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역사가.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교황사학자. 독일 튀링겐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나 당시 독일에서 가장 유명했던 공립 학교들 중의 하나인 슐포르타(Schulpforta)를 졸업하고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언어학과 종교학을 공부하였다. 1818년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고전 언어를 가르치던 랑케는, 1824년에 최초의 저작인 《로만 민족과 게르만 민족의 역사》(Geschichte der romanischen und germanischen Völker von 1494 bis 1514)를 출간하면서 역사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 후 베를린 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프로이센 정부로부터 해외 여행의 특전을 얻게 되었다. 주로 이탈리아에 머물렀던 이 4년 동안의 여행은 그의 역사관 정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831년 베를린으로 돌아와, 독일과 프랑스와 영국의 문서 보관소에서의 연구를 위한 여행을 제외하고는 여생을 거의 그곳에서 보냈다. 랑케는 베를린 대학에서 새로운 세미나 방식을 고안하여 역사학을 대학 교육 수준까지 올려 놓았다. 그는 이 역사학 세미나를 통하여 19세기 독일의 가장 유명한 역사가들 대부분을 훈련시켰는데, 이 세미나 방식은 영국 · 미국 · 프랑스로 확대되어 19세기 후반에는 서양의 모든 나라에서 역사학이 독립된 학문으로 정착하는데 기여하였다. 1871년 베를린 대학 교수직에서 은퇴한 뒤에도 최후의 역작인 《세계사》(Weltgeschichte, 9권 1881~1888)의 집필을 계속하였다. 1886년 그가 죽었을 때, 프로이센 국왕(독일 황제 겸임)은 그에게 귀족의 작위를 수여하였으며 전세계의 많은 국가들로부터도 서훈(敍勳)을 받았다. 랑케는 일반적으로 근대 세계의 가장 위대한 역사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랑케는 54권의 저작을 남겼는데, 유명한 것으로는 《최근 4세기 간의 교황들의 역사》(Die romischen Paipste in den letzten 4 Jahrhunderten, 3권, 1834~1836) , 《종교 개혁 시대의 독일의 역사》(Deutsche Geschichte im Zeitalter der Reformation, 1839~1847), 《프랑스의 역사》(Französische Geschichte, 2권, 1852), 《16~ 17세기의 영국사》(Engische Geschichte, vornehmlich im sechzehnten und siebzehnten Jahrhundert, 6권, 1859~1869), 《프로이센의 역사》(Zwolf Bücher preussischer Geschichte, 5권, 1847~1848) 등이 있다. 15~18세기를 주로 다루고 있는 이 저작들은, 랑케의 주요 업적이 근대 역사학의 연구에 있어서 기술적인 과학적 실증 사학을 열었음에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사 상〕 랑케의 역사주의(historicism) 내지는 실증 사학은 역사가의 주관적 판단을 철저히 배격하고 엄정한 사료 비판에 바탕을 둔 정확한 객관적 사실의 제시, 즉 사실주의(realsm)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역사 연구 방법론의 제시야말로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이다. 랑케는 첫 저서인 《로만 민족과 게르만 민족의 역사》 부록에서 역사 연구 방법론과 역사주의적 역사관을 피력하여 "사료(史料)로 하여금 말하게 하라"는 19세기의 역사주의를 연 장본인이 되었다. 1500년경의 유럽 국가체제의 발전 과정을 다룬 이 저서에서 그는, 이 시기를 다룬 이전의 저작물들에 근거하여 집필된 역사서들이 개인적 · 정치적인 편견으로 얼룩져 있으므로 이것들을 사용할 때에는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랑케는 위에 나열한 그의 저술에 회고록, 서한, 외교 문
서, 목격자의 진술 등을 사료로 이용하였고, 다른 저작들의 경우에도 모두 이와 같은 일차적 자료들을 사용하여 저술하였다. 그리하여 역사가에게 있어서 역사 서술의 자료는 가능한 한 문서 자료(documentary sources)여야 한다는 원칙을 확립하였다. 진정한 역사는 사료 연구에 기초해야 한다는 주장과 19세기에 시작된 문서 자료의 대규모의 발간은 이와 같은 랑케의 새로운 비판적 역사 연구 방법론의 제시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역사 연구에 있어서 이와 같은 방법론상의 혁신은 역사가의 임무에 관한 랑케의 일반적인 생각에서 유래하였다. 그는 《로만 민족과 게르만 민족의 역사》에서 "우리는 역사학에 대해 과거를 재판하고 장래에 유익하도록 인류를 선도한다는 따위의 기능을 기대하여 왔다. 이 글은 그러한 허황된 기능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원래 어떻게 있었는가' (wie es eigentlich gewesen)를 보이려 할 뿐이다··· 제약이 많고 아름답지 못한 사실이라도 그것을 정확히 제시한다는 일이 최상의 원리임은 의심할 바가 없다" 라고 말하여 사실의 엄격한 제시를 역사 서술의 최고 가치로 하는 역사주의 역사관을 피력하였다. 그러면서도 역사는 단순한 박식이어서는 안되고 사실의 의미와 연속성을 확인하고 역사적 발전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이 원래 어떻게 있었는가" , 즉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는가라는 말은 단순하고 당연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그것은 19세기 전반의 역사 철학, 특히 헤겔의 철학에 대한 도전을 의미하였다. 비록 랑케의 역사 사상이 당시의 역사 철학자 헤겔(G.W.F. Hegel, 1770~1831)로 부터 큰 영향을 받았고, 이들 모두 역사를 신의 뜻에 의한 과정이며 모든 사건과 상황은 전체에 있어서 정당한 것이라고 보았지만, 랑케는 역사는 추상적으로 규정될수 있는 최종적인 목표를 갖고 있지 않으며 보다 이후의 시대가 이전의 시대보다 항상 우월한 것으로 여겨지는 진보적 · 향상적 과정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또 인간이 신의 섭리의 계획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거의 신성 모독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역사는 인생의 풍부함과 다양함을 증명함으로써 신의 일을 나타내는 것을 돕는다고 믿었다. 