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종교 철학자. 신부. 문필가. 호교론적 입장에서 수많은 철학적 저술을 남겼고, 정치가로서도 활약하였던 당대의 대표적 지성인이었다. 1782년 6월 19일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 생 말로(Sain-Malo)에서 태어나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선주이자 상인이었던 아버지마저 사업에 실패하자, 수도원을 창설한 그의 형과 삼촌의 후견 아래 성장하였다. 프랑스 혁명의 혼란 때문에 22세가 되어서야 첫영성체를 했으며, 1816년 3월 9일 반느(Vannes)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모든 인간에게 신앙의 일치를 보장하는 가톨릭적 학문을 정립하는 것이 그의 지속적인 관심사였다. 그래서 그는 1828년에 '성 베드로 수도회'(Congrégation de Saint-Pierre)를 창설하고 수도원장으로서 고대어뿐만 아니라 독일어 · 영어 · 이탈리아어와 자연과학 및 사회 과학 분야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는 사제를 양성하는 데 주력하였으며, 학문의 방법론으로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적 방법론을 적극 추천하였다. 라므네는 그의 사상 초기에는 드 메스트르(DeMaiste), , 드 보날(DeBonald)과 함께 전통주의 노선에 서 있었다. 전통주의는 개인적인 이성(理性)과 자유의 추구를 유일한 규범으로 인지하는 자유주의를 단호하게 거부한다.
또한 영성 서적을 출판하면서 당시 왕정을 지지하는 신문인 <보수당원)(Le Conservateur)의 편집에도 협력하였다. 후에 그는 현실 정치에도 참여하여 사제와 주교들이 자애스러워질 것과, 교회가 가난한 삶을 선포하는 진정한 그리스도교로 돌아갈 것을 간청하였고, 가톨릭 신자들이 군주제와 결별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1830년경에는 국민들이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봉기에 참여할 것과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역설하였다. 이와 같은 라므네의 주장은 그가 이미 전통주의의 사상 노선과 멀어져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다시 말하면, 극단적인 교황 지상주의와 군주제의 옹호에서 점차 제4 계급(프롤레타리아)의 권리를 위하여 투쟁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교적 복음을 철저하게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종교적인 사회 혁명가로 변모하였다. 그러나 전통주의와 군주제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벗어났으나, 국가와 사회 철학의 종교적인 기초는 포기하지 않았다. 교회의 파문을 받은 뒤 라코르데르(Lacordaire)를 비롯한 자신의 제자들과도 관계가 끊긴 채 1854년 2월 27일 라세네(la Chenaie)에서 사망하였다. 그때까지도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불의에 대해서는 침묵하지 않았다. 입법회의의 의원과 언론인으로서 활약한 그는 모든 증오와 교조주의에 맞서 양심의 자유, 인간의 권리, 사랑의 우위를 주장하였고, 이러한 정신을 1848년의 혁명에 불어넣고자 하였다.
〔사 상〕 인식론 : 라므네는 진리의 원천을 '보편 이성'(sens commun)이라고 간주하였다. 같은 의미에서 진리의 원천은 전통(tradition)이며, 이것은 신구약 성서보다 더 오래된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다양한 고대 문화는 인류가 신에 이르는 길을 완성하는 데 기여했다고 하였다. 그가 몰두했던 문제는 진리와 종교적 인식의 일치 문제였다. 그에 의하면, 진리의 유일한 기준은 백성 가운데 항상 어디서나 생동하는 보편 이성이다. 그는 집단적인 이성이 개인의 이성에 우선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그는 모든 인식이 그 규범을 근원적 계시에 두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였다. 진리의 최종적 기준은 근원적 계시와 일치하여 주어져 있고, 이러한 계시에 관하여 볼 수 있는 해석자는 교회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보편 이성은 오류를 범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이러한 일치가 자연적인 것이 아니고 신적인 일치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보편이성' 의 형이상학에서 중요한 문제는 '객관적인 명증'즉 '스스로 드러나는 사건 자체' 이다.
라므네는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리드(Reid), 스튜어드(Steward), 프랑스 철학자 주프로와(Jouffroy)의 사상 노선을 따라 건전한 인간 오성의 타당성을 신뢰하고, 진리는 늘 중용에 있다고 믿어 보편 이성의 이론을 제시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보편 이성이 개인적 이성을 대치한다. 그가 개인의 이성이 종교적 진리, 특히 신의 존재를 독자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고 주장한 점에서, 그의 인식론은 가톨릭 교회의 교의(dogma)에 어긋난다. 가톨릭교회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에서 인간 이성의 자연적 빛으로 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다고 하는 이론이나 견해를 단죄한 바 있다.
