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제 공동체

共同體

〔프〕La Communauté de Taizé · 〔영〕The Taizé Commu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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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제의 마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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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제의 마을 전경

로제 슈츠 마르소슈(Roger Schutz-Marsauche, 이하 로제 수사로 약칭)가 1940년에 창설한 에큐메니컬(ecumenical) 국제 수도회. '떼제' 는 이 공동체가 자리한 프랑스 동부클뤼니 근처의 작은 마을 이름이다. 갈라진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화해의 길을 찾고, 또 이를 통해 인류의 갈등을 극복하고 평화를 증진하기 위하여 시작된 이 공동체로 매년 수만 명의 젊은이들이 찾아와 인류 안에서 평화와 화해, 신뢰를 간직하고 전하는 사람이 되고자 기도하고 수련하고 있다.
〔창 설〕 스위스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로제 수사는 어린 시절부터 개방성과 용기를 지닌 외할머니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프로테스탄트 신자였던 할머니는 제1차 세계대전 때 공습이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집에 남아 피난민들과 노약자, 임산부들을 돌보아 주었다. 그 뒤 갈라진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서로 화해할 때, 유럽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가톨릭 교회에 가서 기도하곤 하였다. 이러한 할머니의 삶은 로제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모두 사랑의 하느님을 말하면서도 서로 배치되는 자기 입장을 정당화하는 데 엄청난 힘을 소모하는 그 시대의 그리스도인을 보면서 자라난 로제는,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는 날마다 화해를 구체적으로 이루어 가는 봉헌된 삶이야말로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다시 유럽이 갈라졌을 때, 오래 전부터 절대적인 가치에 대한 열정에 불타온 그는, 화해의 구체적인 징표가 될 수도 공동체를 시작하고자 스위스를 떠나 전쟁과 고통으로 얼룩진 프랑스로 갔다.
폐허가 되다시피한 떼제에 정착한 로제는, 자유를 찾아 독일 점령지를 빠져 나온 피난민, 특히 유대인들을 숨겨 주면서 1942년까지 혼자 지냈다. 이때 조그만 기도실에서 혼자 하루 세 번 기도를 바쳤는데, 그것은 그가 구상 중에 있던 미래의 공동체가 바치게 될 기도의 전형이 되었다. 나치의 비밀 경찰 게슈타포가 여러 번 가택수색을 벌이자 로제는 1942년 말부터 1944년 말까지 제네바로 피신하였다. 첫 두 해 동안 로제 수사는 혼자였으나 그 뒤 6명의 형제들이 동참하여 1949년 부활절에 그들과 함께 독신 생활, 수도원장 직무의 인정, 물질적 · 영신적 재산의 공유 등 세 가지 서원을 함으로써 평생을 수도 생활에 투신하였다. 로제 수사는 1952년에 공동생활의 지침이 될 '떼제의 규칙' 을 썼다.
〔성 장〕 10년 이상 떼제 공동체는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 조용히 성장하였다. 하지만 교회와 신자들은 구체적인 인간 역사와 상황 속에서 삶으로써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한다는 것이 로제 수사와 떼제 공동체의 신념이었다. 그리하여 1950년부터 수사들 중 일부가 떼제를 떠나 근처의 광산 도시로 가서 살기 시작하였고 몇몇은 그곳 공장에서 일하였다. 그 뒤 다른 대륙의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과도 함께 살기 위해 형제들이 파견되었다. 또한 1962년부터는 러시아와 동독, 폴란드, 루마니아 등 철의 장막으로 가려진 동유럽 여러 나라를 은밀하고도 끊임없이 방문하였다. 오늘날 떼제의 수사들 가운데 일부는 브라질과 방글라데시의 빈민가, 세네갈, 미국, 그리고 분단된 나라 한국 등에서 작은 그룹으로 살고 있다. 방글라데시나 세네갈처럼 이슬람교 신자들이 절대 다수인 곳에서 그들과 신뢰와 우애를 나누며 살기도 하고, 뉴욕이나 서울처럼 현대 도시 생활의 한가운데에서 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한 공동체로서의 삶을 지속하면서, 주기적으로 프랑스 떼제로 돌아가 그곳에서 일정 기간을 지내곤 한다.
