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2월 11일 로마의 라테란 궁전에서 교황청과 이탈리아 왕국 사이의 협정과 재정적 협의 및 종교 협약 등으로 맺어진 조약.
〔배 경〕 1861년 이탈리아의 민족주의자들에 의하여 로마가 새로운 국가의 수도로 선포되고, 1870년 9월 20일 민족주의자들의 군대가 로마와 교황령을 점령함으로써 소위 '로마 문제' 가 발생하였다. 교황들은 이를 부당한 것으로 규정하고 항의하였으나 이탈리아 정부는 양보하지 않았다. 결국 교황청과 이탈리아 왕국이 이 문제로 오랫동안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로마 문제' 를 해결하고 이탈리아의 가톨릭 교회와 종교의 조건에 관한 제반 문제를 '정교 조약' (政教條約, concordatum)으로 보완하기 위하여 라테란 궁전에서 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 조약은 1947년에 이탈리아 공화국 헌법으로 추인되었다.
〔과 정〕 교회와 국가 사이에 대립과 혼란을 가중시키고 상호 불신과 증오와 불화를 심화시켰던 '로마 문제' 를 해결하기 위하여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분쟁의 사유로 드러난 80여 개의 안건들이 검토되기 시작하였는데, 그러던 중 밀라노 대교구장인 레티(Aquille Damiano Ambrgio Retti) 추기경이 1922년 2월 6일 비오 11세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로마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민족주의자는 아니지만 1800년대의 전형적인 애국주의자였던 그는,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바티칸 베드로 대성전 중앙 발코니에서 행한 첫 강복식 때 '로마 문제' 를 해결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1922년 12월 23일 회칙 <우르비 아르카니>(Urbi arcani)에서도 "그리스도의 나라에서의 그리스도의 평화" (Pax Christi in regno Christi)라는 함축적인 뜻으로 교황령 점령에 반대한 비오 10세 교황(1903~1914)과 베네딕도 15세 교황(1914~1922)의 정책을 계승하는 그의 계획을 밝히면서도 '로마 문제' 를 해결하려는 의향을 드러냈다.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도 파시즘의 승리로 권좌에 오른 이후, 전부터 검토되어 온 내용들을 기초로 하여 '로마 문제' 를 해결하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면서 이탈리아 정부도 "교회에 관한 입법 계획"이라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는 국제 사회에서 이탈리아의 위상을 높이고 세력을 확대시키기 위해서 교황과의 화해와 교회와의 관계 개선이 필요함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독자적으로 교회법을 개정시키려는 정부측의 움직임에 대해 비오 11세 교황은 1926년 2월 18일 자필 문서로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 사이에 정당한 교섭과 합법적인 합의가 선행되지 않으면 어떠한 결정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천명하였다(《AAS》 18, 1926, p. 84 이하). 그리고 교황청의 영토와 교회의 혼인성사가 시민법으로 유효함을 승인하는 조건을 제시하였는데, 이탈리아 정부는 이를수용하였다. 이로써 이탈리아 정부는 교섭 계획을 세웠으며, 1926년 5월 14일 로코(Alfredo Rocco) 법무 대신 이 국회 하원에 '로마 문제' 해결을 위한 기본적인 사안들을 재검토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안건들은 1926년 8월 6일 비공개로 시작된 협의에서 교황청으로부터 위임받은 변호사인 파철리(Francesco Pacelli) 교수와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위임을 받은 바로네(Domenico Barone)에 의해 검토되기 시작하였으며, 같은해 10월 4일부터는 공적으로 협상이 진행되었다. 10월 24일 교황청은 이탈리아에서 교회의 법적인 조건을 조정하는 조약의 초안을 포함하여 아주 구체적인 제안들을 승인하였다. 파첼리와 바로네는 11월 24일 조약의 초안을 완성하고 1927년 2월부터 조약의 초안을 다시 검토하였다.
