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세례명은 에밀리오. 한국 이름은 성일론(成一論). 1871년 프랑스 아르데슈(Ardéche)에서 태어나 1894년 사제 서품을 받고, 그해 10월 25일 한국에 입국하였다. 1895년 1월 서울 근교의 하우고개(현 하우현 본당)에 부임하여 그곳의 신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한국의 언어와 풍속을 배웠다. 연례 피정이 끝나면서 충청도 아산(牙山) 지역을 맡게 되어 그해 6월 공세리(貢稅里) 본당에 부임하였다. 양촌(陽村)본당(구합덕 본당의 전신)에서 분리 · 설립된 공세리 본당의 초대 주임 신부로 부임한 지 1년 만에 코스트(Coste,高宜善) 신부의 사망으로 서울 주교관의 경리를 담당하는 당가(當家) 신부라는 중책을 맡아 공세리를 떠나게 되었다.
공세리 본당 2대 주임 기낭(Guinand, 陳普安) 신부에이어 1897년 6월 다시 3대 본당 신부로 부임한 드비즈신부는, 1930년까지 34년 동안 재임하면서 본당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부임하자마자 공주 지역을 분리한 뒤 본당을 창설하여 기낭 신부에게 본당 사목을 맡겼으며, 우선 성당을 건립하기 위해 조선 시대에 조세를 보관하던 공세창(貢稅倉)을 성당 부지로 매입하여 80칸짜리 창고를 헐고 성당 · 사제관 · 부속 건물 등을 건립하였다. 그 후 열심한 전교로 신자수가 계속 증가하자 새성당 건립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오랫동안 근검 절약해 모은 기금으로 직접 성당을 설계한 드비즈 신부는,중국인 기술자들을 지휘 감독하여 1921년에 다시 서양식 T자형의 성당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가졌다. 현재의사제관도 이때 함께 건립된 것이다. 이후에도 본당의 신자수는 계속 증가하였으며, 장엄하고 화려한 외관을 갖춘 공세리 본당은 그 지역의 명소가 되었다.
60세 때에 이르러 몸은 건강하였지만 심한 귓병으로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줄 수 없게 되자 더 이상 사목 활동을 계속할 수 없음을 깨닫고, 35년 가까이 일해 온 공세리 본당을 떠났다. 그 후 서울로 올라간 드비즈 신부는주교관에 거처하면서 교구의 부동산을 관리하고 건축에 관한일을 맡아보았다. 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 성당을 설계 감독하였으며, 수원 성당과 고아원, 탁아소등의 건축, 백동(柏洞, 현 혜화동) 성당의종탑 건축, 소신학교건축 감독, 용산 성직자 묘지 개축 등많은 건축 일을 담당하였다.
드비즈 신부는 신부로서의 생애 중에 거의 모든 시기를 공세리 본당의 사목 활동을 위해 헌신하면서 본당의기반을 굳건히 하고 발전의 터전을 닦아 놓았다. 그러나1932년 성탄 때 병으로 몸져눕게 되어 치료차 본국 프랑스로 돌아갔다가 1933년 8월 31일, 그의 고향에서63세를 일기로 선종하였다. (→ 공세리 본당)
※ 참고문헌 《경향잡지》 1320호(1978. 3)/ 《서울대교구 교구 총람》 부록, 가톨릭출판사, 1984. 〔李裕林〕
드비즈, 에밀 피에르 (1871~1933)
〔프〕Devise, Emile Pier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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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

드비즈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