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 문학

文學

〔라〕litterae Latinae · 〔영〕Latin liter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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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질리우스의 <애네이스> 내용을 표현한 삽화(바티칸 도서관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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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질리우스의 <애네이스> 내용을 표현한 삽화(바티칸 도서관 소장) .

그리스 문학과 더불어 서구 문예의 뿌리를 이루는 문학. 라틴 문학은 라틴어의 확산과 분포에 따라서, 또 그 문학 주체의 변천에 따라서 다채로운 역사를 거쳐왔다. 라틴 문학은 기원전 2세기 로마인들이 지중해 연안을 정복하여 로마 제국을 형성하면서 라틴어가 제국의 언어로 통용되었고 헬레니즘을 매개로 전수되는 그리스 문학을 모방하는 데서 시작하여 치체로(M.T. Cicero, 기원전 106~43)와 베르질리우스(M.P. Vergilius, 기원전 70~서기 19)에 이르러서는, 서구 문학사의 한 영봉을 이룩해 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그리스도교가 제국의 이념적 계승자로 서구 사회를 유지하는 동안에도, 로마 고전 문학은 유럽 그리스도인들의 의식과 창작에 깊숙이 지배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고전의 감상에 그치지 않고 성서와 신앙에서 영감을 받아, 비록 예술성과 창작성에서는 고전에 크게 미치지 못하지만, 라틴 문학을 새로운 차원에서 부흥시켜 중세에 전수해 주었다.
I . 로마 문학의 역사
〔초창기(기원전 241~81)〕 상고 시대는 로마인들이 소박한 농경 생활을 영위하던 시대로 예술과 과학 및 문학에 눈뜨기 이전이다. 정치적으로는 라시움(Latum)을 점령해 가고 이탈리아 반도를 장악하고, 곧 이어서 지중해 서안을 장악하기 위하여 카르타고와 첫 번째 충돌에서 승리하고(기원전 241) 시칠리를 정복하던 무렵이다. 또 국내적으로는 귀족과 평민이 권리 분점을 시도하고 있었다. 문화적으로는 로마인들이 '마냐 그라시아' (Magna Gratia)라고 부르던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의 그리스인들과 교류를 시작하면서도 문화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이전 단계이다. 산문으로는 '12동판법' (Leges XII tabularum, 기원전 450경)이나 포룸 로마눔(Forum Romanum)의 석비(lapis niger), 그릇(dueno) 스키피오 가(家) 비문 등에 라틴어의 가장 원시적이고 조야한 문장들이 금석문이나 후대의 인용으로 전한다. 시문은 종교시의 단편이 전해 오고 있다.
군사상으로는 카르타고와 사활을 건 투쟁(제2차 카르타고 전쟁, 기원전 218~202)에서 승리하여 지중해 연안을 전부 점령하던 시대로(그리스 점령 및 카르타고 멸망, 기원전 146 ; 유구르타 전쟁, 기원전 118~106), 이탈리아 반도에서도 로마에 저항하던 동맹 세력을 완전히 평정하여(동맹전쟁, 기원전 90~88) 로마 제국이 확립되던 시대가 뒤따른다. 정치적으로는 귀족 세력과 민주 세력의 갈등이 절정에 달하여 그락쿠스 형제의 개혁 시도와 좌절(기원전 133~122), 마리우스(Marius)와 술라(Sulla)의 내전에서 귀족파의 승리(기원전 82)와 대학살로 이어지는 공화정 마지막 한 세기가 소용돌이 속에 펼쳐진다.
이 시대는 그리스 문화가 도입되면서 문화 · 정치 · 문학에 있어서 그리스 문화를 철저하게 모방하던 단계에 해당한다. 그리스풍의 희극과 비극은 물론 극시 · 소규모의 서사시 · 풍자시가 나타나고 산문에서는 역사 서술이 시작된다. 극시는 초기의 모방 시도(Livius Andronicus, Gnaeus Nevius)에 뒤이어 본격적인 희극 시인인 플라우투스(M.Plautus, 기원전 254~184)와 테렌시우스(A. Terentius, 기원전 195~159)가 로마인의 정서를 희극화하여 로마 극시를 완성시켰다. 정신적으로는 정치적 · 군사적으로 정복당한 그리스와 동방의 문화와 더불어 종교들이 유입되면서, 비록 카토(Cato)의 전통 옹호가 일시 득세하였지만, 상류 사회에 그리스 교육 · 이혼 등이 유행하고 신들을 섬기는 순박한 경건심의 약화가 초래되었다.