떼제의 수사들은 각각 몇 년 동안 공동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성소에 대한 충분한 의미를 발견한 후에 종신 서원을 한다. 첫 수사들은 모두 프로테스탄트 출신이었지만 1969년부터는 가톨릭 신자들도 입회하여, 오늘날에는 5대륙 25개국에서 온 100여 명에 이르는 수사들이 소속되어 있다. 초창기부터 단순 소박한 삶을 선택한 떼제의 형제들은 어떤 기부나 선물, 심지어 가족의 상속도 받지 않는다. 떼제 공동체는 자본을 축적하지 않는다. 그들 스스로 일해서 번 것으로만 살아가고 또 다른 사람들과 나눈다.
또한 떼제는 전쟁과 불의의 희생자들을 맞이하는 장소가 되어 왔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유대인들, 전후에는 프랑스 전쟁 고아들과 독일군 포로들을 맞이하였으며, 또 그 뒤로도 자기 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스페인, 포르투갈, 베트남, 르완다, 보스니아인들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하고 정착할 수 있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초창기때부터 그리스도인들간의 일치를 모색해 온 떼제 공동체는, 1960년과 1961년에 가톨릭 주교들과 프로테스탄트 목사들을 한자리에 초대하였는데, 종교 개혁 이후 가톨릭 주교들이 프로테스탄트 지도자와 모임을 가진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1962년 로제 수사는 교황 23세의 초청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全) 회기를 참관하였다. 공의회 동안 떼제 공동체는 많은 교회 지도자, 특히 카마라 대주교와 라틴 아메리카 주교 회의(CELAM)의 초대 의장 라랭 주교 등 남아메리카의 주교들과 깊은 우정을 나누었으며, 많은 교류와 개발 사업의 협력을 거쳐 1968년 콜롬비아의 메델린과 1979년 멕시코의 푸에블라에서 열린 두 차례의 라틴 아메리카 주교 회의 총회에 로제 수사가 참석하기도 하였다. 한편 떼제의 형제 몇 사람은 소데팍스(SODEPAX)와 세계 교회 협의회(W.C.C.)에서도 일하였다.
〔활 동〕 로제 수사는 "그리스도는 모든 이들에게 당신과의 친교를 베풀어 주시기 위해 오셨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바로 이 사랑의 친교이다. 떼제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친교를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구체적인 방안을 항상 모색해 왔는데, '떼제의 젊은이 모임' 과 '신뢰의 순례' 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떼제와 젊은이 : 1957년 이래 떼제를 찾아온 많은 젊은이들은 자유롭고 소박한 분위기 안에서 기도와 침묵 그리고 대화를 통해 복음의 샘터로 나아가도록 초대된다. 1980년대 들어와서는 다양한 얼굴과 복장을 한 아시아 · 아프리카 젊은이들도 참가하여 보다 큰 규모의 범대륙적(intercontinental) 모임을 이루게 되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다음부터는 동유럽 젊은이들의 비중이 아주 커졌다. 떼제의 언덕에서 매주 진행되는 젊은이 모임은 1962년에 건립된 '화해의 교회' 에서 하루 세 차례 거행되는 공동 기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봄 · 가을에는 매주 500~1,000명, 부활 시기와 여름에는 6천여 명에 이르는 젊은이들이 여기에 참가한다.
여러 해 동안 수십만 명의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떼제를 다녀갔다. 그들은 '어떻게 신앙과 투신을 연결시키고 내적 생활과 인류의 연대를 하나로 결합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부각시켰다. 그리고 이곳을 거쳐간 많은 젊은이들은 기도의 맛과 보다 보편적인 교회관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인권, 국제적인 양심, 외국인들에 대한 신뢰, 그리고 평화와 교류에 대한 제반 문제들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교황 요한 23세를 비롯한 많은 교회 지도자들 또한 떼제에 깊은 관심을 보여 왔으며, 1986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순례자의 한 사람으로서 떼제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신뢰의 순례 : 1970년 로제 수사는 '젊은이들의 공의회' 개최를 발표하였는데 여러 대륙에서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 1974년에야 이 모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모임에는 교황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그리고 캔터베리 대주교가 사절을 보냈고 첫 해에만도 4만 명의 젊은 이들이 떼제에 모였다. 젊은이들이 실망하고 교회로부터 멀어져 가던 시기에, 이 '젊은이들의 공의회' 는 그들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화해를 이루고 세계 평화를 건설하는 데 중요한 몫을 담당하게 되리라는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이 모임은 성숙의 시간을 갖고 후에 다시 개최할 여지를 남기면서 1979년에 모임 규모를 축소하였다. 여기서부터 차츰 새로운 형태의 '신뢰의 순례' 가 발전하게 되었다.
