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테오에게 보낸 편지

- 便紙

〔라〕Epistola ad Timotheum · 〔영〕Leter to the Timot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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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에게 편지를 받는 디모테오(바티칸 도서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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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에게 편지를 받는 디모테오(바티칸 도서관 소장).

신약성서의 15~ 16번째 책으로 사도 바오로가 아끼는 제자이자 동료 선교사인 디모테오(뜻은 '신을 영예롭게함' )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 사도 바오로의 편지로 분류되나 그 사실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 중이다.
〔내용과 구조〕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와 둘째편지는 흔히 수신자인 디모테오의 이름을 따서 디모테오전 · 후서로 불린다. 디모테오 전서에 나타난 정황을 보면, 바오로는 로마의 감옥에서 풀려 나와 다시 로마의 동부에서 활동하려고 한다. 그는 마케도니아에서 디모테오에게 에페소에 머물러 거짓 교사들과 싸우고 그리스도교의 교직자를 세우라고 지시한다. 이 편지는 소아시아의대도시인 에페소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배경으로 한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인사말(1, 1-2)
② 사도 바오로의 교시
바오로의 사도직 위임(1, 3-20) : 복음 선포와 이단 배척
공동 예배 때의 자세와 지도자의 자격(2, 1-3, 13) : 교회 공동체의 문제와 대책
③ 그리스도에 대한 찬가(3, 14-16)
④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
디모테오의 의무와 자세(4, 1-16)
남녀 각 연령층에 대한 태도(5, 1-6, 2)
지켜야 할 여러 가지 사항들(6, 3-19)
⑤ 마지막 권고와 인사(6, 20-21)
디모테오 후서에서 바오로는 로마에서 곧 처형을 앞둔외로운 재소자로 나타난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바오로는 67년에 순교하였다. 그는 디모테오에게 곧 오도록 지시하면서 아울러 복음을 위해 투쟁할 것을 권유하고 거짓 교사에 대항하는 지침을 알려 준다. 이 편지는 유언형식으로 되어 있어 특별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즉 다음과 같은 형식을 갖추고 있다.
① 바오로의 인사말과 감사 기도(1, 1-18)
② 디모테오에 대한 바오로의 명령
사도직 보존의 책임(2, 1-13)
거짓 교사들에 대처하는 지침(2, 14-3, 9)
바오로의 가르침을 지켜라(3, 10-4, 8)
③ 바오로의 개인 유언(4, 9-22)
〔수신인 또는 청중〕 이 편지들의 표면적인 수신인은바오로의 절친한 동료 선교사인 디모테오이다. 그는 바오로의 여러 서간에서 '우리의 형제' (1데살 3, 2 ; 2고린1, 1 : 필레 1장), '동료 일꾼' (1데살 3, 2 ; 로마 16, 21),바오로의 '주님 안에서 사랑하고 충실한 아들' (1고린 4,17 ; 1디모 1, 2)이라 불린다. 그는 바오로의 여러 편지의 공동 저자로 언급될 정도로(1데살 1, 1 ; 2고린 1, 1 ; 필립1, 1 ; 필레 1장 ; 2데살 1, 1 ; 골로 1, 1) 바오로와 각별한친분 관계에 있었다(필립 2, 20-22 ; 1디모 1, 2. 18 ; 2디모 1, 2 ; 2, 1).
사도행전에 따르면, 디모테오는 소아시아 리가오니아지방의 리스트라(Lysta)에서 그리스인 아버지와 유대인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16, 1). 어머니쪽을 따르는 유대 관습으로 볼 때 그는 유대인으로 자라난 것으로 보이나, 할례를 받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보아(16, 3) 유대교신앙을 충실하게 지킨 것 같지는 않다. 성서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그는 바오로의 1차 전도 여행 중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것으로 추정된다. 2차 전도 여행 중에리스트라에 들른 바오로는 그곳에 있는 '형제들에게서인정을 받고 있던' 그를 전도 활동의 동료로 선택하였다
(16, 2-3).
