랍비 문학 - 文學

〔라〕litterae rabbi · 〔영〕rabbinic liter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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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랍비.

회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랍비.

기원전 1세기부터 서기 7세기에 활약한 랍비(율법 학자)들이 남긴 문헌의 총칭. 랍비 문학은 미쉬나(Mishna), 토세프타(Toseta), 탈무드(Talmud), 미드라쉬(Midrash) 등의 다양한 문서들로 되어 있다. 랍비 문학의 각 책들은 모두 여러 세대에 걸쳐 랍비들이 수집하고 편집한 자료들, 즉 '할라카' (율법), '하가다' (전설), '미드라쉬' (성서강해), '타르쿰' (성서 번역), 기도 등이다. 랍비 문학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모든 자료들을 최종적으로 편집한 장본인들이 바로 현자(賢者)라고 불린 랍비들이었기 때문에 다른 용어로 '현자들의 문학' (literature ofthe sages)이라고도 한다. '탈무드' 라는 용어가 넓은 의미에서 랍비 문학에 속한 여러 가지 문서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탈무드 문학' (Talmudic literature)으로 호칭될 때도 있다. 유대인의 정신적 보고(寶庫)인 랍비 문학의 언어는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되어 있다. 랍비 문학의 형성은 원래 팔레스티나에 그 기원을 두고 있지만 3세기부터는 바빌론에서도 발전되었다.
〔역사적 배경〕 유대 역사에서 '미쉬나와 탈무드 시기' 로 불려지고 있는 5~6세기는 랍비 자료의 문학적 형성이 실제적으로 꽃핀 시기였다. 오늘날의 미쉬나, 토세프타, 탈무드, 미드라쉬의 문학적 형태가 바로 이 시기에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랍비 문학의 내용에 있어서 그 씨앗들은 이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뿌려졌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랍비 문학의 자료들은, 바빌론으로 잡혀 갔던 유대인의 포로 귀환(기원전 538)과 제2 성전 건축(기원전 516) 시기로부터 예루살렘의 멸망(70)에까지 이르는, 유대인의 제2 공화국 시절의 여러 상황 속에서 구두로 전승되어 온 유대인의 사상 · 관습 · 기록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2 유대 공화국 시절에 유대인들은 대부분 페르시아(기원전 536~332), 알렉산더와 헬라 군주들(기원전 332~141), 그리고 마지막으로 로마 정복자들(기원전 63~서기 70)의 지배를 받았다. 유대인들이 완전한 자치 정부를 경험한 시기가 있었다면 그것은 하스모네 가문이 통치하던 80년 간(기원전 141~63)이 전부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자유롭지 못했던 이 기간 동안에 에즈라를 필두로하여 많은 현자들은 후에 랍비 활동의 기초가 될 교육과 법률 제정을 위한 일들을 성전과 산헤드린을 중심으로 펼쳐 나갔다.
그 후 유대인들은 1세기 후반부터 미쉬나가 경전화된 2세기 말경에 이르는 동안, 로마 사람들과 두 차례의 전쟁을 치렀다. 첫 번째 유대 전쟁(66~74) 기간에 포로로 잡힌 유대인의 수가 예루살렘에서만 97,000명이었으며, 티투스(Titus)에 의하여 죽은 자가 110만 명이나 되었다. 두 번째 유대 전쟁인 바르 코크바(Bar Kokhba) 항쟁(132~135) 때에는 58만 명의 유대인이 전사하였고 성채 50곳과 마을 985곳이 폐허가 되었다. 이 시기에 유대인들은 땅과 재산을 몰수당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살던 도시에서조차 쫓겨나게 된 경우가 허다하였다. 전쟁 이후 유대 지역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은 갈릴래아 지역에 모여 살게 되었다. 이 시기에 유대인들은 정치적 · 종교적인 면에서도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유대인의 자치 정부는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멸망되는 순간부터 붕괴되었다. 산헤드린의 직무나 사두가이파의 권위는 더 이상 예루살렘에서 인정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유대 사회는 정치적 · 경제적 · 사회적인 면에서 몰락하게 되었고 종교 자체도 로마의 관제 종교로부터 억압받게 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 시기에, 비록 로마 당국의 비호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70명의 장로로 구성된 랍비 학교가 얌니아(Jammia)에 세워져 유대인의 삶을 관장하게 되었다. 첫 번째 유대 전쟁 직후 얌니아에 설립된 랍비 학교는 제2차 유대 전쟁이 끝나자 인구 이동에 따라서 갈릴래아로 옮겨졌다. 170년경까지 우사(Usha)에 있었던 랍비 학교는 벳 세아림(Beth Shearim)과 셉포리스(Sepphons), 그리고 마지막으로 3세기 중엽부터는 티베리아(Tiberias)에 세워지게 되었다. 미쉬나와 토세프타의 성문화는 이러한시대적 배경에서 이루어졌다. 2세기 말경 랍비 유다는 랍비 학교를 중심으로 그 동안 이스라엘 역사에서 구두로 전승된 율법들을 수집하여 첫 탄나임(Tannaim) 문학을 편찬하였다.
3세기는 족장 제도가 세습화되고 랍비 제도가 출현함으로써 팔레스티나의 유대교가 구조적으로 강화된 시기였다. 그러나 유대인을 포함하여 로마 제국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 212년의 황제 칙령이나 380년 그리스도교의 로마 제국 국교화는 팔레스티나의 유대교에 심각한 타격을 주게 되었다. 유대인 족장 제도는 415~429년 사이에 폐지되었다. 팔레스티나 탈무드는 이 같은 시기에 최종적으로 편찬되었다. 그 후에 유대인은 638년 예루살렘이 아랍인의 침공에 함락될 때까지 페르시아(614~626)와 동로마 제국 통치자들의 지배 아래있게 되었다.