1982년 로제 수사는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는 레바논에서 '범세계적인 신뢰의 순례' 를 제창하였다. 이 순례는 떼제를 중심으로 어떤 '운동' 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참가하는 청 · 장년들로 하여금 각자가 사는 곳에서 평화의 순례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곧 도시와 마을과 본당과 지역 교회에서 더 열심히 투신하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이 순례를 영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로제 수사는 매년 세계의 가난한 지역을 방문하여 한동안 머물면서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을 쓰는데, 이 편지는 50여 개 국어로 번역되어 다음 한 해 동안의 묵상 자료로 쓰이게 된다.
떼제는 세계 여러 곳에서 대규모로 젊은이들의 모임을 개최한다. 참가자들은 며칠 동안 모임이 열리는 도시의 가정과 교회에서 생활하면서 지역 교회의 생활을 나누는 한편, 매일 공동 기도의 시간을 갖고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안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실천하는 '희망의 장소 를 방문한다. 매년 말 파리, 런던, 로마, 바르셀로나, 뭔헨, 프라하, 부다페스트, 빈, 폴란드의 브로츠와프 등 큰 도시에 모여 며칠 동안 함께 기도와 생활을 나누는 '유럽모임' 에는 5~10만 명에 이르는 젊은이들이 참가하고 있다. 또 유럽뿐만 아니라 아시아(인도와 필리핀), 동유럽, 북아메리카, 스칸디나비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에서도 이 같은 순례 모임이 개최되었다.
〔화해와 신뢰〕 그리스도인의 화해가 떼제의 핵심적 성소이지만 그것은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사람들 사이에 화해, 민족들 사이에 신뢰를 심으며 인류 안에서 평화의 누룩이 되게 하는 데 더 큰 뜻이 있다. 떼제의 형제들은 삶의 봉헌과 공동 생활을 통해 분열된 교회와 세상 안에서 화해의 표징이 되고자 노력한다. 로제 수사는 이를 '일치의 비유' 혹은 '공동체의 비유' 라고 일컫는다. 이것은 공동 생활 안에서 매일매일 용서하고 신뢰하는 마음을 통하여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려는 노력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사실 수사들의 수가 작은 공동체이지만 시작된 지 50여 년이 흐르면서 떼제는 그리스도인의 일치가 아주 먼 훗날에나 가능한 것이 아님을 보여 주었다. 서로 다른 그리스도교 전통의 수사들이 함께 모여 소박한 삶 가운데 일치를 생활화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일치를 향한 가능성과 희망을 일깨워 준 것이다. 떼제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독특한 일치의 한 소박한 반영이라고 말한다. 떼제는 이 일치를 삶으로써 그리스도인들에게 화해한 백성으로 살아갈 소명이 있다는 것을 일깨운다.
'신뢰' 는 떼제의 가장 핵심적인 말 가운데 하나이다. '인간의 고통도 비참도 바라지 않으시며 사랑만을 주시는 하느님' 께 대한 신뢰는 마음의 평화를 주는 원천이며 동시에 인간들 사이의 신뢰를 가능하게 해준다. 로제 수사는 "신뢰의 숨결은 마음의 사막에 꽃이 피게 한다" 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신앙은 바로 하느님께 대한 겸손한 신뢰이다.