바오로가 그리스로 건너가 교회를 세울 때, 디모테오는 베레아에 남아 선교하다가(사도 17, 14) 아테네로 바오로를 찾아갔다. 그는 바오로와 함께 고린토에서 전도 활동을 함께하였으며(2고린 1, 19 ; 사도 18, 5), 고린토공동체에 문제가 생겼을 때 바오로의 지시로 고린토에갔다(1고린 4, 17 ; 16, 10). 또 그는 바오로가 필레몬서를 쓸 때 필립비에 선교하였으며(필립 2, 19), 데살로니카 공동체를 탄탄하게 세우는 데 도움을 주었다(1데살 3, 2.6). 그는 에페소에서도 선교하였고(사도 19, 22) 거기에 투옥되어 있던 바오로와 긴밀하게 접촉하였다(필레 1장 ;필립 1, 1 ; 2, 19-23 ; 골로 1, 1). 또 바오로가 고린토에서로마서를 쓸 때도(로마 16, 21), 에페소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는 바오로의 마지막 여정에도 참여하였다(사도20, 4).
히브리서 13장 23절에 암시되어 있는 바에 따르면 디모테오는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것처럼 보인다. 이 자료외에 그를 언급한 다른 고대 문헌은 없다. 교회 전승은그가 네르바 황제 치하인 97년에 순교하였으며, 356년에 콘스탄틴 대제가 그의 유해를 콘스탄티노플로 가져갔다고 전한다(에우세비오, 《교회사》 3, 4). 성 요한 다마세노(675~749)는 디모테오가 에페소의 첫 주교였으며 성모마리아의 죽음을 목격하였다고 말한다(설교집 2) 서방교회에서 그의 축일은 1월 26일이다.
한편 디모테오서의 진정한 수신인은 어떤 특정 사목자가 아니라 에페소 또는 로마 같은 대도시의 그리스도교공동체의 지도자들과 신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편지의끝 부분에서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1디모 6, 21), "은총이 여러분에게"(2디모 4, 22)라고 복수형으로 표현된 것이 간접적으로 이를 입증한다.
〔발신인 또는 저자〕 그리스도교는 전통적으로 다른10통의 편지를 쓴 바오로가 이 편지를 썼다고 믿어 왔다. 교황청 성서위원회가 1913년 6월 12일에 발표한 문헌에도 디모테오서를 비롯한 사목 서간이 바오로에게서비롯되었다고 결정하였다. 그러나 모든 학자가 완전히일치하지는 않지만, 19세기 초 이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편지가 후대에 바오로를 추종하는 어떤 사람이 바오로의 이름을 빌려 가명으로 창작한 편지라고 주장한다.비록 서로간에 어휘, 문법 용례, 문체 등에서 비슷한 면 이 없지는 않지만, 바오로가 직접 쓴 친서와 이 편지들사이에는 뚜렷이 구분되는 점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주된논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사용된 어휘와 문체이다. 이 편지를 포함한 사목 서간에 실린 단어들의 1/3 가량이 바오로의 서간에나오지 않으며, 약 1/5 가량의 단어들이 신약성서에서발견되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사목 서간에 쓰인 어휘들은 바오로 서간보다 덜 성서적이고 덜 히브리적이며, 헬레니즘 문헌에 훨씬 가까운 편이다. 나아가 사목 서간의 주요 신학 용어들인 '경건함' (1디모 4, 7. 8), '착한 행실' (1디모 5, 10. 25), '건전한 가르침' (1디모 1, 10 : 2디모 4, 3), '믿을 만한 말' (1디모 3, 1) 등이 바오로의 다른편지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반면에 사목 서간에는 바오로의 가르침에서 핵심적인 단어들(예를 들어 그리스도의몸, 십자가, 자유, 계약)이 나타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그리스어 형용사나 '카이' (καί, 그리고) 같은 접속사, 분사 등을 사용하는 방식도 서로 다르다. 또 문체를 볼 때,바오로는 글의 흐름 도중에 다른 생각을 불쑥 끼워 넣고끝나지 않는 문장을 쓰는 등 열렬하고 격정적인 양식을선호한 반면, 디모테오서는 훨씬 더 공식적이고 가라앉아 있다.
