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대목구 및 서울 대목구 부주교. 세례명은 가밀로. 한국명 정가미(丁加爾). 40여 년 동안 온갖 박해를 견뎌 내면서 한국 교회를 끝까지 지킨 초기 한국 교회의 산 증 인이다. 1853년 11월 17일 프랑스 무티에(Moutiers) 대 교구의 셔브롱(Chevron)에에서 태어나, 1873년 9월 10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 1876년 12월 23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듬해 1 월 25일 동료인 로베르 (Robert, 金保祿) 신부와 함께 한국에 입국하려고 하였지만, 그 당시 한국 은 1866년의 병인박해 (丙寅迫害)로 인해 두 명 의 주교를 포함한 9명의 성직자가 순교하고 천주 교에 대한 박해가 계속되 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 에 입국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따라서 두세 신부보다 먼저 한국
에 입국하려던 리델(Ridel, 李福明) 주교도 우선 만주에 정착하여, 차쿠(岔溝) 일명 노트르담 데 네즈(NoteDame des Neiges)에 머물러 있으면서 계속 입국을 시도하고 있 었다. 결국 같은 해 9월 11일에 로베르 신부와 함께 배 를 타고 만주를 출발하여 23일 저녁에 황해도 배천〔白 川〕 맞은편 한강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1878년 1월 말에야 비로소 구월산(九月山) 일대의 신 자들에게 성사를 베풀어 줄 수 있게 된 두세 신부는, 곧 이어 서울에서 리델 주교가 체포되자 자신과 로베르 신 부의 입국 사실도 발각되어, 결국 관가의 심한 추적을 받 는 처지가 되었다. 이를 피해 산속으로 피신하였다가 6 월에 다시 산에서 내려왔는데 이때 곡산(谷山) 지방에서 로베르 신부를 만나게 되어 서로의 무사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어 포졸들의 추적을 피해 이북 5도를 돌아다 니면서도 결코 전교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 해 12월 에는 남부 지방으로 내려가기 위해 충청도를 거쳐 경상 도로 가는 도중에 천연두에 걸린 어린이들에게 성사를 베풀다가 자신도 감염되어 15일 동안 병석에서 신음하 는 고통을 겪기도 하였다.
1881년 뮈텔(Mutel, 閔德孝) 신부와 리우빌(Liouville, 柳達榮) 신부가 조선 입국에 성공하자, 두세 신부는 충 청도 지방을 전담하여 약 10년 간 이 지방의 복음 전파 를 위해 전력을 다하였다. 1890년 서울에 올라온 두세 신부는 2년 동안 종현(鐘峴, 현 明洞) 본당의 주임 신부 로 사목하다가 약현 본당을 맡게 되어,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식 벽돌조 성당인 약현(藥峴, 현 中林洞) 성당의 건축 을 담당하였다. 처음에는 종현 본당 산하 공소로 출발했 다가 1891년에 새로 부지를 마련하여 착공하게 된 이 성당은 양식 교회 건물로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서, 1892년 11월에 준공되어 이듬해 4월 23일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1892년 5월에 약현 본당 초대 주 임 신부로 정식 부임한 두세 신부는 1895년 '약현 서당' (가명학교의 전신)을 설립하는 등 사망하기 전까지 25년 동안 활발한 사목 활동을 전개했다. 그 당시 약현 본당 관할 공소들은 경기도 일대를 위시하여 멀리 송도(松都)
를 지나 황해도 배천에 이르는 광범한 지역에 걸쳐 있었 다.
1896년 코스트(Coste, 高宜善) 부주교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조선 대목구 부주교로 임명되어 더욱 열심히 사목 활동에 몰두하였으나 노쇠하여 점차로 건강이 나빠 지게 되었다. 한국 교회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40여 년 간을 헌신적으로 살았던 두세 신부는 1917년 4월 19일 에 선종하였다.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경 향잡지》 372호(1917. 4)/ 《서울대 교구 교구 총람》 부록, 가톨릭출판사, 1984. 〔李裕林〕
두세, 카미유 외젠느 (1853~1917)
〔프〕Doucet, Camille-Eugè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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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

두세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