종교와 사회 : 라므네는 종교를 사회의 기초로 간주한 점에서 드 보날과 드 메스트르의 전통주의 사상을 따르고 있다. 그는 초기 저술에서 국가와 사회가 종교 없이는 성립할 수도 없고 존속할 수도 없다는 견해를 표명하였다. 전통주의의 이러한 견해는 그리스 철학과 로마 철학의 사상적 유산을 이어받은 것이다. 라므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과 치체로의 법률론을 참고하여 종교적인 법률과 정치적인 법률이 모든 국가의 제도에서 내적으로 합치한다고 생각하였다. 그에 의하면, 신은 모든 입법의 진정한 원천이고 질서의 영원한 원리이므로 정치적 사회는 종교적 사회의 도움에 힘입어서만 성립될 수 있다. 또 정치적 사회는 종교적 사회로부터 권위와 합법성, 지속성을 부여받는 것이다. 권위에 관한 라므네의 견해가 드 보날의 견해와 다른 점은 편파적으로 왕정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고 민주적이지도 않다는 데 있다. 즉 그의 견해는 신정적(神政的)이어서 가톨릭적인 민주주의와 신의 은총에 의한 군주제와도 연결될 수 있다. 라므네는 종교와 사회의 긴밀한 일치를 믿었으므로 이러한 관계를 프랑스에서 다시 세우려고 노력했고, 자연 종교와 시민종교를 인류 신앙의 유일하고 타당한 표현인 그리스도교와 동일시함으로써 이러한 믿음을 보완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이론이 가진 위험성은 그리스도교가 자연화되는 것인데, 즉 보편적 이성에 의해 획득된 진리를 가톨릭 교회가 늘 구원의 신비라는 이름으로 구별한 초자연적인 진리와 같은 수준에 있는 것으로 보려고 하는 데 있다.
전통주의에서 자유주의로 전환 : 라므네의 초기 저술에서 나타나는 사회 사상은 전통주의자인 드 보날의 사회 사상과 많은 점에서 일치하지만, 그의 후기 사상에서 드러나는 자유와 주권의 문제에 관한 이해 방식은 서로다르다. 라므네는 왕정을 복고하려는 사상 체계가 자유와 종교를 억압한다고 간주하였다. 또 그는 전통적인 종교적 · 정치적 질서를 복구하려는 이념을 내세우는 전통주의의 국가 철학과 역사 철학은 당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보았다. 여기서 그의 자유주의적 사상의 특징이 드러난다. 물론 그의 자유주의는 순전히 정치적 의미의 자유주의가 아니다. 그는 사회를 이끄는 지도자를 백성(민중)이라고 보았고, 당시의 지도층이 혁명 운동을 왜곡한다고 비판한 점에서 백성을 경시한 드 보날과 구별된다. 그에게 백성은 드 보날처럼 추상이나 개인주의적인 개념이 아니라, 낭만주의의 견해처럼 개인의 현존이 실현되는 고유한 실체적 현실태이다. 그가 표방하는 가톨릭적인 자유주의는 백성을 자유롭게 하고, 종교가 구정권(왕정)과의 유착에서 벗어날수 있는 새로운 토대이다. 그는 사회와 당시 프랑스의 군주제를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 보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드 메스트르처럼, 사회 질서를 보장하는 교회의 독립이 교황 지상주의에 의해 회복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간절히 염원하였던 것은 교회의 자유였다. 그러므로 라므네와 그의 추종자들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하였고, 양심의 자유 · 교육의 자유 · 언론의 자유 결사의 자유 등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교회와의 관계를 단절하기 이전에는 민주주의를 무신론적이라고 혹평하기도 하고 국민 주권의 원리를 믿지도 않았으나, 1830년 이후부터는 민주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또 그는 프랑스 혁명의 구호인 자유·평등 박애를 그리스도교적인 복음에서 의역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이러한 구호가 시민 계급만의 정치적 요구의 핵심이 아니라, 전체 백성을 위한 정치적 · 경제적 개혁에서 내용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타협을 모르는 양심적 발언 때문에 그는 마침내 1834년 보수적인 교황 그레고리오 16세(1831~1846)가 이끌던 가톨릭 교회와 절연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832년 8월 15일에 발표한 회칙 <미라리 보스>(Mirari vos)에서 교회와 국가의 분리 · 양심의 자유 · 언론의 자유 등을 주장하는 자유주의 사상을 단죄하였고, 후임 교황 비오 9세(1846~1878)도 유명한 회칙 <관타 쿠라>(Quanta cura, 1864)의 부록(syllabus)에서 합리주의 · 과격주의 · 자유주의의 오류를 비판하고 단죄하였다. 그러나 라므네의 의도는 당시 권위주의적인 정부에 대하여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정치 질서 안에서 가톨릭 신자들이 언론의 자유와 행동의 자유를 누릴 권리를 확보해 주는 데 있었다.
