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 대륙 북반구 중위도로부터 남반구에 걸쳐 크게 펼쳐져 있는 33개의 독립국과 13개 비독립국 영토로 이루어진 지역의 총칭. 1492년 콜럼버스가 발견한 이후 스페인 · 포르투갈 등 라틴 민족의 국가들로부터 지배를 받아 라틴적인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보통 중남미(中南美)라고도 하나, 라틴 아메리카라는 명칭이 보편화되어있어 국제 연합 등 국제 기관에서도 모두 이 명칭으로 통용된다.
I . 지리적 환경
북쪽은 리오그란데 강과 플로리다 해협을 사이에 두고 미국과 접경을 이루고, 동쪽은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아프리카 대륙과 유럽에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다. 남북의 총 길이는 12,500km 이르고 총 면적은 2,057만km²에 달한다. 사용되는 언어는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브라질, 인디언어를 사용하는 안데스 산맥 거주민, 영어 · 프랑스어 ·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일부 카리브해 연안 국가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국가가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있다.
인종은 원주민인 인디오와 백인종인 유럽인, 그리고 아프리카 흑인 등 세 종족의 혼합체로 구성되어 있다. 콜럼버스가 대륙을 발견한 이후 유럽인들이 정복을 위해 많이 이주하였으며, 노동력 안정을 위하여 아프리카 흑인을 노예로 수입하였다. 그 밖에도 수많은 순수한 원주민, 즉 토착 인종이 여러 곳에 흩어져 살고 있다. 또한 혼혈 인종으로 중남미 토착인과 유럽 백인과의 혼혈인 메스티조(Mestizo) , 유럽인과 아프리카 흑인의 혼혈인 물라토(mulato)가 있다. 메스티조를 제외한 순수 원주민의 수는 약 1,500만~2,50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들 가운데 약 100만 명 정도가 미국과 캐나다에 거주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 산재해 있다. 토착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국가는 볼리비아 · 과테말라 · 페루 · 에콰도르 등이고, 메스티조가 많이 거주하고있는 국가는 멕시코 · 콜롬비아 · 베네수엘라 · 칠레 · 파라과이 및 중앙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들이다.
다양한 인종이 섞여 살고 있지만 인종간의 차별이나 편견은 비교적 적은 편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과정을 통해 고착된 계층간의 격차는 매우 심하다. 상류 계층은 백인, 중간 계층은 유럽인과 일부의 혼혈인이 차지하고, 대다수의 혼혈 · 흑인 · 인디오는 하류 계층에 속한다. 이러한 배경으로 라틴 아메리카 사회는 극심한 이중적 구조를 보이고 있다. 도시에 형성된 빈민과 오랫동안 토지 없이 대농장에 고용되어 있는 광범위한 농민이 있는가 하면, 극소수의 대지주· 기업가 · 군부들이 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전체 인구의 90% 이상이 가톨릭 신자여서 문화적 성격도 가톨릭적 전통이 매우 강하다.
II . 역 사
정복 전의 도시 문명(15세기 말까지), 유럽인의 도래와 식민지 시대(15세기 말~17세기 말), 독립과 혼란기(1700~1850경), 세계 경제 체제로의 편입과 성장(1850~현재)이라는 4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정복 전의 도시 문명〕 스페인과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정복당하기 전, 라틴 아메리카 대륙은 오늘날 인디오라고 불리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베링 해협을 통해 이주해 온 아시아인들로, 대다수가 몽고족이며 멜라네시아인, 폴리네시아인 등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수렵을 위해 알래스카를 통해 아메리카 대륙 남쪽까지 이동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독자적인 문명권을 형성하고 살았는데,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마야(Maya) · 아즈텍(Aztec) · 잉카(Inca) 문명이다. 이들이 사용한 언어는 약 500여 종으로 추산하고 있으나 현재까지 남아 있는 언어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이 언어들은 크게 우토 아스테카 어족, 치브차 어족, 마야- 키체어족, 카리브 어족 및 투피 과라니 어족으로 나눌 수 있다.
마야 문명 : 이들 문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 대략 4~9세기에 걸쳐 존재하였다. 지역적으로는 현 멕시코 남단 유카탄 반도 일대와 과테말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에 걸쳐 형성되었다. 이 집단의 가장 괄목할 만한 업적은 정교한 사원의 건축 · 조각 · 회화 · 상형 문자 · 수학 · 천문학 · 달력 이용을 포함한 연대기(年代記)의 발전 등과 같은 문화적인 측면이다. 특히 천문학에 대한 지식은 16세기 유럽인들보다 우월하였고, 이미 1세기경에 숫자 '0' 을 사용할 정도로 상당히 발달한 수학적 방법론을 가지고 있었으며,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건축술에 버금가는 건축 기술을 자랑하였다. 한편 문자의 경우, 초기에는 상징적이고 표의적인 기호에 불과하였으나 차차 상형 문자로서의 완벽성을 이루게 되었다. 문자는 상류 사회, 성직자, 법률가들의 전유물이었다. 유럽인에게 정복된 후에는 알파벳을 사용해 말을 표기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주로 도시를 중심으로 생활하였다. 도시 중앙에는 큰 광장이 있었고, 그 주위에는 신전 · 관청 · 건물 · 궁전 · 운동장 · 정원들이 만들어졌다. 좀 떨어진 곳에 귀족들의 주택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건축물들은 모두 석조물이었다. 도시 외곽에 촌락을 이루고 살던 일반인들의 주택은 나무 기둥과 목초를 사용한 초가로 이루어졌다. 주업은 농업이었지만 잘 발달된 도로망을 통해 도시간의 교역도 번창하였다. 주산물은 옥수수 · 코코아 · 호박 · 면화 등이다. 옥수수 재배로 풍족한 생활이 가능하였고 많은 시간을 건축, 그림, 조각, 기타 예술 활동에 사용할 수 있었다. 농토는 공유되었고 수확의 일부를 종교 의식과 교육에 종사하는 성직자의 몫으로 또 일부를 비상용으로 비축하고 나머지는 공평하게 가족별로 분배하는 제도가 정착되어 있었다. 그리고 재를 비료로 사용할 정도로 농업 기술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종교적으로는 성스러운 신으로서 부신(父神) · 모신(母神) · 성악신(性惡神)을 모셨으며 그 외에 잡신들이 있었다. 하늘을 떠받들고 있다는 사방위신(四方位神)인간을 창조한 인호신(人虎神) 등을 숭배하였고, 이 신들은 성(聖)과 인간을 연결시키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이후 고대 마야 사회는 멕시코 중부 고원 지대의 톨텍(Toltec)인들의 침입을 받아(1200~1540) 결국 그들에게 합병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직계 후손들은 멕시코 남부와 과테말라 지역에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아즈텍 문명 : 멕시코의 광활한 중부 계곡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12~13세기경에 톨텍인을 침략하기 위해 북부로부터 남하한 치치멕(Chichimec)족의 일부인 아즈텍인들은, 그들의 이웃 종족과 끊임없는 전투를 통하여 1345년경에 테노크티트란(Tenochtitlan, 현 멕시코시티 자리)이라는 도시 국가를 건설하였다. 멕시코 전체 계곡을 장악한 이들은 하나의 대제국을 건설하였는데, 전성기 때에는 콜럼버스가 상륙하였던 카리브해 연안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아즈텍 사회는 후반에 매우 엄격한 신분 사회가 되었다. 최하층에는 노예가 있었고 최상층에는 세습 귀족들이 군림하고 있었다. 교육 · 결혼 · 노동 등은 엄격한 계획에 의해 수행되었으며 경제는 공동으로 영위되었다. 이즈코아틀 왕 이전의 주민들은 주로 수렵, 어업 및 단순한 원예업 등에 종사하였다. 이후 이즈코아틀 왕대에 이르러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농지를 확보하고 주로 옥수수 · 콩 · 고구마 · 토마토 · 용설란 · 담배 · 목화 등을 재배하였다.
