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교회사가이며 신학자. 1799년 2월 28일 밤베 르크(Bamberg)에서 생리학 교수의 아들로 태어나, 밖르 츠부르크(Würzburg) 대학교와 밤베르크에 있는 신학교에 서 수학하고, 1822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보좌 신부를 거쳐 1823년부터 아사멘부르크(Aschaffenburg) 대학에서 교회법과 교회사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836년에 란 트슈트(Landshut)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826~1890년 뭔헨 대학에서 교회사와 종교 철학의 교 수를 역임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종교 개혁》(Die Reformation, 3권, 1846~ 1848), 《그리스도교와 교회》(Christentum und Kirche, 1860) 《교회와 교회들, 교황청과 교황령》(Kirche und Kirchen, Papsttum und Kirchenstaat, 1861), 《중세의 교황 우화》(Die Papstfabeln des MA, 1863, 1890), 《지난 6세기간의 정치사, 교회사, 문화사를 위한 기고》(Beitäge zur polit., kirchl. und Culturgesch. der 6 letzten Jhh., I : 1862, II : 1863, Ⅲ : 1882) 《16세기 이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윤리 논쟁사》(Gesch. der Moralstreitigkeiten in der rom.-kath. Kirche seit den 16. Jh., 2 권, 1889) 등이 있다.
〔활동과 성향〕 교회사가로서 또 교회 정책가로서 명성 을 떨친 될링거는, 1860년대 교회 내에서 신 · 구 신학 파 논쟁이 일어났을 때, 구역사학파(舊歷史學派)의 괴레 스(J.V.Gomes)와 바더(F.V. Baader)와 함께 가톨릭적인 복 고의 대표자로서 신스콜라 학파와 대립하였다. 그는 언 어학적 능력과 광범위한 학식으로 학문적인 연구 이외에
출판 활동과 교회사에 대한 번역서를 통해 명성을 얻었 다. 그는 괴레스와 바더에 의해 뮌헨의 가톨릭 서클에 가 입하여 평론지 《에오스》(Eos, 1825~1832)의 발행에 협력 하였다. 이 가톨릭 서클은 그 시대의 낭만주의에 영향을 받았는데, 정치적으로는 보수적 · 반자본주의적 군주주 의자들의 모임이었으며, 다소 교황권 지상론자들이기도 하였다. 될링거는 대중 여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신학 자들이 대중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중적 인 일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1838년 "쾰른 사건" (Kölner Ereignis)에서 광범하게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데 기 여하였고, 《역사와 정치》지의 창간(1838)에 참여하였으 며, 바이에른 지방 의회에서의 의회 활동(1845~1847)과 바오로 성당에 부임하여 사목 활동(1848~1849)도 하였 다. 또한 가톨릭의 자유를 대변하고, 가톨릭 언론의 성장 을 격려하였으며, 독일 주교들이 정기적인 집회를 가져 야 한다고 확신했다. 1848년 밖르츠부르크 주교 회의와 보니파시오회의 창립에도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역사가로서의 될링거는 '유기적 성장' 과 '일관된 발 전' 을 핵심적 표현으로 삼고, 당시 일어난 교황 지상주 (ultramontanism)에 강력히 반대하여 개혁에 관한 두 문 서를 발표하였는데, 이는 청교도주의가 역사적 지속성과 발전에 있어 단절을 나타냈다는 것을 밝히려는 시도였 다. 그리고 교회사에 관한 많은 번역서들을 펴냈다. 그러 나 1850년경부터 국가주의 경향에 영향을 받은 될링거 는 독일 교회의 로마로부터의 독립과 신학교보다는 대학 에서의 성직자 교육을 주장하기 시작하였으며, 교황령의 유용성을 중요시하고 행정 제도를 비난하는 설교를 하였 다. 교황령의 미래에 대한 뮌헨에서의 두 번에 걸친 시사 적 강연은 교황청과 예수회 그리고 마인츠의 개혁파로부 터 결정적인 반감을 사게 하였다. 또한 될링거는 로마 예 수회에 의한 신스콜라 학파에 대해 근본적인 적의를 가 졌다. 그는 역사와 신학에 있어서 독일의 업적을 격찬하 였으며, 학자들은 그들의 연구에 있어서 교회 권위에 의 한 독단적인 방해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될링거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하도록 요청받았 으나 교황의 무류성에 논쟁을 제기하며 공공연히 반로마 주의를 제창하였다. 교황의 무류성 교리를 거부함으로써 1871년에 뮌헨의 대주교에 의해 파문당한 그는, 이듬해 교수직까지 박탈당하였다. 1890년 1월 10일 뮌헨에서 사망하였다.
〔평 가〕 비록 그가 반로마적 토론을 벌였으나 교회 분 열에 가담하는 것은 거절하였다. 그는 제1차 바티칸 공 의회에서 결의한 교황의 무류성 교의에 독일의 일부 신 학자들과 더불어 죽을 때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공 의회로 인해 가톨릭의 본질이 변했다고 하여 '구가톨릭 교 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부 신학자들이 '구가톨릭 교 를 세우려 하자 그는 그들에게 교회를 분열시키지 말 도록 경고하였다. 될링거는 구가톨릭교와 관련이 없지 않다. 그러나 거기에 공식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다. 그 는 규칙적으로 미사에 참례하였고, 그가 죽었을 때는 장 례 미사가 봉헌될 수 있었다. 될링거는 신학에 사색적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접근을 개발할 필요성을 가톨릭 학자들에게 인식시키는 데 영향력을 발휘하였으며, 교회 사의 과학적 탐구와 연구에 관심을 고무시키는 데 기여 하였다. (→ 구가톨릭교)
※ 참고문헌 S.J. Tonsor, 《NCE》 4, pp. 959~960/ A. Schwarz, 《LThK》 3, p. 475/A. 프란츤, 최석우 역, 《교회사》, 분도출판사, 1982. 〔金吉洙〕
될링거, 요한네스 요셉 이냐츠 Döllinger, Johannes Joseph Ignaz(1799~1890)
글자 크기
3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