〔로마 문학의 황금기(기원전 81 ~서기 14)〕 라틴 문학의 제1차 융성은 소위 '치체로 황금기' (기원전 81~31)로서 치체로가 최초의 웅변으로 정치계에 등단하던 시기부터 악티움 해전(기원전 31)까지를 일컫는다. 국내의계층 투쟁, 즉 귀족당과 평민당의 정치적 갈등이 내란으로 폭발한다. 문화적으로는 모든 문학 영역에서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가 융합되던 시기여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라틴 문학의 산문이 절정에 이른다. 치체로에게서 웅변(57편의 연설)을 중심으로 하여 수사학이 고도로 발달하였고 그의 서간 문학도 라틴 문학의 정수로 꼽힌다. 역사 서술은 체사르(C.I. Caesar), 살루스티우스(C.C.Sallustius), 네포스(C.Nepos)에게서 절정에이른다.
이 무렵의 라틴 시문학에는 루크레시우스(C.T. Lucretius, 기원전 98~55)의 철학시와 카툴루스(C.V. Catullus, 기원전 84~54)의 서정시가 뛰어났다. 상류층의 도덕적 타락(이혼, 스캔들, 사치, 동방 종교의 도입)이 가속화할수록 이를 제어하려는 각종의 법제가 갖추어지면서 또한 정치적 · 행정적 사법 제재가 발생하던 시기이다.
이어서 '아우구스투스 황금기' (기원전 31~서기 14)를 맞는데 악티움 해전으로 옥타비아누스가 통일 천하를 이룰 때부터 그의 사망까지를 가리킨다.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가 패배함으로써 기원전 509년 이래 우여곡절 속에 존속하던 공화정은 사라지고 제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로마 평화주의(Pax Romana)라는 율리우스 체사르의 정치 플랜이 로마 제국 전역에 시행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로마인들에게는 로마 제국에 대한 영웅적인 자아 의식이 형성되어 서사시 형식으로 문학에 반영되었다. 아울러 국가와 유력자들은 문학 활동을 보호하고 장려하는 사업을 시작하였다. 로마 문학의 이 두 번째 전성기에 라틴 시문학은 절정에 도달하였다. 베르질리우스는 에피쿠로스 사상을 담은 <목가집>(Eclogae)과 <농경시>(Georgica)에 이어서 스토아 사상을 시화한 서사시 <애네이스>(Aeneis)로 라틴 문학의 정수를 창조해 냈다. 풍자시로는 호라시우스(F.Q. Horatius, 기원전 65~서기 8), 서정시로는 티불루스(A. Tibullus, 기원전 55/48~19), 프로페르시우스(S.Propertius, 기원전 58/54~16)가 훌륭한 작품을 남겼다. 일인 통치자의 전횡으로 다스려지던 시대여서 법정이나 전쟁상의 연설문 등은 사라지고 산문도 대작이 드물다. 역사가 리비우스(T. Livius, 기원전 59~서기 17)의 《로마사》(Ab urbe condita libri)가 남아 있다. 사회 생활의 도덕적 쇄락이 보편화한 가운데 아우구스투스는 여러 가지 제도로 도덕적 쇄신을 도모하여 가정 · 종교 · 농경 생활에 대한 의식을 다시 일깨우려고 노력하였다.
〔로마 문학의 은성기(14~117)〕 제국 정치는 문학 활동의 자유와 창작을 크게 위축시켜 문학의 쇠퇴가 나타났다. 산문이든 시문학이든 전제자들에 대한 칭송과 아첨을 반영하거나 지배층의 퇴폐 향락을 조롱하는 풍조를 띠며, 뜻 있는 사람들은 스토아적 인종(忍從)이나 에피쿠로스적 현실 도피를 추구하는 글을 썼다.
시문학은 서사시가 주종을 이루고, 사회상을 반영하는 풍자시가 유행하였다. 산문에서는 세네카의 철학적 위안서와 비극 작품, 타치투스(C. Tacitus)의 역사서(Dialogus de oratoribus De vita et moribus Iulii Agricolae, Germania, Historiae, Annales), 플리니우스(C.S. Plinius)의 자연학 서적(Naturalis historia), 귄틸리아누스(M.F. Quintillianus)의 <웅변 교본> (Institutiones oratoriae) 등이 문학적 평가를 받고 있다.
