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 성서학에서의 두려움
인간이 신과 접했을 때 경험하게 되는 감정. 성서에서 는, 인격적인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피동적 · 본 능적 두려움을 넘어서 능동적 · 의지적 두려움을 자주 강
조하고 있다. 구약의 이러한 두려움은 단순한 놀람에서 시작하여 경악 · 기급 · 질겁, 그리고 경외 · 숭배 · 신 뢰 · 사랑까지도 포괄하는 폭 넓고 복합적인 개념이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두려움〕 두려움을 표현하기 위하 여 구약성서에서 가장 흔히 쓰이는 것은 어근 '야레' (יָרֵא, '떨다' , '두려워하다' )의 여러 동사 형태와 여기에서 파생한 형용사형 '야레' 와 명사형 '이르아' (יִרְאָה) 및 '모라' (מוֹרָא)이다. 구약성서에 모두 430번 정도 나온 다. 이 밖에도 두려움의 여러 면을 나타내기 위하여 '야 레' 와 직접 · 간접적인 동의어들이 많이 쓰이고 있다. '야레' 와 그 파생어들이 빈번하게 등장하고 히브리어의 어휘가 일반적으로 빈곤한 중에서도 '야레' 의 동의어들 이 많다는 사실은 이미 구약의 특수성을 시사하는 것이 라고 볼 수 있다.
비종교적 두려움 : 비종교적 두려움에 대해서도 수백 가지 실례를 전하고 있는 구약성서에 따르면, 동물과 자 연도 두려움을 느끼지만(창세 9, 2 : 시편 76, 9), 두려움 의 원주체는 무엇보다도 인간이다. 인간은 위협적인 짐 승(아모 3, 8), 극한적인 자연 환경(신명 1, 19)과 위력적 인 자연 현상(요나 1, 4-5), 살인적인 무기(예레 42, 16), 그리고 죽음으로 몰고 가는 질병(시편 91, 6)을 두려워한 다. 그러나 인간에게 가장 흔히 두려움을 유발시키는 존 재는 바로 인간 자신이다.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서 가장 자주 공포를 느끼는 것이다. 적군(1사무 7, 7) 또는 자기 에게 적대적인 사람(들) 앞에서(창세 19, 30 ; 32, 8 ; 시 편 55, 5-6) 인간은 두려움의 반응을 보인다. 이는 개인 만이 아니라 집단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출애 14, 10 ; 민수 14, 9 ; 신명 2, 4 ; 7, 19 : 2사무 10, 19).
이러한 반응은 개인 및 집단의 자기 보호 내지 보존 본 능과 직결된다. 자기의 안전과 생존이 위협받을 때 인간 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두려움이라는 무조건적인 반사 작 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인간의 생존에 가장 큰 위협은 죽 음이다(창세 32, 12 ; 신명 17, 12-13 : 요나 1, 5). 인간은 죽음 앞에서 근본적인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다(집회 40, 1-11). 그러나 생존 자체가 위험에 처하였을 때만이 아 니라, 어떤 형태로든 제한을 받거나 받으리라 예상될 때 사람은 두려움을 느낀다. 인간 관계에서 갈등이 유발되 리라 여겨질 때(느헤 2, 2 : 1사무 3, 15), 사태의 진전이 자신들을 종살이로 몰아가리라 예측될 때(창세 43, 18), 또는 불확실한 미래(판관 7. 3)나 미지의 땅 앞에서(창세 46, 3) 인간은 두려움을 느낀다. 명예를 중시하는 고대 중동인들은 비방(誹謗)이나 중상(中傷)의 대상이 되는 것을 죽음보다도 더 무서워하였다(집회 26, 5-6). 생존이 제한되는 바에는 차라리 생존 자체를 포기하겠다는 것이 다.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두려움은 인간에게 본능적 반응 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의식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거나 하지 않게, 또는 이것 대신 저것을 실행에 옮기게 한다 (창세 19, 30 : 신명 1, 19-33 : 2열왕 25, 24-26). 따라서 인간은 자연 발생적으로 두려움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에 대하여 의지적인 반응을 할 수 있는 존재이다. 더 나아가
서 조건적 반응으로서 두려움을 나타내기도 한다. 상대 방을 공경하는 마음에서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는 능동 적이고 의지적인 두려움으로서, 부모(레위 19, 3)나 어른 (욥기 32, 6)에 대한 경외(敬畏)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만이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두려워할 줄 아는 존재이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 구약성서가 특별한 관심을 갖 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다. 따라서 어근 '야레' 가 나오는 구절들 중 약 5분의 4가 하느님에 대한 두려 움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① 두려운 하느님 : 하느님이 불타는 떨기 가운데서 말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모세는 얼굴을 가린다 (출애 3, 6). 인간이 하느님을 눈으로 보거나(출애 33, 20) 그분의 목소리를 직접 들으면(출애 20, 19) 죽는다고 믿 었던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인들에게만 국한된 반응은 아니다. 신령한(numinous) 또는 거룩한(sacrum) 존재와의 접촉은 죽음의 위협을 의미한다는 고대인들의 믿음이 그 근저에 깔려 있다. 하느님의 현존만이 아니라, 그분과 관 련이 있는 인물 · 장소 · 사물이 인간에게 두려움을 일으 킨다. 즉 하느님의 사자(판관 13, 6), 그분 현존의 자리(창 세 28, 17), 성전(레위 19, 30),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출애 34, 30 ; 1사무 12, 18)과 민족(이사 19, 17), 계약의 궤(1사무 5-6장), 당신 자신을 계시하는 말씀 또는 율법(시편 119, 120. 161), 그리고 그분의 이름(신명 28, 58) 등이 인간에게 두려움을 일으킨다. 하느님의 현 존과 직접 · 간접적으로 접하였을 때 인간은 두려움과 함 께 그 현존에 접근할 수 없음을 통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비인격적 신령(numen)이 아니라,
절대적 자유와 함께 당신을 인간에게 주도적으로 계시하 는 인격적인 하느님이다. 그래서 이분에 대한 두려움 역 시 비인격적 공포를 넘어서는 '인격적 두려움' 이 된다. 예컨대 야곱의 경우,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은 숭배(창세 28, 18-19)로, 모세의 경우에는 파견으로 이어진다(출애 3, 10).
또한 하느님의 행동 자체가 인간에게는 놀람과 공포의 대상이다. 하느님의 행동은 항상 일정한 목적 아래 이루 어진다. 구체적으로는 이집트로부터의 해방을 위시해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과 그 구성원 개인을 위한 개입, 또 는 창조의 위업이 그러하다(신명 10, 21 ; 시편 40, 4 ; 76 편 ; 예레 5, 22). 하느님의 역사(役事)함이 수혜자들만이 아니라(출애 14, 31) 이를 보고 들은 제3자들에게도 역시 두려움이 된다(출애 15, 14-16 ; 이사 41, 5). 그래서 두려 움은 위업을 이루는 분에 대한 믿음과 신뢰로 나아간다 (출애 14, 31 ; 시편 41, 4 ; 52, 8).