그러나 파시스트를 열렬히 지지하는 젊은이들의 방해공작 등 여러 가지 변화로 초안 검토 작업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비오 11세 교황은 시종일관 종교적인 사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영토에 관한 교황의 통치권을 주장한 데에 반하여 무솔리니의 동기는 다분히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회합은 때때로 결렬될 뻔하였으나 조정을 통해 계속 진행되었고, 이탈리아와 교황청 간의 회합이 수차에 걸쳐 은밀하게 진행된 끝에 1928년 11월에 가서야 조약의 구체적인 내용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이때 전권을 위임받아 마지막 실무 협정에 박차를 가한 사람이 바로 교황청의 국무성 장관 가스파리(P. Gaspari) 추기경과 이탈리아 정부의 무솔리니 수상이었다. 1929년 2월 7일 가스파리 추기경은 교황청 주재 외교관들에게 조약 체결이 임박했음을 발표하였고, 2월 11일 라테란 궁전에서 가스파리 추기경과 무솔리니가 전문(前文)과 27개 항목 및 4개의 부칙으로 구성된 협정(trattato)과 재정 협약, 그리고 45개 조항의 정교 협약 등 3가지를 포함하고 있는 조약에 서명하였다. 이 조약으로 바티칸시(市)라는 새로운 국가에 대한 교황의 완전한 통치권이 회복되었다.
〔내 용〕 조약 제1조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로마 가톨릭 종교만을 국교로 한다"는 1848년 3월 4일 공포된 이탈리아 왕국의 기본법에서 용인된 원칙을 재확인한 것이고, 제2조에서는 본래부터 국제 사회에서 인정된 교황청의 주권을 이탈리아 정부가 승인한 것이다. 제3~8조와 26조는 교황청이 절대적인 권한과 최고의 사법권을 행사하는 영토의 절대적인 소유권을 보유하며, 이탈리아 정부는 바티칸 시국에 대하여 어떠한 간섭도 행사할 수 없다. 그리고 교황은 신성 불가침의 사명을 지닌 신분이므로 교황을 모독하는 죄는 국왕에게 범하는 것과 같은 비중의 죄로 이탈리아 법에 따라 처벌한다. 또한, 1871년 5월 13일의 '보장법' 과 라테란 조약과 반대되는 어떠한 규정도 폐지함을 선언하였다. 제9~11조와 17조는 바티칸 시국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은 교황청의 주권에 예속되며 비록 바티칸 시민이 아닐지라도 조약의 고위협상자들이 서로 동의하는 명부에 명시되는 교회의 고위관리들과 교황 궁정에 속한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이탈리아의 군 복무로부터 면제된다. 또 법인 취득에 대한 이탈리아 법규정을 제외하고는 가톨릭 교회의 중앙기관은 이탈리아 국가로부터 어떠한 경우에도 간섭을 받지 않는다고 하였다. 제12 · 19조에서 이탈리아는 국제법의 일반적인 규정에 따라 교황청의 외교 사절 파견과 제3국과의 외교권을 인정하였다. 제13~16조는 교황청 소유의 부동산은 징발과 공물(貢物)로부터 면제됨을 명시하였고, 20~21조는 교황 선거와 공의회 개최에 관한 교황청의 권리와 자유, 제23조는 민법 시행과 교회 당국의 선고에 관하여 규정하였다.