II . 고전 라틴 문학가들과 그리스도교
고전 작가들은 그 문장력과 작품성에 따라서, 라틴어를 계승한 그리스도교 세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 문학가인 치체로, 베르질리우스, 오비디우스, 세네카의 경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치체로〕 로마 최고의 웅변가이자 문장가요 수사학자였으며, 정치가요 법률가였다. 평화를 애호하였고 정치에 있어서는 귀족당을 편들어 그 창시자가 된 보수파였으며, 공화정 말기의 내란과 폭력에 깊이 말려들었다. 그의 대부분의 저서들과 서간집은 보존되어 후대 라틴 산문학(散文學)에 결정적 영향과 최고의 권위를 갖고 있다. 초대 그리스도인 문필가들은 이교도 학원에서 문학 수업을 받았으므로 산문에 있어서는 반드시 치체로가 최고의 귀감이 되었다. 치체로가 그리스-로마 철학과 종교를 취급하는 태도 역시 그들의 규범이 되다시피 하였고 그리스도교 호교론자들은 흔히 치체로를 전거(典據)로하여 종교에 관한 보편적이고 관용적인 태도를 로마 지성인들에게 요구하였다.
암브로시오의 《의무론》(De officiis)은 치체로의 《의무론》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예로니모의 서간들도 치체로의 문장에 친숙함을 여실히 보여 준다. 치체로의 《우정론》(Hortensius)은 청년 아우구스티노의 생애를 바꾸어 진리를 찾아서 매진하게 만들었고, 아우구스티노가 《신국론》(De civitate Dei)에서 개진하는 호교론도 여러 점에서 치체로와 바로(M.T. Varro)를 전거로 하고 있다. 나아가 《그리스도교 교양》(De doctrina Christiana)에 나오는 그리스도교 수사학은 치체로의 수사학과 교육학을 토대로 삼고 있을 정도이다. 보에시우스(A.M.S. Boethius) 역시 그리스도 신자로서 단연 치체로의 문장을 따르고 있다.
교부 시대와는 달리 중세에 와서는 치체로의 영향과 모방이 좁혀져서 그의 몇몇 철학서에 대한 지식이 거론 · 인용되고 있으며, 수사학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었다(De inventione, Auctor ad Herennium에 국한). 다만 르네상스가 되면서 치체로의 문장과 모든 저서에 대한 발견과 심도있는 연구는 단연 그를 라틴어 산문의 스승이요 귀감으로 다시 확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세기 말에는 교황 레오 13세도 교황청 공문서의 작성에 있어 치체로의 문장을 규범으로 천명하였고 이후의 교황 서간과 회칙들은 거의 치체로의 문장과 수사학적 기교를 현저하게 반영하고 있다.
〔베르질리우스〕 로마 최고의 시인이자 그리스도교 교육과 문화에 커다란 자취를 남긴 인물로서 <목가집>, <농경시>, 서사시<애네이스> 등의 작품이 있다. <애네이스>는 로마의 건국을 신화화한 서사시로 로마사의 웅대함을 노래한 것인데 저변에는 평화, 인간의 본분,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인류의 운명에 관한 심원한 철학적 · 종교적 통찰이 흐르고 있다고 평가되어 왔다. 그의 작품은 곧 로마 문법 및 수사학 학교의 교과서로 채택되었고 고 · 중세를 막론하고 라틴어 교육의 가장 중요한 교과서 역할을 해왔다. 베르질리우스 이후의 라틴 시인들과 문장가 들은 한결같이 그의 사상과 소재 및 언어와 운율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Lucanus, Statius, Silvus Italicus, Ausonius, Claudianus) 이들은 그의 소재를 서사시나 서정시 혹은 풍자시나 교훈시로 발전시킨 작품들을 많이 내놓았다.
그리스도교 저술가들 역시 로마 제국의 라틴어 학교에서 양성받은 만큼 베르질리우스의 영향을 깊이 받았으며 특히 그의 <목가집> 제4편은 새로운 태평 성대를 가져올 아기의 탄생을 읊은 노래로 예수의 탄생을 예감한 이교도 세계의 영감으로 간주되어 왔다.
