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사회학자. 프랑스 동부 로렌 지방의 에피날(Epinal)에서 유대교 랍비의 아들로 태어난 뒤르켐은 가족의 전통을 따라서 유대교의 종교 교육을 받았다. 13세 때는가톨릭 신자였던 여선생의 영향으로 가톨릭에 관심을 가지기도 하였지만 일생동안 무신론자로 살았다.
그는 고향에서 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뒤, 파리에 있는 명문 루이즈 르 그랑(Louise leGrand) 고등학교를 거쳐 엘리트 교육 기관인 '고등사범학교 (Ecole Normale Superieure)에 진학하였다. 그는 고전문학과 미학을 중심으로 한 이 학교의 교육에 만족하지못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역사학자인 뛰스텔 드 쿨랑즈(Fustel de Coulanges)와 철학자인 에밀 부트루(EmileBoutroux)의 학문적 접근 방식을 배우게 되었다. 졸업한뒤 철학보다는 그 시대를 흔들고 있던 도덕적 문제를 명확히 밝혀낼 수 있는 학문에 몰두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직 취약했던 프랑스 제3 공화국의 도덕적 · 정치적 통합에 기여할 수 있는 과학적인 사회학 체계를 구성하는 것이 그의 희망이었다.
그는 1년 간의 독일 유학과 파리 근교에서의 교편 생활을 거쳐 29세의 나이에 보르도 대학(Bordeaux Univer-sité) 철학과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곳에서 9년 동안 사회학과 교육학을 강의한 뒤 프랑스 최초로 개설된 사회 과학부의 정교수로 승진되었다. 6년 뒤인 1902년에는 소르본 대학으로 초빙되어 1906년에 교육학 정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1913년에는 그의 교수직의 이름이 특별법령에 따라 소르본 '사회학 교수' 로 바뀌었다. 이것은그가 대학 체계의 개편 작업에서 사회학을 정규적인 학문으로 만들기 위하여 노력한 결과였다. 그는 사회학을학계에 자리 잡게 한 뒤, 그 입지를 더욱 굳힐 필요성을느끼고 학술 잡지 《사회학 연보》(L'Année Sociologique)를간행하였다.
그는 학문적 활동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정치적 참여도하였다. 1896년 발생한 드레뛰스 사건에서 그는 드레뀌스를 위한 공개 청원서에 최초로 서명한 사람들 가운데하나였다. 또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그는 수세에 몰린 조국을 도와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전쟁에 대한 연구서와 기록들을 간행하는 위원회에서 일하였고, 범독일주의와 특히 트라이치케의 국민주의적 저술들을 공격하는 여러 책자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그는 아들 앙드레가 전사했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고2년 뒤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론과 공헌] 뒤르켐의 사회학적 이론들, 특히 분업,자살, 그리고 종교 생활의 초기 형태들에 대한 이론들은사회 질서에 대한 흡스(T. Hobbees)식의 질문에 새로운 방식으로 대답하려는 것이었다. 즉, 개인들은 어떤 방식으로 사회에 통합되는가? 어떤 조건하에서 그들의 활동은사회 질서의 유지에 기여하는가? 어떤 조건하에서 그들은 서로 연대적이라고 느끼게 되는가? 어떤 조건하에서그리고 어떤 기제에 개인의 자율성은 사회 질서의 존재와 양립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의 대답 역시 흡스나 루소와 매우 달랐다. '사회 계약' 이라는 철학적 허구에 대해,뒤르켐은 풍습에 대한 실증 과학(그에게는 이것이 사회학이다)으로부터 도출된 해답으로 바꾸었다.
그가 이룬 중요한 공헌 가운데의 하나는 사회 질서에 대한 인위론적(人爲論的, artificialiste) · 주의론적(主意論的, volontariste) 개념들의 한계를 명확하게 보여 주었다는 점이다. 그는 스펜서(H. Spencer)와 점증하는 분업 체계의 복합성을 분업이 가져다 준 유익한 효과라고 설명하려는 사람들은 반대하였다. 뒤르켐에 따르면, 분업은역사의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왔다. 그것은 분업이 유용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의 내재적인 과정(그구조가 다원의 진화론을 연상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분업론》에서 묘사된 과정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사회들이 '사회적 · 도덕적 밀도' (densité sociale etmorale, 똑같은 용적 내에서 관계를 갖는 사람의 수)가 증가하는 순간부터 사회적 역할의 체계는 가치와 규범 체계 속에서 계속적인 변화를 초래하며 더욱더 분화된다. 이러한 변화들은 그들 나름대로 '사회적 · 도덕적 밀도 에 대해 긍정적인 '피드백' (feedback) 효과를 일으킨다. '사회적 · 도덕적 밀도' 의 증가는 이처럼 진화적 형태로 자동유지되는 과정을 낳는다. 즉, 연대적(連帶的)의 기본적형태들은 일정한 방향으로 진화한다. 다시 말하면, 유사성에 근거한 기계적 유대(solidarite mecanique)는 점차 자리를 양보하게 된다. 기계적 유대의 특징인 억압적인 법의 비중은 계속 감소하는 반면에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계속 발전한다. 유기적 유대의 발전 결과인 개인주의는 유대 자체를 해체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므로 체계 분석의 언어 속에는 《분업론》에 나타난 진화 과정은부정적인 피드백 효과를 발생시키는데, 뒤르켐에 따르면이 효과들은 그 당시의 사회 경제적 위기를 설명해 주는것이다.
