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汎)영국 성공회 교회 회의' (Pan-Anglican Synod)라고도 불리는 영국 성공회 주교들의 모임. '람베드 회의'라는 말은 영국 런던 자치구인 람베드에 위치한 캔터베리 대주교의 관저인 람베드 궁에서 회의가 소집 · 진행된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영국 성공회' 란 용어는 영국 교회(영국 국교회)를 비롯하여 스코틀랜드와 미국의 감독 교회(Episcopal Church)를 포함한 세계의 모든 곳에 퍼져 있는 독립 교회, 자치 교회들과 같은 지역 교회들과 캔터베리 대주교 관할권에 속하여 있는 관구들과 교구들의 총칭이다. 이 공동체는 중앙 집권적 교계 체제를 채택하고 있지 않지만 캔터베리 대주교의 지도권을 인정하고 16세기에 작성된 성공회의 《공동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에 담겨 있는 교리와 전례에 동의함으로써 결속되어 있는 교회 연맹과 교회 연합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1867년부터 오늘날까지 10여 년 간격으로 12차례에 걸쳐 소집된 람베드 회의는 캔터베리 대주교가 소집하여 그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교회의 이름으로 교리를 정의하거나 법률을 제정하고 정책을 집행하는 기구가 아니라 영국 성공회의 전체 주교들이 의견을 교환하고 통일하는 자문 기관일 뿐이다. 그러므로 친교 · 증거 · 화해와 같은 주제를 설정하고 교회의 내부 문제를 비롯하여 신학 · 경제 · 사회 · 윤리 · 영성 · 종교· 국제에 관련된 문제들을 다루고, 회의에서 합의된 사항들은 회칙이나 결의문 또는 보고서의 양식으로 발표된다. 하지만 지역 교회 안에서의 구속력은 없다. 다만 지역 교회의 주교들이 관할 구역에서 교회 회의(synod)나 성직자 총회(convocation)를 통해 지역 상황에 맞게 적용하여 실천할 수는 있다.
〔기 원〕1800년대 중엽에 미국 감독 교회의 주교가 캔터베리 대주교 서머(J.B. Summer, 1848~1862)에게 영국의 모 교회(母敎會)와 미국 교회의 친교를 증진하기 위해서 영국 성공회의 모든 주교들이 참석하는 교회 회의를 소집할 때가 되었다는 희망을 표명하였다. 1860년에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논문을 엮은 《평론》(Essays and Reviews)이 발간되고, 1861년에는 캐나다 나탈(Natal) 교구의 주교 콜렌소(J.W. Colenso, 1814~1883)가 영벌(永罰)을 부인하고 모세 오경의 저자성과 역사성을 거부함으로써 교리논쟁이 일어났다. 그런데 자유주의 신학은 교회의 단죄를 받았으나 캐나다의 주교들은 이런 두 가지 사건에 충격을 받아 영국 성공회의 교회 회의를 통해서 정통 신앙 교리를 위협하는 사상의 재등장을 막고, 주교들의 의견 교환을 위해서, 전체 교회 회의의 소집을 제의하였고, 미국 주교들도 이러한 회의에 참석하겠다는 적극적 반응을보였다.
캐나다 교회의 제안은 캔터베리 관구와 요크(York) 관구의 성직자 총회에서 승인되어 캔터베리 대주교 롱리(C.T. Longley, 1862~1868)는 모든 주교들에게 초대장을 발송하였다. 1867년 9월 24일 영국,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미국과 영국의 식민지 국가에서 144명의 주교들 중 76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제1차 람베드 회의는 4일 동안 콜렌소 분규와 같은 교회 내부 문제들에 대한 토론을 끝내고 13개 항으로 작성된 결의 사항과 사목 교서<모든 신자들에게 보내는 교서>(Address to the Faithful)를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영국 성공회의 일치는 성서가 가르치고 초대 교회가 옹호하며, 사도 신경 · 니체아 신경 · 아타나시오 신경에 요약된 신앙 교리를 간직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규정하고 캔터베리 대주교를 중심으로한 영국 성공회 공동체의 일치를 강조한 것이었다.