그래서 역사는 실제로 일어났던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말은 랑케의 또 다른 유명한 말, "각 시대는 동등하게 신과 직결되고 있다"라는 말과 보완 관계에 있다. 또한 역사의 각 시대는 개별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서 그는 각 시대는 특이한 독자적인 가치와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서 그 나름대로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즉 개별적인 역사 현상인 이들 각 시대는 그 나름의 독특한 '사상들' (ideas)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랑케 자신의 깊은 신앙심과 이른바 '개별성의 심연' 에 대한 그의 낭만적인 열정과 플라톤주의의 영향이 모두 하나로 결합되어 역사에 있어서 '사상' 의 역할에 대한 랑케의 견해를 형성하였다. 그는 한 시대의 다양한 정치적 · 문학적 · 지성적 활동들은 같은 정신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같은 사상을 표현하는 상관 관계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평 가〕 모든 생활 영역들간의 상관 관계에 대한 깊은 이해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로 정치 · 법제 · 군사 등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한 정치사가이자 외교사가였다. 랑케는 민족주의가 발흥하던 시대에 속해 있었으며, 따라서 그의 관심은 강대국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다양한 유럽 국가들의 정신이 정치적으로 구현된 강대국들을 여러 다양한 사상들의 표현으로 보았다. 이러한 랑케의 견해는 그 자신이 편집하였던 학회지 《역사 · 정치 평론》(Historisch-Politische Zeitschrift)에 발표한 논문 <정치학 대화>에서 가장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1836년에 발표한 이 논문에서 랑케는 1830년의 혁명 운동들에 반대함으로써 기존의 정부들을 옹호하였으며, 자유주의는 일반적으로 타당성을 지닌 정치 형태를 설정할 수 없다고 설명하였다. 그 이유로 각 국가는 살아 있는 유기체이고 개체이며 그 자신의 독특한 제도적 형태를 가져야 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랑케는 외교적 사건들이 역사가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강대국들은 상호간의 투쟁 동안에, 그리고 상호간의 투쟁에 의하여 그들의 독특한 개성을 발전시키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특히 랑케의 주된 관심사는 외교 정책이었기 때문에, 그는 산업화가 독일에 초래했던 변화들의 중요성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였다. 요컨대 랑케는 근본적으로 보수주의자였다. 그리고 역사에 대한 랑케의 견해들은 근대 사회 과학의 목표들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는 사회 발전 법칙의 가능성과 사회적 행동이나 행위에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패턴의 가능성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사건의 일반화 내지 법칙화를 시도하는 사회 과학과는 달리 역사학의 고유기능은 개개 사건의 유일성, 즉 개성을 규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가로서의 그의 견해와 방법론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랑케는 위대한 저술가였고, 저작들은 역사서일 뿐만 아니라 또한 문학 작품이기도 하다. 그의 새로운 견해들이 역사를 '전문화된' 학문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그는 역사학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이제 역사는 전문적인 훈련을 필요로 하는 하나의 학문일 뿐 아니라 과목이 되었으며, 문서의 수집 및 탐구와 문서 자료들의 편집은 역사가의 활동에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와 같은 문서 탐구의 노력들은 원래 외교사 자료들에 관계되는 일이었지만, 곧 제도사 · 경제사 · 사회사 같은 과거사 연구를 위한 자료들에까지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역사학은 모든 종류의 사회적 탐구를 위해 중요한 자료들을 내놓게 되었다. 나아가 랑케는 과거의 각 시대의 독특하고 개별적인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모든 가치들의 상호 의존적 의미를 묵시적으로 지적했고, 외국 문화의 이해를 가로막았던 장벽들을 제거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만일 타고난 역사가가 있다면 그는 바로 랑케이다" 라고 격찬했던 영국의 유명한 역사가 액튼 경(Lord Acton)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랑케는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로서 역사학의 발전에 있어서 크고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역사 ; 역사주의 ; 역사 철학)
※ 참고문헌 朴成壽, 《歷史學概論》, 삼영사, 1983/ 車河淳, 《史觀이란 무엇인가》, 청람, 1980/ Theodore H. von Laue, Leopold Ranke : The Formative Years,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50. 〔金辰雄〕
랑케, 레오폴트 폰 (1795~1886)
〔독〕Ranke, Leopold v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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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

레오폴트 폰 랑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