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망즈, 플로리앙 (1875~1938)

〔프〕Demange, Flo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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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6월 11일, 명동 성당에서 거행된 드망즈 주교 성성식(왼쪽)과 성성식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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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6월 11일, 명동 성당에서 거행된 드망즈 주교 성성식(왼쪽)과 성성식 기념.

주교. 초대 대구 대목구장. 세례명은 플로리아노. 한국명 안세화(安世華). 1875년 4월 25일 프랑스 알사스(Alsace) 주의 로렌(Lorraine) 지방에서 태어나 파리로 이주하여, 생 쉴피스(St. Sulpice) 신학교, 파리 가톨릭 대학,파리 국립 대학 등에서 수학하였으며, 1895년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전공하였다. 신학교를 졸업한 1898년 6월 26일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조선교구 선교사로 임명되어 같은 해 10월 8일 한국에 입국하였다. 입국 후 한국어와 풍속을 익힌 드망즈 신부는,1899년 5월 부산 본당 신부로 임명되어 사목하였다. 학식과 덕행을 겸비한 훌륭한 인품을 지닌 그는 부산에 부임한 지 1년 만인 1900년 9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교수로 전임되었다. 이후 6년 동안 신학교에 봉직하면서특히 한국인 성직자의 양성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1906년 10월 19일 <경향신문>(京鄉新聞)이 창간되자, 드망즈 신부는 초대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취임하여개화기의 애국 계몽 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한일합방으로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경향신문>은 창간된 지 4년 만에 폐간되고 말았다. 신문에 연재되었던 '법률 문답' (法律問答)은 독자들에게 많은 지식과 도움을 제공하여 높은 찬사를 받았는데, 이 때문에 <경향신문>은 신뢰성 있는 신문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따라서 편집 책임을맡고 있었던 드망즈 신부의 사회적 영향력도 그만큼 커질 수 있었다. 또한 <경향신문>의 부록으로 《보감》(寶鑑,《경향잡지》의 전신)을 간행하였다. 《보감》에는 천주교 교리와 교회사에 대한 지식, 교회법의 해설은 물론 신자들에게 필요한 일반 상식 등이 자세히 제시되고 있어서, 신자들이 더욱 깊은 신앙심으로 바른 사회 생활을 해나갈수 있게 하는 교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11년 4월 8일 조선 대목구가 서울 대목구로 개칭되고 경상도와 전라도의 남부 지역이 분할되어 새로 대구대목구가 창설되자, 뛰어난 학덕을 인정받고 있던 드망즈 신부는 초대 대구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36세의젊은 나이에 아드라스(Adras)의 명의(名義) 주교로 임명된 그는, 그 해 6월 11일 명동 성당에서 주교 성성식을갖고 6월 26일 대구로 부임함으로써 새 교구를 책임지는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드망즈 주교가 부임할 당시 대구교구는 교구로서 갖추어야 할 시설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다.
1912년 성신 강림 대축일을 맞이하여 한국 교회 최초의 교구 성직자들을 위한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 《대구교구 지도서》를 편집 · 반포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주교관건물과 교구 관리소, 1914년에는 성 유스티노 신학교와명도회관(明道會館) 1915년에는 성 바오로 수녀원 등주요 시설을 차례로 건립하였고, 1918년에 주교좌 성당의 확장 공사와 1919년에 신학교의 나머지 공사를 완공시킴으로써 대구교구가 갖추어야 할 모든 조직을 정비하였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대구교구는 그 후에도 수녀원 성당 · 신부 휴양소 · 주교관 별관 등을 세우고, 주교좌 성당을 본격적으로 확장하는 등 교구 시설을 점점더 보완하였다.
1919년 교황을 알현하고 파리 외방전교회의 주교들과 교무(敎務)에 관한 안건들을 논의하기 위해 교황청을방문하였을 때, 드망즈 주교는 대구 신학교 신학생인 전 아우구스티노와 송 안토니오를 동반하여 그들이 로마 우르바노 대학에서 각각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게 함으로써보다 유능한 성직자 양성을 위한 시도를 하였다.