토지는 공유지, 개인 소유지, 국유지 등 세 종류로 구분되었다. 공유지의 경우 주민들의 기초 공동체(Calpuly)의 구성원에게 일정한 면적으로 분배하여 경작하게 하였다. 분배받은 땅은 상속은 허락되었지만 팔 수 없고 권리를 이양하지 못하였으며, 2년 동안 계속 땅을 놀리지도 못하게 되어 있었다. 이후 왕국의 규모가 팽창하고 영토가 확대됨으로써 귀족 계급과 무사 계급 그리고 성직자 들의 부와 권력이 커지게 되었다. 패전국에서 끌려온 노예들이 생김에 따라 경작 의무에서 벗어난 일반민들이 수공업자와 상인으로 변하게 되었다. 상류 계급인 귀족의 대우를 받은 자들은 행정 관리 · 법관 · 지방 호족 · 지방 장관 등이며 이 사이에 위치한 무사 계급은 무인 학교를 나온 후 군대에 소속되었다. 이들은 승전에 대한 공으로 토지와 노예를 분배받았으며 이를 자식들에게 상속하
였다. 성직자들은 종교와 교육을 전담하는 가장 지혜롭고 영향력을 많이 가진 계급이었다. 이들은 동시에 정부의 고문 역할도 담당하였다.
아즈텍인들의 가장 큰 사원은 피라미드식의 기초 축대위에 2개의 성전을 나란히 건립한 것이었는데 우신(雨神)과 국가신을 모시는 신전이었다. 수도에는 신전들 외에도 운동장 · 학교 · 궁전 · 시장 · 관청 등의 공공 건물들과 운하와 크고 작은 도로 및 수도(水道) 등의 시설이있었다. 종교적인 영향력은 절대적인 것으로 공적 · 사적 생활뿐만 아니라 문화와 사회 제도에도 큰 영향을 끼쳤 다. 이들은 여러 신을 숭배하였으며 모든 종교 의식은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잉카 문명 : 매우 상이한 조직 유형을 채택하고 있었다. 잉카 제국은 북부 에콰도르에서 페루를 지나 남부 칠레에 이르기까지 안데스 산맥을 따라 3,000마일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페루의 쿠즈코 계곡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한 후 1440년부터 제국의 팽창을 시도하였으며, 1532년 스페인에 정복되기까지 지속적인 팽창 정책을 추진하였다. 정치 권력은 상부에 1인의 최고 통치자와 하부에 일단의 현지 관리로 구성된, 고도로 세련된 관료 조직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제도를 통하여 잉카인들은 대부분의 안데스 지역에 대한 효율적인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들은 방대한 도로 체계와 관개 시설, 산악 지대에 있어서의 계단식 농경법, 섬세한 방직 기술, 정교한 의술 등 다방면에서 높은 수준을 자랑하였다. 특히 제국의 전지역은 수도인 쿠스코와 도로, 교량 등으로 완벽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신앙은 중앙에 태양신을 숭배하는 제단을 쌓고 그 주위에 수많은 작은 신들의 집단을 형성하였다. 제왕인 잉카는 승려 역할과 군 통치권을 지닌 사령관할을 하였으며 왕권은 세습되었다. 사회 계층의 구분이 엄격하여 장식이나 의복 등으로 귀족과 평민을 구별하였다. 상층 계급으로는 군주, 잉카 후손들 외에 군주가 능력이 있는 자를 천거하여 편입시키기도 하였다.
경제 생활은 대부분 농업이나 가사에 종사하였으며, 토지는 가족 단위로 분배하여 경작하게 하였기 때문에 굶주리거나 헐벗은 자가 없었다. 또한 국민들은 태양신과 잉카 왕에게 속해 있는 토지를 순번대로 돌아가며 경작할 의무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노인 · 과부 · 어린이 · 불구자들을 위해서 봉사해야 할 의무도 가졌다. 그리고 여러 가지 저장 창고에 공동으로 곡물이나 의복 등을 저장해 두고 전쟁 때나 흉년이 들었을 때 이를 사용하였다. 상업은 그리 왕성하지 않았으나 잉여물을 매매할 수 있었고, 토지의 개인 소유는 금지되었으나 가옥과 가구는 개인이 소유할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은 발달된 문학을 갖고 있었다. 아직도 약간의 서정시와 위대한 잉카 왕 파차쿠텍에게 바친 유명한 노래들이 남아 있다. 문자를 갖지 못하였지만, 계산은 여러 가지 색깔들의 실 매듭을 이용하였고 의사 전달의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 이들은 복잡한 통계에도 이것을 이용한 것으로 전해지고있다.
〔유럽인의 도래와 식민지 시대〕 유럽인은 15세기에 시작된 팽창 정책의 일환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식민지로부터의 더 많은 토지와 재화, 특히 금(金)의 산출에 주력하여 절대 왕정(絶對王政)의 권력 강화에 기초로 삼고자 하였다. 또 가톨릭과 그들의 생활 양식을 이식하는 데 주력하였다. 따라서 수많은 선교사들은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였으며, 정복자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평민이나 하층민들은 신대륙 정복을 통하여 신분 상승의 기회로 삼고자 하였다.