둘째로는 역사적 상황이다. 디모테오서 등 사목 서간에 나타난 정황을 보면, 바오로는 2년 간의 감옥 생활(사도 28장)에서 풀려 나와 그레데 섬과 에페소(1디모와 디도) 및 마케도니아로 되돌아와 활동하였으며, 그런 다음로마로 다시 가서 투옥되었다가(2디모) 마침내 처형되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바오로 자신은 스페인으로 가는계획만 밝히고 동방에서 그의 일은 끝났다고 말하였다(로마 15, 23-24. 28). 96년경에 쓰여진 고린토인들에게보낸 글레멘스의 첫째 편지' 에도 바오로가 서쪽 끝까지복음을 전하고 믿음을 증거하였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5, 5-7), 바오로가 다시 동방에서 활동했을 가능성은 상당히 희박하다. 어쩌면 바오로는 로마에서 계속 투옥되어 있다가 네로 황제에 의해 죽었는지도 모른다(에우세비오, 《교회사》 2권, 25). 게다가 바오로의 편지에 나타난 디모테오의 이미지와 디모테오서에 묘사된 디모테오의 모습도 다르다.
셋째로는 교회의 직제와 이단설의 차이이다. 디모테오서에는 감독자와 장로 등 교회 직무를 맡은 이들의 자격과 의무 등이 명시되며,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일정한 역할을 맡던 과부들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이런 내용은 바오로의 시대보다 훨씬 더 발전된 교회 직제임을 보여 준다.또 바오로의 시대에도 그와 다른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이 나오지만, 디모테오서에는 좀더 체계화되고 널리 퍼진 유대교적 그노시스주의의 모습이 한층 더 뚜렷하게제시된다. 이런 여러 양상들은 바오로 시대보다 훨씬 뒤인 2세기 초반의 시대상에 상당히 가깝다.
넷째로는 교의의 차이이다. 디모테오서 등 사목 서간에는 바오로의 주요한 신학적 사고(믿는 이와 그리스도의일치, 성령의 능력과 증인, 율법으로부터 의 자유)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같은 몇몇 표현들도 바오로가 흔히 쓰는 용법과는 다르다. 예를 들어 사목서간에서 '믿음' 은 그리스도에 대한신앙인의 관계라기보다 그리스도교와 동의어로 쓰인다. 또 사목 서간에는 재림에 대한 기대감이 상당히 낮으며,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강조하는 바오로에 비해 그리스도인의 윤리 생활을 아주 강조하고 있다. 바오로의 생애 중에 그리스도교 내부에서 발전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이러한 모든 변화는 바오로의 시대보다 후대라는 점을 드러낸다.
이러한 갖가지 차이점을 설명하는 견해는 크게 바오로친서설과 가명 작품설로 나뉜다. 바오로의 친서설을 옹호하는 입장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사목 서간에 나타난 정황을 그대로 받아들여, 바오로가나이 들고 감옥에서 고통을 받았으며 여타 편지와 다른주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가 생겼으리라고 설명하는 견해이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 편지들은 바오로가 로마에 체류한 이후 5년 이내에 쓰여졌어야 하는데, 그 기간 동안에 문법과 문장상의 변화뿐 아니라 상당한 교의적 변화까지 생겨났다고 여기기에는 무리이다.
