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출판사

出版史

〔라〕historia preli Catholicis · 〔영〕history of the Catholic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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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베르크 성서 홍보용 포스터와 구텐베르크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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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베르크 성서 홍보용 포스터와 구텐베르크 동상.

① 세계의~
서양에서 출판 역사를 말할 때 종교개혁 이전까지는 가톨릭의 출판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출판물들이 성서나 신학 서적, 신심 서적에 관한 것이었고 인쇄 역시 교황이나 교권으로부터 임명을 받은 사람들이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측 모두에게 출판 사업 발전의 전기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종교개혁 이후부터 근대적인 가톨릭 출판이 점차 등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종교개혁 이전까지의 가톨릭 출판〕 출판에 있어서 인쇄는 기술적인 면에서 가장 중요한 대량 생산 방법이었고, 문화적으로도 모든 형태의 글을 정확한 복사본으로 만듬으로써 의사 전달의 혁명을 이룩했다. 인쇄된 문서들은 말로 전하거나 손으로 베끼는 형태보다 훨씬 우위에 서게 되었고, 무한한 정보의 확산을 가능하게 했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에 이집트, 히브리, 그리스, 로마에서는 두루마리나 필사본 책들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는 접힌 형태의 파피루스, 양피지, 송아지 가죽에 쓰여진 성서 사본이 사용되었으며, 이런 형태는 특히 14세기의 성경 필사본에서 많이 발견된다. 수도원의 필사실은, 대학이 생겨나고 상업과 정치적인 필요에 의해서 많은 일반 필경사들이 등장하는 중세 전반까지는 대량의 성경 사본을 만들어내는 원천이었다.
15세기 초에는 대중적인 수요에 따라 상당수의 책들이 목판술로 인쇄되었다. 목판술은 초기에는 1423년의 성 크리스토퍼 판처럼 낱장으로 인쇄했지만 후에는 여러 장을 묶은 책 형태로 발전했다. 목판 인쇄물의 수가 워낙 많기 때문에 한때 금속 활자 인쇄가 목판술에서 발전한 것으로 추측했으나, 기술적인 측면에서 목판술과 금속 활자 인쇄는 전혀 다른 것인 만큼 시대의 필요에 부응한 다른 형태로 보아야 할 것 같다. 1480년경에는 목판으로 인쇄된 책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는데 스페인어와 타갈로그어 두 언어로 쓰여진 《그리스도교 교리》(Doctrina Christiana)가 목판술로 인쇄된 가장 마지막 책일 것이다.
인쇄술 발명 이후의 발전 : 금속 활자술의 발명은 1440~1450년경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가톨릭 교계 제도의 동의와 때로는 적극적인 장려 속에서 이루어졌지만, 근본적으로는 지적 · 경제적 동기를 가지고, 필요한 인적 자원과 자본을 제공했던 평신도들에 의한 사업이었다. 특히 12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대학의 설립 도시 생활의 확장, 상업의 번창, 상인과 법률가 계층의 형성, 의회 제도와 여러 국가 사이의 교회 협의체의 형성, 자국의 고유 언어가 발전되던 이 시기에 더욱 사용하기 편리하고 정확한 문자로 된 의사 소통 매체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매체가 기술 면에서는 종이 생산, 금속 활자용 잉크, 압착 기술, 야금에 대한 지식이 전수되었고 수도원이나 대학에서 성서를 베끼던 필사도 이제는 자형을 아름답게 만들어 사용하게 되면서 인쇄술은 점차 의사 전달 수단으로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초기에는 주로 짧은 작품들, 곧 독일 묵시 문학의 시, 달력, 도나투스의 라틴어 문법서, 교황의 대사(大赦) 문서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특히 콘스탄틴 미사 경본과 서지학적으로는 42행 성서라고 불리는 구텐베르크 성서를 중요한 업적으로 들 수 있다. 인쇄 기계의 급속한 보급은 대중에게 더욱 많은 자국어 책과 소책자들을 읽게 함으로써 중요한 문화적 영향을 미쳤다. 일반적으로 초기 인쇄업자들은 이상주의자나 예술가가 아니라 이윤을 추구하는 사업가들이었다. 