스페인령 아메리카 : 스페인은 헤르난 코르테스(H.Cortés), 프란시스코 피사로(F.Pizarro) 등 정복자들의 모험에 의해 반세기 만에 라틴 아메리카의 거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고, 19세기 초 이 지역이 독립할 때까지 약 300년 간 식민지로 통치하였다. 이들의 정복 활동은 카리브해 연안 국가와 아즈텍 · 잉카 제국에 집중되었다. 아즈텍 제국은 1521년에 코르테스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잉카 제국은 1533년에 피사로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각각 붕괴되었다. 이들은 짧은 기간 내에 본국의 여러 제도를 이곳에 이식시켰고, 전형적인 스페인식 도시를 건설하였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스페인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하였는데 스페인 여성들이 절대 부족하여 인디언 여자와의 혼혈인 메스티조가 탄생하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메스티조는 멕시코, 중앙 아메리카, 안데스 등의 스페인령 아메리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인종 집단으로 등장하였다.
스페인 국왕은 정복자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정교한 관료 제도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행정 체계는 스페인의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를 그대로 적용한 것으로 1492~1550년 사이에 완비되었다. 이와 관련된 주요기구로 스페인 내에 설치된 인도 제국 자문위원회(Council of the Indies)가 있다. 이 기구는 귀족 · 고위 성직자 · 법률가로 구성되어 있으며, 식민지를 관할하는 입법 · 사법 · 행정의 최고 기구였다. 한편 식민지에는 여러 개의 부왕령(副王領)과 총독령이 있었다. 부왕과 총독은 식민지에서 상당한 정도의 자율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대부분 본국의 귀족 · 총신 · 대부호 등이 등용되었다. 총독은 원칙적으로 부왕의 하위직이었지만 현실적으로는 독립적인 사법권을 행사하였다. 이러한 기구들은 서로 견제하고 감시하였고 식민지에서의 국왕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기구로 활용되었다. 이 밖에 지방 행정기관의 장과 의회는 존재하였으나 이후에 매관 매직되어 점차 대지주 · 광산주 · 상인 등에 의해 점유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지역에서의 자신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권력을 행사하였으며, 대농장주들은 마치 봉건 영주와 같은 권한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당시 스페인의 경제 구조는 금 · 은 등의 귀금속을 국가의 부(富)의 척도로 삼고, 모든 경제 활동은 국력 신장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중상주의(重商主義) 정책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스페인은 신세계에서 발견된 모든 재원에 대한 독점화를 시도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의 첫 번째 목표는 금광과 은광이었고, 또 다른 목표는 상업 유통 과정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유지 ·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와 달리 농업과 제조업에 관한 관심은 미미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이러한 경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디언들의 노동력을 강제적으로 동원할 필요가 있었다. 값싼 인디언의 노동력은 식민 사회에서 상당히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에, 국왕을 포함한 식민지의 관리와 성직자들은 인디언 통제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1542년 스페인 국왕은 식민지 관리들의 권한을 축소시키기 위해 새로운 조치를 발표하였다. 이는 식민지 관리의 직접적인 관할권을 박탈함으로써 국왕의 관할권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교회는 국왕의 이 조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이 조치는 최소한 법적인 면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억압의 형태만 변경시켰을 뿐 억압 자체는 계속되었다.
한편 정복과 그에 잇따른 식민 정책은 원주민 사회를 급격히 변화시켰다. 우선 원주민의 수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정복 과정에서 생긴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물론, 당시 원주민에게는 전혀 면역이 없었던 천연두 등의 전염이 더 많은 피해를 일으켰던 것이다. 특히 질병으로 인한 사망은 여성보다 남성들이 더 많아 성별간의 불균형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전통적인 결혼 형식과 가족 구조의 붕괴 현상이 일어나 인구 감소로 인한 노동력이 감소하였다. 따라서 남부 지역에서는 흑인 노예가 수입되었다. 그 결과 스페인령 아메리카는 다인종 사회로 변화되었으며 이에 따라 분화된 사회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16세기경 전체 인구의 2% 미만을 차지하고 있었던 백인은 가장 강력하고도 특권적인 계층을 이루고 있었다. 같은 기간에 메스티조 · 물레토 · 자유민인 흑인을 포함한 혼혈인은 전체 인구의 3%에 불과하였다. 인구의 95% 이상을 차지한 인디언들은 국왕령에 의해 극도로 제한된 직분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을 뿐만 아니라, 원주민들은 식민 체제를 통해 비옥한 토지에서 축출당하고 자신들의 종교적 상징과 전통을 파괴당하는 등 전통적인 사회 질서와 문화의 파괴를 경험하게 되었다.
17세기에 들어 스페인령 아메리카는 급속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1588년 스페인의 무적 함대가 영국에 패배하자, 왕실의 권력은 급격히 축소되었고 귀족들은 왕권에 도전하였다. 스페인의 세력이 약화되자 새롭게 부상하는 유럽의 각 나라들은 세력 다툼을 벌이는 한편,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기득권을 확보하려고 각축하였다. 이에 따라 영국 · 네덜란드 · 프랑스 등은 이 대륙에 자신들의 정착지를 마련하였으며, 특히 영국은 이 지역의 노예 무역을 관장하는 등 스페인의 독점적인 지위를 점차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18세기 초 부르봉 왕조는 개혁 정책을 통해 스페인의 공업과 농업의 회복을 기도하였다. 그리고 식민지와의 무역을 강화하기 위해 스페인과 식민지의 항구를 개방하였고 자유 무역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무역의 증대, 가격 안정, 밀무역의 감소, 식민지에서의 경제 활동 증대 등을 가져왔다. 그 결과 식민지에 많은 유럽인들의 이민이 이루어져 인종 구조에 급격한 변화를 초래하였 다. 특히 식민지에서 태어난 백인인 크리올(Creole)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여 1825년경에는 이들이 전체 인구의 20%를 차지하게 되었고 메스티조와 혼혈인의 인구도 28%까지 상승하였다. 반면 원주민의 인구는 더욱 감소하여 42%로 떨어졌다. 이에 따라 점차적으로 크리올들은 광업과 상업 등 주요 경제 분야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고, 많은 토지의 소유로 지역에서 막강한 권력 을 행사하게 되었다. 한편 스페인은 영국의 아바나와 마닐라 침공으로 일어난 7년 전쟁으로 식민지군을 창설하였고, 많은 크리올들이 입대해 고위 직급에 오르게 되었다. 그들은 서서히 새로운 계층을 형성하면서 본국의 식민 정책에 반기를 들기 시작하였다.
