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팡루, 펠릭스 (1802~1878)

〔프〕Dupanloup, Fél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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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뒤팡루.

펠릭스 뒤팡루.

프랑스의 주교. 설교가. 교육학자. 1802년1월 3일 알프스 지방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교육을 받은 뒤팡루는, 청년 시절부터 왕정 복고시대(1814~1830)의 사교계와 엘리트 성직자들을 접하게 되었다. 사제로서품된 후 1826~ 1839년에는 마들렌 성당에서교리를 가르쳐 명성을얻었으며, 1837년 파리소신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어 훌륭한 교육자로서의 자질을 드러냈다. 1844년부터 자유주의 가톨리시즘정치파의 우두머리인 몽타랑베르(C. Montalembert, 1810~1870) 곁에서 중등 교육의 자율을 보장받기 위해 나섰으며, 파리의 가톨릭계로부터 얻은 개인적인 영향력 덕분에 화해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었고, 긍정적인 결과를 얻어 내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1850년 교육의 자율을보장하는 팔루 법안(Loi Falloux)을 가결하게 한 주역이기도 하다.
1849년 오를레앙의 주교로 임명된 뒤팡루는, 모든 형태의 독재주의에 반대하고 자유주의 가톨리시즘을 지지하였다. 당시 교회 내에는 상반되는 두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자유주의 가톨리시즘인데, 교회가 변해 가는 현대 사회의 문화적 조류와 종교 · 정치적 자유를 인정하고, 보다 개방적인 태도를 취해야 사회에 영향력이 있는 새로운 엘리트들의 신임을 얻을 수 있다는 입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작가 루이 브이요(Louis Veuillot)가 속한 강경파인데 프랑스인들이 탈(脫)그리스도교화하는 이유는 교회가 당시의 새로운 사조와 합류, 동조하는 데 있다고보는 입장이었다.
1850~1866년 사이에 뒤팡루 주교가 쓴 《교육 이론》(De l'éducation) 6권이 출판되기 시작하였다. 1854년에는프랑스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어 당시 유럽에서 일어난 정치 · 종교적 쟁점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1864년 교황 비오 9세는 회칙 <관타 쿠라>(Quanta cura)와 <오류표>(Sylabbus)를 발표하여 자유주의 사상은 신앙과 대립된다고 선언하였다. 이 선언은 자유주의 가톨릭 신자들을 당혹스럽게 했을 뿐만 아니라 강경파의 기세를 고조시켰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뒤팡루주교는 1865년에 <9월 15일의 협정과 12월 8일의 회칙>을 발행하였다. 이 문서는 <관타 쿠라>를 해석한 것인데, 이로 인해 교황의 무류성을 둘러싸고 자유주의 가톨릭 신자들과 강경파 사이의 논쟁이 다시 불붙게 되었다. 뒤팡루 주교는 소수의 주교들과 함께 교황의 무류성을 교의로 선언하는 것은 시기 상조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1869년에 개최된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의 무류성이 교의로 확정되자(1870), 뒤팡루 주교와 같은입장을 취했던 주교들은 공의회의 결정에 순명하였다.
프랑스 제정이 몰락한 후 1871년 뒤팡루 주교는 국회상원 위원에 선출되었고 1875년에는 하원 위원이 되었다. 여당 군주파에 속한 그는, 교회에 유리한 법안들이채택되도록 노력하였는데, 특히 1875년 고등 교육의 자율화에 관한 법안이 그것이다. 그 결과 몇 해 안에 개설된 가톨릭 대학들은 교회 안의 지적인 쇄신을 위한 발판이 되었다.
1878년 10월 11일 프랑스 라콤브(Lacombe)에서 사망한 뒤팡루 주교는 주교로서 부여된 임무뿐만 아니라 교황 수위권과 더불어 교회 전체의 책임을 생각하였다는 점에서 19세기에 보기 드문 주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대표적인 저서로 《그리스도적 사랑과 그 실천》(La Charitéchrétienne et ses oeuvres, 1863), 《교리에 대한 담화》(Entretienssur le catéchisme, 1864), 《법학에 대한 서한》(Lettre sur 1' étude du droit, 1865),《여성 교육에 관한 제서한》(Lettres Sur I'éduca-tion des filles, 1879) 등이 있다. (→ 설교학)

※ 참고문헌  R. Aubert, 《NCE》4. [H. Lebr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