그들 각자가 책의 발행인이었고 다른 업자와 경쟁하면서 책을 판매할 새 시장 개척을 위해 노력하였다. 1500년경에는 많은 학자들의 라틴어 책과 아울러 거의 모든 그리스와 로마 고전들이 기업화된 인쇄업자들에 의해서 번역 출판되어 평신도들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성서도 거의 모든 유럽 언어들로 인쇄되었다. 이제 인쇄술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유럽 전체에 보급되었으며, 1500년경에는 제목이 다른 4만여 종류의 책이 인쇄되었다. 한 종류에 적어도 약 200권 정도 인쇄했다면 1450년에서 1500년 사이에 약 800만 권정도의 책이 인쇄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이 숫자는 앞서 천 년 동안 필사한 책 전체보다 많은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부터 18세기 후반까지의 가톨릭 출판〕 16세기 유럽의 중심지에는 베네치아의 알두스 마누시우스(Aldus Manutius), 바젤의 프로벤(Froben), 파리의 바디우스(Badius)와 에스티엔느(Estiennl), 앤트워프의 플랑탱(Plantins)들과 같은 명문 출판사들이 등장하였다. 그들은 좋은 활자체와 삽화의 중요성을 인식했으며, 르네상스 시대의 광범위한 욕구에 부응하는데 초점을 맞춰다. 또한 라틴어는 국제 학술 언어였기 때문에 모든 인쇄업자들의 활동 범위는 국제적이었다.
이탈리아 : 베네치아의 가장 위대한 인쇄업자인 알두스 마누시우스는 정확한 학문에 근거한, 그리스 로마 시대 작가들의 8절판 책들로 명성을 얻었고 염가의 작은 책들도 근대 출판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더욱이 마누시우스는 챈서리(chancer), 이텔릭(italic), 또는 알딘(aldine)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활자체를 만들었다. 인쇄업자들에게 심각한 문제는 복사본의 출판이었는데, 저작권이 없던 당시로는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서 인쇄업자들은 특정한 책을 2~10년을 기한으로 인쇄 판매할 수 있는 독점적인 면허제를 실시했다. 베네치아 당국도 이러한 특허를 내주었는데, 대신 이 기간이 끝날 때까지는 베네치아를 떠나지 않는다는 약속이 부가된 것이었다. 그리고 만일 복사본을 출판할 경우 책을 압수하고 벌금을 물렸다.
로마와 교황령만이 아니라 이탈리아와 그 외에 바젤과 같이 교황의 세속 통치권이 미치는 다른 나라에서 인쇄된 중요한 책들도 교황 특권이 부여되었다. 이 특권을 침해하는 경우에는 파문, 벌금, 책 압수 등의 위협이 뒤 따랐다. 교황 특권이 부여된 최초의 예는 마누시우스에게 주어진 10년 간의 특권이었는데, 이와 동시에 모든 이탈리아 인쇄업자들에게는 그의 활자체나 그것을 모방한 활자체로 그의 그리스와 라틴 고전 작품들을 복사 출판해서는 안된다는 경고가 내려졌다. 그리고 레오 10세도 비슷한 특권을 여러 번 허용했다.
교황청과 밀접한 인쇄 출판사의 필요성은 1539년에 마누시우스의 아들이, 당시에 팔라티나라고 불리던 바티칸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인쇄되지 않은 그리스어 서적들을 출판하자고 제의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 계획은 발도(Baldo)에게 주어졌지만, 교황청 소속 인쇄소라는 이름을 받기 위해서는 1549년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의 작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에우스타시오(Eustatius)가 주석을 붙인 《일리아드》였는데 1542년에 제1권, 1549년에 제3권이 나왔고 색인은 그 뒤에 출판되었다.
16세기 교회의 심각한 문제는 독일, 스위스, 영국, 네덜란드 등에서 인쇄된 이단 서적들이 대륙을 휩쓸고 범람해 오는 것이었다. 인쇄기 발명 이전에 손으로 쓰여진 소수의 책은 이런 문제를 야기시키지 않았다. 1545년에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는 무엇보다도 프로테스탄트 출판물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열린 것이었다. 그 결과의 하나가 1559년 로마에서 발행된 금서 목록이다. 트리엔트 공의회가 시도한 계획들 중에는 교황의 훈령, 공의회 교리서, 그리고 개정판 라틴어 성서의 발행이 들어 있었는데 이는 로마에 더 많은 인쇄업자들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문화 활동에 관심이 많았던 코시모(Cosimo)의 아들 페르디난도 데 메디치(Ferdinando de Medici, 1549~1609)는 동방 서적을 주로 출판한 메디치 출판사를 만들어서 교황청을 위한 활자 제조 계획을 후원했다.