포르투갈령 아메리카 : 포르투갈은 이미 수준 높은 지도 제작법과 항해술 등을 이용해 인도 · 중국 · 아프리카 · 대서양 연안 등에 스페인보다 앞서 진출하였다.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 대륙으로는 스페인보다 늦게 진출하였다. 1494년 스페인과 체결된 토르데실랴스(Tordesillas) 조약을 계기로 남아메리카 대륙의 동부 지역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지역에는 스페인 점령 지역에 있었던 대규모의 원주민 문명 사회가 없어 원주민 세력과 충돌 없이 점령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금 · 은 등이 매장되어 있지 않아 스페인령 아메리카와는 달리 농업, 특히 사탕수수의 경작이 식민지 경제의 주요 품목이 되었다. 이 같은 상황으로 이 지역의 경제적인 가치는 다른곳에 비해 낮게 평가되었고, 따라서 통치 방식도 스페인보다 느슨한 편이었다.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1549년에 정비된 관료 조직이 설치되었으나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조직은 기본적으로 효율적인 통치보다는 프랑스와 영국의 침입으로부터 이 지역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어서 이 지역에서의 권력 행사는 주로 지주나 시위원회에 귀속되어 있었다. 교회의 조직과 영향력 또한 다른 지역보다 미약하였다.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반까지 지주들이 브라질 북부 연안에 설탕 제조 산업을 번창시킴에 따라 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는데 갈수록 줄어드는 원주민들로는 이를 충족시키지 못하였다. 이에 이 부족한 노동력을 아프리카 지역에서 수입하였다. 아프리카 흑인 노예의 노동력을 이용한 사탕수수 재배 사업은 브라질의 북동부 지역을 세계 최대 규모의 경작지로 성장시켰다. 사탕수 수 수출량은 매년 250만 파운드에 달하였고 이로 인해 브라질의 북동부 지역을 전체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만들었다. 브라질 중남부 지역에서는 목축업이 성행하였고,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침략 초기에 내륙으로 쫓겨 들어간 원주민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금광과 다이아몬드광이 발견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포르투갈인들이 내륙으로 진출하였다.
브라질의 식민지 경제 체제는 주로 수출에 의해 주도되었다. 따라서 이곳에서의 이윤은 주로 수출품에 대한 세금 부과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 지역의 관료 조직은 세금 징수에 동원되다 보니 통제가 느슨해져 스페인령 식민지에서보다는 독립 운동 세력이 미약하게 형성되었다.
아프리카 흑인 노예의 수입으로 19세기 중반에는 인구의 절반 이상이 흑인으로 구성되는 특징을 갖게 되었고, 이러한 인종 구성은 브라질 사회를 고도로 계층화된 사회로 만들었다. 인종 상호간의 결혼은 전체의 10% 미만이었으며 특히 백인과 흑인의 결혼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지배층인 식민지 태생의 백인과 본국 출신의 상인 사이에 권력 갈등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갈등은 독립 운 동의 잠재력을 형성하였으나, 느슨한 통치 방식 때문에 강력한 저항은 일어나지 않았다.
〔독립과 혼란기〕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은 중상주의에대한 반발 외에 크리올의 본국인에 대한 반감, 계몽 사상 · 프랑스 혁명 · 미국 독립 등의 영향, 나폴레옹의 이베리아 반도 침입에 따른 본국 정부의 권위 실추 등이 그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독립 운동은 식민지에서 자신의 기득권을 확보하려는 크리올에 의해 주도되었기 때문에 보수적 경향을 띠고 있었다. 따라서 사회 질서에 있어서 커다란 변화는 없었으며, 단지 지배 세력만 바뀌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스페인령 라틴 아메리카는 19세기에 독립을 획득하였다. 1808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점령하고 동생 조제프(Joseph)를 국왕에 봉하자,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크리올을 중심으로 한 세력들은 독립 운동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독립 투쟁은 멕시코, 북부의 베네수엘라, 남부의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 4개국이 주도하였다. 나폴레옹에게 저항한 주요 지역은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였다. 이 지역의 크리올은 이미 영국군의 침략을 물리친 경험이 있을 정도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1810년 프랑스군이 세빌라와 카디스를 공격하자, 부에노스아이레스 시 의회는 부왕을 폐지하고 혁명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개혁 조치를 단행하였으며 1816년에는 독립을 선포하였다. 혁명위원회에서 근무하던 산 마틴(José de San Martin)은 뛰어난 군사 전략을 발휘하여 1817년에 칠레를 해방하고, 스페인의 자유 헌법을 반대하던 페루의 크리올 세력과 연합해 1821년에 페루의 독립을 쟁취하였다.
라틴 아메리카의 북부 지역은 볼리바르(S.Bolivar)에 의해 주도되었다. 1810년 이 지역 카리카스의 크리올들은 총독을 추방하고 자신들을 중심으로 하는 통치 조직을 결성하였다. 그 뒤 스페인의 왕정 복고가 이루어지자 독립 투쟁은 잠잠해졌으며 볼리바르는 망명하였다. 이후 1816년 그는 다시 베네수엘라로 복귀하여 1819년에 베네수엘라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리고 1821년에는 콜롬비아 · 에콰도르를 해방시켰으며 페루와 볼리비아를 각각 1823년, 1825년에 해방시켰다.
멕시코 지역은 이달고 신부(Fr. M. Hidalgo)를 중심으로하는 크리올들이 주도하였으나 후에 혼혈인과 인디언들이 결집하여 독립 투쟁을 수행하였다. 이달고 신부는 노예제 폐지와 원주민 공동체에 대한 토지 분배를 주장하였다. 이들은 과달루페의 성모를 상징으로 하는 종교적 열정으로 거대한 군대를 조직하여 한때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달고 신부는 체포되어 처형되고 말았다. 이달고 신부를 계승한 모렐로스 신부(Fr. J.M. Morelos)는 같은 노선을 견지하면서 민족주의와 사회적 · 인종적 평등주의를 강력하게 주장하였으나 그 역시 1815년에 체포 처형되었고, 그 뒤를 이투르비데(Agustín de Itúrbide)가 계승하였다. 그는 독립 군주국의 보장, 가톨릭의 국교화, 크리올과 본토인의 평등을 내세워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고 게릴라들과 연합하여 1821년에 독립을 선포하였다.
