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도미니코 수도회 신부. 성서학자. 1855년 3월 7일 프랑스 앵(Ain)의 부르장 브레스(Bourgen Bresse)에서 태어나 오텡(Autin)에서 소신학교를 졸업한 다음, 소르본 대학에 진학하여 1878년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 파리 생 쉴피스 대신학교에서 한 해를 보낸 다음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1879년 바르(Var)의 생막시맹(Saint Maximin) 수련원에서 착복식을 가졌다. 프랑스 정부가 도미니코 수도회 수도자들을 추방하자, 스페인 살라망카에서 신학 과정을 마치고 1883년 12월 23일 스페인 사모라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1884~1888년 살라망카와 프랑스 툴루즈에서 역사와 철학을 가르쳤으며, 1888년 10월 오스트리아 빈 대학교에 유학하여 시리아어 · 아시리아어 · 이집트어 · 아랍어 등을 배웠다. 1890년 2월 11일 빈을 떠나 3월 10일 예루살렘에 도착한 라그랑즈는, 그 해 11월 15일 예루살렘 북문인 다마스커스 성문 가까운 곳에 '예루살렘 성서 연구소 (L'Ecole Biblique et Archéologique Française de Jérusalem)를 개설하였다. 이 자리는 테오도시우스 2세의 황후 에우도키아가 460년에 성 스테파노 성당과 수도원을 세웠던 곳이다. 1891년 12월에 학술 계간지인 《성서 잡지》 (Revue Biblique)를, 1903년에 학술 총서 《성서 연구》 (Etudes Bibliques)를 창간하였으며, 1900년에는 '성서 연구소' 와 더불어 부속 성당과 수도원을 신축하였다. 라그랑즈는 처음에 구약성서를 연구하였으나, 1907년부터는 주로 신약성서를 연구하였다.
1907년 비오 10세 교황은 '현대주의' 를 단죄하는 칙서를 발표하였는데, 1912년 6월 29일 추기경 어전 회의에서 라그랑즈도 현대주의자로 거명되어 9월 5일 이스라엘을 떠나 프랑스로 귀국하여야만 했다. 다행히 1913년 6월에 예루살렘 성서 연구소로 되돌아왔으나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또다시 예루살렘을 떠나 파리에서 살다가 1919년 초에야 연구소를 재개할 수 있었다. 1920년 10월 15일 프랑스 정부의 위촉으로 '예루살렘 프랑스 고고학 연구소' 를 병설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19년부터 1936년까지는 비교적 조용히 성서 연구소에서 연구와 제자 양성에 몰두하던 라그랑즈 신부는, 1936년 황달 증세가 나타나 프랑스 남부에 있는 생 막시맹 수련원에서 요양하던 중 1938년 3월 10일 83세로 사망하였다. 1967년 라그랑즈 신부의 유해를 발굴해 예루살렘 성서 연구소 성당 제대 앞에 안장하면서 묘소를 덮은 석회석에 라틴어로 이런 묘비명을 새겨 넣었다. "도미니코회 예루살렘 성서 연구소 설립자, 지칠 줄 모르는 성서 주석가, 마리 조제프 라그랑즈 형제, 여기 평안히 잠드시다(1855년 3월 7일~1938년 3월 10일)."
그는 20세기 가톨릭 성서학계의 비조(鼻祖)로서, 가톨릭에서는 처음으로 성서 연구에 역사 비평 방법론을 도입하였고, 그의 연구에 힘입어 가톨릭 성서학이 비로소 정립되었다. 그는 '참' (veritas)을 찾아나선 정열적 지성인이었다. 무조건 다른 사람의 학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어림짐작으로 만족하는 법도 없었다. 원전으로 돌아가라고 후렴처럼 제자들에게 강조하곤 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원전 연구로만 만족하지 않고 반드시 현장 지리와 고고학적 유물도 함께 연구하였다.
