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코르데르, 장 밥티스트 앙리(1802~1861)

Lacordaire, Jean Baptiste Hen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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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코르데르 신부.

라코르데르 신부.

프랑스의 설교가. 신학자. 수도명은 도미니코. 부르고뉴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해군 장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1795년 미국 독립 전쟁 당시 로상보(Marechal de Rochambeau) 원수가 지휘한 프랑스 군대에 출병을 지원한 그의 아버지로부터 자유의 정신을 물려받은 것 같다. 어머니는 열심한 가톨릭 신자였다. 나폴레옹 치하 때 디종 시에서 군대식 중고등학교 교육을 받은 라코르데르가 보기에, 학교의 종교 행사는 의무적이고 형식적이었으므로 끝내 그는 신앙을 잃고 말았다. 학창 시절부터 웅변에 탁월한 재주를 보여 어머니의 권고대로 법대에 진학하였다. 1823년에 변호사 시보(試補)로 파리에 왔을 때 사람들은 그를 앞으로 법조계에서 유능한 변호사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그러나 성격이 예민한 그는 쾌락의 추구와 간책을 즐기는 당시 파리 사회에 혐오감을 느끼고, 고민 끝에 어린 시절의 신앙을 다시 찾게 되었다. 그때의 내적 체험을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 체험은 맹목적인 굴복, 즉 인간의이성 작용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성의 빛을 확장하는 것이며, 더 깊이 들어가는 빛과 더 넓은 수평 아래 모든 사물을 보게 하는 것이었다." 이 체험을 계기로 라코르데르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생을 바치고자 신학교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1824년 친구들의 소개로 파리 대주교의 추천을 받아 생 쉴피스(Saint Sulpice)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당시 프랑스 교회는 군주제를 지원하고 교황의 권위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었다. 형식주의를 비난하고 민주주의 사상을 주장한 라코르데르가 사제품을 받을 무렵 교수들은 그의 서품을 연기하였으나, 파리 대주교의 개인적인 중재로 1827년 서품을 받게 되었다. 그 후 교구와의 긴장 관계가 계속되어 부수적인 소임만 맡게 되었다. 1년 동안 성모 방문 수녀회의 지도 신부, 1829년에 앙리 4세 고등학교 보좌 신부의 일을 겸하였다. 뉴욕 주교가 교구사무처장으로 오라는 초대에 망설이던 중 혁명이 일어났다(1830), 그때 마침 <미래>(L' Avenir)라는 신문의 창간에 몽타랑배르(Momtalambert)와 함께 참여해 달라는 라므네(Lamennais)의 부탁을 받고 이를 기꺼이 수락하였다. 라므네의 목표는 교회의 자유를 지원하는 데 있었다. 라코르데르는 이 신문을 통하여 국가로부터 교육의 자율성을 확보하려는운동을 전개하였고, 그 후에도 이 교육 활동에 열성을 다하였다. <미래>지는 종교 자유 옹호 연맹 (Agence générale pour la défense des libertés religieuses)을 결성하고 정부의 인가를 무시하고 가톨릭 학교를 창립하는 일까지 감행하였다. 그 결과 정부측에 의해 소송이 제기되어 사회에 파문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832년 교황청이 라므네의 활동을 금지시켰을 때 라코르데르 신부는 교황청의 지시에 즉시 순종하고 라므네와 결별하였다. 라코르데르 신부는 파리 대주교의 부탁을 받고 최초로 파리 주교좌 성당인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사순절 강연회를 시작하였다. 1835년부터 거의 십년 간이나 계속된 이 강연회는 대성황을 이루었고 특히 지식인들과 젊은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라므네가 교회를 떠난 일로 상심했던 라코르데르 신부는 교회의 전통 안에서 자기의 사도직을 확고히 하기 위해 1836년 5월 로마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라코르데르 신부는 라므네가 쓴 교회 비판 문서 《로마의 사건들》(Les Affaires de Rome)에 대응하기 위해 그곳에서 《교황청에 관한 서간》 (Lettre sur le Saint-Siège)을 썼지만 긴장이 고조되어 있는 상황임을 감안하여 1837년 말까지 출판을 연기하였다. 그 당시 프랑스 교회의 실상을 본 라코르데르 신부는, 교구 신부로서 자기 사명에 충실한다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수도 생활을 지원하게 되었다. 로마에서 그는 프랑스 대혁명 때 해산된 도미니코회를 알게 되어 1839년에 입회하였다. 1841년 귀국한 그는 도미니코회 사제로서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프랑스 국가의 소명' 에 대한 강연을 하면서 활동을 재개하였다. 1843~1849년에는 여러 도미니코회 수도원을 설립하여 수도회의 재건을 꾀하였다. 1848년 2월 혁명 때 제헌 국회에 참여하였고 <새 시대>(L'Ere Nouvelle)라는 신문을 창간하였다. 같은해 5월 15일 강권 발휘 이후로 라코르데르 신부는 정치 활동을 스스로 포기하고 <새 시대> 신문 사장직도 떠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851년 12월 2일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에 반발하여 노트르담 대성당 강연을 거절하였다. 그 이후로 지방에 가서 가톨릭 학교를 창립하고 학생 지도에 헌신하였다. 1861년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으로 선출된 그는 이 일을 개인적인 명예라기보다는 종교 활동의 자유에 기여한 결과로 여겼다.
라코르데르 신부는 세 분야에 큰 영향을 주었다. 첫째, 그는 비록 프랑스 교회 내에서는 몰이해와 의문의 인물이 되었지만, 교황청에 충실하면서 프랑스 교회가 어려운 고비를 극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둘째, 계몽주의의 유산을 물려받아 자유 · 정의 · 과학의 발달에 열심한 동시대인들과 호흡하면서, 모든 가치가 예수에 대한 신앙으로 완성될 수 있음을 강연과 행동으로 증거한 현실 참여 사제라 할 수 있다. 셋째, 베네딕도회의 게랑제(Dom Guéranger) 신부와 마찬가지로 교회 내의 수도 생활을 부활시키는 데에 헌신하였다.
저서로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강론집》 (Conférences de Notre-Dame de Paris)과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편지》 (Lettres à jeunes gens)가 있다. (-> 라므네 ; 도미니코회)
※ 참고문헌  L.C. Sheppard, Lacordaire : A biographical essay, New York, 1964 1 G. Ledos Morceaux choisis et bibliographie de Lacordaire, Paris, 1923/ J. Ridel, Les idées sociales de Lacordaire, Paris, Thèse Sorbonne/ Marc Escolier, Lacordaire ou Dieu et la liberté, Fleurus, 1959.
[Hélène Lebu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