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게트, 빅토르 마리 (1848~1889)

〔프〕Deguette, Victor Mar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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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게트 신부.

드게트 신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세례명은 빅톨. 한국 이름은 최동진(崔東鎮) 그러나 최진승(崔鎭勝), 최올돌(崔兀乭)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동료 신부였던 푸아넬(Poisnel, 朴道行) 신부의 증언에 따르면, 드게트 신부는 1848년에 풍 수 아브랑쉬(Ponts Sous Avranches)에서태어나 모르탱(Mortain) 소신학교에 진학함으로써 성직자의 길을 택하였다고 한다. 쿠탕스(Coutances)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제 서품을 받은 뒤, 여러 해 동안 자기 교구에서 봉사한 후, 1875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1년 간의 수련을 마치고 곧바로 한국에 파견되었다.
1876년 2월 27일 프랑스를 떠나 만주에 도착한 드게트 신부는 중국 국경에서, 오랫동안 신부 없이 방황하고있던 한국의 교회를 위해 입국을 준비하고 있는 리델(Ridel, 李福明) 주교와 많은 선교사들을 만나게 되었다.짐을 풀지도 못한 채 그 다음날 리델 주교와 블랑(Blanc,白圭三) 신부와 함께 한국에 입국하기 위한 항해를 시작하였으나, 항해 도중 세 사람이 동시에 입국하기는 어렵다는 사정을 인식하게 되자, 리델 주교는 다시 중국으로돌아가게 되었고 나머지 두 사람만 항해를 계속하였다. 결국 5월 10일 밤에야 서울에서 약 4km 떨어진 장소에도착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이후 여러 가지 병으로 고생하다가 이듬해 겨우 건강을 회복한 드게트 신부는 곧바로 용인(龍仁) 지방으로 내려가 성사를 집전하였지만 곧은신처가 관헌에게 발각되어 다시 충청도 지방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던 중 리델 주교가 두세(Doucet, 丁加彌) 신 부,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와 함께 입국하였다는소식을 들었으나 얼마 안 가서 그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1878년 6월에 리델 주교가 풀려나 중국으로 추방된일을 계기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잠시 멈춘 듯하자 은신처에서 빠져 나와 계속해서 전교 활동을 벌여 나갔다. 그러나 곧 관헌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3개월 동안감옥에서 온갖 고초를 겪은 후, 그 해 9월 중국으로 추방당하였다. 그 후 만주에서 리델 주교를 다시 만나 《한라자전》(韓羅字典)의편찬에 착수하였고,1881년에는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건너가 한국에서의 선교활동에 필요한 교회서적을 인쇄하는 일에도 종사하였다.1883년 블랑 주교의 요청에 따라 다시한국에 입국하여 강원도 이천(伊川), 함경도 원산(元山) 등지를 근거지로 삼고열심히 전교하였다.비록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선교 활동이 인정되었지만, 1887년부터 원산 본당의 초대 주임 신부로 사목하면서 1889년까지 강원도 지방의 교세 확장에 특히 전력하였다. 한편 1886년 한불 조약(韓佛條約)이 체결된 이후 선교사들의 활동이 보다 자유로워졌다고 하지만 여러 지방에서는 크고 작은 박해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드게트 신부 역시 외국인에게 발급해 주던 여행권이라 할 수 있는 호조(護照)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박해를 받았다. 초대 원산 본당의 신부였던 그가 관가에 체포되어 서울로 호송당하게된 이 일을 가리켜 '드게트 추방 사건' 이라고 하는데, 이사건은 중앙 정부와는 달리 원산에서는 한불 조약이 체결된 사실을 얼마 동안 모르고 있었던 데다가 완고한 주민들의 반발, 그리고 지방관의 자의적인 횡포까지 겹쳐서 일어난 것이었다. 그는 교회측과 프랑스 대리 공사의 엄중한 항의로 한 달이 지난 뒤에 다시 원산 본당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1889년 4월 초에 블랑 주교의 지시에 따라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는데, 그 무렵 그는 이미 심신이 몹시 쇠약해진 데다가 장티푸스까지 걸린 상태였다. 결국 병을 치유하지 못한 채 그 해 4월 29일 사망하였다.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함경도 선교사 서한집》 I(원산 본당 편), 한국교회사연구소, 1995. 〔李裕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