바티칸 출판국 : 1587년 식스토 5세가 세운 바티칸 출판국은 도메니코 바사(Domenico Basa)를 최초의 책임자로 임명하여 불가타 성서를 인쇄했다. 보통 시스티나 성서라고 알려진 이 성서는 1590년에 발행되었는데, 로베르 에스티엔느가 고안한 방법에 따라서 내용을 종래에 절로 나누는 방법 대신에 단락으로 나누었다. 그 후 1592년에는 로베르토 벨라르미노의 책임 하에 개정판이 나왔고 1593년 제4판이 그리고 그 뒤 5년 후에는 5판이 나왔다.
1626년 안드레아 브로지오티(Andrea Brogiotti)가 바티칸 출판국 책임자가 되었을 때 교회는 외국 선교 영역으로 활동 범위를 넓히고 있었다. 이 일을 위해서는 공식적인 문서 출판을 위한 여러 유형의 판형과 활자들이 필요했다. 이 활자들은 그리스어, 라틴어, 동방 언어, 음악 용어 활자들을 총괄하여 출간된 활자 색인(indice de carat-teri) 안에 수록되어 있다. 두번째의 공식 출판국이 1626년 바티칸에 설립되어 포교성성(Congregatione a Propagatione Fidei)을 돕게 되었다. 인쇄 계획은 교리서, 문법서, 그리고 동방 언어들로 된 전례서들과 같이 외국 선교에 필요한 범위로 한정되었다.
19세기 초 몇십 년 동안은 바티칸의 인쇄 출판의 불행한 시기였다. 교황령에 밀어닥친 나폴레옹 1세의 영향은 재앙에 가까운 것이었다. 1796년 체결된 볼로냐 조약에 의해서 교황 비오 6세는 약 500여 권의 필사본을 내주어야 했으며, 아라비아어와 그리스어로 된 많은 양의 활자 자료가 이집트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와 이오니아 제도에 인쇄소를 설립하기 위해 몰수되었다. 몇 번에 걸쳐서 넘겨준 후에 바티칸의 판형과 활자 모음은 아예 프랑스의 국립 인쇄소(Imprimerie Republique)에 전부 대여되었다. 비오 7세와 나폴레옹 사이의 평화는 잠시 지속되었지만, 1808년 로마가 점령 당한 지 1년 후 교황이 투옥되면서 깨졌다. 바티칸 출판국은 활동을 일시적으로 중단했다. 나폴레옹이 인쇄기를 압수했지만 교황은 1809년 6월 10일자 교황 칙서를 작성 인쇄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공식적으로 파문하는 문서였다.
1869년에 개최된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인쇄, 출판을 부추기는 좋은 계기였다. 공의회에 참가하는 모든 주교들은 교회 문제에 대한 여러 가지의 인쇄 자료를 준비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티칸의 출판 활동이 발전하는 본격적인 계기는 1881년에 문을 연 바티칸 문서고와, 그 뒤를 이어 역사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한 레오 10세의 서한이었다. 비오 10세는 1909년 바티칸 출판국과 포교성성의 출판 활동을 하나로 통합하여 '바티칸 다국 언어 활자 출판국' (Tipografia Polyglotta Vaticana)이라는 공식 명칭을 부여했다. 이 출판국은 전례문, 선교 홍보물, 학술 연구 결과물 등과 같은 명실공히 모든 언어의 공식 문서들을 발행했다.
프랑스 : 1530년 무렵 프랑스의 인쇄업자들은 독특한 활자체로 국제 출판계를 이끌었으며 파리는 당연히 출판 예술에 있어 유럽의 중심이 되었다. 이 중 에스티엔느 가문은 150년 동안 인쇄 분야에서 뛰어난 역할을 수행했다. 가문의 창시자 앙리 에스티엔느(+1520)는 텍스트의 정확성과 르네상스 형식의 목판 테두리로 유명했다. 로베르 에스티엔느(1503-1559)가 라틴어 연구를 활성화시키려는 목적으로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았는데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라틴어 신약 성서(1523)였다. 이 성서에는 당시의 성서에 포함되지 않은 이본들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소르본느 대학교 신학부 교수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1세가 1539년 그를 왕실 출판업자로 임명하여 히브리어와 라틴어, 1년 후엔 그리스어판을 발행하게 했다. 1547년 앙리 2세가 즉위하고 그의 동생 샤를르가 실권을 쥐게 되자 후원자를 잃은 에스티엔느는 1551년에 제네바로 옮겨 갔고, 그곳에서 칼뱅의 신학 저서를 출판하는 출구를 마련하였다. 파리에 있던 본래의 출판사는 그대로 가톨릭 계통의 출판사로 남았다.