처음에 영국의 많은 주교들은 람베드 회의가 성직자 총회의 권위를 약화시키지 않을까 염려하여 냉담한 반응을 보였으나, 제2차 람베드 회의(1878)에는 100여 명의 주교들이 참석하여 일정한 간격을 두고 소집되는 정기 모임으로 발전시키기로 결의했다. 이로써 람베드 회의는 국제적 성격의 집회가 되었고 조직도 확대되었다. 제4차 람베드 회의(1897)는 상설 기구로 '람베드 자문단' 을 구성하였고, 제8차 람베드 회의(1948)는 '선거 전략 고문 회의' 를 신설했으며, 제9차 람베드 회의(1958)는 두 위원회를 운영하는 총무를 임명했다. 또 제10차 람베드 회의(1968)는 두 위원회를 '영국 성공회 자문위원회' 로 통합하여 런던에 본부를 두었으며, 이 회의부터 주교가 아닌 신학자들과 교회 실무자들이 자문 위원으로 참석했고, 다른 그리스도교 대표들이 참관인으로 초대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영국 성공회의 교회 문제만을 다루었던 람베드 회의는 점차로 의제를 범(汎)그리스도교적 관심사로 확대하였는데, 회의의 주요 관심사들 가운데 하나는 분열된 그리스도교의 일치 회복이었다. 145명의 주교들이 참석한 제3차 람베드 회의(1888)는 영국 성공회가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들과 일치를 위하여 기본으로 삼는 4가지 주요 교리를 담고 있는 '람베드 4원칙' (Lambeth Quadrilateral)을 선언하였다. 이 강령은 1886년에 미국 감독 교회 성직자 총회가 시카고에서 선언한 '시카고 4원칙' 을 수정 · 채택한 것인데, 제6차 람베드 회의(1920)에서 <모든 그리스도교 백성들에게 호소함>(Appeal to All Christian People)을 통해서 재확인되었다. 이 호소문은 그리스도교 일치 운동사에 있어서 귀중한 문헌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람베드 회의는 영국 성공회가 그리스도교 일치 운동에서 중요한 공동체로 떠오르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제7차 람베드 회의(1930)는 영국 성공회가 가톨릭적 고교회파(高敎會派)와 복음주의적 저교회파(低敎會派)를 포함하는 교회 조직을 갖추고 있으며, 국가 교회 · 지역 교회 · 관구 · 교구들이 캔터베리 대주교와 일치하여 람베드 회의 안에서 주교들이 서로 의견을 나누면서 존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국 성공회는 교회 일치의 본보기라고 선언하면서 람베드 회의의 교회 일치적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다른 그리스도교들과의 관계를 담당하는 위원회를 구성하여 이후부터 제8차 모임(1948)에 이르는 람베드 회의들은 구가톨릭교와 스웨덴 루터교와 같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들과 친교와 일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가톨릭과의 관계〕 제10차 람베드 회의 때부터 참관인으로 대표단을 파견한 가톨릭은 대표단 단장이 개막식에서 교황의 메시지를 대독(代讀)하였다. 영국 성공회와 가톨릭 교회의 관계에 관한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된 이 회의에서는, 교황 바오로 6세 (1963~1978)의 회칙 <인간생명>이 토의되었고, 성공회의 캔터베리 대주교좌와 가톨릭 교회의 교황좌를 연구하는 위원회는 거부되었지만 교황이 재일치된 그리스도교의 수장(首長)이 될 수도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후의 람베드 회의들은 영국 성공회와 가톨릭 교회의 신학적 대화를 승인하였으며, 제12차 람베드 회의(1988)는 합의된 신학 내용을 담은<최종 보고서>(Final Report)에 대한 영국 성공회 공동체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최종 견해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 개선의 과정 속에서 교황청은 영국 성공회와 가톨릭 교회 사이를 가로막는 심각한 문제를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영국 성공회의 공동체에서 제기하고 있는 여성의 사제 서품에 관한 문제였다.
제10차 람베드 회의에서는 여성 사제 문제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이후 영국 성공회 공동체의 일부에서는 여성 사제가 등장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제11차 람베드 회의(1978)의 주요 의제 중 하나가 여성의 사제 서품에 관한 문제였다. 교황 바오로 6세는 교황청 참관 인단의 단장이 대독한 연설에서 여성 사제 서품에 대한 강경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면서 이 문제는 두 교회의 일치 증진에 '새롭고 중대한 장애' (Information Service, No. 29, 21)가 될 것이라는 걱정을 표명하였다. 캔터베리 대주교 런시(R. Runcie)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제12차 람베드 회의의 결과를 설명하는 편지에서 영국 성공회 안에서는 여성 사제뿐만 아니라 여성 주교에 관한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고 전하면서 람베드 회의는 지역 교회와 관구 및 교구에 대한 관할권을 갖고 있지 못하며 이 문제로 영국 성공회의 공동체가 분열될 것을 걱정하였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답장에서 캔터베리 대주교의 걱정과 입장을 이해하지만 람베드 회의가 여성의 사제 서품 및 주교 서품에 관한 문제를 다룬 것은 "두 교회 사이에 있는 화해의 길에 걸림돌을 놓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Information Service, No. 70, 60)고 염려하였다. → 영국 국교회 ; 교회 일치 운동)
※ 참고문헌 G.K.A. Bell, Documents on Christian Unity, vols. 4, London, Oxford Univ. Press, 1924~1958/ A.H.G. Stephenson, The First Lambeth Conference 1867, London, Church Historical Society, 1967/ The Secretariat for Promoting Christian Unity(The Pontifical Council for Promoting Christian Unity), Information Service, No. 6(1969. 1), No.39(1979. I~I), No. 70(1989. II) / John R.H. Moorman, A History of the Church in England, 3rd ed., London, Adam & Charles Black, 1976/ Ruth Rouse · Stephen Charles Neil eds., A History ofthe Ecumenical Movement 1517~1948, vol. 1, 3rd ed.,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86/Harold E. Fey ed., The Ecumenical Advance. A History ofthe Ecumenical Movement 1948~1968, vol. 2, 2nd ed.,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86/ Edward L. Cutts, A Dictionary of the Church of England, 3rd ed., London, Society for Promoting Christian Knowledge, 1908. 〔金聖泰〕
람베드 회의
會議
〔영〕Lambeth con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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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

1958년에 개최된 람베드 회의에 참석한 고위 성직자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