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북동쪽 에밀리아-로마냐(Emimia-Romagna)지방에 있는 역사와 예술의 중심 도시. 아드리아해와 7마일의 운하로 연결되어 있으며, 인구는 13만 6,324명(1988). 라벤나에 최초로 정착한 주민은 기원전 1400년경 아퀼레이아에서 남하한 이탈리아 반도의 종족들로 추측되는데,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이곳에서 5km 떨어진 곳에 클라세(Classe) 항구를 건설한 1세기 이후 로마제국의 중요한 해군 기지로 부상하였다. 402년에 호노리우스 2세가 이곳을 서로마 제국의 수도로 정하였으며, , 서로마 제국이 몰락한 이후 오도아켈(476~493)과 동고트왕국의 테오데리히 대제 치하(493~529) 때도 이곳은 이탈리아의 수도였다. 540년에 동로마 제국의 벨리사리우스(Belisarius)에게 점령당한 뒤 동로마 제국의 태수령(太守領)이 되었다가 그 후 롬바르디족(751)과 프랑크족(754)에게 넘어갔으며 756년에는 프랑크 왕국의 피핀(Pipin) 왕이 교황 스테파노 2세(752~757)에게 양도함으로써 교황령에 합병되었다. 9세기부터 11세기까지 라벤나의 대주교들은 게르만 황제들의 지원을 받아 많은 권력을 보유했으나 합스부르크 왕가의 루돌프 1세가 1276년에 교황에게 기증한 이래 1441~1509년, 1527~1529년, 1797~1815년을 제외하고는 교황령으로 존속했으며 1859년에 마침내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었다.
〔교회사〕 150년부터 클라세에 있던 주교좌를 우르수스(Usus)가 429년에 라벤나로 옮겼다. 성 베드로 그리솔로고 주교 재임 때 라벤나는 볼로냐 · 모데나 · 이몰라 · 파렌체에 걸친 대교구가 되었으며, 아그넬로 주교 재임시(557~578)에는 테오데리히 왕 때 번성하였던 아리우스파가 종식되었다. 이후 수세기 동안 라벤나의 대주교들은 로마로부터의 자치권을 보호하기 위해 투쟁하였다. 그러한 주장은 막시미아노 주교(546~556)로부터 시작되어 마우로 주교(648~671) 재임 때 절정에 달하였는데 콘스탄스 2세 황제는 결국 666년에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그 후로도 이러한 투쟁은 간헐적으로 계속되다가 12세기부터 라벤나는 로마에 항구적으로 충성하였고, 세 명의 교황을 배출하였으며 10~13세기에는 수차례 교회 회의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14세기부터 주교들은 순수한 종교 활동에 보다 더 치중하였으며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 이후 적극적으로 교회 개혁을 시행하였고 많은 수도원들도 이에 협조하였다. 라벤나 교회는 나폴레옹의 지배 시기와 19세기의 이탈리아의 국가 부흥 운동 기간 동안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20세기에 들어와서는 그리스도교 부흥 운동을 시작했다.
〔유 적〕 라벤나의 기념물들은 상당수 파괴되었으나 여전히 로마와 비잔틴 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것들로 호노리우스 황제의 누이 갈라 플라치디아(Galla Placidia)에 의해 세워진 조반니 에반젤리스타(요한사도) 성당과 그녀의 능묘, 비탈레 성당, 클라세의 아폴리나레 성당, 그 외에도 테오데리히의 궁전을 위시한 여러 개의 궁전과 요새 및 시성(詩聖) 단테의 묘가 있다. 또 국립 박물관에는 비잔틴 양식의 공예품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으며 베라 루티 미술관이 있다. (->교황령)
※ 참고문헌 A. Jacopin, 《NCE》 12 pp. 96~ 102/ Britanica World Encyclopedia, ,《브리태니커 세계 대백과 사전》, 브리태니커 · 동아일보 공동 출판, 1994, pp. 555~556/ 趙義卨 編, 《世界史大辭典》, 民衆書林, 1985, p. 216. 〔李庭熙〕
라벤나
〔이〕Rav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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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경에 세워진 성 아폴리나레 누오보 성당 내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