이 외에도 출판업에서 유명한 사람으로서 활자 디자이너 클로드 가라몽(Claude Garamond), 프랑스 르네상스 시대의 책 디자이너 조프르와 토리(Geofroy Tory, 1480?~1533), 리용의 인쇄업자 장 드 투르느(1504~1564), 만년에 바티칸 출판국을 위해서, 특히 동방 언어 활자체를 만드는 일에 종사한 로베르 그랑종(1550~1600)이 있었다.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한 출판의 업적은 1632년에 시작된 《예수회의 보고서》(Jesuit Relations)라는 책의 발행이었다. 북아메리카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보내온 연례 보고서인 이 책은 곧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북아메리카에 대한 유럽인들의 태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독일 : 종교개혁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측에서 많은 책과 팸플릿을 발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들은 라틴어는 물론이고 독일어, 영어로도 출판되었으며 많지는 않지만 프랑스어로도 출판되었다. 인쇄가 시작된 처음 한 세기 동안 출판은 논쟁과 설득과 여론 형성, 대중을 향한 선전의 유력한 도구가 되었고 종교개혁 기간 동안 독일 출판은 주로 논쟁적인 논문들을 출간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했던 활발한 인쇄소들 외에 루터의 고향인 비텐베르크에는 프로테스탄트 팸플릿의 출판에 주력한 인쇄소가 있었다. 독일어를 사용하는 스위스의 두 도시 바젤과 취리히에 인쇄소가 설립되었으며, 16세기 후반에는 프랑크푸르트가 출판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라틴어와 프랑스어로 256종의 책을 출간한 바젤의 요한 프로벤(Johan Froben)은 당시의 선구적인 인쇄업자였다. 그는 가톨릭의 입장으로서 1516년에 에라스무스가 편집한 최초의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출간했다. 이 외에도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2세, 요한네스 아머바흐(Johannes Amerbach)가 유명하다.
영국 : 영국 가톨릭 출판은 16세기 중반부터 150여년 간 모든 책의 인쇄와 보급에 영향을 미친 정부의 일련의 제한 조치 때문에 불이익을 당했다. 이단 서적의 보급을 막기 위해 출판 · 검열 제도가 실시된 것이다. 1557년 출판인 조합(Stationers' Company)은 강령을 발표했는데 이에 따르면 이 조합에 소속된 사람만이 판매를 위한 일체의 인쇄물을 만들 수 있으며, 모든 회원들은 인쇄할 모든 책의 제목들을 조합에 등록해야 했다. 당시에는 이 등록 명부가 판권을 표시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며, 이처럼 공인된 집단에 의한 출판만을 허용한 것은 지하 출판업자의 출판을 통제하기 쉽게 만들었다.
1559년 엘리자베트 여왕이 선포한 금지령은 모든 책은 출판하기 전에 허가를 받고, 이미 출판한 책들도 재허가를 받게 했다. 이 법령은 차별 없이 적용되었으며, 1586년의 스타 챔버(Star Chamber) 법령은 그때까지의 모든 법령을 조문화해서 출판을 더욱 엄격하게 통제할 권위를 부여했다. 법령의 내용을 살펴보면 출판은 런던과 주변 교외로 제한하고, 인쇄업자 · 종업원 · 인쇄소의 수도 한정하며 적법한 허가를 받지 않은 모든 출판물은 금지하고 아울러 출판인 조합의 감시인들은 무허가 지하 출판소를 색출하는 권한을 가진다는 것이다. 1586년 금지령의 효력은 극심한 탄압과 활자 발전에 장애가 된 1637년과 1643년의 더 가혹해진 금지령으로 바뀔 때까지 계속되었다. 존 밀턴(John Milton)은 이러한 가혹한 탄압에 대항하여 <아레오파지티카>(Areopagitica)라는 팸플릿을 써서 출판의 자유를 옹호했다. 그러나 밀턴 조차도 출판의 자유에서 가톨릭은 제외시켰다.