초대 교부들은 한결같이 베르질리우스의 예찬자들이었다. 프루덴시오(Prudentius)는 서슴없이 그를 "그리스도 신자 베르질리우스" 라고 불렀다. 풀젠시오(F.P. Fulgentius)는 그의 작품들을 은유로 해석함으로써 그를 참다운 예지의 원천이요 상징으로 승화시켰다. 베르질리우스의 작품들과 세르비우스(Servius) 등에 의한 주석서는 중세가 고대로부터 전수받은 가장 귀중한 유산이 되었다. 중세 각급 학교에서 <애네이스>는 가장 귀중한 이교도 문헌이 되었고 사람들은 라틴어 6각운시(六脚韻詩)를 쓰는 표준으로 이 서사시를 익혔다.
특히 8~9세기는 '베르질리우스의 시대' (Aetas Vergiliana : L. Traube)라고 불릴 정도로, 대이동으로 유럽을 석권한 민족들이 암흑기로부터 빠져 나오는 데 정서적 · 문화적으로 자신을 순치(馴致)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11~12세기가 오비디우스(NP.Ovidius, 기원전 43~서기 17)의 시대라고 하지만 베르질리우스는 적어도 학교에서는 단연 첫 자리를 차지한 문인이었다. 단테가 그를 인간 예지의 상징으로 간주하여 《신곡》에서 지옥과 연옥을 여행하는 길잡이로 삼음으로써 베르질리우스에 대한 중세인들의 생각을 가장 잘 드러냈다. 르네상스는 다시 한번 베르질리우스 연구와 영향을 꽃피우게 한다.
〔오비디우스〕 로마의 가장 유명한 시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중세와 르네상스의 그리스도교 및 일반 시인들에게 베르질리우스 다음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운율, 시상, 시구(詩句)에 있어서 가장 탁월한 라틴 시인이며, 고 · 중세 라틴어 시인들은 베르질리우스의 시 세계를 동경하면서도 오비디우스의 언어를 빌려 시를 지었다고 평할 정도이다. 그의 장편시 <변신>(變身, Metamorphoss)은로마 시대부터 그리스와 로마 신화 및 전설을 시화(詩化)하고 연구하는 표준이 되었으며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회화, 시, 설교의 자료로 풍성하게 인용되어왔다. 또한 <사랑의 예술>(Ars amatoriae)은 에로스 체험을 과감하게 시상화한 라틴 문학의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다. 아우구스티노는 이 연애시를 읽고서 "아직 연애를 하지는 않았지만 연애하기를 사랑하게 되었다" 라고 고백할 정도였다. 오비디우스 이전에는 사랑은 사람을 파멸시키는 방황이요 광기요 마음의 병고로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오비디우스는 사랑은 당사자 두 사람의 깊은 상호 체험임을 직관하고 이를 관찰하여 노래로 읊었다. 그 작품의 주인공들은 후일 라틴 문학에서 연애하는 연인의 전형(典型)으로 꼽히게 된다.
12~13세기는 오비디우스의 영향이 가장 강렬하였던 시대로서(Aetas Ovidiana I. Traube), , 유랑 시인들이 특히 그를 귀감으로 삼아 시작(詩作)을 하였다. 중세기 동안 오비디우스의 시는 종교적이고 정신적 사랑의 은유(allegoria)로 해석되어 도덕적 권위를 갖는 설교로 풀이되기도 하였다. 신비가들은 <아가>와 더불어 오비디우스의 연애시를 신비적으로 해석하여 인용하였고 중세의 사회적 유행으로 통하던 궁중 연애는 오비디우스 시 세계를 모델로 삼았다. 쵸서, 단테, 보카치오의 시 세계는 늘 오비디우스 주위를 맴돌고 있다.
〔세네카〕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에게 막강한 영향을 끼친 로마 스토아 철학자이자 문장가이다. 사도 바오로는 아카이아 총독으로 와 있던 세네카(L.A. Seneca, 기원전 4~서기 65)의 아우 갈리오(사도 18, 12-17)와 대면하기도하였다. 세네카의 글은 운문과 시문을 막론하고 탁월한 경지의 도덕적 · 종교적 수준에 도달해 있었으므로 그리스도교 작가들은 그를 도덕 교육의 귀감으로 삼았다. 4 세기의 인물 예로니모는 바오로와 세네카 사이에 오갔다는 서간(위경)을 사실로 믿고 그를 탁월한 스승으로 받들었다. 중세기의 인물들(Petus Venerabilis, Petrus Abaelardus)도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 1200년대부터 1500년대 사이에 세네카 전집에 바오로와 세네카 사이에 오갔다는 서간(세네카가 썼다는 편지 8통과 바오로가 썼다는 서간 6통)이 실리는 경우가 300편을 넘는 것을 보아도 세네카의 위치를 알 만하다. 그러나 세네카의 사상과 그리스도교 사상의 유사성은 극히 피상적인 것이다.