스페인령 아메리카로부터 독립한 국가들은 그 동안의 전쟁으로 막대한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 전쟁으로 노동력이 급격히 줄어들었으며 자본도 줄었다. 전쟁 기간 동안 교역도 거의 중지되다시피 하였고, 스페인과의 무역은 물론 식민지간의 무역도 중단되었다.
브라질의 독립은 스페인령 지역의 독립과는 다른 과정을 거쳤다. 우선 포르투갈은 식민지가 정치적 독립을 주장하더라도 이를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경제적 · 군사적 힘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 나폴레옹이 이베리아 반도를 침공하였을 때 포르투갈 왕실은 영국의 도움으로 브라질로 피신하였고, 나폴레옹이 물러나자 왕자를 두고 왕실은 다시 본국으로 돌아갔다. 포르투갈 의회가 다시 왕자에게 귀환을 요구하자 그는 독립을 선포해 버렸다. 그리고 대부분의 혁명 엘리트들은 브라질의 재식민지화를 반대하고 독립된 군주제를 원하였기 때문에, 독립 선포는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브라질은 1822년 국가 체제를 군주제로 하는 독립을 획득하였다가 1889년에 공화제 국가로 전환하게 되었다. 따라서 브라질은 크리올들이 지배 엘리트가 되는 스페인령 아메리카와는 달리, 포르투갈 국왕과 그 수행원들로 구성된 새로운 지배 엘리트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와 무관하게 노예 제도는 쿠바와 푸에리토리코를 제외한 스페인령 라틴 아메리카와 같이 독립 당시부터 1850년대까지는 존속되었다. 흑인 노예제는 브라질 정치에 있어서 중요 쟁점으로 계속 남아 있었다. 다른 신생 국가들처럼 브라질에서도 독립 자체가 극빈자들의 생활 양식을 변화시키는 요인으로는 작용하지 못하였다.
독립한 뒤, 각 나라는 민주적인 헌법을 채택하면서도 계층 사회를 뒤엎는 일이 없이 소수의 백인에 의한 수탈이 계속되었다. 기존 사회의 질서와 구조가 청산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독립은 많은 혼란을 야기시켰다. 노예제는 여전히 존재하였고, 혼혈인들은 여전히 박해받는 계층이었으며, 특권층은 무정부 상태에서도 과거의 가치관과 전통을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대개의 국가에서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여 민주적 절차와 정통성을 무시하였고, 정권 쟁탈이 반복되어 경제 발전은 정체되었다. 이러한 혼란은 1850년까지 지속되었다.
〔세계 경제 체제로의 편입과 성장〕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라틴 아메리카의 경제는 서구 유럽과의 무역을 증대시키면서 세계 경제 체제로 편입되었다. 당시 유럽은 산업 혁명의 결과로 도시에 모인 노동자들의 식량 수요와 생산의 안정적인 증대를 위한 원료의 수요가 급증하였다. 따라서 라틴 아메리카 경제가 1차 원료의 공급지로서 성장하게 되자 유럽의 대규모 자본 투자가 이루어졌다. 특히 영국의 자본이 많이 투자되었는데 19세기 말~20세기 초반 사이의 투자액은 9배로 증가하였다. 투자된 자본은 라틴 아메리카의 빈약한 자본으로는 수행할 수 없는 철도 건설, 광산업 등에 집중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라틴 아메리카는 20세기 초반까지 원료 생산 산업 부분의 집중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대부분 해외의 자본에 의해 추진되었으므로, 이로써 종속적 경제의 기초가 형성되어 갔다.
수출 경제의 급속한 성장은 중요한 정치적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까지 반봉건적인 성격이 강한 지주와 자본가들은 경제적 이윤을 목표로 적극적인 기업가로 전환되었다. 아르헨티나의 소 사육가, 브라질의 커피 재배자, 쿠바와 멕시코의 설탕 생산자 등은 경제적 효율성과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 결과 이들은 상당한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고 그것을 바탕으로정치적 권력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들의 정치 권력에 대한 접근 방법은 대략 두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는데, 하나는 아르헨티나와 칠레에서처럼 지주와 그 밖의 경제 엘리트들이 정부를 직접 통제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미국이나 유럽과 비슷한 헌법에 기초하여 몇몇 귀족의 파벌들이 경쟁하는 과두적인 형태의 정치 권력을 만들었다. 다른 하나는 군부 출신의 강력한 독재 체제의 창출이었는데, 지주와 경제 엘리트들은 이들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였다. 이러한 경로를 통해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 권력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 만들어졌고 권력의 중앙 집권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중앙 집권적인 권력은 국가 단위의 경제 발전을 추구하였고 그에 따르는 제반 시설 및 제도를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경제 성장에 따라 중간 사회 계층이 출현하였다. 전문 직업인 · 상인 · 소규모 사업가들로 구성된 이들은 주로 도시에 거주하였으며 비교적 교육을 잘 받았다. 뚜렷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함에 따라 이들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위치에 있었으나 새로운 지도 계층으로 성장하지는 못하였다. 이와 더불어 광범위한 노동자 계층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수출을 중심으로 하는 라틴 아메리카 경제는 막대한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으며, 이를 위해 유럽으로부터의 이민이 장려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동자 계층은 20세기 초 노동 운동을 주도하였고, 해외 노동력의 대대적인 수입과 농촌으로부터의 인구 유입은 도시화를 촉진시켰다. 1900년까지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약 75만 명의 인구를 지닌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하였고, 아르헨티나는 인구의 25%, 칠레는 약 20%, 브라질과 멕시코는 10% 이상이 도시에 거주하였다.
이러한 경제 성장은 1929년에 불어 닥친 세계 공황에 의해 위기를 맞게 되었다. 유럽과 미국의 급격한 경제적 쇠퇴는 라틴 아메리카의 수출 시장을 축소시켰다. 1차 생산품에 지나치게 의존하였던 라틴 아메리카는 세계 경기가 침체될 때마다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1930~1934년 사이의 수출량은 이전 5년 간의 수출량의 48% 이하로 줄어들었다. 계속된 공황은 그 동안의 수출 중심의 경제 발전 노선을 의심하게 하였고 경제적 혼란으로 인한 정치적 불안이 가중되었다. 이 당시 많은 나라들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으며, 군부가 중요한 정치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공황을 극복하고 계속적인 경제 발전을 추구하는 새로운 방안으로 수입 대체 산업의 활성화가 제기되었다. 그것은 유럽과 미국으로부터 수입해 왔던 산업 제품을 자체적으로 생산함으로써 대외 의존도를 줄이고 자국 내의 고용 창출을 증대시키자는 것이었다. 1960년대까지 이러한 노선은 비교적 성공을 거두었다. 1947년까지 산업의 부가 가치는 국민 총 생산의 20%로 높아졌고, 1960년까지 광대한 땅을 가지고 있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자체적으로 직물 · 가공 식품 · 냉장고 등을 생산하였으며 제철소가 여러 나라에 설립되었다. 1970년에는 아르헨티나 · 브라질 · 멕시코 등지에 자동차 조립 공장이 설립될 정도로 산업화는 지속되었다.