좀더 널리 퍼진 두 번째 견해는 바오로가 다루고자 했던 주제만을 측근인 서기에게 말하였고, 그 서기가 실제로 이 세 편지를 작성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변화가 생겼다는 설명이다(O. Roller). 그러나 바오로가 서기를 이용할때도(로마 16, 22 : 1고린 16, 21 : 갈라 6, 11 : 2데살 3,17) 그의 전형적인 스타일은 전혀 변하지 않았으며, 사목 서간에도 서기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또 어떤 이들은 루가가 바오로의 서기였다고 주장하면서 사도행전과 사목 서간의 문체상의 유사성을 설명하는데, 이에 대한 증거는 전혀 없다. 또 바오로를 수행하던 이가 바오로의 전도 활동 중에 그의 권위를 빌려 쓴 것이기에 바오로의 편지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는데, 이런경우는 가명 저자이지 바오로의 친서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와 다른 세 번째 견해는 사목 서간이 바오로의 여러 편지 중에서-지금까지 전해 오지 않는 편지를 포함해서-나온 단편들로 구성되었다는 주장이다(P.N. Harrison).디모테오서에 나오는 개인적인 사항들을 다룬 구절들이이 단편 가설의 보기인데(예 : 2디모 1, 16-18 : 3, 10. 11: 4, 1. 2. 5-22 등), 이런 단편들이 어떻게 보존되고 수집되었으며 단편들로 짜여진 디모테오서가 어떻게 전체적으로 일관된 논조를 유지하고 있는지 등을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이 바오로 친서설은 여러 의문점들을갖고 있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가명 작품설을 받아들이고 있다.
〔저술 시기〕 디모테오서의 집필 시기에 대한 주장은상당히 넓은 기간(대략 56~130경)에 걸쳐 있다. 집필 시기는 편지의 발신인과 연관되어 대략 세 가지 견해로 나뉜다. 하나는 바오로의 친서설 또는 그의 측근이 썼다고보는 이들의 견해로 대략 기원전 50년대 후반과 60년대초반에 쓰여졌다고 주장한다. 가명 작품설을 주장하는이들 역시 사도 이후 두 번째 세대(70~100경)로 보는 입장과 세 번째 세대(100~130경)로 보는 입장으로 나누어진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디모테오서를 비롯한 사목 서간에서 사도 바오로의 편지를 받거나 읽으면서 그것을 기억하는 교회에게 바오로의 가르침을 편지 형식으로 새 세대에게 전해 주려고 한 점, 교회의 직제가 바오로 시대보다 좀더 발전된 모습이 보이고 바오로 이후 시대의 그리스-로마 철학에서 나온 어휘를 많이 사용한 점, 바오로자신이 언급한 적이 없는 장로(長老, presbyter)를 중요하게 다룬 점, 여전히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가정 교회가세워지고 있는 점, 이 시기에 이루어진 루가 복음 및 사도행전과 사목 서간이 문체나 내용 전반에서 상당한 동질성을 가지고 있음을 고려하여 사도 이후 시대, 특히 두번째 세대로 집필 시기를 추정한다. 좀더 범위를 좁힌다면, 1세기 말부터 유대인들의 대량 개종이 줄어들고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가정 교회가 감소된 사실과 특히110년경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가 소아시아의 몇몇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교회 직무자의 권한을 좀더 엄밀히규정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대략 100년 전후가 집필 시기로 여겨진다.
〔저술 장소〕 지리적인 배경을 살펴볼 때, 디모테오 전서는 소아시아의 에페소를 주된 무대로 하고, 디모테오후서는 로마를 무대로 한다. 그래서 저술 장소도 에페소기원설과 로마 기원설로 크게 나뉜다. 에페소 기원설은디모테오의 전승을 깔고 있고 바오로의 사도직에 깊이결부되어 있는 에페소 공동체의 어느 지도자에게서 디모테오서를 비롯한 사목 서간이 유래하였다는 주장이다.반면에 로마 기원설은 바오로가 순교한 뒤 로마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그의 사도직을 생생하게 보존하고, 그 를 중앙 지중해 지역의 전체 도시 교회의 스승으로 삼기위하여 디모테오서를 작성하였다는 주장이다.