초대 교부 시대에는 세네카의 영향이 미미하여 테르툴리아노는 그를 몇 차례 언급은 하였지만 피상적이다. 치프리아노와 미누치오 펠릭스(Minucius Felix)는 특히 세네카의 《섭리론》(De providentia)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음을보여 준다. 락탄시오는 15회나 세네카를 인용하였는데 그리스도교에 매우 접근했던 인물로 칭송하고 있다. 예로니모는 세네카가 그리스도인이었다고 주장하면서 그의 결혼관을 자주 인용하였다(세네카의 유실된 책자). 암브로시오나 아우구스티노는 인용이 적은 데 비해서 마르티노(B. Martinus)는 세네카의 글을 베껴 쓸 만큼 그를 신뢰하고 있었다.
스토아 사상이 유행하지 않은 시기에도 세네카의 작품들은 수도회에서 널리 읽혀졌는데, 특히 시토회(Cistercenses)에서 더욱 그러하였다. 다수의 중세 저술가들은 세네카를 교부들보다 더 많이 인용하는가 하면 심지어 복음서보다 훌륭하다고 감탄하는 일도 있었다. 중세 전체를 통해서 세네카는 이교도 문화에서 윤리 도덕을 이끌어 내는 전거로 통하였으며, 철학적 논거와 아리스토텔레스를 전거로 하는 중세 윤리와 대조되는 인물로 부각되었다. 중세기에 세네카만큼 선집(florilegia)이 많이 간행된 문장가도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르네상스에 신스토아 사상이 등장하면서 세네카는 단연 사상적 중추로 부각되어 16세기 세네카 작품의 번역, 선집, 주석서가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교회 저술가들마저 세네카를 무척 많이 인용하였다. 교회 학자들은 세네카를 인용하여 설교와 저술에 차용하고 그의 비극 작품들을 그리스도교 배경으로 번안하기도 하여 스페인 영성에 그가 끼친 영향력을 잘 보여 주고 있다. 17세기에 와서도 스토아 사상을 인용하는 영성 대가(Justus Lipsius, Pierre Charron, Sebastian of Senlis)들은 한결같이 세네카를 가장 권위 있는 전거로 부각시킨다.
Ⅲ . 그리스도교 라틴 문학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즉위(117)하면서부터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해(476)까지는 라틴 문학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하는 시기라고 하겠다. 속세적 로마 문학이 급속히 쇠퇴하고 그리스도교 라틴 문학이 그 위치를 대신하는 시대이다. 카라칼라 황제가 칙령(Constitutio Antoniniana, 212)으로 제국의 모든 자유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허락하면서부터 문화와 문학에 있어서도 보편주의가 강력하게 대두되었고, 아프리카 · 갈리아 · 스페인에서 그곳 출신의 문학인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그리스도교 문학은 아프리카 지역에 힘입은 바가 특히 크다.
〔성서와 라틴어〕 박해 중인 2세기 중엽부터 아프리카 교회에서 성서들이 라틴어로 번역되기 시작하여 곧 이탈리아 반도에서도 번역본이 나오게 되었다. 셈족의 어휘와 표현 방식이 상당히 많아 구약의 라틴어 번역은 생소한 어감을 주었으며 신약의 번역문도 이에 못지않았다. 그 특이하고 거친 어조가 구어에 가까웠고 고전 문학의 품격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였는데 이 번역문들이 그리스 도교 공동체들과 그 문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성서 번역 언어의 서민체인 불가타(vulgata)는 초기 그리스도교 라틴어의 근본 성격을 반영하는 것으로 성서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통상적 라틴어를 구사하는 서민 출신들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이 당초부터 당대 상류층의 전통적 고전 라틴어보다도 서민 언어의 자유스러움과 창의성에 우선을 두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사실 서민 라틴어를 구사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이념을 표현하는 데 유리한 새로운 어휘를 도입하는 편익을 주었고 이미 존재하던 어휘들도 그리스도교 영역에서는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되었다.