떼제의 공동 기도는 단순한 아름다움으로 특징지어진다. 단순하면서도 교회의 살아 있는 전통에 뿌리를 둔 떼제의 전례는 성서 봉독 뒤에 이어지는 긴 침묵과 거듭 반복해서 부르는 짧은 묵상 노래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히 떼제의 묵상 노래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내적 생활과 인류의 연대, 가장 가난한 이들, 불의의 희생자들을 위해 '자기 삶을 내어주는 것' 은 떼제의 모임에서 항상 이어지는 주제이다. 떼제 공동체는 교회가 인류 한 가운데에서 "화해의 터전, 나눔과 단순 소박함의 터전"이 되도록 노력하면서 젊은이들과 함께 앞으로도 세계 도처에서 화해의 순례를 떠날 것이다.
〔떼제와 한국) 1960년대부터 유럽에 머물고 있던 한국인 성직자, 유학생, 신자들이 떼제를 찾기 시작하였는데, 1970년대 이후 떼제와 관련한 책들이 번역 출판되면서 한국에서도 차츰 알려졌다. 1980년대 말 이후 유럽의 유학생과 교민은 물론 한국에서 직접 떼제를 찾아오는 사람도 늘어나는 추세이며 떼제에는 현재 한국인 수사 3명이 생활하고 있다.
한편 1970년대 초 떼제를 방문한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 젊은이들의 기도 생활을 심화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수사들을 한국으로 초청할 의사를 밝혔고, 그 뒤 1977년 홍콩에 머물고 있던 로제 수사와 떼제의 형제를 찾아가 수사들의 한국 파견을 다시 요청하였다. 몇 차례 준비 방문을 거쳐 1979년 떼제의 형제들이 한국에 도착했는데 현재 영국, 프랑스, 스위스, 네덜란드 출신의 수사 5명이 서울 화곡동에서 살고 있다.
떼제는 다른 수도 공동체들과 달리 어느 나라에서건 비록 오래 머물더라도 잠정적인 체류로 여기며 분원을 만들어 정착하지 않으므로 한국에서도 지원자들을 모집하거나 수도원을 세우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드러나는 특별한 사업을 벌이기보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열어 주시는 여러 가지 가능성에 열린 자세로 지내면서 무엇보다 "공동체의 비유"를 살아가는 것을 우선으로 삼는다. 또 수사들은 젊은이들의 기도 생활 심화에 도움을 주는 것과 동시에 또 분단 상황의 한국에서 신뢰와 화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자신들의 사명으로 간주한다. 그들은 서울과 지방의 여러 본당과 교회에 초대되어 기도나 피정을 지도하기도 하고 매년 1월 그리스도교 일치 주간에는 가톨릭, 프로테스탄트, 정교회가 참여하는 기도회를 함께 준비한다. 또 화해를 진작(振作)시키기 위해 일본 젊은이들이 한국을 방문하도록 여러 차례 주선하였고, 홍콩의 젊은이들을 초대해서 한국 젊은이들과 함께 기도와 모임을 갖도록 하기도 하였다.
수사들 중 한 사람은 교도 사목에 전념, 장기수와 사형수 그리고 그 가족들을 위해 힘을 쓰고 있으며, 다른 수사들은 대학과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들 가운데는 여러 새 성당에 스테인드 글라스를 설계 제작한 수사도 있고, 국제적으로 한국에 관한 깊은 인식을 넓히는데 기여하기 위해 구상(具常) 시집 세 권을 비롯하여 한국 현대 문학을 영역(英譯)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은 사람도 있다. 또 수사들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일치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만 동시에 불교의 승려들을 포함, 비그리스도인들과도 많은 개인적인 접촉을 가지고 있다. (→ 프랑스)
※ 참고문헌  신한열, <현대 영성의 현장 · 떼제 공동체 1~2>, 《경향잡지》 1510~1511호(1994. 1~2)/ 호세 빌라도, 이미림 역, <떼제 이야기》, 분도출판사, 1983/ 마더 데레사 · 로제 수사, 안병철 역, 《화해의 어머니 마리아》, 가톨릭출판사, 1988/ 로제 수사, 김영무 역, 《떼제-일치의 비유를 실천하는 공동체》, 분도출판사, 1984/ 로제수사, 안응렬 역, 《떼제의 규칙》, 분도출판사, 1976/ 로제 수사, 정태현 역, 《님의 사랑은 불이어라》, 생활성서사, 1993/ Elisabeth Marchant, Taizé, 《DSp》 15, pp. 9~12. 〔申漢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