수입 대체 산업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발전 노선은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로는 산업 구조적 불안이 늘 존재하였는데, 제조 완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기계 · 예비 부품 · 중간 생산재를 외국으로부터 수입하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역 수지 적자는 나아지지 않았으며 경제적 종속도 역시 개선되지 않았다. 둘째로는 국내 시장의 협소와 보호 무역의 강화로 인해 생산성이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그리고 산업화는 자본 집약적인 기술을 이용해 이루어져 고용의 기회가 기대수준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부분적으로는 노동 인력의 급속한 증가에도 그 원인이 있었으나, 노동 집약적 생산방식보다는 자본 집약적 생산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노동 인구의 증가에 부응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는 국내 소비 시장의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로 작용하였으며 계속된 실업은 1960년대 이후 사회적 불안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수입 대체 산업의 활성화 정책에 따라 자본가와 노동자가 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산업 엘리트들과 노동자들의 이익을 통합해 주는 새로운 동맹이 가능하였고, 이것은 오랫동안 우월한 위치를 향유해 온 농업 부문과 지주의 이익에 직접적으로 도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인민주의 동맹이라는 권력의 형태를 만들어 냈다. 아르헨티나의 페론, 브라질의 바르가스, 멕시코의 라자로 카르데나스 정권은 바로 이러한 인민주의에 기초하여 수립된 권력이었다. 이러한 정권은 반권위주의적이었으며 지주들의 이익에 대항하는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러한 동맹의 내부에는 계급적 이해 관계가 얽혀 있어 갈등의 여지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 수입 대체 산업 정책이 여러가지 면에서 한계에 도달하자 정치적 압력을 받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군부 쿠데타에 의한 군사 정권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1964년에 브라질, 1966년에 아르헨티나, 1973년에 칠레에 등장한 군사 정권이 이를 잘 보여 준다. 이들 정권은 노동자 계급을 정치적 · 경제적으로 배제하고 민중 부문을 통제하였으며 정치 활동을 최대한 억제하고 서구 유럽의 경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경제를 부활시키고자 하였다. 특히 다국적 기업과의 관계를 밀착시키기 위해 국제적 금융 기관과 거래를 활발히 하였는데, 이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주로 미국에서 공부한 젊은 엘리트들을 동원하였다.
이후 수출 주도형 산업화 정책이 라틴 아메리카의 발전 전략으로 확실한 자리를 잡으면서 외채 위기가 발생하였다. 여러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그들의 수출 능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외채를 과도하게 빌렸는데 이 차관으로 건설한 새로운 설비를 가동하려는시점에 세계 경제가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수출로 벌어들인 금액의 약 30% 이상을 이자로 지급하여야 했고 외채를 갚기 위해 국내의 수요를 줄여 나갔으며 경제 성장 속도도 갑자기 떨어졌다.
20세기에 들어선 뒤 라틴 아메리카 각국에서는 민족주의가 대두하고 후진성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노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최근 들어 정치적으로는 군사 정권에서 민간 정권으로 정권이 이양되어 서서히 민주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일부 국가에서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호전으로 변화의 징후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베네수엘라와 페루 등과 같이 실업 · 마약 · 테러 · 고질적인 인플레이션 · 외채 상환 불능 등의 혼란이 지속되고 있는곳도 있다.
Ⅲ . 문 화
토착의 인디오 문화와 식민자의 이베리아 문화 및 수입 노예의 아프리카 문화로 구성되어 있는데,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인디오 문화〕이 문화가 우세한 지역을 '인디언-아메리카 라고 하는데, 그 지역은 아즈텍 문명과 잉카 문명을 낳은 멕시코 고원과 안데스 산지이다. 구체적으로 멕시코 중 · 남부, 과테말라,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등 주로 고지에 폐쇄적인 공동체를 형성한 농민 및 브라질과 콜롬비아의 아마존 강 유역, 베네수엘라의 오리노코강 유역, 중앙 아메리카의 카리브해 연안 등에 거주하는 인디오 부족민들이다. 이들은 옥수수를 주식으로 생활하며, 주로 농업에 종사한다. 이곳은 정복 이전의 행정 구분이 현재에도 남아 있고, 혼혈이 심하여 이른바 메스티조 문화를 형성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메스티조 문화는 유럽 문화가 약 3세기에 걸쳐 인디오 문화와 혼합된 것으로 메스티조가 특히 많은 멕시코나 콜롬비아를 메스티조 아메리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오늘날 이 메스티조는 라틴 아메리카 문화 · 사회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이베리아 문화〕 이 문화가 지배적인 지역을 '유로-아메리카' 라고 하는데, 주민들 대부분은 칠레 · 아르헨티나 · 우루과이 · 브라질 남부에 거주한다. 정복 직후 정착한 스페인 · 포르투갈인과는 달리, 19세기에 유럽에서 건너온 이민의 자손이 대부분이며 특히 이탈리아 · 스페인 · 독일 · 영국 · 유고슬라비아 출신자가 많으며 유대계도 적지 않다. 이들은 라틴 아메리카에 동화되는 한편 인디오 문화와 접촉이 적었기 때문에 현재에도 남유럽적인 생활이 영위되고 있으며, 출신국 단위의 조직을 유지 · 발전시켜 조상의 땅에 대한 귀속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사회 · 경제적으로 상층 계급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아프리카 문화〕 이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지역을 '아프로-아메리카' 라고 하는데, 주로 사탕수수 재배를 위해 흑인 노예가 수입되었던 카리브해 주변 및 브라질 연안 등지이다. 음악과 춤을 비롯하여 아이티에 전해진 부두교나 브라질의 칸돔블레 · 마쿰바 등 아프리카의 민속 종교가 존속하여, 아프리카 문화를 짙게 갖고 있다.
