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그리스도교 교육 수도회 설립자. 교리 교육자. 축일은 5월 15일. 1651년 4월 30일 랭스(Reims)에서 고대 왕가 귀족 가문의 첫째 아들로 태어나, 본 앙팡 고등중학교(Collége des Bon Enfants)에서 공부하던 16세 때랭스 주교좌 성당 참사회 회원이 되었으며, 소르본 대학교와 생 쉴피스(Saint Sulpice) 신학교 과정을 마치고 27세 때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귀족 가문에서의 성장과 좋은 환경에도 불구하고, 루앙의 니엘(M.Nyel)과의 만남을 통해 자선 학교를 세우는 데 관심을 갖게 된 라살은, 먼저 그의 고향에 자선 학교를 세우고 차차 그 주변으로 확장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계획에 자신을 온전히 바치리라고 생각한 그는, 이것이 하느님이 마련한 소명임을 깨닫고 가정과 가족을 떠나, 참사회원직마저 버리고 이 일에 전심으로 투신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재산을 넘겨주고 가난한 사람들의 수준으로 자신을 낮추었다.
〔업 적〕 수도회 설립 : 라살의 첫 번째 관심은 그가 모집하고 받아들인 교사들을 훈련시키는 일이었다. 그는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에게 엄격한 자기 수련 생활을 따르도록 권유하고, 학교에 모여든 많은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최선책을 토의하기도 하였다. 몇몇 교사들은 그 일이 너무 어렵고 무보수였기 때문에 포기하고 떠났지만, 더 좋은 젊은이들이 그 자리를 메꾸어 주었다.
그러나 자선 학교를 준비하려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국가의 원조도 없었고, 이 어려운 일에 자신을 바칠 자세가 되어 있는 훈련된 교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무지와 불결함과 비천함에 영원히 버려지지 않기 위해서는 이러한 사도직에 헌신하는 수도 단체가 반드시 필요하였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육은 라살에게 있어서 절박한 사도직이었다. 그것은 바로 어린이들에게 학업을 가르치는 학교를 설립하는 문제보다도 종교심을 가르치고 선량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훈련시키는 일이었다. 그의 모든 교육적 체계는 이 목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가까운 성당에서 매일 미사에 참례하고 학기 중에는 정규적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상기하는 시간을 가지며 하루에 두 번씩 교실에서 묵주 기도를 바쳐야 했다. 그리고 하루 30분, 일요일에는 1시간 반 동안 종교 교육 시간이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학과목 안에 종교 과목이 포함되어 있었다. 모든 활동은 신앙 안에서 학생들을 교육하는 목적에 이바지하도록 되어 있었고, 그들을 실천적인 가톨릭 신자로서 교육시키고, 동시에 그들이 벌어서 살 수 있는 직업을 정해 주는 일이었다.
라살의 자기 극복 능력, 행정 능력, 지도력은 그가 마주친 심각한 어려움과 방해를 극복하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그가 제시하는 전망은 처음에는 실망스럽게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 수도회에 대한 필요성은 계속 대두되었다. 이 절박한 필요성에 의하여 라살은 오랜숙고 끝에 1684년 삼위 일체 대축일에 12명의 학교 교사들과 함께 1년 동안 수련기를 가진 다음, 독특한 수도복의 수도회를 창립하게 되었는데, 이름을 '그리스도교 교육 형제회' (Brothers of the Christian Schools)로 정하고 회칙 결정은 경험이 모아질 때까지 연기하기로 하였다. 수도 단체 설립은 그리스도교 교육 사업을 보다 안전한 기초 위에서 실행하려는 라살의 최선책이었다. 수도회의 규모와 상관없이 이 일을 위해 일반 평신도들을 훈련시킬 생각을 한 라살은, 이러한 훈련에 착수하기 위하여 1686년에 최초의 정규 학교를 랭스에 설립하였으며 이어 또 하나를 파리에 설립하였다.