<자살론》에서는 《분업론》의 핵심적 결론을 계속해서발전시킨다. 그에 따르면, 기계적 유대에 근거한 사회들( '공동 사회' 에 가까운)에서는 개인은 분해할 수 없는 전체의 작은 부분이다. 이와 달리, 유기적 유대에 근거한 사회들( '이익 사회' 에 가까운)에서는 개인이 사회 속에서 격리되어 있는 것으로 느껴지는 경향이 있다. 《자살론》의기본 가설은 인성의 균형과 개인의 '행복' 은 개인과 사회 사이의 유대의 강도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 유대는 너무 밀접해서도 안되고 너무 이완되어서도 안된다. 이명제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는 자살률이라는 지표를 사용하는 그의 가성에 대한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의 큰 공헌은 방법론적 측면에서 하나의 모범이 된 통계적분석을 통해 어떤 개인이 너무 강하거나 너무 약한 규범적 강제성을 띠는 사회적 맥락 속에 있을 때 자살률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그의 네 번째 저서는 《종교 생활의 초기 형태》(LesFormes élémentaires de la vie religieuse)이다. 뒤르켐은 여기서 사회적 통합의 상징적 측면들을 다루고 있다. 종교는그에게는 개별적 표현 이상으로 보편적 본질을 나타내는현상이다. 그 본질을 파악하기 위하여, 그는 진화론적 시각에서 볼 때 '종교 생활의 초기 형태' 로 간주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토템 신앙(totemism)을 분석하여 종교의 정의를 시도하였다. 만약 종교를 초월적 신을 향한 믿음이나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믿음으로 정의한다면 종교는보편적 현상일 수 없다. 그것은 초월적 신(神)도, 초자연적 힘에 대한 신앙도 포함하지 않는 수많은 종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초자연의 개념은 자연의 개념을 함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적 사실들을 초자연적 사실들로 바꾸는 것은 실증적 사고의 발전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초자연과 초월성은 특수한 종교 형태에 한한 것으로 늦게 출현한 개념으로 간주되어야 하고, 종교의 본질을 정의하는 데는 사용될 수 없는 것이다.
뒤르켐은 종교의 본질을 모든 종교의 체계에 공동된성스러운 것(sacré)이 세속적인 것(profane)과의 대립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종교는 성스러운 것-따로 보관되고 금지된 것-에 대한 믿음과실천의 통일된 체계이다." 이제 문제는 왜 모든 사회들오스트레일리아의 사회들이나 또는 근대 사회들-에서 이러한 구별을 경험하게 되는지를 설명하는 데에 있다. 만약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의 종교적 관습, 즉 토템 신앙을 조상 숭배나 동물 숭배 같은 종교의 다른 형태로부터 도출하여 설명한다면 이 종교 현상은 일반성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므로 다른 이유를 찾아야 한다. 그에 따르면, 토템은 "익명의 비인격적인 힘을 상징하는데, 이힘은 그 동물들과 섞이지 않은 채, 그것들 각각에게서 다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비인격적인 힘(그것의 상징인토템인)은 멜라네시아인들에게서 '마나' (mana)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이 개념은 수우족(Sioux)의 와칸(Wakan) ,그리고 이러쿼이족(Irqusis)의 오렌다(Orenda)와 정확히일치하는 개념이다.
그러면 왜 사회들은 이 익명의 확산된 힘(사회들은 이힘의 상징들을 성스럽다고 간주한다)을 생각해 냈을까? 뒤르켐에게는 오직 하나의 해석이 가능하다. 그것은 개인을초월해 있으며 익명의 확산된 힘의 형태를 취하는 유일한 실재적 힘이 사회 자체이기 때문이다. "무릇 사회는-그것이 사회가 사람들의 영혼에 행사하는 유일한 행위이지만-사람의 영혼 속에 있는 신성한 것(divin)에대한 감동을 일깨우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사회와 그 구성원이 맺는 관계가 신과 그 신도들이 맺는 관계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회는 개인에 대한 집단의 도덕적 권위를 내포하며 이 권위는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고취하는 존경에 의해서 성립된다. 이 존경이 성스러움의 원천이며 이것이 종교 현상을 설명한다. 이처럼 종교는 환생(예컨대 인민의 아편으로서의 종교) 같은 인위론적 방식으로 해석되기보다는 개인과 사회를 통합하는 규범과 가치의 투영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종교는 사회 구조와 같이진화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뒤르켐은 그의 시대에있던 분업과 개인화(mdividation)의 진전, 그리고 국가간경쟁의 신화가 과학과 국기(國旗)를 신성화하고 있다고보았다.
이와 관련하여 《분업론》과 《자살론》에서 제기한 질문을 다시 생각해 보면, 개인의 중시와 개인주의적 종교가어떻게 사회 질서의 유지와 양립할 수 있는가? 이에 관한 뒤르켐의 대답은 모호하고 순화론적이다. 그는 개인은 현실주의적 기대(attentes réalistes)를 계발함으로써만,그리고 분업 체계 속에서 그의 역할과 위치를 수락함으로써만 '행복' 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그의 시대의 사회 갈등이 이런 사실을 인정하게 하는 도덕 체계의 출현을 알려 주는 과도기적 상태의 징표로 보였던 것이다. (-) 종교사 ; 종교 사회학)
※ 참고문헌 R. Boudon · F. Bourricaud, Dictionaire Critique de laSociologie, Paris : PUF, 1982/ 《EU》, 1968/R. Aron, Les étapes de apenséeSociologique, Paris, Gallimand, 1967(이종수 역, 《사회 사상의 흐름》, 홍성사, 1980)/ L.A. Croser, Masters of Sociological Thought, 1975(신용하 · 박명규 역, 《사회 사상사》, 일지사, 1978)/ A. Giddens, 김의순 외역, 《에밀 뒤르켐 연구》, 한길사, 1981. [崔宗哲]
뒤르켐, 에밀 (1858~1917)
〔프〕Durkheim, Em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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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

에밀 뒤르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