전통적으로 에페소 기원설이 선호되어 왔으나, 로마교회가 바오로 서간을 집성하여 전파하였고 1세기 말에사본들을 최초로 두루마리 형태에서 책 형태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로마 교회설도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
〔사용된 자료〕 디모테오서를 쓴 이가 로마서를 제외한다른 바오로의 편지를 모두 알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않다. 그는 70인역 구약성서에서 인용하였고(1디모 5,18a), 창세기 2-3장에 근거한 광범한 논의를 이용하고있으며(1디모 2, 11-14), 얀네와 얌브레 같은 묵시 문학도 인용한 듯하다(2디모 3, 8). 아마도 바오로 시대의말기쯤에 나온 것 같은 전통적인 어구들도 많이 인용하고 있다(2디모 1, 1-2. 15-18 ; 4, 9-15). 덧붙여 디모테오서는 다양한 찬가(1디모 3, 16 ; 2디모 2, 11-13)와 영광송
(1디모 6, 15-16), 예언(1디모 1, 18 ; 4, 1) 등도 인용하고있다.
그러나 사목 서간 필자는 바오로의 자서전적 기사를정확하게 밝히는 데 초점을 두지 않고 신학적으로 유용한 바오로의 이미지를 전개시키는 데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이 목적을 이루는 데 필요한 전승이라면, 그것이 역사적으로 정확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관계치 않고 사용하였기 때문에, 디모테오서에 적힌 자료의 역사적 가치를 옳게 평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물론 이 편지의 저자가 다른 신약성서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그에게는 알려진 바오로에 관한 전승을 인용하였을 가능성은 남아 있다. 따라서 이 편지에 실린 기사 중 일부는 바오로에 대한 참된 기억을 기록한 것일 수 있다.
〔집필 목적〕 비록 누군가가 바오로의 이름을 빌려 썼을지라도, 디모테오서는 날조된 작품은 아니다. 그리스-로마 철학 전통 안에서는 가명 편지로 집필하는 것이 오랜 전통이었다. 특히 1세기 로마 세계에서는 '편지' 라는문학 양식을 정치와 철학, 문학 등지에서 폭 넓게 사용하였다. 편지는 불충분하긴 하지만, 마치 개인적으로 대면해서 이야기하는 듯한 효과를내는 바람직한 의사 소통수단으로 여겨졌던 것이다(요한 묵시록에도 편지 양식이 일부 들어 있다). 가명 작품의 경우 필자는 그가 직면한 당대의 문제를 그의 스승의 사고로 풀어 보려고 하였다. 즉"스승이 이 문제에 부딪혔다면 분명히 이렇게 말하였을것이다."
디모테오서를 비롯한 사목 서간도 바오로를 빌려 과거로부터 온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집필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편지를 본 최초의 독자들은 분명히 바오로가 '실제' 의 필자는 아니나, 이 편지를 통해 바오로와 대화하며 그의 가르침과 개인적인호소를 전해 받는다고 여겼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디모테오서가 쓰여질 당시의 그리스도교는 사도 이후 시대이다. 그 당시 그리스도교가 널리 퍼지고 많은 신도들이 생겼으나, 교회의 정통성과 합법성의 최고 권위인사도들이 사라짐으로써 여러 형태의 반발과 저항에 부딪히게 되었다. 크고 작은 박해도 있었고 유대교 및 이교문화와의 갈등도 있었지만, 특히 교회에 심각한 위기를가져온 것은 교회 내의 여러 가지 상반된 견해였다. 복음
과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들이 유포되면서, 참된 믿음의 가르침을 분명히 밝히고 교회의 정체를확실히 하는 일이 시급해졌다. 이러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디모테오서의 필자는 바오로의 가르침과 삶을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유일한 정통 가르침이자 바람직한 생활 방식의 본보기로 제시한다(1디모 1, 16 ; 2디모 1, 13).그는 교회 지도자, 더 확대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가르침을 지키고 따를 것을 호소한다. 사실상 사목 서간은 바오로 외에 다른 어떤 사도의 존재도 언급하지 않는다. 특히 디모테오서는 바오로와 그가 전한 복음을 반대하는 이들을 '궤변론자' 로 취급하며, 이러한 이단 교사들에 대항한다. '율법 교사 (1디모 1, 7)라 불리는 (유대그노시스주의자로 추정되는) 적대자들은 결혼에 반대하고 금식을 요구하는(1디모 4, 3-5) 극단적인 금욕주의를주장하고, 믿는 이들의 부활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믿는(2디모 2, 18 ; 1고린 15, 12) 등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어긋난 이단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그러한 가르침을반박하는 데 관심을 갖기보다, 다만 그들의 어리석음을지적하고 배척할 것을 요구한다.
