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세례명은 레오. 한국명은 강양(姜良). 1866년 프랑스 오른(Оrne)의 세즈(Sées) 지방에서 출생하였다. 1890년 9월 28일 사제로서품된 후 이듬해 2월 초 한국에 입국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직후 곧바로 경상도에 파견되어 전교하다가 1892년 강원도 이천군 이천면염산리 ( 廉山里)에위치한 이천(伊川)본당으로 전임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때 패주하는 청나라군사들로부터 간신히 위험을 모면하였으나, 그 뒤 다시 동학 혁명이 일어나자동료인 르 장드르(Le Gendre, 崔昌根) 신부와 함께 저항세력을 조직하여 동학도들을 물리쳤다. 그 결과 입교자수가 매우 증가하여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계속되는교세 확장과 예비자들의 격증으로 1896년에는 이천 본당에서 포내(浦內) 본당을 분할시켰다. 그로 인해 담당사목 지역이 줄어들게 되자, 여가를 이용해서 《신입 교우들을 위한 강론집》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한편 1900년 11월에 이천군 귀당(龜塘)에 사는 김순식(金淳植), 김응섭(金應燮) 등이 성당을 파괴하고 뒤테르트르 신부를 폭행한 이른바 '뒤테르트르 신부 사건' 이라고 하는 교안(敎案)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김순식의 조카 김만섭(金萬燮)이 친척인 김주하(金周河)에게매매한 가옥에 대한 환퇴(還退) 문제가 악화되어 일어난것으로, 천주교 신자인 김주하가 가옥을 사들여 소성당을 마련하고 뒤테르트르 신부를 맞이하면서 김씨 가문과그 집의 가묘(家廟)를 훼손하고 신주(神主)를 폐기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사건이 일어난 후에 교회와 프랑스 공사관 측은 그들을 처단하고 파괴된 성당을 다시 짓도록 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1901년 원주(原州)에서는 뒤테르트르 신부가 강원도 관찰부(觀察府)에 함부로 들어가서 관에 압력을 가했다는 오해를 받은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것은 비신자들이 교인들에게 전답 · 가옥 · 송추(松楸) 등을 빼앗겼으므로 그 값을 받아 내겠다고 신자들을 고소하여재판이 진행되는 도중에 뒤테르트르 신부가, 관찰부에 함부로 난입하여 관찰사에게 압력을 가해 고소를 취하하도록 강요하였으며, 재판 비용을 받아 내기 위해 가재를빼앗고 사우(祠宇)의 문호를 부수뜨리는 등의 폭행을 자행하였다는 오해를 받은 사건이었다. 이와 같이 뒤테르트르 신부는 두 차례의 교안 사건에 휘말려 많은 곤경을겪어야 하였다.
그 후 계속해서 이천 본당의 사목을 담당하여 전교에힘썼으나, 불행하게도 공소 순방 중에 성홍열(또는 홍역)에 감염되어 결국 완쾌되지 못하고 1904년 3월 11일 평강(平康) 근처의 거릿말에서 선종하였다. 그의 유해는 그곳에서 멀지 않은 자치봉 언덕에 매장되었다.
※ 참고문헌 《서울대교구 교구 총람》 부록, 가톨릭출판사, 1984/《뮈텔 주교 일기》 I~III 한국교회사연구소, 1986~1993/ 이원순, 〈朝鮮末期社會의 敎案 研究>,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6. 〔李裕林〕
뒤테르트르, 레옹 피에르 (1866~1904)
〔프〕Dutertre, Léon Pier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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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

뒤테르트르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