결국 창조주이며 역사의 주재자인 하느님의 존재 자체 가 "티끌이나 재만도 못한" (창세 18, 27) 인간에게는 두 려움의 대상이다. 하느님은 두려운 분(시편 47, 3 ; 하느님 에 대한 이런 형태의 서술이 히브리 성서에 30번 이상 나온다), 두려움 자체이다(시편 76, 12). 이분의 신비와 성성(聖 性) 그리고 그 위력의 행사에 바탕을 둔(출애 15, 11) 절 대적 우월성과 이질성, 그리고 불가해성(不可解性 ; 시편 139, 17-18 ; 욥기 11, 7 ; 집회 18, 5-7) 앞에서 인간은 두 려움을 느끼며 그분을 찬송할 수밖에 없다(시편 96편). 하느님은 존재론적으로 두려운 분으로서, 인간은 그 앞 에서 존재론적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하느님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며, 그리고 하 느님도 손수 인간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신 명 26, 8 ; 여호 10, 10), 이로 인하여 인간이 하느님에게 등을 돌리거나 그분을 피해 달아나거나 노예적 공포 속 에 빠지는 경우는 구약성서에서 찾아볼 수 없다. 하느님 은 두려운 분으로서 인간에게 구원을 베푸는 분이다(느 헤 1, 5). 이 구절에 나오는 '위대하고 두려운 하느님' 이 라는 관용어는 이 밖에도 항상 은혜롭고 구원을 베푸는 하느님을 가리킨다(신명 7, 21 ; 다니 9, 4 ; 느헤 4, 8 : 9, 32).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하느님과 신비로운 힘으로 인 간에게 감격과 경탄, 순종과 헌신을 유발시키는 하느님, 그 현존으로 인간에게 죽음의 위협을 느끼게 하는 하느 님과 인간에게 구원을 베푸는 하느님은 다른 두 존재가 아니라 한 분이다.
② 두려움과 죄와 환희 : 하느님을 마주한 인간은 자 신의 조건과 처지를 되돌아볼 수밖에 없다(이사 6, 5). 속 (俗)으로 표현되는 인간은 성(聖)으로 대표되는 하느님 과 철저하게 다르다. 하느님을 직접 · 간접적으로 마주한 인간은 그분에 대하여 존재론적으로만이 아니라 윤리적 으로도 이질성과 근접 불가성, 그리고 자신의 부정성(不 淨性)을 자각하게 된다. 하느님은 존재론적으로만이 아 니라 윤리적으로도 역시 위대한 분이다. 이런 하느님 앞 에서 죄인인 인간은 윤리적 두려움을 또한 느끼게 된다. 그래서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은 그분과 양립할 수 없는
죄에 대한 두려움을 내포하고(출애 20, 20) 더 나아가서 그분의 심판(시편 64, 10)과 '심판 날' 에 대한 두려움(요 엘 2, 11)까지도 포괄한다. 이런 맥락 속에서, 인간이 겪 는 고통을 하느님이 죄인인 인간에게 내보이는 진노와 심판의 결과로 여기기도 한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하느 님에 대한 공포가 인간 삶의 기본 요소라고 말하기도 한 다(시편 88, 16).
그러나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드러내 보일 때 하느님 은 공포를 일으키고 소름을 끼치게 하는 신비(mysterium tremendum)인 동시에 매혹을 느끼게 하고 인간을 당신께 로 끌어당기는 신비(mysterium fascinosum)이다. 하느님을 두려워함은 단순히 노예적 근성의 발로가 아니다. 절대 적으로 위대한 존재에 대한 두려움은 그분에 대한 매혹 과 감격과 희열을 동반한다(레위 9, 24 ; 시편 40, 4 ; 64, 10-11). 그분의 위대성은 당신 백성에 대한 구원을 이루 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려움은 찬양 · 기도 · 제사 를 통한 경신례로 나아간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 경 외(敬畏)로 전개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에 대한 두 려움이 한글 번역 성서에서 '경외' 로 번역되기도 한다.
③ 두려움과 믿음 :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이스라엘 백 성에게 가장 기본적 사항은 야훼를 유일한 하느님으로 섬기는 것이다(출애 22, 2-6). 달리 표현하면, 그분만을 경외함이며(신명 6, 13 ; 10, 12), 이것이 믿음의 근본 조 건이다. 하느님과의 관계에 배치되는 우상 숭배는 야훼 대신 또는 그분 곁의 다른 신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스 라엘인들은 야훼 이외의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두려워해 서는 안된다(이사 8, 12-13). 우주의 주인을 주님으로 모 신다는 자긍과 열성과 함께(시편 47편) 이스라엘은 야훼 만을 믿고 찬양해야 하는 것이다(신명 10, 20-21).
특히 신명기와 신명기계 저술들이 강조하는 바에 따르 면 하느님을 두려워함은 그분을 사랑하고(신명 10, 12 ; 집회 2, 15-16), 섬기고(여호 24, 14), 그분에게 애착하며 (신명 13, 5),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신명 5, 29), 그분의 길을 걸으며(신명 8, 6), 그분 말씀을 듣는 것(1사무 12, 14)이다. 결국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은 단순히 신령하거 나 거룩한 존재에 대한 본능적이고 무조건적인 반응을 넘어서는, 인간에게 구원의 존재로서 당신의 현존을 드 러내는 분에 대한 조건적이고 의지적이며 인격적인 관계 까지도 포괄하는 것으로서 그분에 대한 믿음 및 경건심 과 동등한 개념인 것이다.
④ "두려워하지 말라!" : 하느님을 두려워함은 동시에 다른 존재를 무서워하지 않음을 내포한다. 여기에 두려 움과 공포에 휩싸인 인간을 안심시키고 위로하는 "두려 워하지 말아라"라는 말이 자리하게 된다. 이 관용어는 비종교적 영역에서도 쓰이지만(창세 35, 17 ; 1사무 23, 17) 신학적 맥락에서 더 자주 쓰인다. 하느님의 사자(창 세 21, 17) 또는 그분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출애 14, 13 ; 신명 20, 3)이 이 말을 하기도 하지만, 하느님이 직접 하는 경우가 더 흔하다. 이때 이 말씀은 흔히 하느 님의 자기 소개와 함께 이루어진다(창세 15, 1 ; 26, 24 ; 이사 41, 10 ; 예레 30, 10-11 등). 이로써 위기와 두려움에
처한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친근하고 인간과 함께하는 존재로 드러내고 용기를 북돋우며 승리 또는 구원을 약 속한다.
두려움을 극복해야 할 대상은 두 가지 차원에서 생각 할 수 있다. 첫째는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느끼는 공포이 다. 특히 하느님의 발현 때에 인간은 죽음의 공포에 휩싸 이게 되는데, 이때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은 자칫 폐쇄적 이 될 수 있는 본능적인 공포를 극복하고 당신에게로 다 가오라는 초대이다. 둘째는 하느님 외의 존재에 대한 공 포이다. 하느님 외에는 두려워해야 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두려워해서도 안된다. 그분만이 가장 두려운 존 재일 뿐만 아니라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대상이고(이사 8, 13), 그분에 대한 경외는 동시에 다른 모든 두려움을 극복하게 한다(시편 3, 7 ; 23, 4 ; 56, 5. 12 ; 118, 6).
그래서 하느님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과 함께 사람 들에게 사명을 부여한다(창세 15, 1 ; 민수 21, 34 ; 이사 51, 7 등). 유일하게 두려운 당신의 도움이 있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아무리 두려운 마음이 앞선다 하더라도 공포 에 젖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가장 큰 권능 을 지닌 유일한 하느님, 그리고 인간들과 맺은 약속과 계 약에 충실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이사 41, 10).
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이들 : 하느님을 두려워함은 그 함축적 의미로 해서 종교적 명칭으로도 쓰이는데, 특 히 시편에 자주 나오는 "야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그것이다. 일차적으로 이 명칭은 정당한 자격을 갖추고 (시편 15편 ; 24편) 성전 의식에 직접 참석한 전례 공동체 (시편 22, 26), 또는 계약의 하느님에 대한 경신례의 주체 인 계약의 백성 전체(시편 60, 5-6)를 가리킨다. 그리고 부차적으로 이 명칭은 후대의 시편들에서 종교 의식과는 별다른 관계없이 일반적으로 경건한 종교인들(시편 103, 13. 17-18)을 가리킨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인 야 훼께 충실한 사람들이다. 야훼를 두려워하는 이들은 야 훼 숭배자로서 그분에게 속한 이들 또는 그 공동체이다.