또 디모테오서의 필자는 이단에 대항하여 교회의 사도적 정통성을 보존하기 위해, 교회 지도자들에게 교회를조직화하고 직제를 유지하도록 강력히 촉구한다. 바오로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그 복음을(1디모 1, 11) 디모테오에게 전수한다는 것이며(1디모 6, 20 ; 2디모 1, 13-14),이 복음을 믿음직한 그리스도인 교역자에게 전해 주어복음의 연속성과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정통성을 보전해야 한다는 것이다(2디모 2. 2). 이와 같이 바오로의 사도직과 가르침을 단절 없이 올바로 전해 주고, '하느님의집' 인 교회(1디모 3, 15)를 올바로 유지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이 직제와 그 직무를 맡을 사람(특별히 감독자)의 자격인 것이다.
아울러 디모테오서의 필자는 바람직한 윤리 생활을 강조한다. 그는 로마 사회의 근본 가치인 '경건함' 과 당대의 헬레니즘에서 강조한 각종 윤리 지침들, 유대교 윤리등을 그리스도교 윤리와 연결시켜, 예배의 질서(1디모 2-3장 ; 5, 3-25) 및 가정 생활의 질서와 조화를 강조한다.가정의 규범(1디모 5, 1-2 : 6, 1-2)과 덕행 목록(1디모 6,11 ; 2디모 2, 22), 악습 목록(2디모 3, 2-5)이 그 예이다.이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유대인과 이방인, 노예와자유인, 여성과 남성, 젊은이와 늙은이)이 각자의 성별과 법적 신분에 맞게 윤리를 성실하게 지켜,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적대 세력이나 패륜 집단이 아님을 실제로 보여 주어 선교의 역동성을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 "현재와 미래 생명의 약속을 지닌 경건함이 모든 일에 유익한 것입니다. 이 말은 확실하고 그대로 받아들일 만합니다"(1디모 4, 8-9).
디모테오서를 비롯한 사목 서간은 그리스도교의 역사상 중요한 전환기에 하나의 대안으로 쓰여졌다. 유대교및 기존 사회 질서에서 오는 박해 외에 내부에서 커 가는갈등 속에서 그리스도교는 점차 제도적 권위를 강조하고지역 교회를 맡을 사목자를 내세우는 변화를 맞았다. 그런 상황에서 제시된 이 편지들은 사도적 정통성뿐 아니라 교회의 직제와 윤리 생활에 기여한 바가 상당히 컸던것으로 여겨진다. (← 디도에게 보낸 편지 ; → 사목 서간)
※ 참고문헌  장 엘마로 역주, 《디모데오 전 · 후서, 디도서》,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신약성서 10, 분도출판사, 1981/ 박익수, 《디모데전 · 후서, 디도서》,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성서 주석45, 대한기독교서회, 1994/ R.E. Brown · J.P. Meier, Antioch and Rome :New Testament Cradles of Catholic Christianity, N.Y., 1983/ M. Dibelius,Die Pastoralbriefe, 《NTD》, 1966(김득중 역, 《목회 서신》, 국제 성서 주석 42, 한국신학연구소, 1984)/ A.T. Hanson, Studies in the PastoralEpistles, London, 1968/ A.Q. Malherbe, Social Aspects of EarlyChristianity, Baton Rouge, 1983(조태현 역,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적 배경》, 대한기독교서회, 1994)/ D.C. Verner, The Household of GodThe Social World of the Pastoral Epistles, 《SBLDS》 71, Chico, 1983. 〔李鎔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