예로니모(Hieronymus, 347~419)는 성서의 고대 번역본을 수정하면서 아주 오래된 요소들을 삭제하기도 하였으나, 그 같은 어휘로 성서의 의미 전달이 지장을 받게 될 경우에 한하였다. 초세기부터 통용되던 성서 라틴어를 그는 4세기에 당도해 있던 그리스도교 라틴어로 훌륭하게 가다듬었다. 그렇다고 본래의 고유한 문체를 바꾸지는 않았다. 아우구스티노의 생각대로 예로니모는 자기가 새로 번역하는 구약본은 그리스도교 고유의 라틴어 문체에 따라서 작업하였다.
그러나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면서 교회는 박해의 긴장이 없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입교하면서 이전의 고립을 떨쳐 버리고 새로운 양상과 처지에서 세계를 대하게 되었다. 문학에 있어서도 전혀 새로운 입장을 취하여 고전 라틴어와 이교도 문학에 대해서 초세기의 완고한 배타적 태도를 청산하고 아주 유연한 입장을 지니게 되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한 집단의 고유한 언어이던 그리스도교 라틴어가 그리스도교를 생활 이념으로 받아들인 세계에 의사 소통의 고유한 수단으로 자리잡을 기회를 얻게 되었다. 힐라리오,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는 그 동안 그리스계의 사상 모형에 덧붙여서-철학적 언어와 표현을 세련시키고, 당대에 풍미하던 철학 사조 특히 신플라톤 철학의 용어와 어법을 과감히 수용하는 여유를 보였다. 힐라리오는 교양 있고 품격 있는 문장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도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표명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그는 전례 라틴어를 성스러운 언어로 다듬어 갔으며 그것이 4세기 후반부에는 그리스도교 세계 전체에 본격적으로 정착되었다.
그 뒤 서구 그리스도교가 발전하고 로마 제국이 쇠퇴하면서-더군다나 황제는 밀라노에 상주하였다-교황이 군림하는 로마는 은연중에 교회 행정의 본산이 되었다. 교황청은 점차 행정 당국 또는 속권을 대행하는 기구로 발전하였고, 그런 가운데 교황청의 언어와 문서들은 로마 제국의 황실과 관공서에서 나오던 공문서와 법령문 형태를 모방하면서 그리스도교 일상 언어와 다른 형식과 어법을 띠게 되었다. 특이한 전문 용어를 구사하는 점에서만 달랐던 것이 아니라, 인위적이고 사법적인 어조를 띠었고 로마 공문서 문체에 쓰이던 조항과 단서가 구분되는 형태를 갖추었다. 이것은 르네상스 시대 때 한 단계 높은 수사학적 세련을 거쳐서 교회법전에 채택되었고 현대에까지 공문서에 고스란히 전수되고 있다.
〔교부 시대의 시문학〕 우선 범위가 좁고 작품도 드문 그리스도교 라틴어 시문학(詩文學)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교 시문학의 창시자로 꼽히는 3세 기경의 콤모디아노(Commmodianus)는 스페인 출신으로 이합체(離合體, acrostichides) 형식의 제목으로 된 교훈시와 호교시의 시집을 남겼는데, 고전의 우아한 형식으로 성서 주제와 그리스도교 교리와 도덕적 훈계를 담아내는 본보기를 보였다. 교황 다마소 1세(Damasus I , 366~384)는 고전의 단구시(epigrmmata)를 그리스도교 영감으로 처리하여 자신의 생활 주변과 교회 상황 그리고 유명 인사들에 대한 인물평을 남겼다(Epigrammata Damasiana) .
로마 전례가 라틴어로 확립되었을 즈음에 새로운 전례 형식이 도입되었는데 암브로시오(Ambrosius, 340~397) 주교의 <찬미가>가 바로 그것이다. <찬미가>는 로마 전례의 시어(詩語)와 그리스도교 고유의 영성이 절묘하게 혼합된 문학 형식이었다.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을 보면 아리우스 이단과의 투쟁 중에 포르티아나 성당에서 농성하면서, 암브로시오가 이틀 밤을 꼬박 새워 시편 응송(antiphona)과 그리스 찬미가를 본따서 손수 지은 찬미가(hymmus)를 신자들에게 가르쳐 부르면서 정치적 승리를 이끌어 내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 새로운 예식은 삽시간에 그리스도교 세계 전체에 두루 퍼질 만큼 좋은 반향을 일으켰는데, 이때부터 음악과 시를 합한 새로운 전례 형식이 생겨나게 되었다. 중세에 이르면 찬미가는 성찬 전례와 수도원 성무 일도(officium) 또는 시간 기도에서 그리스도교 신심을 표시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확립되었고 암브로시오의 찬미가 일부는 오늘날에도 불려지고 있다. 암브로시오는 산문 특히 서간과 성서 주석서(20편)와 교리 및 교훈서(15편)에서 탁월한 문장력과 신학적 해박함을 보여 준다.