1925년에는 교황청에서 거행된 한국 순교자 79위의시복식에 참석하였으며, 1927년에는 <가톨릭 신문>의전신인 〈천주교회보〉(天主敎會報)를 창간하였다. 1928년 중병을 얻어 치료와 요양을 위해 본국에서 3년 동안체류하다가 1930년 11월 11일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1931년부터는 소신학생들을 서울의 동성상업학교(東星商業學校)에 편입시킴으로써 이후 신학생들의 입학이 정규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고, 동시에 그들의 교육 수준도 향상되기에 이르렀다. 드망즈 주교는 계속적으로 증가하는 교세를 혼자 전담하기에는 자신의 나이가너무 많다고 느끼고, 한국인 성직자들에게 독립된 교구를 맡길 시기가 되었다고 판단하였다. 마침내 1931년과1934년에 전라북도와 전라남도가 각각 감목 대리구로설정되었고, 1937년에는 최초의 방인 교구인 전주 지목구가 탄생하게 되었다.
성직자 양성에 못지않게 기성 성직자들의 교육에도 전념하여 한국인 성직자와 선교사들의 피정을 직접 지도하였고, 그들에게 연중 주일의 강론 자료와 강연회 프로그램을 제공해 주었다. 또한 교육과 교리 공부에 관한 효유(曉諭) 등 회람(circularis) 형식의 훈시를 통해 성직자들로 하여금 시국 문제나 교회 안의 현안 문제 등에 대해적극적이고도 현명하게 대처하도록 하였다.
한편,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기념하여 처음으로 열린 한국 천주교회 공의회에서는 전국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교리서를 발간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를 위한 준비 작업과 결의문 작성, 그리고 교리서를 편찬하기 위한 다섯 교구 위원회의 설치 등에 관한 일이 모두 드망즈 주교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다섯 교구위원회의 초대 위원장으로 임명된 그는 약 2년 간에 걸친 노력으로 1934년에 새로운 교리서인 《천주교 요리문답》을 간행하였다. 같은 해 10월 31일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그 동안 한국 교회의 발전을 위해 애쓴 헌신적인 봉사와 대구교구 신설에 대한 절대적인 공로가 인정되어 최고 문화 훈장인 레종 도뇌르(Légion d'honneur) 기사장을 수여받았다.
교구장으로서 교세를 크게 신장시킨 드망즈 주교는1937년 4월 13일 전라북도 지역을 전주 지목구로 승격시켜 한국인 교구로 설정함과 동시에, 전라남도 지역도 광주 지목구로 승격시켰다. 광주 지목구는, 이미 1933년부터 이 지역에 진출하여 전교 활동을 펼치고 있던 아일랜드의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신부들에게 위임되었다.
드망즈 주교는 1938년 2월 9일 63세의 나이로 대구에서 선종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한국 교회는 대구교구가 창설된 지 25년 만에 전주교구와 광주교구를 분립시킬 만큼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또한 1914년에 57명으로 시작한 성 유스티노 신학교는 드망즈 주교가 사망할당시 118명이 수학하고 있을 정도로 크게 성장하였다.
"믿고 일하라" (Confide et labora)라는 그의 사목 표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드망즈 주교는 신부 · 주교로서 40여년 동안을 오직 한국 교회의 발전을 위한 전교에 힘썼으며, 특히 그중의 27년 동안은 대구교구장으로서 교구 발전에 뛰어난 공적을 남겼다. (→ 대구대교구 ; 성 유스티노 신학교)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가톨릭 청년》 37호(1936. 6)/ 《경향잡지》 873 · 874호(1938. 3)/ 한국교회사연구소, <드망즈 주교 일기해제>, 《드망즈 주교 일기》, 가톨릭신문사, 1987/ 《영 남교회사연구소 월보》2, 1991. 〔李裕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