야훼에게 충실함 또는 그분에게 속함은 종교적 의무만 이 아니라 윤리적 의무도 내포한다. 윤리적 의무는 하느 님의 뜻을 따르는 것, 구체적으로는 그분의 율법을 준수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동시 에 율법을 성실히 지키는 사람들이다. 결국 하느님에 대 한 경외와 율법 준수가 동일시된다(신명 10, 12 ; 시편 19, 10 ; 112, 1). 이 동일화는 통상 부정적 의미로 쓰이는 율 법주의가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존재 근본을 이루는 계 약의 기본 구조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은 계 약을 통해서 야훼와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 이 관계는 그 본질상 상호 의무를 지니고 있다. 이 의무는 계약 헌장에 담긴 그분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 준수는 계약에 성실함, 곧 하느님에게 충실함을 말한다. 하느님 을 두려워함은 하느님에 대한 윤리적인 두려움을 갖는 것만이 아니라, 윤리적으로 요구하는 하느님 의지에 충 실하게, 대인 관계에 있어서 윤리적으로 살아야 하는 것 도 뜻하는 것이다.
지혜 문학이 하느님을 두려워함은 지혜의 시작이고 근 본이라고 강조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잠언 1, 7 : 욥기 28, 28 ; 시편 11, 10 ; 집회 1, 4). 하느님을 두려워함은 올바른 윤리적 자세와 행동을 가리킨다(잠언 3, 7 ; 8, 13 : 욥기 1, 1. 8) . 지혜의 근본으로서, 곧 슬기로운 삶을 이 루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 조건으로서 두려움 또는 경외를 통하여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정립되지 않았 을 때 지혜 자체는 성립되지 않는다. 지혜 문학에 따르면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은 이상적 삶의 근본일 뿐만 아니 라 그러한 삶이 추구해 갈 목표이기도 하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두려움〕 신약에서 두려움을 표현 하는 데 가장 자주 쓰이는 말은 동사형 '포베오마이' (φοβέομαι)와 명사형 '포보스'' (φόβος), 그리고 이들에게 서 파생된 단어들이다. 구약의 '야레' 에 상응하는 이 어 근은 신약성서에 모두 150여 번 나온다. 이 밖에도 직 접 · 간접적 동의어로서 '세보마이' (σέβομαι)와 '에울라
베오마이' (εὐλαβέομαι), 그리고 이 들의 명사형 등도 가끔 쓰인다.
그리스도와 두려움 : 신약은 비종 교적 두려움(마르 11, 8 ; 마태 2, 22 ; 14, 5 ; 21, 26 등)과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사도 10, 2. 22 ; 13, 16 등)에 관해서 구약과 거의 같은 내용을 보 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그 두려움 의 대상으로 자주 언급되는 것이 특 징이다. 이 점에서 우선 특기할 사항 은 유대의 종교적 · 정치적 지도자들 과 백성과 예수 사이에 드러나는 관 계이다. 지도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호의적으로 수용하는 군중 때문에 예 수를 두려워한다(마르 11, 18). 또한 그들은 예수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지 만 백성이 두려워서 이를 실행에 옮 기지 못한다(마르 12, 12 ; 루가 22,
2). 유대의 권세가들이 군중을 두려워하는 것은 현세와 그 권력으로 인해서 '눈이 어두운' 지도자들보다도 일반 백성이 예수에게 더 가까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에 대하여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것은 예 수의 신성(마태 17, 5-6 ; 루가 24, 37)과 권능이(마르 4, 41 : 5, 15 : 5, 33 ; 마태 9, 8 ; 루가 5, 9 : 7, 16 ; 요한 6, 19) 드러날 때이다. 신적인 예수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 으로 하여금 예수에 대한 믿음을 자문해 보게도 하고(마 르 4, 41), 기쁨을 느끼게도 하며(마태 28, 8), 자기 죄를 고백하게도 하고(루가 5, 9), 그러한 예수를 통하여 당신 백성을 찾아 준 하느님을 찬양하게도(루가 7, 16) 하기 때 문이다. 이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와 예수를 통 하여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인간들의 반응이다.
구약에서는 하느님이 직접 또는 중개자를 통하여 인간 에게 위로와 고무의 뜻으로 "두려워하지 말아라!"고 말 씀하였다. 이제 신약에서는 예수가 이 말씀을 한다. 당신 의 신적 존재 또는 권능에 접해서 두려워 떠는 제자들에 게 이 말씀으로 안심시키고(마태 17, 7 ; 마르 6, 50), 죽음 의 공포를 믿음으로 극복하라고 타이른다(마르 5, 36 : 루 가 8, 50). 이 믿음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다(루가 8, 48). 아울러 예수는 이 말씀과 함께 특별한 임 무를 맡긴다. 시몬에게 '사람들을 낚는 어부' 가 되는 소 명을(루가 5, 10), 또 부인들에게는 당신 부활의 복음을 제자들에게 전하는 사명을 부여한다(마태 28, 10). 이와 같이 하느님과 관련하여 구약이 말하는 두려움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신약이 말하는 두려움 사이에는 일 정한 유사성이 나타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게도 두려움의 대상은 오직 하느님뿐이며 이분에 대한 두려움이 여타의 모든 두려움 을 극복하게 한다(마태 10, 28 ; 루가 12, 4-5). 하느님만 을 두려워해야 하고 그분만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는 이 유는 그분이 생사 여탈권(與奪權)을 쥐고 있으면서 동시 에 가장 미세한 것('머리카락' : 마태 10, 30)과 가장 보잘 것없는 존재( '참새' : 마태 10, 29 ; 루가 12, 32)에게도 지 대한 관심과 사랑을 쏟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두려움 : 특히 바오로에 따르면 하느님 에 대한 두려움은 그리스도적 존재의 중요한 일부를 차 지한다(1베드 1, 17). 그리스도적 성화(2고린 7, 1)와 구원 (필립 2, 12)에 이르기 위하여 두려움은 필수적인 조건이 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엄격하심' 을 알 아야 하고(로마 11, 22) 그분의 절대적 권능과 자유를 진 지하게 받아들이는 두려움으로, 잘못된 확신과 오만에서 벗어나야 한다(로마 11, 20). 동시에 새로운 실존을 살아 가는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령에 의해 서 모든 현세적 두려움과 하느님에 대한 노예적 공포로 부터 해방되어 순종하는 자녀적 사랑의 삶을 영위해야 한다(로마 8, 15 ; 2디모 1, 7) . 그러나 그 삶에는 다른 사 람들에 대한 존경과 사랑과 함께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이 있어야 한다(1베드 2, 17). 결국 하느님에 대한 그리스 도인들의 두려움은 하느님의 절대적 권능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그분의 무한한
사랑에 대한 응답인 것이다.
