天主〕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다. 하느님을 모시면 목적은 저절로 얻어지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모시는 방법으로 처음에는 하느님의 기운을 몸에 내리게 하는 것이 강조되었다. 하느님의 기운〔靈 氣〕이 몸에 내리는 것을 강령(降靈)이라고 한다. 강령을 위한 방법으로 21자 주문의 처음 대목 곧 8자로 된 강령 주문(降靈呪文)을 정성껏 되풀이하여 외우게 하였다. 이 렇게 주문을 되풀이하는 동안에 어떤 무아의 경지에서 하느님의 기운이 몸에 내리게 된다. 이러한 초자연적인
상태에서 병도 고치고 예언도 하고 놀라운 힘도 낼 수 있 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제우는 이미 하느님에 대한 정성[誠]과 공경[敬]이 없으면 그 초자연적인 상태〔降 靈〕도 효력을 낼 수 없다고 강조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하느님을 모시는 두 가지 길을 밝혔다. "안에는 신비스 러운 영감(靈感)이 있고 밖에는 하느님 기운에 합치는 경지가 있다"(《동경대전), 논학문). 여기서 하느님 기운과 합치는 경지가 바로 '강령' 이다. 신비스러운 영감이란 곧 하느님에 대한 정성과 공경을 통해 하느님의 마음과 통하는 체험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반성을 거친 최제우에 따르면, 하느님을 모 신다는 것은 기운쪽으로는 하느님 기운과 합치는 경지에 이르고 마음쪽으로는 하느님 마음과 통하는 신비적 체험 에 이르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하느님을 모시면 무궁한 기운과 슬기는 저절로 얻어지게 된다. 최제우는 이러한 최고의 경지를 '무궁한 나 라고 불렀다. "글도 역시 무궁 이오 말도 역시 무궁이라, 무궁히 살펴내어 무궁히 알았 으면 무궁한 이 둘 속에 무궁한 내 아닌가"(《용담유사》, 흥 비가).
이와 같이 동학에서는 종교의 수도 목적을 개인적으로 는 '무궁한 나 에 두고 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현실적 으로는 "마음을 닦고 기운을 바로잡는 것"을 생활의 신 조로 삼게 되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느님 기운과 합 치고 하느님 마음과 통하는 종교적 목적을 위한 일상적 인 생활 신조이다. 최시형 시대에도 위에서 본 동학의 기 본적인 믿음과 사상은 그대로 이어받아졌다고 보아야 한 다. 다만 그 현실적인 종교 활동에 따라 강조하는 대목이 다소 다르고 표현이 다소 달라졌을 뿐이다. 예컨대 최제 우의 시대에는 하느님을 모시라고 가르쳤는데 최시형의 시대에는 하느님을 모셨다고 가르치는 경향이 나타났다. 사람이 이미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면 사람은 본래 '무궁 한 존재' 일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람이 바로 하느님이 다”(人是天 人乃天)라는 표현도 나올 수 있게 된다. 따라 서 "사람 섬기기를 하느님 섬기듯이 하라" (事人如天)라 는 구호도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 사상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저술 같은 것은 나타나지 못하 였다. 따라서 공적으로는 최제우의 저술만이 동학의 경 전으로 되어 있다.
〔천주교와의 관계〕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동학과 천 주교는 대표적인 민중 종교로 교세를 확대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때때로 두 종교는 어떤 형태로든 서로 관계를 맺었다. 두 종교는 동질적인 요소보다는 이질적인 요소 가 더 많았는데, 그것은 교리 측면과 운동체로서의 성격 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 교리 측면에서 동학과 천주교는 모두 천주를 승 배 대상으로 삼는다. 하지만 천주교의 하느님과 동학의 하느님은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서학의 하느님은 '창 조주요 인격신이며 초월적인 존재로서 만유 위에서 이를 다스리는 전지 전능한 존재' 이다. 이와는 달리 동학의 하느님은 '만물을 내신' (《동경대전》, 논학문), '만물을 낳 고 키우고 이루고 거두는' (《동경대전》, 포덕문) 존재로 우
주 만물의 주재자라는 점에서는 천주교와 비슷하다. 그 러나 동학에서의 하느님은 사람의 마음속에 내재하는 존 재이다. 이는 천인합일(天人合 一)과 인내천(人乃天)으 로 설명되기도 한다.
둘째, 운동체로서의 성격에서 천주교의 민중 운동은 교리에 입각한 만민 평등과 신앙의 자유 존중, 내세 복락 등 정신적인 측면에서의 사상 개조론에 머무른다. 이와 달리 동학은 선천 후천 사상(先天後天思想)을 근거로 한 현실 개벽론에 입각하고 있다. 즉 동학은 인간 사회 민족 개벽으로서 보국 안민을 통한 지상 천국의 건설을 목표 로 하고 있다.
이와 같이 동학과 천주교는 많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 다. 그것은 현실에서 두 종교간의 관계에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그것은 동학의 창도기와 동학 운동 전개기로 나 누어 그 성격을 이해할 수 있다. 천주교는 19세기부터 민중 종교 운동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충청도 · 경기도 남부 지역 · 전라도 북부 지역에서 형성된 신자 집단은 전라도 남부 · 충청도 북부 · 경상도 북부 지역으로 확 대 · 형성되었다. 1830년대 후반부터 경상도 남부 지역 까지 신자촌이 형성되는데, 프랑스 선교사의 순방을 받 아 1860년대에는 양산 · 김해 · 기장 · 동래 등지에도 신 자 집단이 형성되었다. 이 무렵 최제우는 동학을 창설하 였다. 포덕문에 따르면 그는 1860년대부터 천주교를 처 음으로 들었는데, 이는 그 이전에 그가 영남에서 전래된 천주교를 접하였음을 뜻한다. 그리고 전파된 서학에 대
한 반동으로 동학을 창시하였다. 또 한 동학과 천주교와의 관계는 대외 관계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아편 전쟁을 비롯한 서구 열강의 중국 침 탈은 조선인들에게도 위기 의식을 불러일으켜 서양의 종교인 천주교를 함께 경계하게 되었다. 이에 최제우 는 서양 제국주의의 위협에 저항하 기 위하여 천도(天道)를 만들었다. 그 뒤 그는 이를 동학으로 고쳤는데, 왜냐하면 자신의 종교를 서학과 구 분하려는 의도에서였다.
1864년 최제우가 처형되고 1866
년 병인박해(丙寅迫害)로 천주교가 탄압을 받자, 동학과 천주교의 관계는 그리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 시 대두하기 시작한 것은 1892년 동학이 교조 신원 운 동을 전개하면서 본격적인 천주교 배척 운동이 일어났 다. 당시 동학은 척양 척왜(斥洋斥倭)를 외치면서 천주 교를 배척하였고, 이것은 결국 군사 행동으로 발전하였 다. 마침내 농민 운동 과정에서 동학도들이 선교사를 살 해하는 일이 일어나고 교회와 교우촌 침탈이 일어나는 상황에 이르러, 두 종교간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기도 하였다. (→ 《동경대전》)
※ 참고문헌 《東經大全》 《龍潭遺詞》 《崔先生文集道源記書》, 1880(東學思想資料集 壹, 亞細亞文化社, 1979)/ 《天道教會史》, 1920(東學想資料集 壹, 亞細亞文化社, 1979)/ 《侍天教宗繹史》, 侍 天教本部, 1925/ 李瑄根, 《韓國史》(現代篇), 震檀學會, 1966/ 李光麟, 《韓國史講座》 V(近代篇), 一潮閣, 1992. 〔崔東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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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을 세운 초대 교주 수운 최제우(왼쪽)와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