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 제9대 서울 대목구장. 초대 대전교구장. 세례명은 아드리아노, 한국명은 원형근(元亨根) 1883년 2월 4일 프랑스 라 로미외(La Romieu)에서 출생하여 1904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으며, 1907년 3월 10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같은 해 5월 21일 한국에 입국한 후 이듬해 만주 북간도(北間島) 지방으로 파견되어 삼원봉(三元峰) 등지에서 전교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파리 외방전교회에 소속된 젊은 선교사들은 군 복무를 위해 본국으로 소환되어야 했다. 이에 라리보 신부를 비롯하여 남아 있는 신부들은 전교 활동에 더욱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는데, 이 시기에 그는 충청도 합덕 본당 신부로 부임하여 혼자서 40여 개의 공소를 맡아 순방하였다. 라리보 신부는 성격이 쾌활하고 솔직하며, 한국인의 성격적 특성과 잘 조화를 이루는 전교 활동을 폈기 때문에 신자는 물론 외교인들과도 좋은 관계로 지낼 수 있었다. 따라서 비교적 많은 사람들에게 전교하여 그 지역의 교세가 크게 신장되었다.
1917년부터는 서울교구의 당가 신부로서 교구의 재정을 맡아 책임지게 되었다. 그 후 1926년 1월 서울교구 보좌 주교였던 드브레(Devered, 俞世竣 주교가 사망하자, 같은 해 12월 14일 그의 후임으로서 승계권을 가진 보좌 주교로 임명되어, 1927년 5월 1일 주교 성성식을 거행하고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위임에 따라 실질적인 서울교구 주교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또한 1933년 1월 23일에 43년 동안의 활동 기간을 통해 한국 교회에 큰 업적을 남긴 뮈텔 주교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제9대 서울교구장으로 취임하였다.
교구장 재임 중 라리보 주교는, 철저히 교회를 탄압하고 전교의 자유를 제한하며 신사 참배를 강요하는 등 교회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 일제의 민족 문화 말살 정책에 대항하면서 서울교구를 이끌어 나갔다. 특히 1927년에 백동(柏洞, 현 혜화동)의 베네딕도 수도원이 덕원(德源)으로 이전하자 그 부지와 건물을 매입하여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소신학교를 이전, 독립시키는 등 신학교 제도의 혁신을 추구하였다. 이렇게 성신대학(聖神大學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의 기초를 놓은 라리보 주교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과 교세 확장을 위해서도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1933년 3월 6일에 개최된 전국 5개 교구(서울, 대구, 원산, 평양, 연길) 주교 회의에서는 '5교구 출판위원회' 를 구성하였는데, 라리보 주교가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출판위원회에서는 교세 확장을 도모하기 위하여 모든 교구에서 통용되고 있는 예비자 교리서를 수정 · 통일하기로 하였으며, 새로 《가톨릭 청년》이라는 잡지를 창간하기로 하였다. 한국 교회 안에서 전개되어 온 가톨릭 운동을 통합하는 구심체 역할을 한 《가톨릭 청년》은, 교회의 교리 정립과 청년들의 신심 함양에 도움을 주고 사회계몽과 민족 문화의 향상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교회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지면서 그들이 외국인 성직자를 구금하고 추방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자, 교황청에 사임할 뜻과 함께 한국 교회의 보존을 위해 한국인 성직자를 주교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 즉 일제가 교구장을 일본인으로 대치하려는 데에 맞서서, 노기남(盧基南, 1902~1984) 신부를 비밀리에 천거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한국인 사제로서는 처음으로 노기남 신부가 주교로 서품되어, 교황 비오 12세로부터 1942년 1월 3일 제10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1942년 1월 5일 교구장직에서 물러난 라리보 주교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거처하면서 광복이 될 때까지 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소속의 한국인 수녀와 고아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였다. 1948년 충남 지역이 독립 포교지로서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되자 이 지역의 책임자로 임명되었으며, 1956년 4월 28일에는 교회 발전을 위해 노력한 공로가 인정되어 교황 비오 12세로부터 '탑전시종' (榻前侍從, Episcopus Pontipicio Solio Adstans)이라는 명예직과 함께 그에 따르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1958년 6월 23일 충남 지역이 대전 대목구로 설정되자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이듬해 1월 11일 대전 대흥동(大興洞) 성당에서 착좌식을 거행하였다. 그 후 1962년 3월 10일 교계 제도가 설정됨에 따라 대목구가 정식 교구로 승격되면서, 라리보 주교는 초대 대전교구장으로서 주교좌 성당인 대흥동 성당을 신축하는 등 대전교구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1907년에 입국하여 1965년 교구장직을 사임할 때까지 모두 58년 동안이나 한국 교회를 위해 봉사한 라리보 주교는, 1960년에 프랑스 정부로부터 그 공로를 인정받아 최고 훈장인 레종 도뇌르(Légion d'honneur) 기사장을 수여받았다. 또 1961년에는 한국 정부로부터도 외국인 주교로서 평생을 바쳐 한국의 사회 사업과 문화 향상에 큰 공훈을 세운 사실을 높이 인정받아 문화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82세의 고령으로 점차 격무를 감당하기가 어렵게 되자, 1965년 3월 현직에서 은퇴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1974년 8월 12일, 90세를 일기로 프랑스의 몽브통(Montbeton) 요양소에서 사망하였다. (⇦ 원형근 ; → 서울대교구 ; 대전교구)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교구 총람》 부록, 가톨릭출판사, 1984. 〔李裕林〕
라리보, 아드리앙 조제프 Larribeau, Adrien Joseph(1883~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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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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