한편, 바빌로니아는 기원전 586~538년의 바빌론 유배 이후에도 계속 유대인들의 중요한 거주지가 되었다. 70년 예루살렘이 멸망당한 직후에 바빌로니아에는 망명족장의 영도하에 자치 정부가 수립되었다. 바르 코크바 항쟁과 더불어 많은 랍비들은 바빌로니아로 망명하였다. 따라서 바빌로니아는 유대교의 역사에 있어서 점차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게 된 것이다. 바빌로니아의 유대인들은 226년경 사산 왕조(Sassanian dynasty)가 정권을 잡고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음으로써 250년까지 일시적인 곤경을 겪었다. 그러나 5세기 중엽 이후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 유대인 자치 정부는 폐지되었고 망명 족장은 처형당하였으며, 회당들은 폐쇄 조처를 당하였고, 많은 랍비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편찬된 때는 바로 이 같은 시기였다. 사보라임(saboraim), 즉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편집자들은 랍비 학교를 중심으로 교육되던 조상들의 교훈과 율법에 대한 해석을 모아 그들의 정신적 유산을 보존하려고 했던 것이다. 사보라임 시대는 바빌로니아 학교의 책임자들을 일컫는 게오님(geonim) 시기를 거쳐 11세기까지 계속되었다.
640년경 아랍이 팔레스티나와 바빌로니아를 함께 통치하면서 바빌론의 위치는 팔레스티나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족장 망명 제도가 부활되었고 오늘날의 바그다드인 수라(Sura)와 품베디타(Pumheditha)의 랍비 대학들은 그 이름을 널리 떨치게 되었다. 그 후 칼리프 제국이 정치적으로 쇠퇴하게 되자 유대인들은 이집트, 북아프리카, 스페인 등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망명 족장의 영향력도 점차 쇠퇴하고 랍비 학교도 차차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099년 십자군의 예루살렘 점령은 유대인들에게 랍비 문학이 태동된 시대에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랍비 학교 제도〕 랍비들이 구전된 율법을 수집하여 편집하고, 랍비의 사상을 그 시대에 알맞게 가르치고 전파한 것은 학교를 통해서였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율법 교육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랍비 학교 제도가 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2세기 중엽 이후였다. 6~7세의 남자 어린이들이 다녔던 초등 '서원' (beit sefer)은 관습에 따라 회당 또는 부속 건물에 위치해 있었다. 서원에서 아동들은 주로 경전의 본문을 읽는 법을 배웠다. 처음에는 석판을 이용하여 알파벳을 배우고 그 다음에는 두루마리의 일부를 읽는다. 그 다음 읽기 시작하는 책은 레위기였다. 학업 과정은 이론상, 경전 모두를 타르쿰과 더불어 공부하도록 되어 있었다. 학교에서 주로 사용되는 교수 방법은 교재를 계속 반복하여 큰소리로 읽는 것이었다.
10세가 되어 공부를 더 계속하고자 하면 베이트 미드라쉬(beit midrash)나 베이트 탈무드(beit talmud)라는 학원에 입학하여 미쉬나 교사에게 유대인의 전승과 할라카의 초보 과정을 교육받았다. 중등 교육 과정에서도 주로 사용되는 교수 방법은 암기였다. 학생들은 암기하기 쉽도록 부호에 따라서 노래부르게 된 교육 자료들을 소리내어 반복하도록 훈련받았다. 학생들은 비록 교과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무조건 외워야 했다. 학생수가 많은 경우에는 전승 자료들을 상당량 외우고 있는 '탄나' (Tanna)를 고용하여 학생들에게 기계적으로 암송하도록 훈련시키기도 하였다.
한편, 4세기에 랍비 학교는 바빌로니아에서 '칼라'(kallah)와 '피르카' (pirqa) 제도로 그 기능이 보충되기도 하였다. '칼라' 는 랍비 학교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의 교육 대회 같은 제도였다. 이 같은 모임들은 훗날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최종 양식을 형성하는 데 특별한 의의를 지니게 되었다. 반면에 '피르카' 는 주로 할라카와 부분적으로는 하가다에 대한 평신도 강좌였다. 랍비들의 이 같은 개인적인 강좌 모임은 평신도에게 랍비적 영성을 심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학교 공부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스승을 섬기는 문하생으로서의 수련 기간(talmid hakam)이었다. 문하생으로서의 수련은 정해진 기간이 없었다. 이 기간은 어느 제자이든지 율법 문제에 있어서 독립적이며 자유스러운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되어 '랍비' 라는 칭호와 더불어 안수(semikhah)받게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안수는 원래 어느 랍비든지 자신의 제자에게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안수를 줄 수 있는 랍비들은 산헤드린에서 허락을 받아야 했고 후에 그 수가 제한되었기 때문에 안수권은 점차적으로 족장의 권한으로 제한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이 같은 안수 제도는 4세기 중엽부터 사라지게 되었다. (→ 미드라쉬 ; 미슈나 ; 타르굼 ; 탈무드)
※ 참고문헌  M. Adler, The Worldofthe Talmud, New York, Schocken Books, 1968/ S. Safrai ed., The Literature of the Sage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7/ H.L. Strack · G. Stemberger, Introduction to the Talmud and Midrash, Cambridge, T & IClark, 1991. 〔張春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