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교회 학자. 축일은 7월 21일. 1559년 7월 22일, 나폴리 왕국의 브린디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율리오 체살 룻소' (Julius Caesar Russo)였다. 신앙심이 깊은 중산층 가정 출신으로 부모가 사망하자 교육을 위해서 베네치아로 갔다가 1575년에 카푸친회의 베네치아 관구에 입회한 후 라우렌시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파도바 대학에서 교회 학문을 공부하였으며, 히브리어 · 그리스어 · 독일어 · 스페인어 · 프랑스어 등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탁월한 설교자 : 1582년 사제로 서품된 뒤 북이탈리아 지방과 알프스 너머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설교가로 활동하였으며 특히 강론 중에 성서를 효과적으로 이용하였다. 그의 저서 《전집》(Opera Omnia) 15권 중에서 11권은 강연과 강론을 담고 있는데, 모두가 성서를 비유적으로 인용한 글들이다. 설교를 준비하기 위하여 쓰여진 라틴어 본문들을 읽어 보면 그가 다양한 언어들을 얼마나 유창하게 사용하였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천주의 모친' 마리아에 대한 자신의 헌신적인 신앙을 전달하려고 애썼으며, 이전에는 거의 들어볼 수 없었던 탁월한 생각을 가지고 성모의 원죄 없는 잉태, 승천, 그 외의 특전들에 대하여 칭송하였다. 완전하고 확고한 마리아론의 흐름을 이룩해 놓은 저서 《마리알레》(Mariale)에 수록된 84개의 설교들은 성서, 전승, 교부, 신학, 성모의 이름을 기리는 전례 등을 인용하고 있다.
사도 외교가 : 1599~1602년과 1606~1613년에는 보헤미아, 오스트리아, 독일의 호전적인 프로테스탄트들과 싸웠다. 이들 나라에 카푸친 수도원을 설립한 라우렌시오 신부는 수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을 가톨릭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황제 루돌프 2세가 그를 수적으로 열세인 군대의 수석 군목으로 임명하자, 그는 말을 타고 앞장서서 십자가를 높이 들고 나가면서 군사들을 격려하였다. 1610년에는 노련한 외교가로서의 수완을 발휘하여 가톨릭 연맹을 결성해 냈으며, 1614년에는 스페인과 사보이 왕가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폴리 총독이었던 오수나(Osuna)의 공작 지론(P. Giron)의 학정에 시달리던 나폴리 사람들을 대표해서 스페인 왕 펠리페 3세를 만나 자신의 사명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오던 중, 자신의 생일인 1619년 7월 22일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사망하였다. 그 후 톨레도의 돈 페드로(Don Pedro de Toledo)는 그의 시신을 스페인으로 옮겨 아스토르가(Astorga) 교구의 빌라프란카(Villafranca)에 있는 성당에 매장하였다.
행정가 : 라우렌시오는 카푸친회의 장상으로서 토스카나(1590~1592), 베네치아(1594~1596), 스위스(1598), 리구리아(1613~1616)의 관구들을 지도하였고 보헤미아와 오스트리아(1599-1602, 1606~1610), 바이에른-티롤(1611~1613)의 총대리를 지내기도 하였다. 1602년 참사회가 그를 3년 임기의 총장으로 선출한 후 카푸친회는 가톨릭 부흥을 위한 중심 세력이 되었고, 34개 관구 9,000여명의 수도자들은 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스페인 등의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성 보나벤투라와 마찬가지로 초기 카푸친회의 엄격함과 사목을 조화시키려고 하였던 그의 영향력은 수도회의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저술가 : 1928~1956년 사이에 베네치아 카푸친회에서 발간한 그의 저서 《전집》의 특징은 완전한 원어 구사능력을 가지고 성서를 풍부하게 인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히브리어 능력이 워낙 탁월하였기 때문에 글레멘스 8세 교황이 그를 유대인들을 위한 설교자로 임명하였을 때, 랍비들은 그를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성서 주석가로서의 그의 능력은 창 세기 앞 부분의 11장을 문학적으로 설명한 저서 《창세기주석》(Explanatio Genesim)에 잘 나타나 있다. 1607년 프라하에서 그는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폴리카르포 라이저(Policarp Leiser)의 도전에 응수하기 위해 그의 가장 방대한 저서이자 교회론적으로 매우 중요한 대저 《루터설》(Lutheranismi hypotyposis)를 완성하였다. 루터교에 대한 근본적이고도 철저한 반박으로 이루어진 이 저술은 루터의 개인적 생애와 가르침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를 담고 있었으나 라이저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출판되지는 못하였다. 정정당당한 논쟁가였던 라우렌시오 신부는 "죽은사람에 대항해서 싸우기를 거부하였고, 그림자와 전쟁하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성서 신학자 · 대중 설교자 · 선교사 · 논쟁가 · 수도회장상 · 외교가로서 교회에 봉사한 라우렌시오 신부는, 교황 베네딕도 15세의 말대로,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반종교 개혁에서 그가 이룩한 업적들로 해서 "교회가 어려움에 처하였을 때 하느님께서 섭리로 일으켜 주신 많은 뛰어난 사람들 중에서 참으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ASS》 11, 1919, p. 268)라고 평가되고 있다. 1783년 5월 23일 교황 비오 6세에 의해 시복되고, 1881년 12월 8일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또한 교황 요한 23세는 1959년 3월 19일 그를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 카푸친회)
※ 참고문헌 이성배 역, 《매일의 성 인》, 성바오로출판사, 1994/ 최정오, 《가톨릭 성인 사전》, 계성출판사, 1987/ T. Mac Vicar,《NCE》 8, pp. 566~567. 〔宋炯萬〕
라우렌시오, 브린디시의 (1559~1619)
Laurentius di Brindisi
글자 크기
3권

브린디시의 라우렌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