'참' 을 아끼는 열정을 '사랑' (caritas)으로 승화시키는 마음을 익힌 그는, 남의 견해를 비평하거나 논쟁할 때에도 결코 저속한 표현을 쓰지 않았으며, 교회 당국으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하였을 때에도 언제나 순종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단적인 예가 요한 소절(小節) 사건이다. 요한 1서 5장 7-8절의 그리스 원전 "증언자는 셋이 있으니 곧 영과 물과 피이며 이 셋은 일치합니다"라는 글은, 258년에 카르타고에서 순교한 치프리아노 주교가 라틴어로 쓴 《가톨릭 교회 일치론》과 특히 600년 이후 라틴어역 성서에 보면 괄호 안의 글이 삽입되어 있다. "(하늘에서) 증언하는 분 셋이 있으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시며, 이 세 분은 일치합니다.) (그리고 땅에서 증언하는 분 역시 셋이 있으니) 곧 영과 물과 피이며, 이 셋은 일치합니다." 이 확장된 문구를 '요한 소절' (CommaJoanneum)이라 하는데, 이는 라틴 교회에서 덧붙인 가필이었다. 그런데 1897년 1월 13일 교황청 검사성(현 신앙교리성)에서는, 가톨릭 신앙인은 요한 소절을 의심하거나 부정해선 안된다는 결정을 내렸고 이틀 후 교황 레오 13세는 이 결정을 추인하였다. 이는 원전 비평상 받아들일수 없는 독단적 결정이었다. 라그랑즈 신부가 교황청의 이와 같은 결정을 통고받고 "그 소식은 1897년 4월 9일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나는 몹시 당황하였다. 이제까지 상당히 자유롭게 다루어 온 원전 비평 분야에서조차 교황청이 이처럼 제동을 건다면, 무수한 가톨릭 · 비가톨릭 석학들의 통설에 대해서 검사성이 이처럼 단호하게 반론을 편다면, 그보다 한결 더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지 이제 분명하지 않은가? 나는 곧바로 게쎄마니 올리브 숲 속으로 들어가서 여드레 동안 피정을 했고 그 결과 평온을 되찾았다"라고 하였다. 비가톨릭 신학계에서는 그의 이런 처신을 보고 '라그랑즈는 가톨릭 신앙의 노예' 라고까지 하였지만, 그는 교황청의 무지와 폭거를 참아냈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서 연구소는 발전할 수 있었고 가톨릭 성서학이 정립될 수 있었다. 현대 가톨릭 성서학의 외로운 개척자로서 그는 구약성서학 · 중간사학 · 신약성서학은 물론 근동학 · 고고학 · 지리학까지 두루 다루었는데, 그 여러 분야에서 결코 전문가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양성과 발전에도 큰 보람과 기쁨을 느꼈다.
〔저 서〕 30편의 주요 저서 외에, 여러 학술지에 기고한 논문 500여 편, 서평 1,300여 편이 있다.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La méthode historique surtout a propos deI'Ancien Testament(EB, Paris, Lecoffre, 1903)/ Etudes sur Lesreligions sémitiques(EB, Paris, Lecoffre, 1903)/ Le livre desJuges(EB, Paris, Lecoffre, 1903)/ Le messianisme chez lesJuifs(EB, Paris, Gabalda, 1909)/ Evangile selon saint Marc(EB, Paris, Gabalda, 1911)/ Saint Paul. I'Éptre aux Romains(EB, Paris, Gabalda, 1916)/ Saint Paul, I'Eptre aux Galates(EB, Paris, Gabalda, 1918)/ Evangile selon Saint Luc(EB, Paris, Gabalda,1921)/ Evangile selon saint Mathieu(EB, Paris, Gabalda, 1923)/Evangile selon saint Jean(EB, Paris, Gabalda, 1925)/ Le Judaismeavant Jésws-ChristEr(EB, Paris, Gabalda, 1931)/ Histoire anciennedu canon du Nouveau Testament(EB, Paris, Gabalda, 1933). (→ 성서 연구 방법론)
※ 참고문헌 F.M. Braun, L'oeure du P. Lagrange, Étude et biblio-graphie, Fribourg Suisse, S. Paul, 1943/ L.H. Vincent, (DBS) 5, pp. 231 ~2371 Le Père Lagrange au service de la bible, Souvenirs persomnels, Paris, Cerf, 1967/ 정양모 . 이영헌, 《이스라엘 성지, 어제와 오늘》, 생활성서사, 1988, pp. 45~48. 〔鄭良謨〕
라그랑즈, 마리 조제프(1855~1938)
Lagrange, Marie 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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