프루덴시오(C. Prudentius, 348~410)는 스페인 사람으로 호라시우스풍의 서정시(Catemerina), 하느님께 나아가는 은둔과 정화를 노래한 교훈시(Apotheosis, Hamartigenia), 호교론적 내용을 담은 논전시(Contra Symmachum) 덕과 욕망 사이에서 영혼의 투쟁을 그린 시(Psychomachia), 춤곡에 가까운 성서시(Peristephanon)를 남겼는데, 운율과 시상에 있어서 고전에 뒤지지 않는 훌륭한 작품으로 중세기 동안 계속 애독되었다. 그리고 갈리아 출신의 주교 시도니오(A.Sidonius, 430~480)도 그리스도교 라틴 시인으로서 고전시인들을 모방하여 그리스도교인의 심정과 주제들을 읊었으며(Camina) 방대한 서간집을 남기고 있다.
〔교부 시대의 산문〕 성서를 제외한 그리스도교 최초의 라틴 문헌은 《실리타노 성인들의 수난기》(Pasio sanctorum Scilitanorum)로서 180년에 북아프리카에서 순교한 열두명에 관한 순교록이다. 간결하고도 극적인 구성을 갖는 이 순교록은 그 후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스 수난기》 (Passio Perpetuae et Felicitatis) 등 무수한 성인 전기의 효시요 전형이 되었다. 최초의 대립 교황이었던 노바시아누스(Novatianus, 200?~?)야말로 그리스도교 주제를 라틴어로 집필한 최초의 로마 본토인이었다. 철학과 성서에 박식하며 예리하고도 우아한 문장을 구사하고 논리와 추론에 탁월하였던 그의 저작들이 본인의 종교 정치적 행위 때문인지 거의 말소되고 《삼위 일체론》(DeTrinitate)만 제대로 전수되고 있다.
그러나 3~5세기까지는 아프리카 출신의 교부들이 그리스도교 문학을 주도하였다. 우선 3세기 초엽부터 구어체에서 그리스도교의 고유한 라틴어 문어체가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다만 미누치오 펠릭스 같은 인물은 그리스도교 신조어(新造語)들을 극력 피하고 고전적 문어체를 구사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최초의 고전적인 그리스도교 라틴 문장가로 손꼽히는데, 그리스도교를 옹호하는 치체로풍의 대화록 《옥타비우스》(Octavius)는 라틴어로 집필된 가장 오래된 그리스도교 작품 중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4세기의 인물 락탄시오(C.F. Lactantius, 240?~320?)도 미누치오 펠릭스보다는 그리스도교 용어와 이미지를 많이 구사하기는 하였지만, 가급적 그리스도교 어휘를 피하면서 고상한 문어체로 당대의 지식인들을 끌어 보려고 하였다. 락탄시오는 성서 번역문의 언어와 문체가 "유치하여" 지성인들의 그리스도교 접근을 방해한다고 하였다. 당대의 유명한 수사학자로서 그가 쓴 《하느님의 규범》(Divinae institutiones)은 호교론적 입장을 벗어나서 그리스도교 교리를 전반적으로 다룬 최초의 작품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구어체 라틴어를 그리스도교 문학 작품에 도입한 최초의 인물은 테르툴리아노(Tertullianus)이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가장 훌륭한 호교론자로서, 법률가다운 명쾌하고 날카로운 문체로 당대의 문장가가 되었다. 신학적 소재와 도덕 및 영성을 다룬 저서들도 있고 이단을 둘러싼 논쟁서들도 문학적으로 훌륭하지만 그리스도교 신학 용어들을 창안한 공적이 더 크다. 그의 뒤를 이은 아프리카 카르타고의 주교 치프리아노(Cyprianus, 249~258)는 "평이하고도 풍부한 언어와 수사학적 기교와 웅변적인 설득력을 갖춘 문장" 으로 많은 서간과 서간체 작품(AdDonatum, Ad Demetrianum)을 남겼으며, 교회와 교리를 다룬 저서도 있다. 당대의 유명한 수사학자이자 호교가인 아르노비오(Arnobius)는 3세기 후반부터 4세기 초엽의 아프리카 교회의 인물로, 이교도 지식인들을 상대로 철학 지식을 총동원하여 날카로운 필체로 그리스도교를 옹호하고(Adversus nationes) 박해자들의 참담한 말로들을 지적하였다(Demortibus persecutorum) .