이 조약으로 이탈리아는 바티칸 시국이 일정한 영토와 국민 및 주권을 가진 독립 국가임을 인정하였으며, 바티칸 시국은 주권 국가답게 화폐와 우표를 발행하고 국민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외교 사절을 파견하고 받아들이는 등 국제 관계에서도 교황청이 스스로 절대 독립의 주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탈리아는 다른 종교에 대하여 제재를 가하지는 않지만, 가톨릭을 이탈리아의 국교로 인정하였으며, 108.7에이커(133,070여 평)의 이 작은 국가에 이탈리아의 상수도 시설과 철도와의 연결에 합의하고, 방송국과 우체국을 설치하여 외부와 전보 · 전화 등 우편 시설을 연결시키도록 협정하는 등 이탈리아와 바티칸 시국 사이의 여러 가지 세부적 관계 사항들에 대해서도 합의하였다. 교회의 주요 법인 조직체는 정부의 어떤 간섭도 받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교황청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국제법상 치외 법권이 인정된 건물들로는 성 요한 라테란 대성전과 그 부속 건물, 성 마리아 대성전과 성 바오로 대성전, 카스텔 간돌포(Castel Gandolfo)의 교황 별장 및 로마 내외의 몇몇 성당들, 그리고 기타 건물, 예를 들어 교황청 상서원, 신앙 교리성, 인류 복음화성 등 몇몇 성(省) 건물들이 이에 해당되었다. 그리고 바티칸 시국 영토 밖의 로마시에 거주지를 두고 있는 바티칸 시국에 파견된 각국 대사관 건물들도 국제법에 따른 치외 법권적인 지위가 인정되도록 합의하였다. 또 로마의 그레고리오 대학교, 성서 대학, 우르바노 대학교, 동방 교회 연구소, 러시아 신학교 등의 건물도 교황의 사전 양해 없이는 이탈리아 국가가 징발할 수 없도록 합의하였다. 반면 교황청은 로마를 수도로 한 사보이(Savoy) 왕조하의 이탈리아 왕국을 정식으로 인정하였으며 양편은 모두 이 라테란 조약에 반대되는 이전의 법을 폐기하는 데 합의하였다.
재정적 타결 : 이탈리아 정부는 조약의 중요 부분을 이루는 특별한 규약에 의해 교황령과 그 안의 소유물의 손실에 대하여 보상하기로 하여 현금 7억 5,000만 리라와 1억 리라에 상당하는 정부의 유통성 있는 채권의 5%로 책정했는데 1934년에 이를 3.50%로 변경하였다.
종교 협약 : 전문과 45개 항목으로 구성되었는데 조약의 기본 정신을 구현하는 데 필요한 정교 조약은 이탈리아에서의 종교와 가톨릭 교회의 조건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즉 ① 정교 조약의 정신에 따라 교회의 영적 권한인 자유로운 성사 집행과 공적인 신앙 행위의 보장, ② 교회 당국자와 교회 법인에 대한 각별히 호의적인 대우(3, 4, 6~8, 29조), ③ 특히 이탈리아 법에서 결혼과 교육에 있어서 교회법과 이탈리아 국내법과의 상관 관계를 규정하였다.
이 종교 협약의 규범에 따라 이탈리아 정부는 가톨릭 교회에 자유로운 영적 지도력 및 교회 업무에 관한 재치권과 신앙 행위를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보장하였다. 그리고 정부는 신성한 로마시에서 그 성격에 위배되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을 것도 약속하였는데 제1조에서는 '영원한 도시' 의 거룩한 특성을 보존하는데 적극 협력할 것을 명시하였다. 교황청은 주교 후보자 명단을 정부에 제출한 후에 이탈리아에서 대주교와 주교를 선발할 수 있지만 새로 임명된 주교는 국가에 대해 충성을 서약해야 한다는 데 합의하였다. 이탈리아의 성직은 이탈리아의 시민에게만 주어질 수 있으며 신부와 수도자는 병역과 배심원의 의무에서 면제된다(3~15조). 이탈리아는 혼인성사에 공적 효력을 부여하며 공립 국민학교와 신부, 수사, 평신도에 의해 인가된 중학교에서 종교 교육을 실시하도록 허가했다. 가톨릭 활동 보조 단체와 같이 종교 단체나 자선 사업체들은 국가의 인가를 받아야 하며, 수사나 성직자들의 정당 가입은 금지되었다.