이베리아 그리스도교 문화라는 문화적 전통을 공유하는 라틴 아메리카이기는 하나 이를 기층 문화로 분류하면 이렇듯 세분화가 가능하다. 이는 도래(渡來) 문화의 차이뿐만 아니라, 각지 각 시대에 이를 수용한 신대륙의 문화 · 사회 환경의 차이도 반영한 것이다. 근래 민족주의의 고양과 더불어 라틴 아메리카 문화 전통의 근원을 인디오 문화와 역사에서 찾으려는 이른바 인디헤니스모 운동이 활발한데, 이 운동을 국제적으로 유명하게 한 것은 리베라, 시케이로스, 타마요 등 멕시코의 화가들이다. 현대 문학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문학자로는 노벨상 수상 시인인 칠레의 네루다, 과테말라의 아스투리아스와 아르헨티나의 보르헤스, 브라질의 아마도 등이 있다. 이들은 라틴 아메리카의 4대 문호로 꼽힌다. 한편 아르헨티나의 탱고, 브라질의 삼바, 쿠바의 룸바 · 맘보 등은 세계에 널리 애호되고 있는 민족 음악이다.
IV. 가톨릭 교회의 역사
라틴 아메리카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된 시기는 대체로 콜럼버스 상륙에서 잉카 제국의 멸망(1531)에 이르는 40여 년이다. 1493~1494년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 계약되었고 교황청으로부터 승인된 합의에 의해, 이 신대륙 내에서 새로 발견된 서쪽 지역은 스페인이, 동쪽 지역은 포르투갈이 주민들을 그리스도교화하여야 한다는 의무가 맡겨졌다. 콜럼버스는 그의 제2차 탐험 때 12명의 선교사와 동행했고, 1511년에 안틸 제도(Antilles)에 최초로 교구가 설립되었다. 전교를 담당한 사람들은 주로 프란치스코회 · 예수회 · 도미니코회 · 카푸친회 등의 수도자들이었다. 대륙 정복의 역사와 함께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되었던 이 지역 가톨릭 교회는 원주민 사회에 문화 · 종교적 측면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었고 한편으로는 억압자의 편에서, 또 한편으로는 원주민의 편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이 과정은 라틴 아메리카의 복음화 과정이며 동시에 대륙의 문명화 과정이기도 하고, 스페인과 포르투갈, 즉 라틴 교회의 문화를 이식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식민지 통치하의 교회〕 정복 초기의 교회는 왕권에 종속되어 식민지에서의 모든 활동이 통제되었다. 이는 새로운 영토에서의 포교상의 왕실 보호권(patronato real)정책에 의한 것으로, 식민지에서의 교회는 왕권의 지휘 아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미 13세기 로마 교황에 의해 포르투갈에 부여된 권한인데, 1493~1510년 사이에 발표된 교황 칙령으로 스페인에도 부여되었 다. 이에 따라 스페인 국왕은 식민지의 주교들 및 기타 고위 성직자들의 임명권 · 교구 설정권 · 선교사 파견권 등을 가지게 되었고, 교회의 재산을 관리함과 동시에 재정을 담당하는 권한도 가지게 되었다. 이를 기초로 하여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는 1524년에 인도 제국 자문 위원회라는 아메리카 식민지 담당 특별 행정 기관을 구성하였다. 따라서 스페인 국왕은 식민지의 모든 문제들 즉, 종교 · 경제 · 관료 · 정치 · 군사 등의 제반 문제들에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 결과 라틴 아메리카의 교회는 로마 교회와 직접적인 관계없이 스페인 국왕과 그들이 임명한 성직자들의 지도 아래 놓인 국가 교회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식민지의 복음화라는 이름 아래 수행되었는데 결국 정복의 과정은 복음화의 과정이라는 등식을 성립시켰다. 결과적으로 이 시기의 교회는 정복자의 착취적인 식민지 정책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었으며 따라서 정복자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이러한 국가 교회 형태는 19세기 초까지 지속되었다.
반면 원주민을 비인간적으로 착취하는 정책을 원주민의 편에서 비판하는 일부 수사들도 있었다. 예컨대 도미니코회 신부인 바르톨로메 드 라스 카사스(Bartolome de Las Cassas)는 원주민 착취의 전형적인 체제인 엔코미엔다(encomienda)를 비판하였고 그리스도교적 정신에 입각하여 식민지 정책을 비판하는 많은 저술들을 남겼다. 1767년 모든 스페인 영토로부터 추방당한 예수회도 같은 경우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라틴 아메리카 교회의 예언자적 전통을 형성하였고 최근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영국과 북아메리카에 의한 종속 시대의 교회〕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라틴 아메리카의 대부분의 국가가 독립하였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하였다. 이에 따라 새로운 교역국으로 영국과 미국을 선택하는 한편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19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경제적 근대화 운동은 세계의 자본주의 중앙 국가들의 경제 계획에 의해 진행됨으로써 라틴 아메리카 를 새로운 형태의 종속 상태에 빠뜨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는 전통적 가치와 보수적 사회 정책을 강력하게 추구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즉 근대화가 추진되는 과정에서 교회와 국가 권력 사이의 협조 관계가 깨어지고, 교회의 영향력을 제거하려는 반교회주의와 과격한 세속주의적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따라서 교회는 지금까지 유지해 온 교회의 위상을 보호하고자 노력하였던 것이다. 물론 교회의 일부는 독립 투쟁의 과정에 참여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독립 이후 도전하는 이러한 일련의 상황에 직면한 교회는 근대주의를 반대하였고 보수적 정치 권력과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자하였다. 국가에 종속되었던 이전의 관계는 청산되었지만, 거꾸로 강력한 보호 · 지원 세력이 없어짐으로써 교회는 자기 보호적 태도를 보이게 된 것이다. 선진 자본주의의 발전 사상과 함께 라틴 아메리카에 진출한 프로테스탄트의 도전에 직면하게 된 것도 이 시기이다.
1929년에 불어 닥친 세계 경제 공황을 기점으로 이러한 상황은 조금씩 변하게 되었다. 즉 19세기 초부터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 자유주의가 경제 공황으로 비판을 받는 한편, 교황 레오 13세의 사회 회칙을 바탕으로 하는 가톨릭 교회의 대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국가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한군부의 교회에 대한 호의적 태도로 가톨릭 교회는 부흥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교회는 자신을 국가 권력과 한 체제 안에 묶고 평신도의 활동을 첨가하여 라틴 아메리카를 다시 가톨릭 국가로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미미하지만 사회 문제에 대한 교회의 참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때 라틴 아메리카 주교 회의(CELAM)가 결성되었다.