교부 시대의 라틴 문학 대표자는 역시 아우구스티노(A. Augustinus, 354~430)이다. 그는 원래 수사학 교수로 황실 수사학 교수를 역임한 인물답게 그리스도교의 가장 위대한 라틴 문장가, 가장 방대한 저서를 남긴 교부, 가장 뛰어난 사상가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그의 《고백록》(Confessiones)은 라틴 문학과 그리스도교 문학의 새로운 장르로서 미려한 문체와 매혹적인 수식, 심원한 인간 심리의 통찰과 고매한 철학적 · 신학적 사상은 오늘날에도 성서 다음으로 그리스도교의 가장 훌륭하고 제일 널리 읽히는 명작으로 꼽히고 있다. 《참된 종교》(De vera religione)를 위시한 철학서들과 논전서들, 《신국론》을 위시한 신학서와 성서 주석서들, 그리고 그의 사목 생활을 담은 《강론집》(Homiliae)과 그의 성직 생애를 보여 주는《서간집》(Epistolae)도 한결같이 그리스도교 라틴 문학의 절정을 담고 있다.
〔중세 초기의 그리스도교 라틴 문학〕 아우구스티노의 생전에 아프리카 교회가 붕괴됨으로써, 5세기 말엽 아우구스티노의 제자 오로시오(P. Orosius ; Historiarum adversus paganos libri)를 제외한다면, 아프리카는 교회사에서 사라지고, 민족 이동의 격동기(476~799)를 통해서 그리스도교 라틴 문학을 승계하는 역할은 이탈리아와 갈리아 지방이 맡게 되었다.
6세기에는 《철학의 위안》(De consolatione Philosophiae)으로 잘 알려진 그리스도교 철학자 보에시우스, 13세기까지 중세 지식인과 대학의 인문 교육 교과서(Institutiones)를 썼고 당대의 탁월한 식자요 고대 문전을 보전하고 필사하여 중세에 전수하는 운동(Bivarium)을 일으킨 문화사가 카시오도로(Cassiodorus, 480/490~583 ; Chronica, Historia Gothorum, Variarum libri, Historia ecclesiastica tripartta)가 유명하다. 그리고 고전 시문학의 마지막 인물 베난시오(F. Venantius, 530~600)는 주옥 같은 찬미가를 남겼다(Vexilla regis prodeunt, Pange lingua gloriosi). 대(大) 그레고리오 교황(540~604)은 학자요 문인으로서 그의 설교집(예: Moralium libri)에서 탁월한 문장을 보여 주었으며, 동시대의 인물인 투르의 주교 그레고리오(Gregorius Turonensis, 544~594)는 프랑크족의 역사를 집필하였다(Historia Francorum). 스페인의 이시도로(H. Isidorus, 559~636 ; Historia de regibus Gothorum)도 역사 서술 작업을 하였지만, 특히 그는 고문 연구(Etymologiarum libri)로 더 유명하다.
그다지 널리 알려지거나 읽히지는 않지만 6~7세기 사이의 그리스도교 문학가들도 상당수 있다. 그들은 주로 이탈리아 반도(Ennodius, Benedictus, Arator subdiaconus, Ionas Bobiensis)와 갈리아(Avitus Viennensis, Caesarius Arelatensis, Dracontius, Martinus Bracarensis)에서 활약하였다.
지난 세기 문화사학계에서는 그리스 문학에 비추어 로마 문학의 고유한 창작성을 두고 많은 시비가 있었고, 그리스도교 라틴 문학의 예술성에 관해서도 비판이 끊이지않았다. 르네상스에 뒤늦게 계몽된 게르만 세계가 종교개혁을 배경으로 하여, 로마 역사와 가톨릭 교회에 취한 적대적 자세와 더불어 그리스 세계에 대한 문화 제국주의적 굴종을 자초하다 보니 그러한 왜곡이 있었던 것으로 오늘날 평가되고 있다. 어느 지역, 어느 민족이나 자기네 고유한 언어와 미적 감각에 따라서 문화와 문학을 창조하고 생활 정황과 종교 이념을 표상해 왔고 앞으로도 표상할 것이며, 라틴 문학은 인류사를 장식하는 빼어나게 아름다운 화단으로 기억되고 인용되고 모방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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