1688년 랭스에서 파리로 수도회 본부를 옮긴 라살은 자신의 수도회가 교구 소속이기를 거부하였다. 이는 그의 사업이 전국적인 성격을 갖고 나아가 더 큰 발전의 가능성을 여는 데 있어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6년 후에 그와 순종의 서약으로 하나로 묶인 12명의 형제들은 라살의 단체에 정주하면서 또 다른 중요한 발걸음을 내닫게 되었다.
기구의 확장 : 1700년부터 칼레(Calais) , 샤르트르(Chartres), 루앙, 리텔(Rethel), 귀즈(Guise)에서 학교 문을 열었으며, 그 후 몇 년도 안되어 수도회는 남부 프랑스, 즉 디종(Dijon), 아비농(Avignon), 망드(Mende), 마르세이유(Marseilles) 등지로 확장되어 나갔다. 수도회는 파리에서 최초의 정규 보통 학교뿐 아니라 성인들을 위한 수업(일명 일요일 학교)을 포함하여 그 영역을 넓혔다. 그리고 칼레에서는 선원들을 위한 학교, 루앙에서는 중류 사회 상인들의 자녀들을 위한 기숙사 학교 등으로 영역을 넓혀 갔다.
이 기숙사 학교는 중요한 혁신이었다. 당시 프랑스의 많은 대학들은 예수회 회원에 의해 지도되고 있었고, 오라토리오회(Oratorians)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등 고전에 기초를 둔 학과목으로 상류 사회의 요구에 응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업에 종사하고 있는 중산 계급의 자녀들을 지향하는 라살의 학교는 고전을 배척하고 보다 실용적인 과목을 제공하였다. 프랑스에서 중산 계급자들의 숫자와 영향력이 급증하게 되었고, 곧 중산층이 나라의 가장 중요한 그룹을 형성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 명확하고도 급증하는 요구들에 직면하게 되는 것은 예정된 일이었다. 사실 루앙의 기숙사 학교는 18세기 수도회에 의해 성공적으로 설립된 다른 많은 학교들의 표준이 되었다.
1705년에 다시 수도회 본부는 파리에서 루앙으로 옮겨졌다. 라살은 그곳에서 비행 청소년들을 위한 또 다른 기관을 설립하였다. 라살과 형제들의 배려로 그들은 점차 유순하게 되었고 적지 않은 경우 진정한 변화도 가져왔다. 다루기 힘든 자녀들을 둔 많은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을 라살에게 데려옴으로써 라살의 업적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평생에 걸쳐 끊임없이 라살을 괴롭혀 온 골칫거리는 당시 프랑스에 널리 퍼져 많은 성직자와 몇몇 주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던 얀센주의였다. 라살은 얀센주의와 함께 행동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의 교황에 대한 순명은 라살과 그의 사업이 이단에 물들지 않도록 잡아주었다. 그는 수도회의 사업을 관리하고 그의 단체를 지도하고, 회칙을 교정하고, 묵상집과 염도(念禱)의 방법' (Method of Mental Prayer)을 쓰면서 루앙에서 말년을 보냈다. 또한 라살은 항상 그의 장상직 은퇴와 그의 사후에 장상직을 맡아 줄 사람에 대해 걱정을 많이 하였는데, 그가 총회를 소집한 1717년에 새 총장으로 바르톨로메오가 선출됨으로써 비로소 그 걱정은 사라졌다.