두려움과 사랑 : 신약성서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보 다 사랑을 더 강조하고 있음은 사실이다(마르 12, 28-34 ; 요한 13, 34). 그리고 요한 1서 4장 18절은 사랑과 두려 움을 대립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 구절이 말하는 두려 움은 하느님의 은혜와 구원, 그리고 그분의 구원자적 존 재 자체가 아니라 심판과 벌만을 무서워하는 노예적 두 려움이다(로마 8, 15). 이렇게 제한된 두려움이기 때문에 자연히 부정적으로 판단될 수밖에 없다. 요한 1서에 따 르면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결정짓는 것은 인간 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이다(1요한 3, 1). 모든 것 을 압도하는 이 사랑의 신비에 대한 인간의 응답은, 구 약 · 신약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두려움의 일부이면서 그 핵심이었던, 사랑일 수밖에 없다(1요한 4, 11). 그리고 이 인간의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에 따라 이질적인 모든 것을 제거해 나감으로써 순수와 완전을 지향해야 하는 것이다. (→ 경외심)
※ 참고문헌 S. Terrien, 《IDB》2,p. 256~260(《성서 백과 대사전》 3, 성서교재간행사, pp. 138~193)/ S. Plath, Furcht Gottes, Der Begriff ירא AT,Arbeiten zur Theologie II/2, Stuttgart, 1963/ J. Becker, Gottesfurcht im AT, 《AB》25, Rom, 1965/ L. Derousseaux, La crainte de Dieu dans I'AT, 《LD》 63, Paris, 1970/ H.P. Stahli, ירא. jr' fürchten, 《THAT), München · Ziirich, 1975, pp. 756~7781 H.F. Fuhs, ירא jare', 《ThWAT》 2, Stuttgart · Berlin · Köln · Mainz, 1982, pp. 869~893/ H. Balz, φοβέομαι · ἀφόβως · φοβερός· φόβητρον· φόβος, 《EWNT》3, Stuttgart · Berlin · Köln · Mainz, 1983, pp. 1026~1039/ G. Lanczkowski · K. Romaniuk, Furcht I ~ Ⅱ , 《TRE》 11, 1983, pp. 755~759. 〔任承弼〕
II . 종교학에서의 두려움
일반적으로 심리학에서는 '두려움' 을 희망과 서로 어 긋나는 인간의 반응으로서, 어떤 고통이나 불길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한 당연한 반응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일상적인 삶 속에서 느껴지는 '두려움' 과 종교적인 상황 속에서 전개되는 '두려움' 에는 큰 차이가 있다. 앞의 것이 이미 경험된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이라 면, 뒤의 것은 다분히 임의적이라는 것이다. 즉 어린이가 밤을, 개가 사자를 무서워 하는 것은 상황이나 사물과 접 촉하면서 직접적인 해를 입었던 예전의 경험에서 비롯되 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적인 경우는 직접적 유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앙 대상과의 관계에서 또는 특수한 믿음 에 의해서 임의적으로 규정된 것이다. 종교적인 '두려 움' 의 양상과 이와 관련된 의례적 차원의 경험들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종교적 두려움의 양태〕 누멘적(numen)인 두려움 : '누 멘적인 두려움' 이라는 용어는 독일 종교학자 루돌프 오 토(R. Otto)가 처음으로 사용하였는데, 그는 종교의 존재 론적 근거를 '성스러움' 또는 '신성' 에 두고, 이들을 누 멘적인 것' 으로 규정하였다. '누멘적인 것' 이란 그 자체 가 개념들로서는 설명될 수 없는 비합리적인 것이다. 단 지 이 누멘적인 것을 체험하는 인간의 특이한 감정적 반 응을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는 것이다. 이 특유의 감정이 '두려운 신비' 이다. 오토에 따르면, '두려움' (tremen-
dum)의 감정은 '말할 수 없는 신비 속에서 피조물이 초 월한 자 앞에서 생겨나는' 인간의 반응으로 자연적인 공 포의 감정과는 분리된다. 곧 이 특유의 감정은 공포와 유 사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을 통하여 유추적으로 암시될 수는 있으나 무서워 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 다. 이 감정은 '공포 이상의 공포' 로 표현되기도 한다. 따라서 영어의 '경외감' (awe)이나 독일어의 '무시무시 함 (grauen), '전율을 느끼다' (erschauern)라는 의미와 비 슷하다. 따라서 누멘적 두려움이란 '앞으로 예기될 불운 에의 두려움' 과는 근원적인 차별성을 가진 인간의 본질 적 경험이다. 그러면 이러한 감정의 구체적 모습은 어떻 게 나타나는가? 오토는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이 러한 감정은 때로는 깊은 예배의 평온 속에서 고요한 조 수(潮水)와 같이 우리 마음에 엄습해 오기도 한다. 그리 하여 보다 지속적인 영혼의 상태로 이행하여 오래 계속 되다가 여운을 남기고는 아주 사라져 버리면서 우리의 영혼을 또다시 속된 세계로 몰아넣기도 한다. 그런가 하 면 갑자기 저돌적인 충격과 경련을 일으키면서 영혼으로 부터 폭발해 나오기도 하며 때로는 이상한 흥분과 도취, 환희와 황홀경으로 이끌기도 한다. 미친 듯한 악마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으스스할 정도의 소름과 전율로 하락하기도 한다." 이처럼 선험적 범주로 설정된 '성스 러운 대상' , '누멘적인 것' 에 대한 두려움의 경험은 대상 그 자체의 신비스런 속성 때문에 야기된 것이다. 여기에 는 '힘' , '위력' , '절대적 압도성' 의 요소가 들어 있다. 또한 성스러운 대상의 두려운 요소를 경험하는 순간, 인 간의 마음은 활성화되고 열성으로 치달으며 엄청난 긴장 과 역동성으로 채워지게 되는데, 이것은 두려움의 요소 에 '누멘적 활력' 이라는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까 지 살펴본 '누멘적 두려움' 은 절대 접근 불가능한 대상 과 이 대상 앞에서 피조물적인 감정을 느끼는 인간을 토 대로 이루어진다. 성스러운 대상의 엄청난 힘, 위력, 신 비스러움 등의 존재론적 속성을 지닌 절대 타자로서의 대상 앞에서 인간이 느낄 수밖에 없는 경험의 한 양태이 다. 그러므로 선험적인 범주로 규정된 대상에 대한 선험 적 경험으로서의 '누멘적 두려움' 은 '존재론적 두려움' 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 와 전혀 다른 엄청난 존재와 대면함에 있어서 그 대상이 가진 속성으로 인하여 그 대 상에게 매혹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느껴지는 반대 병 존의 감정인 두려움도 들기 때문이다.
오염에 대한 두려움 : 존재론적 두려움인 '누멘적인 두려움' 과는 다르다. 이것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칠 위험 스러움에 대한 반응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누멘적인 두 려움은 존재 자체의 속성에 대한 인간의 특이한 감정이 지만, 오염에 대한 두려움(Pollution fear)이란 포괄적으로 말해서 불운한 재앙으로 해를 입게 될 것이라는 불안함 에서 생기는 감정이다. 이러한 감정이 일상적인 현실 생 활에서의 두려움과 구별되는 이유는 이들에 대한 설명 체계에 있다. 종교적 차원에서의 '두려움' 은 초자연적 힘의 작용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두려움을 야기시키는 대상은 비일상적인 힘을 가지고 있
으며, 인간의 이러저러한 잘못으로 이 힘이 위험스럽게 작용한다는 믿음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러한 위험은 세 가지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다.
① 신성한 것과의 접촉으로 인한 두려움 : 이 두려움 은 성스럽다고 규정된 어떤 대상을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여기지 않을 경우 생길지도 모르는 불운에 대한 감정이 다. "신성한 것(대상)이 오염되었기 때문에 분노한다" 는 믿음에 근거한 것으로 종교 제의의 장소나 신전에 함부 로 접근하지 않는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종교 의례 가 행해지는 장소나 성스러운 물건일 경우, 이들은 인간 들에게 성스럽게 여겨져야만 그들에게 유익한 대상이지,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아주 무서운 힘으로 전락하게 된 다는 것이다. 이때의 오염의 주체는 인간이며 오염의 대 상은 신적인 대상 또는 성스러운 사물이다. 이는 인간이 자기 세계와 병행하여 또 하나의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 다고 믿어 왔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 세계는 천신 · 지 고신에서부터 하위의 신들 · 천사 · 정령 · 마신 · 사령에 이르는 존재들로 구성되는데 이들 세계와 인간의 접점 (接點)을 '성스럽다' 고 보는 것이다. 희생 제의의 제장 (祭場)이나 사원 또는 교회가 이에 해당된다. 이외에도 왕이나 사제는 성스러운 인물로, 그리고 신의 뜻이 적혀 있는 책은 성스러운 경전으로, 그리고 초자연적 존재를 찬양하는 춤이나 음악 등은 성스러운 의례가 된다. 이렇 게 '성스러운 것' 으로 일단 규정된 이상 인간은 이들을 아주 신중하게 다룬다. 그리하여 성스러운 인물, 사물 또 는 장소에 접할 때에는 항상 조심을 하며 또한 정화 의례 를 치른다. 그렇지 않을 경우 상당한 화를 초래한다고 믿 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려움은 다신론적(polytheism) 배 경에서 흔히 나타나는데 원시 종교의 경우, 의례를 행하 는 집행자인 추장과 관계된 모든 것은 성스러운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추장의 물건에 잘못 손대거나 심지어는 추장이 먹다 남긴 음식물을 먹어도 해를 입게 된다는 두 려움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이 원시 종교에만 해 당되지는 않는다. 이슬람교의 경우 무슬림이 아니면 성 소에 출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나, 힌두교 성전인 베다 를 브라만 계급 이외의 사람들에게 개방하지 않는 것 등 이 이에 속한다. 이들은 모두 성스러운 것을 오염시킬 경 우 당하게 될지도 모를 재앙에 대한 인간의 반응으로서 의 두려움이다.
