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뇌, 외젠느 (1873~1947)

〔프〕Deneux, Eugéne

글자 크기
3
드뇌 신부.
1 / 3

드뇌 신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세례명은 에우제니오. 한국 이름은 전학준(全學梭). 1873년 7월 26일프랑스에서 부유한 은행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896년 사제 서품을 받고, 1902년 9월 6일 투르니에(Tournier,杜啓昌) 신부와 함께 선교사로 파견되어 한국에 입국하였다. 입국 후 한국어를 배우던 중, 당시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교장이었던 기낭(Guinand, 陳普安) 신부가 병에걸리자 그를 도와 신학교에서 일하였다. 그러다가 1903년 6월경 이내수(李迺秀,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사목하고 있던 전남 무안(務安)에 부임하여, 목포(木浦) 본당주임으로 있던 데예Deshayes, 曺有道) 신부를 도와 약10개월 간 사목하였다.
1904년 4월 14일마라발(Maraval, 徐若瑟) 신부 후임으로인천(현 답동) 본당의 4대 주임으로 임명되어 5월 1일자로부임하였다. 그러나부임 당시의 인천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인천 분원 수녀들의 분규에 마라발신부까지 관련되어있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일로마라발 신부는 드뇌 신부가 부임하기 전인 4월 6일자로 뮈텔 주교(Mutel, 閔德孝)로부터 성무(聖務) 집행 정지처분을 받고 영종도(永宗島)에 머물게 되었다. 이런 어려운 때에 부임한 드뇌 신부는 구월리, 고잔, 새말, 부평, 새골, 대야동, 남동, 신창리, 강화, 온수리 공소 등여러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고, 또 새로 공소를 설립하는데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특히 마라발 신부가 머무르고 있는 영종도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자주 방문하였다.드뇌 신부가 인천 본당 사목에서 가장 주력하였던 것은 교육을 통한 복음 전파였다. 당시 인천은 한 해 동안원래의 본당 신자수보다 더 많은 신자가 이주해 오는 형편이어서 사목상 어려운 점이 많았다. 또 이주해 온 신자라고 해도 생계 때문에 신앙 생활을 그다지 열심히 하지못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1909년 12월 18일자로 그는, 본래 1900년 9월 1일에 설립된 박문학교(博文學校)의 설립자 겸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직접 학교를 운영해 나갔다. 그리고 1914년에는 여자부 교사(校舍) 6실을, 1915년에는 남자부 교사 6실을 각각 신축하였으며,그 후 1917년 4월 2일에는 일제 당국의 지시에 따라 남자부와 여자부를 합쳐서 '인천박문학교' 라고 교명을 변경하였다. 드뇌 신부는 학교 운영을 한국인에게 맡기고싶어했지만 일제의 강요에 따라 설립자 겸 초대 학교장으로 취임하여 계속해서 학교의 운영 책임을 맡았다.1923년에는 그 동안 이 학교의 운영과 한국인의 교육을위해 그의 모든 정성을 다 쏟은 공로가 인정되어 일제 총독부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1924년 6월에는 남학교 교사 신축 공사를 시작하여이듬해 6월 16일 100평 규모의 건물을 완공 · 축성하였다. 곧 이어 여학교 교사 확장 공사도 시작하였는데, 자금 부족으로 잠시 공사가 중단되기도 하였지만 그 해 11월 30일에 완공하였다. 그 당시 외국인 선교사에게 있어서 교회 소속의 학교는 많은 외교인 학생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입교시키고, 많은 한국인과 접촉하여 교리를 가르치는 데 가장 용이하고 적절한 전교 장소였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도 교육 사업은 전교를 위한 필수적인것이었다.
또한 드뇌 신부는 사유지인 인천 용현동, 영종도 등지의 20여 만 평의 농토를 해성(海星) 보육원에 기증함으로써 보육원 운영을 위한 재정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또 인천 본당의 신자수 증가로 많은 어려움이 생기자,1934년 4월에는 성당 증축 공사를 시작하여 착공 4년만인 1937년 6월 30일에 현재의 인천교구 주교좌인 답동 성당을 완공하였다. 라리보(Lamibau, 元亨根) 주교가성당과 제대를 축성하였고, 오후에는 성당 준공까지 미루어 온 드뇌 신부의 회갑연도 있었다. 그 밖에 1935년10월 14일 해성보육원의 부속 병원이 개설되는 데에도적극적으로 협조하였으며, 1938년 10월 15일에는 해성병원을 신축하기도 하였다.
35년 동안 인천 본당의 주임 신부로, 박문학교의 교장으로, 또 해성 보육원 원아들의 어버이로 활약한 드뇌 신부는 전교뿐만 아니라 성당 건축, 학교와 병원 설립에도많은 공헌을 하였다. 답동 성당 낙성식을 계기로 본당 신부직에서 물러난 다음에는 인천의 수녀원에 거주하면서수녀들의 지도 신부로서 여생을 바쳤다. 그 후 75세 때인 1947년 12월 9일에 선종, 인천시 용현동 묘지에 매장되었다. (→ 답동 본당)
※ 참고문헌  《교회와 역사》 188호(1991. 1), 한국교회사연구소/ 천주교 인천교구, 《인천교구의 전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천주교 인천교구, 《인천교구 25년》,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천주교 인천교구 답동 교회, 《沓洞本堂 85年史》 , 1974/ 천주교 답동 교회, 《답동 대성당 100년사》, 1989. 〔李裕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