그는 특히 양심의 자유에 관하여 단호한 견해를 표명하였다. 권위와 권력과 관련된 법의 옳음도 개인의 양심, 나아가서는 공공의 양심이 결정한다. 교황의 결정도 개인의 양심의 권리를 능가할 수 없다. 그에 의하면 신이 아닌 인간의 권위에 대한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순명은 거부되어야 한다. 진정한 지성은 자유를 전제로 하므로, 맹종은 인간의 자연 본성에 어긋난다. 맹종은 그리스도교의 참다운 정신에도 반대된다. 그래서 그는 예수회의 회칙에도 반감을 표시하였다. 완전한 자기 부정과 완전한 복종을 본질적인 덕으로서 찬양하는 예수회의 회칙은 그에게 옳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개성과 인격성의 파괴는 해롭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는 자유롭고 개방적인 논쟁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여기서 라므네는 로마 교회에 대한 동방 교회의 비판적 태도를 모범으로 들고 있다. 양심만을 따라야 하며, 양심을 거스려 행동하는 것은 죄이다. 라므네는 세속적인 이익과 인간적인 욕구에 사로잡혔던 당시 교계 제도와 거리를 두면서, 신비체로서의 교회의 참 모습은 권위주의적이고 군주적인 제도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에 의하면, 진정한 교회는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삶의 공동체이며, 복음적인 의미에서 믿음과 사랑을 추구하고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교회이다.
〔평 가〕 라므네는 당시 프랑스의 사회 문제에 주목하였던 최초의 가톨릭 신자들 중에 속하며, 19세기 초기의 프랑스에 최초로 사회적 가톨리시즘의 초석을 놓은 선구자였다. 그는 가톨리시즘에 정치적으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려 하였고, 종교와 사회를 서로 화해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이름은 1848년의 혁명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는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와 비오 9세에 의해 자유주의자라고 낙인찍혀 단죄되었고, 교회를 떠나 철학적 종교에 기울어졌었지만, '그리스도교적 민주주의' 의 새벽을 연 교회의 아들이었다고 평가된다. 라므네의 자유주의는 정치적인 이론이나 이상이 아니었다. 그는 당시 프랑스 가톨릭 교회의 지성적인 취약점을 간파하여 보완책을 제시하려고 한 열정적이고 행동하는 가톨릭 신자였고, 그는 19세기 종교의 영역에서 보면 위대한 예언자였다. 그는 교황의 무류성, 교황의 세속권의 종언, 교회와 국가의 분리, 교황권과 민주주의의 연합을 예언하였다. 1868년 교황의 세속권이 종언을 고하고, 1870년에 교황의 무류성이 선포되었으며, 레오 13세는 민주주의적인 국가 형태를 승인하였고, 1905년 프랑스에서는 교회와 국가가 법적으로 분리되었다. 라므네가 예언한 모든 것이 적중한 것이다. 프랑스 전통주의의 공헌은 신학이 사회적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기능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 점이다. 전통주의가 그리스도교의 복음 내용을 사회적 관계를 고려하여 기능화한 것은 비판받을 법하다. 복음의 생활화냐 기능화냐 하는 문제는 계속 쟁점으로 남아 있다. 전통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긴장 지대에 서 있다가 자유주의로 전향한 라므네는 그의 좌절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교회를 자유 문제에 주목하도록 한 공로자이며, 그가 중시한 자유의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가톨릭 사회론에서 계속 논의되는 주제이다. (→ 자유주의 ; 사회주의 ; 전통주의)
※ 참고문헌 F.R. de Lamennais, Essai sur l'indifférence en matière de religion, Oeuvres complètes de F.de La Mennais, Tome 1, Paris, 1836~ 1837, Nachdruck in Frankfurt a.M., 1967/ 一, De la religion considérée dans ses rapports avec l'ordre politique et civile, Paris, 1836~1837, Nachdruck in Frankfurt a.M., 1967/ R. Spaemann, Der Ursprung der Soziologie aus dem Geist der Restauration, Studien über L.G.A. de Bonald, Miinchen, 1959/ H. Barth, Die Idee der Ordmung, Erlenbach-Zurich und Stuttgart, 1958/ W. Gurian, Die politischen und sozialen Ideen des franzoesischen Katholizismus, M. Gladbach, 1929/ H. Maier, Revolution und Kirche, München, 1972/ E. Muhler, Die Soziallehre der Päpste, Miinchen, 1958/ H. Schnatz, Päpstliche Verlautbarungen zu Staat und Gesellschaft, Darmstadt, 1973/ A.F. Utz . B.G. von Galen eds., Die katholi-sche Sozialdokrin in ihrer geschichtlichen Entfaltung, Aachen, 1976/ E. Coreth · W.M. Neidl · G. Pfligersdorffer eds., Christliche Philosophie im katholisehen Denken des 19. und 20. Jahrhunderts, Bd. 2, Styria, Graz Wien Koeln, 1988/ D. Huisman ed., Dictionnaire des Philosophes, PressesUniversitaires de France, 1984. 〔朴鍾大〕
라므네, 위고 펠리시테 로베르 드 Lamennais, Hugo Félicité Robert de(1782~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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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

라므네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