② 불결한 것과의 접촉으로 인한 두려움 : 이 두려움 은 불결한 그 무엇에 의해 인간이 오염이 되었을 경우 해 를 입게 될지도 모른다는 감정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오 염을 당함으로써 생기는 사건에 대한 반응이다. 예를 들 어 피, 시신, 또는 특정 동물이나 새에 접촉하면 부정을 탄다고 하는 경우이다. 곧 사회에서 규정한 어떤 위험스 러운 것들과의 접촉이 야기하는 불운한 사건에 대한 인 간의 반응인 것이다. 성스러운 대상일 경우 특별히 오염 되지 않았다면 인간에게 유용한 힘으로 인식되지만, 불 결하고 위험스러운 것의 경우는 어떠한 것이든 인간에게 이로운 존재로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면 어떠한 것들 이 불결한 것, 위험스러운 것의 범주에 해당되는가? 일
반적으로 인간의 배설물에서부터 자연의 일탈(逸脫) 현 상, 부정한 음식에 이르기까지 그 대상은 다양하지만 가 장 두드러진 사례로는 여성에 대한 배제 행위를 들 수 있 다. 여성, 특히 생리 중인 여성을 부정하다고 느끼는 것 은 시대와 문화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인 현상이 다. 이것은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인간의 분비물인 피에 대한 부정적 의식이 가미되어 나타난 것이므로, 가 장 최악의 두려움을 야기시킨다. 여성을 부정적으로 묘 사하여 사회적으로 배제시키고 있는 가장 단적인 사례는 서구 중세 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실 어떤 것을 오 염시킬 정도의 불결한 사물은 그 자체가 불결한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위험스러움의 강도에 따라 악마적인 적극적 힘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특별한 접촉에 의해서 뿐 아니라 대상 스스로의 적극적 작용으로 인하여 인간 에게 해를 미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접촉만 피 하면 화를 면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적 극적으로 그 악마적인 힘에 대처해야 한다는 인식이 싹 터 악마적인 것과 동일시되는 대상을 제거하기에 이른 다. 중세 사회에서는 여성을 당시 사회 혼란의 원인으로 규정하고 나아가 특정의 종교적 여성(wich)을 악마적 속 성을 소유한 마녀로 규정짓고 약 100만 명에 달하는 여 성을 화형에 처하였다. 이 사건은 여성을 단순히 불결하 다고 생각하여 의례에서 배제시키고, 여성과의 잘못된 접촉시 오염 때문에 해를 당할 것이라는 소박한 의식이 극단적으로 발전한 두려움에서 야기된 것이다. 여기서 언급해야 할 문제는 '과연 불결한 것, 위험스러운 것, 심 지어는 악마적인 것으로 분류되는 사물들을 어떠한 기준 에 의해 결정되는가' 이다. 대체로 사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계층(힌두교의 경우 카스트 계급에 포함되지 못하는 '접촉해서는 안되는 천민' 이 불결한 대상으로 규정되어 있다)이 나 기존의 세력 관계에서 힘없는 존재들이 대부분 불결 한 대상으로 지목된다. 이에 대해 프로이트(G. Freud) 이 론이나 분류 체계론에 의하면 '이러한 사물은 불안정한 특색이 있으므로 어떤 계기에 의해 폭발적으로 돌변할 수 있기 때문에 두려움을 야기하는 존재로 규정되었다' 고 한다. 곧 사회적 · 문화적 억압 기제에 의해 스스로를 충분히 표출하지 못한 존재가 가지는 폭발적인 가능성이 불결한 힘 혹은 위험스러운 세력으로 범주화되었던 것이 다. 이상으로 미루어 볼 때 종교적인 '오염에의 두려움' 을 야기시키는 대상은 그것이 신성한 것이든 위험스러운 것 혹은 악마적인 것이든 다분히 임의적이라는 점에 있 어서는 공통적임을 알 수 있다.
③ 인격적 신인(神人) 관계의 일탈에 의한 두려움 : 이러한 경험은 주로 유일신적 배경에서 나타난다. 신앙 대상이 하나의 신으로 규정되고 이 신과 인간의 상호 관 계가 인격적인 계약 관계로 설정된 경우, 인간의 잘못으 로 인해 신으로부터 받게 될 응징에 대한 두려움이다. 신 과 인간 사이의 계약 관계란 인간이 신의 계명을 잘 따르 고 신을 잘 섬길 경우 인간에게 은총을 내릴 것이며, 그 렇지 않을 경우 혹독한 벌을 내린다는 쌍방적인 계약 관 계이다. 이러한 현상은 다신론적 상황에서와는 달리 윤
리적인 차원이 가미된 것이다. 또한 신의 존재론적 속성 과 대면한 피조물 인간의 독특한 감정이 아니다. 쌍방적 인 신인 관계가 일탈되는 경우, 곧 신의 정의에 반하는 행위를 하거나 신이 내린 계율을 거스르는 등의 행위를 하는 경우에 계약을 위반한 인간은 어떠한 응징을 당하 게 되리라는 예상을 하게 되고 이에 의해 자연히 '두려 움' 의 감정이 유발되는 것이다. 이는 구약의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에서 잘 드러난다. 이스라엘 백 성들은 자신의 고난을 계약 관계를 파기한 자신들의 책 임으로 돌리면서 하느님 앞에서의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 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의 '두려움' 이란 감정은 오토 가 말했던 존재론적 차원과 또한 그 존재에 대한 매혹적 인 감정이 아주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그 리스도교적 두려움을 모두 인격적 신인 관계의 일탈에 의한 두려움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이러한 유형의 두 려움은 그리스도교보다는 이슬람교 전통에서 더 명확히 드러난다. 이슬람교에서는 은총과 심판이라는 분명한 틀 속에서 현실적인 자신들의 삶이 규정되기 때문에 그들이 알라신을 어떻게 모시는가, 코란의 규범을 얼마나 열심 히 지키는가에 따라 삶의 존재 형태가 결정된다고 생각 한다. 따라서 알라신에 대한 불복종은 직접적인 삶에 영 향을 미치므로 무슬림이 갖는 두려움은 단순한 '오염' 의 범위를 넘어선다. 현대에 전개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의 전통 복귀 운동에서 이러한 논리가 그들의 존립 근거 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 점은 특히 유명한 이슬람 교의 근본주의 운동이었던 와하브파(Wahabbhism)의 슬로 건에 잘 나타난다. "외부 문명 세력권 때문에 이슬람이 황폐해진다면 이것은 전통을 진실되게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슬람 국가가 강성해진다면 이는 무슬림들이 알라신에게 철저히 봉사하였다는 증거이며 초기 이슬람 전통을 올바로 계승한 표징이다." 이러한 체계에 기초한 두려움은 단순히 오염에의 접촉 때문에 야기되는 것이 아니다. 이때의 '오염' 의 의미는 윤리적인 색채가 가미 된 '죄' , '범죄' 를 뜻한다. 따라서 두려움은 죄책감과 분 리될 수 없는 감정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이상에서 살 펴본 '오염에 대한 두려움' 은 그 양태론적 성격에 있어
서는 오토(R. Otto)식의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일상 생활에 서 흔히 갖는 재앙에의 두려움과 더욱 가깝다고 할 수 있 다. 그러나 앞서 언급하였듯이 종교적인 차원의 '오염에 의 두려움' 은 대상이 끼치는 직접적인 해가 확인되어서 가 아니라, 특정 대상에게 그러한 초월적인 힘이 있을 것 이라는 믿음이 전제된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갖는다. 오 토는 이러한 두려움이 좀더 발전적인 과정을 밟아 나가 면서 결국에는 성스러운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두려움이 라는 현상을 이루어 가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이 두 경험의 양태는 그것을 발생시키는 동기의 차원에서 분명 히 구분될 수 있다.
