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 버트란트 아더 월리암 (1872~1970)

〔영〕Russell, Bertrand Arthur Willi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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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란트 러셀.

버트란트 러셀.

영국 철학자. 진보적인 사상가. 기호 논리학의 선구자. 1872년 5월 18일 영국 웨일즈의 트렐렉(Treleck)에서 자유 사상가인 앰벌리 자작의 3남매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조부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수상을 지냈던 자유당 정치가 존 러셀 경이고, 대부(代父)는 유명한 경험주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J.S. Mil)이다.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독실한 청교도인 조모의 영향 아래 성장 하였다. 11세 때 유크리트 기하학을 배우고 나서 지적인 각성과 함께 수학에 유별난 흥미를 느끼게 된 러셀은, 18세가 되던 1890년 캠브리지의 트리니티 대학에 입학하여 처음에는 수학을 전공하였으나 졸업할 무렵 철학으로 선회하였다. 1900년 이탈리아의 논리학자 페아노(G. Peano)와의 만남을 통해 기호 체계를 통한 논리 분석의 방법에 대해 결정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 후 화이트해드(A.N.Whitehead)와 더불어 새로운 기호 논리학의 체계를 세우기 위한 방대한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1910~1913년 사이에 《수학의 원리》(Principia Mathematica)가 3권으로 간행되었는데, 이때부터 수리 논리학 · 인식론 · 존재론뿐만 아니라 윤리 · 종교 · 사회 · 교육 · 정치 등 다방면에 걸쳐 연구와 저술 활동을 하는 한편, 자신의 사상을 사회 운동과 정치 참여를 통해 실천해 나갔다. 수차례 국회 위원에 입후보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징병 반대 운동을 주도하다 투옥되기도 하였다. 이후 미국, 러시아, 중국을 오가며 강의와 저술을 계속하였다. 1950년에는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탁월한 대변자이자 사상의 자유를 위한 불굴의 투사' 라는 찬사와 함께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네 번의 결혼을 통해 자녀 셋을 두었으며, 1955년 웨일즈에 정착한 후 주로 반전(反戰) 및 평화 운동에 전념하다가 1970년 2월 2일, 98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사 상〕 러셀은 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70여 권에 달하는 책과 논문을 저술하였다. 그의 탐구 주제가 순수 철학을 포함하여 인문 · 사회 · 자연 과학의 전 영역에 걸쳐있고, 또한 시기에 따라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사상의 전모를 요약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지금까지 미치고 있는 지속적인 영향을 고려해 볼 때, 그의 주요한 업적과 핵심적 내용은 단연 철학 분야에서 엿볼 수 있다.
논리학 : 러셀은 《수학의 원리》에서 프레게(G. Frege)의 논리주의(logicism)에 동조하여 수학을 논리학에 환원시킴으로써 오랫동안 직관주의와 형식주의 사이에서 방황하던 수학의 학문적 기초를 공고히 했다. 그는 산술과 기하학을 망라한 수학의 모든 개념들이 집합이라는 단순한 개념의 논리적 관계로 정의될 수 있으며, 수학의 명제들이 몇 개의 원초적 명제들로부터 계산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를 위해 그는 술어와 집합을 다룰 수 있도록 고전 논리를 확장시키고 더욱 정교화시켰다. 그는 진리 함수 이론, 논리적 연결사와 기호의 해석, 관계 논리 및 단일 명사(singular terms)의 처리에 대한 획기적 이론을 발전시켰다. 한편 집합의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발생하는 역설-자기 자신을 원소로 하지 않는 집합들이 그 스스로의 구성 원소인가 아닌가-을 해결하기 위해 유형 이론' (theory of type)을 제창하였다. 이 이론에 따르면 어떤 명제도 그것과 동일하거나 더 높은 등급의 명제에 관한 것일 수는 없다. 따라서 크레타 사람이 "크레타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이다" 라고 말할 때처럼 문법과 어휘에 있어서 아무런 잘못이 없는 문장도 실제로 무의미한 것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역설이 해결될 수 있었다. 또한 지칭체가 없거나 지칭이 불완전한 문장을 다루기 위해 '기술 이론' (theory ofdescription)을 고안하였는데, "현재의 프랑스 왕은 대머리이다" 혹은 "웨이벌리의 저자는 스코트이다"라는 문장이 순수하게 지시적인 논리적 고유명을 사용하는 확정 기술(definite description)을 통해 의미 있게 다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유형 이론과 기술 이론은 문장의 문법적 형태와 논리적 형태를 구분하는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이후의 철학적 분석활동에 강한 자극제가 되었다.