〔결과와 의의〕 라테란 조약을 통해 이탈리아와 교황청이 대립한 지 60여 년이 지나도록 계속 이탈리아에 불명예가 되어 오던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다. 교황은 "이탈리아는 하느님에게 다시 돌아왔고 하느님도 이탈리아에 되돌아왔다" 고 말할 정도로 이 조약의 결과에 대해 만족을 표시하였다. 이로써 '로마 문제' 이후 자발적으로 바티칸에 포로가 되었던 교황이 해방되었다. 법적인 효력이 발효된 비준 각서가 6월 7일 양 당사국간에 교환되었다. 이탈리아 정부는 바티칸 시국에 대사를 파견하였는데 이때부터 이탈리아 주재 교황청 대사 파견이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1929년 12월 5일 이탈리아 왕국의 최고위 당국자들이 처음으로 바티칸 시국을 방문하고 교황을 알현하였다. 라테란 조약의 법적인 의의로는, 첫째 국제적으로 서로간의 법적인 지위를 인정하여 이를 구체화하는 국내법이 제정되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제3국의 간섭이나 개입 없이 오로지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 사이의 자유로운 합의에 의하여 체결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조약은 교황청이 이탈리아 교회의 최고 기관으로서만이 아니라 전세계 가톨릭 교회의 최고 중심이라는 입장에서 체결되었다는 점이다.
라테란 조약은 파시스트당과 왕국이 물러나고 1944년 이탈리아가 공화국이 된 후에도 새로운 헌법에 의해 채택되었는데 이것은 기독교 민주당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 및 사회주의자들의 지지에도 힘입은 것이었다. 1985년 양국간의 합의로 로마 가톨릭 교회가 이탈리아의 국교로서 존속시키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조약의 일부내용이 갱신되었다. 이로써 공립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가르치던 종교 교육이 중단되었고 각자의 선택에 따라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 로마 문제 ; 비오 11세 ; 정교 조약 ; 교회와국가 ; 가스파리, 베드로)
※ 참고문헌 《AAS》 21, 1929, Pp. 209~295/ A. Parlamentari, Assemblea costituente Camera dei Deputati e Senato della Repubblica, V~Ⅶ , legislatura a cuura di L. Elia e G. Guarino, 1 e2, Milano, 1974/ 요트 마르크스, 김창수 편역, 《가톨릭 교회사》 下, 가톨릭출판사, 1975/ K.Bihlmeyer · H. Tiichle, Kirchengeschichte, Ⅲ , ed. English by V.E. Miills · F.J. Muller, Newman Press, 1966/ Del Giudice V., La Questione romana e irapporti tra Stato e Chiesafino alla Conciliazione, Roma, 1947/ H.Edin ed.,History ofthe Church, Ⅹ, trans. by A. Biggs, New York, 1981/ Fernando Della Rocca, I Papi della Questione romana(da Pio Ⅸ~a Pio XI ), Roma, 1981/ A. Franzen, 최석우 역, 《교회사》, 분도출판사, 1982/ A. Fliche · V. Martin, Storia della Chiesa, XXIII , ed. italiana, Ed. Paoline, 1991/ G.Galloni, La revisione del Concordato, Il domani d'talia, 8, 1975/ E.Graziani, La riforma del Concordato lateranense, Problemi e prospettive, Temi romana 10~11, 1969/ F.Modugno, Sulla psizione costituzionale dei patti lateranensi, Studi per la revisione del Concordato, Padova, 1967/ F.Pacelli, Il diario Concliazione, ed. da M. Maccarrone, Vaticano, 1959/ P. Paschini V. Monachino(a cura), 1 Papi nella Storia, II , Roma, 1961/L.Sartori, I Concordati alla luce della ecclesiologia del Vaticano II ,Humaritas, 32, 1977/P. Scoppola, Chiesa e Stato nella Storia d'ltalia, Bari, 1967/ -, La Chiesa e ilfascismo, Bari, 1971. 〔金喜中〕
((Reference end
라테란 조약
條約
〔라〕Pactum Lateranense · 〔영〕Lateran Treaty
글자 크기
3권

라테란 조약에 서명하는 교황청 국무성 장관 가스파리 추기경과 이탈리아 정부의 무솔리니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