〔두려움의 방어 기제로서의 정화 의례〕 흔히 정화 의 례(purification rite)는 잃어 버린 순수함을 회복하려 하거 나 고도의 순수성을 계발하려는 의도에서 행해지기도 하 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성한 것이 오염되는 것을 방지 하기 위해, 그리고 더러운 것 · 위험스러운 것과의 관계 를 제거하려는 의도로도 집행된다. 이러한 정화 의례를 통해 두려움의 감정은 다소간 해소된다. 그러므로 두려 움의 감정은 모든 의례 준비시 정화 의례를 드리도록 작 용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신에 대한 감사나 숭배 의 표현인 성스러운 의례가 불결한 것에 의해 감염되었 을 경우, 이 또한 신의 분노를 일으키는 한 계기로 보았 기 때문이다. 멘슁(Mensching)은 이러한 준비적 성격을 지닌 제례로서 악귀를 몰아내는 것, 물에 의한 정화, 그 리고 피에 의한 속죄 등을 들고 있다. 이것은 한국 무속 의례인 굿에서도 본격적인 굿거리에 들어가기 전에 '부 정을 친다' 는 의도의 '부정막이' 내지는 '부정치기' 의 절차가 꼭 선행한다는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준 비적 성격으로서의 정화 의례는 성스러운 것과의 접촉에 의한 두려움, 즉 성스러운 것을 오염시킴으로 발생할지 도 모를 두려움에서 행해지는 의례이다. 그러나 정화 의 례에는 이외에도 이미 오염된 것 혹은 인간의 잘못된 행 위를 제거 내지는 대속하기 위해 행해지는 것이 있다. 그 형태로는 단순히 물로 씻음으로써 오염을 제거하는 것에 서부터, 오염된 사물이나 사람에게서 불결한 것을 끌어 내는 행위(구토), 오염된 존재에게서 더러운 무엇을 다른 사물, 특히 동물들에게 전이시키는 행위(희생 제의), 오염 그 자체를 해체시키는 것, 혹은 오염된 것을 순수한 것으 로 변형시키는 행위(불의 의례) 등 다양하다. 이 중에서 희생 제의가 가장 대표적이다. 희생 제의는 제물을 통해 인간과 신이 통교할 수 있다는 믿음을 토대로, 성인식 · 결혼식과 같은 통과 의례시 그 행위를 정당화하고 축복 하는 효과를 기대하면서 수반되는 제의이기도 하다. 그 러나 여기서 더욱 중심적으로 다루는 것은 잘못된 행위 로 말미암은 재앙을 막거나 줄이기 위하여 행하는 '속죄 를 위한 희생 제의' (piacular sacrifice)이다. 이러한 성격의 의례는 원시 종교에서 잘 나타난다. 이집트령 수단 남부 의 늪지대와 초원에서 소를 키우며 사는 누어족의 경우, '코크' (kok), '로르' (lor), '키에르' (kier)라는 희생 제의 를 가리키는 말이 있다. 이 중 '키에르' (kier)는 속죄 행위를 뜻하는 말로서 인간의 "잘못" 으로 인한 정령의 분노를
달랜다는 의미로 사용되며, '코크' 라는 말은 다른 사람 에게 입힌 피해를 보상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누어 족의 이러한 희생 제의는 소의 생명으로 인간의 생명을 대신한다는 믿음에 기초한 것으로 희생 제의를 통해 정 령에게 황소의 형태를 빌려 그 자신을 바치는 의식을 행 한다. 그리하여 정령이 의식의 효력을 인정할 경우에 인 간이 요청하는 대로 잘못을 용서해 주며, 따라서 불행에 의 두려움이 해소되는 것이다.
이외에도 신성한 존재의 분노를 사지 않기 위하여 그 러한 대상에게 의례를 행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신의 분노로 인해 야기되는 불행에의 두려움을 해소하려는 의 례이다. 바빌로니아의 <길가메쉬 서사시>에 나오는 대 로, 큰 홍수가 나서 신에게 바친 음식물이 모두 휩쓸려 가버리자 살아 남은 사람들이 홍수가 그친 후 다시 봉물 을 바쳐 신들의 진노를 막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또한 힌두교의 <바가바드 기타>에는 '조상' 에게 음식을 바치 지 않으면 그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위험을 당한다는 믿음이 있다. 이에 따라 그들은 헌주(獻奏)와 무덤에 제 물을 바치거나, 불로 봉물을 태우는 등의 의례를 행한다.
이제까지 살펴본 의례들은 모두 초월적인 세력과 인간 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두려움을 제거 내지는 해소하려는 실천적 차원과 아주 긴밀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종교 적 제차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평 가〕 이제까지 종교적인 차원에서 전개된 '두려움' 의 양상을 살펴보았다. 절대 타자로서의 신이 가지는 존 재론적 속성에 대한 피조물 된 자의 감정에서부터, 성스 러운 대상의 분노에 대해 두려움 · 위험스러운 것의 오염 에 대한 두려움 · 인격적으로 묘사되는 신인 관계의 일탈 에서 야기되는 응징에 대한 두려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 다. 이에 따라 항상 인간은 이러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려 고 노력을 해왔다. 정화 의례나 희생 제의 등이 그 대표 적인 예이다. 두려움의 감정과 이러한 의례의 관계에 대 해서는, 두려움의 해소책으로 의례가 생겼다는 주장과 의례가 사회적 차원에서 인간의 감정을 조장 · 통제하기 때문에 두려움의 감정이 생겨났다는 주장이 있다. 어떠 한 설명이든, '두려움' 이라는 감정은 계속해서 인간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 러므로 종교의 기원을 두려움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가능 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입장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경 우와 앞서 살펴본 오토의 경우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마 르크스주의의 경우에는 종교의 기원을 '자연과 싸우는 원시인의 무기력' 에 두며, 무기력한 인간이 자연 재해 등의 재앙에서 느끼는 두려움을 기원으로 보고 있다. 이 런 식의 설명은 오토가 말하는 종교 기원으로서의 두려 움과는 약간 초점을 달리하는 것이다. 오토 역시 두려움 을 종교의 기원으로 보고 있지만 이것은 재앙에 대한 불 안함에서 유발되는 두려움이 아니라 신적 대상이 갖는 어떤 속성, 즉 인간으로 하여금 무엇인가 '켕기는' 마음 을 갖도록 하는 특성으로서의 두려움이다. 어떤 식으로 든지 두려움은 인간의 삶 속에 상당한 의존 감정을 유발 시킬 만큼 강력하며, 그러한 감정에의 구속에서 헤어나
려는 인간의 노력 또한 적극적이었던 만큼 두려움은 인 간에게 중요한 감정이 아닐 수 없다.