인식론 : 러셀은 지식을 '습득에 의한 지식' (knowledge by acquaintance)과 '기술(記述)에 의한 지식'(knowledge by description)으로 구별하고 물리 과학이나 상식을 통해 알려진 지식들이 지각을 통해 직접적으로 파악된 명백한 지식으로부터 추론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물리적 대상은 감각 자료(sense-data)의 복합물로 대체될 수 있으며, '나' [我]와 같은 심적 주체 역시 지각적 경험의 논리적 구성물로 대체될 수 있다. 그러나 러셀의 이론은 진리 대응설에 입각하여 모든 명제를 외연 논리에 의한 함수로 다루고 있으며, 이 때문에 여러 난점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예를 들어서 그가 명제 태도(propositional attitude)라고 말한 'S는 P를 믿는다' 와 같은 심적 명제의 경우, 전체 명제의 진위가 P의 진위에 의하여 결정될 수 없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하여 러셀은 행동주의의 노선에 따라 신념을 사건들에 대해 갖는 복합적 관계로 파악함으로써 그러한 명제들이 의미 있게 다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귀납적 명제의 경우, 귀납 원리 자체는 결코 증명될 수 없다고 말하였지만 몇 가지 공준(公準)을 채택함으로써 정당화의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존재론 : 러셀의 존재론은 '논리적 원자론' (logical atomism)과 '중성적 일원론' (neutral monism)으로 대표되 고 있다. 그에 따르면 세계는 우리의 의식과 독립하여 존재하는 단순한 개별자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들은 단순한 성질밖에 없으며 또한 서로 단순한 관계만 맺고있다. 이 단순한 대상은 논리적 고유 명사로 지칭되며 그 외의 명사적 표현은 모두 술어로 분석될 수 있다. 개체는 단순한 성질의 복합으로 대체 가능하나 '관계' 는 실재하며 '보편' 역시 관계의 한 형태로 실재한다. 한편 러셀은 비트겐슈타인(L.Wittgenstein)과 더불어 언어의 구조와 세계의 구조가 대응한다는 전제를 받아들였다. 모든 명제는 원자적 명제로 분해될 수 있으며 원자적 명제의 참은 원자적 사건에 의해 결정된다.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사건의 성질은 정신이나 물질이 아니라 더 근원적인 중성적 소재(neutral stuff)o이다. 사건은 본질적인 성질이 아니라 인과적 관계에 의해 심적인 것이나 물체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사건은 동시에 물리적인 인과 관계와 심적인 인과 관계를 모두 가질 수 있다.
가치론 : 윤리학에 있어서 러셀의 견해는 초기에는 무어(G.E. Moore)의 이론을 따라 '선' (good)을 정의할 수 없는 객관적 비자연적 성질로 보았으며, 옳고 나쁜 행위는 직관을 통해서만 판단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후기에 와서 가치에 대한 주관적, 감성적 이론을 전개하여 도덕적 판단이 욕구(desire)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러셀은 어떤 환경에서 가능한 다른 행위보다도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생각되는 행위를 '옳은 행위' 로 정의함으로써 공리주의적 입장을 취하였다.
종교에 대해서 러셀은 일생 동안 철저하게 비판적인 태도를 유지하였다. 러셀은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신 존재(神存在) 증명, 예를 들어 제일 능동인(第一能動因, causa prima) · 필연유(必然有) · 설계(design)에 의한 논증 등이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논박하고, 그리스도교의 계명 · 의식(儀式) · 그리스도의 신성 · 교회의 권위에 대해서도 비합리적이고 근거 없는 것이라 하여 단호히 거부하였다. 또한 인간의 심리적 상태가 항상 육체의 상태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영혼의 불멸과 내세의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 입장을 표명하였다. 내세를 부정하는 대신 러셀은 현세적 복지에 대해 집요한 관심을 기울여 여러 정치 · 사회 · 교육 철학적 이론을 제안하였다. 그는 인간 사회의 가장 지배적인 가치를 개인의 자유로 보고 국가 권력과 개인의 자유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합리적 사회 제도를 추구하였다.
〔의의 및 평가〕 러셀은 로크(J. Locke), 흄(D. Hume), 밀(J.S. Mill)로 이어지는 영국 경험론의 '확실성의 추구' 라는 전통에 따라 '참' 이라고 알려진 모든 신념 체계를 철학적으로 정당화시켜 보려고 하였다. 그의 철학 전반에는 오캄(W. Ockham)의 단순성의 원리에 입각한 논리와 언어의 분석이 일관적 태도로 나타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지나친 논리주의와 철학의 입체화 성격은 러셀 철학의 특징이자 장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결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러셀은 생전에 순수 철학의 주제에 대한 수많은 반대 논쟁에 휘말렸으며, 여러 번 그의 기본적 논지를 수정하였다. 종교적 교설에 관한 그의 과격한 견해에 대해서도, 신앙의 본질과 종교적 현상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종교에 대한 러셀의 입장이 일부 비판가들이 비난하듯 신성 모독과 불경건한 파괴적 회의주의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신앙의 명제가 결코 이해될 수 없다거나 무조건 옹호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명제가 참이라는 것을 '철학적으로' 논증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을 뿐이다. 이 태도는 신앙과 철학을 분리시킴으로써 종교적 진리의 독자성을 확보하려 하였던 후기 스콜라 시대의 철학적 흐름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방대한 러셀의 철학 전반에 대한 성격 규명과 세부적 이론에 대한 긍정적 · 부정적 평가가 계속되고 있는 지금, 그의 철학사적 위치를 단언하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있다. 그러나 분석 철학이라는 현대 철학의 중요한 한 조류의 개척자로서, 이론과 실천 그리고 이상과 현실을 융합시키고자 한 사회 개혁가로서, 러셀을 20세기의 위대한 철학자라고 부르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 논리학 ; 논리 실증주의 ; 분석 철학 ; 비트겐슈타인)
※ 참고문헌  A.J. Ayer, Russell, London, Woburn Press, 1974/ P.Edward · W.P. Alston · A.N. Prior, 《EP》 7, pp. 235~258/ B. Russell,Autobiography, vols. 3, London, Allan & Unwin, 1967~1969/ P. Schilpp ed., The Philosophy of Bertrand Russell, Cambridge, Cambridge Univ.Press, 1944. 〔孔容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