교리 교육자 : 라살의 교육 방법은 그의 회칙 안에 기초되어 있다. 더 정확하게는 1720년에 출판된 《학교들의 지침서》(The Conduct of Schools)에 기초되어 있다. 라살은 이론가가 아니었다. 그의 교육 방법은 엄격하게 실천적이었는데 그는 어떤 순간의 요구를 만날 때, 그 상황에 가장 잘 적응된 방법을 취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문을 연 학교에서는 언제나 수용력을 느낄 수 있었고, 폭넓은 수업을 배울 수 있었다. 당시 초급 학교에서 '개인적 방법' 을 사용하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에 '동시적 방법' 이나 많은 학생들을 다스리도록 그의 선생들을 훈련하면서 엄격한 규율을 견지하는 수업 방식, 그리고 빈번한 처벌의 필요성을 회피하는 수업 방식을 채택하였던 것이다. 그는 또한 지금까지 단지 읽는 것을 배우는 매개체로만 사용된 라틴어를 버리고, 대신에 모국어를 사용하였다. 20세기에 와서는 기본적인 상식으로 되어버린 이러한 방법에 있어서 그는 선구자였지만, 당시에 그는 이것 때문에 적지 않은 반대에 부딪혀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전에 언급한 평신도 교사의 훈련을 위한 보통 학교와 비행 청소년을 위한 학교, '고전' 보다는 '현대적' 학과목에 치중하는 현대의 고등학교의 형태를 설립하도록 이끈 시대적 요청이었다.
라살은 학과목의 통상적인 세속 과목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종교야말로 진정한 교육의 가장 확실한 기초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젊은이들을 훈련시키는 것과 함께 그들이 맡은 가장 중요한 의무 중의 하나가 종교 교육으로 생각하였고, 그것이 학교를 설립한 첫 번째 이유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교실 안에 종교적 분위기가 유지되는 것을 주안점으로 해서 전체 수업 시간을 편성하였고, 하루의 주된 수업 시간으로 중시하였던 교리 교육 수업 중에 사용되는 교수 방법을 교사들에게 상세히 지시하였다. 또한 기본적인 문제들, 즉 신앙의 신비, 성사 등을 강조하도록 하였으며 어른들에게 강연하듯 길게 설명할 것이 아니라 질문하고 대답하는 방법으로 수업해 나아가도록 지시하였다. 세속 과목 안에서의 종교적 통합을 꾀하기 위해서 라살은, 그리스도인의 행위들을 본받을 수 있는 읽기 교육용 책을 저술하였고, 쓰기 반 학생들에게는 성서 본문을 베껴 쓰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사용하기 위해 기도 소책자를 출판하였고, 미사 동안에 외우는 기도문을 만들었으며, 《그리스도인의 의무들》 (The Duties ofChristian, 1703)이라는 제목으로 3권의 책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이 책은 여러 상황에 처한 학생들과 교사들이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 것이다. 이 책이 250판이나 계속 출판된 것은 수도회 안의 학교에서나 다른 곳에서 얼마나 널리 사용되었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평가 및 의의〕 라살은 1719년 4월 7일 성금요일에, 루앙(Rouen)에서 사망하였다. "모든 루앙 시민들은 그를 애도하며 그를 성인으로 받든다"라고 바르톨로메오 총장은 로마에 있는 그의 회원들에게 편지를 썼다. 라살의 조카이자 4년 후 라살의 전기를 쓴 베네딕도회 회원 엘리 마이여페(Elie Maillefer)는 그를 "인정많고, 관대하고, 성실한 사람" , "마음이 완고한 사람들을 하느님께 데려갈 수 있는 독특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묘사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였다. "본디 의지가 강하고 대담했다. 그리고 신중한 반성 후에 자신의 입장을 취하였고, 하느님의 뜻에 부합되는 것이라고 생각이 들 때는 그것을 결코 놓치지 않았으며, 하느님을 위한 가장 어려운 일을 착수할 준비가 언제나 되어 있었다."
1733년 블랭(J.B. Blain)에 의해 쓰여진 라살의 첫 번째 전기 《그리스도교 교육 수도회 설립자, 세례자 요한 라살의 생애》(La vie de M. Jean-Baptiste de La Salle, instituteur des Frères des Écoles chrétiennes)가 2권으로 발행되었다. 라살은 1900년에 시성되었고, 1950년에 모든 교사들의 주보 성인으로 공포되었다. (⇦ 요한, 드 라살)
※ 참고문헌 W.J. Battersby, 《NCE》 7, pp. 390~392. 〔편찬실〕
라살, 세례자 요한 (1651-1719)
La Salle, Jean-Baptiste 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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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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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