※ 참고문헌 Hans H. Penner, The Concept and Forms of Ritual, 《NEBrit》 26, pp. 824~8271 Carsten Colpe, Sacred and the Profane, 《ER》 12, pp. 511~526/ Roudolf Otto, Das Heilige, Miinchen : C.H. Beck, 3. Aufl., 1963(길희성 역, 《聖스러움의 意味》, 분도출판사, 1987)/ J.B. Noss, Man's Religions, New York : Macmillan, 1979(윤이흠 역,《世界宗教史》 上 · 下, 현음사, 1988). 〔朴廷海〕
: Ⅲ 유교에서의 두려움
인간이 두려운 대상을 대할 때 느끼는 마음의 정감으 로서, 기쁨[喜] · 분노[怒] · 슬픔[哀] · 사랑[愛] · 미움 [惡] · 욕망[欲]과 함께 인간의 7가지 기본 감정인 칠정 (七情) 중의 하나이다. 두려움은 다른 감정과 마찬가지 로 그 자체는 자연스럽고 선하지만, 인간 성숙을 위한 수 행에 있어서는 조절되어야 하는 정(情)이다. 그러나 궁 극자(窮極者)와 천명(天命)에 대한 두려움(敬畏]만은 이 상적 인간인 군자(君子)가 되기 위한 필수 요건으로 유 교 수양의 바탕이 된다.
〔유교 경전에서의 경외] 유교에서는 두려움을 포함한 인간의 감정을 긍정적으로 이해하여 그 자체는 자연스럽 고 선하며, 인간에게는 필수적인 정감이라고 본다. 공자 와 맹자 역시 당시 사회 현실과 타락상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으며, 이 두려움의 마음이 공자로 하여금 《춘추》를 짓고 맹자로 하여금 이단 사설을 배격함으로써 바른 도 (道)를 펴고 세상을 제도하는 데 기여하도록 했다는 것 이다. 그렇지만 인간다운 인간(聖人)이 되고 인간다운 공동체(大同社會)를 이루기 위해서는 인간의 모든 감정 들은 중용(中庸)에 입각해서 조절되어야 한다. 이 감정 들이 조절되지 못할 때 악을 초래하게 되므로, 《대학》에 서는 마음에 분노 · 두려움 · 좋아함 · 근심 등이 있으면 그 바름[正]을 얻지 못한다고 경계하고 있다(7장). 중화 (中和)를 이루는 것이 선이요 지나침(過]과 모자람(不 及]에 빠지는 것이 악이라고 생각하는 유교에서는 두려 움을 포함한 칠정이 조화된 상태를 이상으로 여기며, 칠 정의 조절을 수양의 중요 과제로 삼고 있다.
그런데 유교에서는 조화의 본체적 기준을 천명과 천명 이 내재한 인간 본성에 두고 있다. 따라서 천명을 알고 두려워함, 그리고 천명에 순응함과 본성에 따름을 무엇 보다 중요시한다. 《논어》에서는 "천명을 모르면 군자가 될 수 없다" (<堯曰> 편)고 하면서, 군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세 가지 두려움 중 첫째가 천명을 두려워함이라고 역 설하고 있다. "군자가 두려워하는 바가 세 가지 있으니, 천명을 두려워하고 대인(大人)을 두려워하고 성인의 말 씀을 두려워한다"(〈季氏〉 편). 군자는 무엇보다 천명을 알 고 두려워하므로, 천명을 경외하고 따르는 대인도 두려 워하고 존경하며, 더 나아가 천명을 밝혀 주고 본받도록 하는 성인의 말씀 역시 두려워하면서 성실히 믿고 따른 다. 그러나 소인은 천명을 모르기에 두려워하지 않으며, 천명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므로 대인도, 성인의 말씀도 무시하고 기탄 없이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천
명을 알고 두려워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군자와 소인의 차이가 있다고 본다. 또한 유교에서는 군자와 소인의 차 이뿐만 아니라 인간과 금수의 구별 역시 근본적으로는 천부적인 마음의 보존 여하에 달려 있다고 보는데, 궁극 자와 천명에 대한 경외가 있어야 마음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고, 경외심이 없으면 방심하게 되어 금수의 상태로 까지 전락하게 된다고 믿는다.
따라서 언제, 어디서나 궁극자의 현존을 의식하면서 삼가고 두려워함(戒愼恐懼)이 본연의 마음을 보존하고 [存心] 본성을 기르며(養性] 감정을 조절해 나가는 데 가장 필수적인 자세라고 강조한다. 우선 혼자 있을 때부 터 열 사람의 눈이 지켜보고 열 사람의 손가락이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듯이 삼가야 한다(《大學) 6장). 그러므로 "군자는 그 보이지 않는 데를 경계하여 삼가며 〔戒愼〕, 그 들리지 않는 곳을 두려워한다(恐懼). 어두운 것보다 더 보여지는 바가 없으며 미세한 것보다 더 드러나는 바가 없으므로, 군자는 혼자 있을 때에 삼가는 것이다〔愼獨)" (《中庸》 1장). 더 나아가 외모 · 대인 관계 · 일 처리 등 외 적 행위에 있어서도 마음의 경외심을 늘 간직하면서 경 건하게 처신해야 한다. 이렇게 유교에서는 궁극자를 의 식하면서 삼가고 두려워하는 계신공구(戒愼恐懼) 내지 경외를 무엇보다 중요시하여 수기(修己)의 바탕으로 삼 고 이에 힘쓴다.
[성리학에서의 거경(居敬)〕 공맹(孔孟) 사상을 계승하 고 이론을 체계화한 성리학에서는 인간의 마음에 더욱 관심을 집중시키면서 궁극자에 대한 두려움 내지 경외를 '경' (敬) 사상으로 심화하고 논리화하였다. 이천(伊川) 정이(程頤)는, 학문하는 사람이 걱정할 바는 마음이 흐 트러져 안정할 수 없는 상태로서 이것은 천하의 공통적 인 병이므로, 무엇보다 먼저 경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세 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음이 외물(外物)에 접하여도 안정되고 보존되려면 경을 마음의 주(主)로 삼아 분심하 지 말고 오로지 경에 집중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회암 (晦庵) 주희(朱燾)는 성인을 향한 학문과 수양의 길은 오직 경에 거함(居敬)과 이(理)를 궁구함(窮理)에 있는 데, 이 둘은 상호 보완적이나 거경을 바탕으로 해서만 궁 리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소학》과 《대학》뿐만 아니라. 유교 사상 전체가 경을 바탕으로 하 고 경으로 일관되어 있으며, 따라서 "경은 일심(一心)의 주재(主宰)요 만사의 근본"이라고 언명하였다. 더욱이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마음은 한 몸의 주재요, 경은 한마음의 주재" 라고 하면서, 경은 “배움(學)과 생각[思] 을 겸하고 움직임[動]과 고요함(靜)을 관통하며 안[內] 과 밖[外]을 합하고 드러남[顯]과 은미함(微)을 일관하 는 도(道)" 로서 "성학(聖學)의 시작이요 마침" 이라고 강 조하였다. 그는 경을 마음의 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그 의 사상 체계의 핵심과 바탕으로 삼았으니, 그의 사상의 집성체인 《성학십도)(聖學十圖)는 경을 주(主)로 하고 "경외를 높임"에 전체적 요점을 두고 있다.