〔미국에 의한 종속과 해방 신학의 발전〕 1960년대에 라틴 아메리카 교회는 종속적 자본주의가 심화되어 위기가 고조되는 세 번째 시기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때 교회는 억압적인 정치 체제와 다국적 기업과 지배 계층에 의한 민중의 극심한 수탈 구조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해방 투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즉 사회 구조적 악이 만연하는상황에서 '교회는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이러한 질문을 사회적으로 실천에 옮긴 시기인 것이다. 1968년 콜롬비아 메데인에서 개최된 제2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 회의는 이러한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 주는 예이다. 이 회의는 '신식민지화된 라틴 아메리카의 현실' , '국제적 긴장 관계' , '국제 상업주의의 모순과 국제적 빈부 격차 , '국제적 독점 기업' , '금융 제국주의' 등 체제 비판적 용어들을 수용하였다. 그리고 "이 세상의 해방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연결된다"는 점을 인정하고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즉 부분적 문제 해결에 의한 개량적 조치를 요구하던 이전까지와는 달리 근본적인 체제의 모순을 지적하고 나선 것이다. 교회 상층의 이러한 변화는 그리스도교인들의 해방 투쟁을 크게 고무시켰으며 해방 신학의 급속한 발전을 일으켰다. 가난한 이들의 해방을 주요 주제로 삼는 해방 신학은 서구 신학과의 결별을 선언하였고 해방 투쟁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한편 교회의 이러한 실천은 수없이 조직된 기초 교회 공동체(Basic Ecclesical Community) 운동을 통해 이루어졌다. 사목적 필요에 의해 시작된 이 운동은 이후 다양한 영향력을 가지면서 크게 성장하였고 기초 교육에서 해방을 위한 투쟁에 이르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 운동은 사회적 모순의 극복에만 국한되지 않고 교회의 쇄신에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교계 중심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가톨릭 교회를 평신도 중심의 교회로 변화시키는 데 중요한 촉진제가 되었던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새로운 복음화〕 현재 라틴 아메리카는 민주화 과정 또는 민주 제도 적응 과정에 놓여 있다. 또 특유의 문화 종교 유산을 바탕으로 자기 신원에 대한 새로운 각성과 긍정의 과정 그리고 사회 정의에 대한 의식화 과정에 있다. 이 미묘한 사회 정치적 상황에 더하여, 여러 나라에서는 모택동 주의에 젖은 테러리스트들의 맹목적인 폭력이나 마약 밀매업자들의 폭력, 다국적기업이나 무자비한 사람들의 원주민들에 대한 공격 행위들이 자행되고 있다.
1990년대 들어서 이 대륙의 지역 교회와 보편 교회에 모두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라틴 아메리카 복음화 500주년 기념과 제4차 라틴 아메리카 선교 대회(COMLA)였다. 복음화 500주년 기념 준비 작업은 "새로운 복음화"의 촉진과 가
정 사목의 활성화, 신흥 종교 운동에 대한 대처 방안 등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며, 신앙의 쇄신과 사도직 투신이 깊숙이 이루어졌다. 수도 · 사제 성소의 증가는 남미 교회의 확고한 희망의 표징이 되었다.
1991년 2월 3~8일, 페루 리마에서 개최된 제4차 라틴 아메리카 선교 대회는 교회의 보편 사명인 선교를 촉진시키는 모임으로, 신자들의 가슴에 신앙의 선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 대회가 채택한 결의안에는 선교 의식의 활성화와 교육, 조직 등이 강조되어 있다. 라틴 아메리카 복음화 500주년 기념은 1992년 10월 12~20일에 산토-도밍고에서 열린 제4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 회의 총회에서 그 절정에 올랐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2년 10월 11일 산토-도밍고를 방문하여 복음화 500주년 기념 미사를 집전하고, 선교사였던 에제키엘 모레노 주교의 시성식을 거행하였다. 또 12일에는 라틴 아메리카 주교 회의 제4차 총회에 참석하여 500주년 기념을 "우리 모두와 라틴 아메리카교회를 위한 은총의 시간"이라고 규정 짓고 제4차 총회의 핵심 주제인"새로운 복음화, 인간의 진보, 그리스도교 문화" 를 역설하였다. 그리고 "구세계로부터 신앙을 전해 받은 신세계 라틴 아메리카는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세계에 전파할 준비를 하여야 한다" 고 호소하였다.
정복의 역사와 함께 진행된 라틴 아메리카의 그리스도교는 초기에 강제 개종과 속성 영세, 십일조 징수 등 정복 정책과 결합된 큰 오류들에도 불구하고 많은 원주민 영세자를 얻는 데 성공하였다. 1511년 최초의 교구가 설립되는 등 교계 제도와 함께 교회가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이후 19세기에는 보수 정치 권력과 동맹 관계를 유지하기도 하였던 교회는 1960년대 이후 급격한 변화와 발전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진보적 변화가 전면적인 것은 아니고, 보수적이며 점진적인 개혁 노선을 견지하는 입장이 교회안에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의 교회는 비인간적 삶을 강요하는 정치 · 경제적 체제의 반복음적 모습을 인식하였고 그리스도교의 해방 전통을 라틴 아메리카의 교회에 다시 복원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1991년 통계에 의하면 라틴 아메리카에는 총인구의 88.4%에해당하는 4억 181만 7,000천여 명의 신자에 729개의 교구와 26,385개의 본당이 있으며, 추기경 14, 대주교 119, 주교 489, 신부 53,961(교구 소속 29,591, 수도회 소속 24,370)명이 있다. (→ 기초 교회 공체 ; 라스 카사스 ; 해방 신학)
※ 참고문헌 Alan Gillbert, Latin America, Routledge, New York, 1990/Enrique Dussel ed., The Church in Latin America 1492~1992, Orbis, Maryknoll, New York, 1992 / Edward L. Cleary, Crisis and Change, Orbis, Maryknoll, New York, 1985(오경환 역, 《중남미 교회의 위기와 변화》, 가톨릭출판사, 1988)/ 김춘호, 《라틴 아메리카 해방 신학》, 분도출판사, 1990/ 유스토 L. 곤잘레스, 서영일 역, 《중세 교회사》, 은성, 1987/後藤政子, 진경희 역, 《라틴 아메리카 현대사》, 미래사, 1985/ 로날드 문크, 강문구 . 김 형수 역, 《라틴 아메리카 정치 경제학》, 한울,1991/ 《세계 대백과 사전》, 동서문화, 1991/《한국 천주교회 연감》,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4. 〔朴眩準〕
라틴 아메리카
〔영〕Latin A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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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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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야 문명의 태양 신전(멕시코 팔렝케 소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