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 세례명은 가롤로. 1767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1792년 렌(Rennes) 교구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후, 극동 지역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 후 베트남의 통킹(Tonkin) 선교사로 전교하던 중 1795년에 본국으로 돌아갔으나, 나폴레옹 황제에 의해 다른 신부들과 함께 로마로 추방되고 말았다. 그러나 또 다시 1812년에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로마에서 추방된 랑글루아는, 렌 교구에서도 은퇴하게 되었고, 이후 경찰의 감시를 받는 입장이 되었다.
나폴레옹이 퇴위하고 부르봉(Bourbon) 왕조가 복귀하자 그는 동료 신부들과 신학교의 건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여, 1815년 3월 2일 루이 18세로부터 신학교 인가를 받았다. 또한 1823년에는 중국 및 극동 아시아 지역에서의 선교사들의 전교 활동에 관한 내용을 다룬 총 8권 분량의 책을 완간하였는데, 이 책에는 1767~1820년 사이에 활동한 선교사들의 서한과 그들의 파견 지역, 그리고 연대기가 차례로 수록되어 있다.
한편 랑글루아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이던 1827년에 로마 교황청 포교성성의 장관 카펠라리(Cappellari) 추기경으로부터 파리 외방전교회에 한국 포교지를 위임하고 싶다는 내용의 서신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선교사의 부족, 조선 입국로의 불확실, 파리 외방전교회 주교들의 승인 여부 불투명, 불충분한 재력 등의 이유를 들어 거절하였다. 즉 한국 진출을 위해서는 마카오(Macao)에 주재하고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 대표부로부터 한국 입국에 관한 정보를 들어야 하며, 또한 한국을 전담하는 일에 대하여 파리 외방전교회 모든 주교들의 의견 수합이 있어야 하므로 시일이 필요하다고 하며 한국 포교지 맡기를 주저하였다.
그 후 랑글루아 신부는 각지의 주교들에게 서신을 보내어 조선 전교의 희망 여부를 묻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파리 외방전교회의 일원으로서 시암(Siam, 현 태국) 교구의 보좌 주교로 방곡에서 전교 활동을 벌이고 있던 브뤼기에르(B. Bruguière, 蘇) 신부가 단독으로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였다. 그 결과 파리 외방전교회의 조선 포교지 전담 문제가 다시 거론되었는데, 마침내 1831년 9월 9일 조선 포교지가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북경교구로부터 분리되어 조선 대목구로 설정되었고, 그와 동시에 브뤼기에르 주교가 초대 대목으로 임명되었다. 이로써 조선 교회는 창설 46년 만에 독립된 교구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후 1833년 4월에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에서도 조선 포교지 전담을 정식으로 수락하였다.
랑글루아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으로서 많은 사제를 양성하였으며, 한국 포교지를 위임받은 후에는 훌륭한 선교사들을 한국에 파견하였다. 이후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한국에 많이 진출하여 적극적인 전교 활동을 펌으로써, 한국 천주교회는 끊임없이 교세가 증가하는 등 내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1851년 7월 13일 프랑스에서 사망하였다. (→ 조선 대목구 ; 파리 외방전교회)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崔奭祐, 《韓國敎會史의 探究》,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달레 교회사》 中/ 柳洪烈, 《增 한국천주교회사》 上, 가톨릭출판사, 1975/ Adrien Launay, Histoire Générale de la Société des Mission-Etrangéres, Paris, 1894. 〔李裕林〕
랑글루아, 샤를 프랑수아 (1767~1851)
〔프〕Langlois, Charles François
글자 크기
3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