경의 내용으로 성리학에서는 분심하지 않고 마음을 오 로지 하나에 집중함(主-無適)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엄숙히 함〔整齊嚴肅〕, 경외하는 마음을 갖고 삼가고 두 려워함(戒愼恐懼〕, 항상 깨어 있음(常惺惺法], 성찰하여 흐트러진 것을 모아 들임[省察收斂] 등을 들고 있다. 거 경의 실천적 세목으로 주희는 《경재잠》(敬箴)에에서 다 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즉 '홀로 있을 때〔靜)는 의관 을 바르게 하고 쳐다봄을 높이 하며 마음을 침잠하여 상 제를 대하여 모시고(對越上帝), 수족을 움직일 때[動]에 는 발걸음을 중후하게, 손짓을 공손하게, 땅을 밟음을 조 심스럽게 하며, 대인 관계에 있어서는 큰 손님을 모시듯 하고 일을 함에 있어서는 제사를 받들듯 하며 조심하고 두려워하여[戰戰兢兢) 감히 잠시도 안이하지 말며, 입을 지키기를 병마개를 막듯 하고 잡생각 막기를 성문 지키 듯 하며 성실하고 진실하여 잠시도 경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는 것이다. 경에 어긋남으로써 야기되는 병폐로는, 마음에 잠시라도 틈이 생기면 만 가지 사욕이 일어나 불 길이 없는데도 뜨거워지고 얼음이 없는데도 차가워지며, 일에 있어서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천지가 뒤 바뀌고 삼강(三綱)이 무너지고 구법(九法)이 무너지게 된다고 경계하고 있다.
이러한 경의 모습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바탕 내지 궁 극자를 마주하고 의식할 때 우러나오는 태도이므로, 궁 극자에 대한 현존 의식과 대면 의식(對越上帝)은 거경의 핵심이요 바탕이 된다. 그런데 성리학에서는 만물의 존 재 근거 내지 궁극자를 선진 유교(先秦儒敎)와는 달리 종교적 관점에서보다는 철학적 관점에서 이해함으로써 자연히 궁극자관에 있어서 신앙적 측면은 약화되었다고 본다. 궁극자에 대한 호칭에 있어서도 '태극' . '이' , 도' 등을 사용하였다. 그렇지만 성리학의 궁극자관이 비록 비위격적(非位格的), 내재적 성향이 강하다 하더라 도, 궁극자에 대한 대면 의식과 여기서 연유하는 거경 사 상은 성리학적 인생관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정약용의 신독(愼獨)〕 유자(儒者)이며 동시에 천주교 인이었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궁극자에 대해 올바로 알고 그의 현존을 깨닫고 계신공구함이 무엇보다 급선무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바탕이라고 믿었다. 일 반적으로 두려움의 감정은 아무런 이유 없이 생기는 것 이 아니라 대상을 의식할 때 생기게 되니, 예컨대 밤에 묘지나 숲속을 지날 때 두려움을 기약하지 않아도 두려 움을 느끼게 되는 것은 도깨비나 호랑이가 있음을 의식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군자가 어두운 방안에 있더 라도 매우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감히 악을 저지르지 못 하는 것은 상제가 강림하여 계심을 알기 때문" 이라는 것 이다. 상제의 현존과 감시를 의식하면 누구나 두려워하 고 삼가게 되어 선을 행할 수 있으나, 그 현존과 감시를 의식하지 못하면 두려움 없이 방자하게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약용은 상제의 현존을 두 가지 측면에서 의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첫째는 인간의 마음[道心] 안에서 말씀 하는 천(天)의 명령을 통해서요, 둘째는 상제의 강림과 직시를 통해서이다. 상제는 인간의 도덕적 마음[道心]에 후설(喉舌)을 기탁하여 말씀하므로 도심(道心)의 경고
(儆告)는 바로 상제의 명령인 것이다. 다른 사람은 들을 수 없고 자신만이 홀로 자세히 들을 수 있어 자세하고 엄 한 바가 어디에 비교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도심의 소리가 혁혁한 천명임을 반드시 알아 그 말씀에 순응하면 선이 되고 상서로움이 되나, 그 말씀을 업신여 겨 거역하면 악이 되고 재앙이 되니, 군자의 삼가고 두려 워함은 오로지 여기에 있을 따름이다."
또한 신령하고 밝은(靈明) 상제가 임재(臨在)하여 굽 어볼 뿐만 아니라 마음속까지도 꿰뚫어 보고 있음을 알 때 두려워하고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천(天)의 영명(靈明)함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아 드러나지 않 는 숨겨진 것이 없고 밝혀지지 않는 미세한 것이 없으며 그 처소를 밝히 굽어보고 날마다 감시하니, 진실로 사람 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아무리 담대한 자라도 삼가고 두 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與猶堂全書) 〈中庸自箴〉).
이렇게 상제의 현존과 직시를 알게 되면 누구나 두려 워하고 삼가게 되나, 상제의 임재와 감시를 믿지 않으면 신독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다산은 상제의 현존과 직 시를 아는 "지천(知天)이 신독의 근본"이며, 나아가 "수 신(修身)의 근본"이라고 역설하였다. 특히 수양에 있어 서 중요 과제인 감정의 조절은 상제 현존 의식과 경외심 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기쁨 · 분노 · 슬픔 등의 감정이 일어나기 전에는 상제가 임재하여 굽어살핌을 깨 닫고 계신공구하여 마음을 공평 공정하게 유지하면 중용 에 이를 수 있으며, 이러한 자신을 삼가는 노력(愼獨)을 계속하여 나가면 기뻐해야 할 때 기뻐하고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게 되는 등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중화(中和) 하게 된다는 것이다.
옛 성현들은 상제가 날마다 여기에서 보고 계심을 의 식하였기에 그들의 계신공구와 신독은 대단히 진실되고 정성스러워 실로 천덕(天德)에 도달하였으나, 당시 유자 (儒者)들이 성인이 되려고 애쓰지만 헛수고하는 이유는 그릇된 궁극자관과 여기서 초래된 상제 현존 의식의 결 여라고 판단하였다. 물론 성리학에서도 거경을 무엇보다 중요시하고 경의 핵심으로 대월상제를 들고 있으나, 성 리학의 비위격적, 내재적 궁극자관으로 인해 효과를 거 두지 못한다고 보았다. 당시 성리학에서 궁극적 존재로 지칭하는 태극이나 이(理)는 본래 무지하고 위엄이나 능 력도 전혀 없는데 어떻게 두려워하고 삼갈 수 있겠느냐 는 것이다. 정약용은 바른 궁극자관의 확립이 무엇보다 중요한 급선무라고 보고서 성리학의 철학적 태극론을 비 판하고 유교 경전의 초월적이고 주재적(主宰的)인 상 제 · 천관(天觀)에 입각해서 인격적이고도 신앙적인 궁 극자관을 정립하였다. 이러한 그의 견지와 궁극자관에는 천주교 사상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정약용은 상제의 현존 의식과 경외심을 심화하기 위해 《경기재잠)(敬己齋箴)을 지어 스스로를 경계하였는데, ,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天)이 인간을 만물의 으뜸으로 삼았는데, 인간이 자신에게 경건하지 않으면 자신의 특성을 살려 자아 완성에 이를 수 없으니 보고 듣 고 말하고 행동함을 예(禮)로써 해야 한다. 천이 아주 가
까이 계셔 직시하고 있는데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방 자할 경우 그냥 지나쳐 천벌을 내리지 않는 것은 회개할 시간적 여유를 주심이다. 남이 보지 않고 혼자 있을 때에 도 항상 두려워하고 삼가기를 마치 천의 노(怒)하심을 받듯이 해야 한다. 매일 신독함으로써 상제를 섬겨야 한 다."
이러한 유교의 궁극자 현존 의식과 경외심은 그리스도 교 신앙의 심화와 복음의 토착화에 자양분이 될 것이다. (- 경재잠)
※ 참고문헌 《朱子大全》 《朱子語類》 《二程全書》 退退溪全書》 《與猶堂全書》 金夏秦, 《東洋哲學의 만남》, 1995/ 최기복, 〈茶山의 死 生救援觀〉, 《宗教神學研究》 4집, 서강대 종교신학연구소, 1991, pp. 167~170. 〔崔基福〕
두려움
〔라〕timor · 〔영〕fear · 〔독〕Furc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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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두려워하여 그분의 목소리를 들으면 죽는다고 믿었다(보티젤리 작)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