이 시기에 출판업에 종사하던 가톨릭 신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고, 그중에서 최소한 한 명, 곧 월리엄 카터(William Carter)가 처형당했지만(1584) 가톨릭 출판이 완전히 억눌려 버린 것은 아니었다. 1600년대 초반에 존 하이엄(John Heigham)은 많은 가톨릭 서적을 영국으로 밀반입했으며, 제임스 왕이 스페인과 프랑스 문제에 골몰하고 있던 시기에는 가톨릭에 대한 탄압이 느슨해져서 활기를 띠었다. 영국 가톨릭 출판인들 중에 가장 활발했던 사람은 리차드 버스티간(Richard Verstegan)인데, 그는 1582년에 《캠피온의 순교》(Campion' s Martyrdom)라는 책을 내고는 프랑스로 도망, 앙베르스에 정착하여 출판업자, 번역가, 작가로 활동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성모 소성무일도서》이다. 많은 인쇄업자들이 앙베르스나 루뱅으로 옮겨갔다. 1564년에서 1567년까지 약 18명의 가톨릭 저자들이 작품을 발표했으며, 45종 정도의 책이 발행되었다.
17세기 말 영국 런던과 지방에 가톨릭 계열의 출판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토마스 미건(Thomas Meighan)은 1717년에 런던 가톨릭 인쇄소를 설립하여 버스티간의 《성모 소성무일도서》를 출간했다. 그리고 1760년에 《평신도를 위한 가톨릭 지도서》(Laity's Catholic Directory)가 발간된 후로는 지하 출판과 대륙으로부터 신심 서적을 밀반입해야 하는 시대는 끝났다
성서 출판의 경우, 1582년 신약성서가 인쇄되기 전까지는 영어로 된 가톨릭 성서가 없었지만, 부분적으로는 그보다 훨씬 이전에 출판되었다. 예를 들어 캑스턴(Caxton)이 번역한 보라진(Voragine)의 《황금 성인전》(Legenda Aurea)에는 모세 오경과 복음서의 대부분이 담겨 있다. 성서 일부에 대한 최초의 공식 번역은 1555년까지 인쇄된 세인트 존 피셔(St. John Fisher)의 《참회의 시편》(Penitential Psalms)이다. 찰스 웜슬리(Charles Walmesley)의 《묵시록 해설》(Exposition of the Apocalypse)이 1771년부터 1821년 사이에 시고 파스토리니(Sigo Pastorin)라는 익명으로 출간되었다. 게즈(A. Geddes)는 1792년부터 1797년 사이에 구약성서의 창세기부터 룻기까지 새롭게 번역하여 출간했다.
미국 : 미국의 초기 식민지 법령에는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던 메릴랜드 주에서조차도 가톨릭 서적의 출판 금지가 명시되어 있었다. 가톨릭 신자들은 영국에서 온 망명자들이 가져온, 대륙에서 출판된 서적이나, 더블린 또는 런던의 지하 출판물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기록에 의하면 선교사들은 책을 손으로 베껴서 사용하였다.
최초의 출판은 1773년 조셉 크럭생크(Joseph Crukshank)가 시도한 챌로너의 《영혼의 뜰》(Garden of the Soul)이었다. 로버트 벨(Robert Bell)은 1774년 볼티모어에서 가톨릭 기도서를 인쇄했다. 위 두 책의 후원자는 아마도 예수회 선교사인 로베르 몰리뉘(Robert Molyneux)였을 것이다. 1776년 이전에 페늘롱(Fénelon),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성 토마스 모어(St. Thomas More) 등을 포함해서 여덟 권의 가톨릭 제목의 책이 인쇄되었다. 미국 최초의 가톨릭 출판업자는 크리스토퍼 탈보트(Christopher Talbot)였는데, 그는 1784년 필라델피아에서 조셉 리브(Joseph Reeve)의 책 《신구약 성서의 새 역사》(The New History of the Old and New Testament)를 발행했다.
※ 참고문헌  R.A. Burke, 《NCE》 3. 〔吳世完〕
② 한국의~ (⇨ 한국 가톨릭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