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Rus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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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키예프의 가장 중요한 기념물인 소피아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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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키예프의 가장 중요한 기념물인 소피아 성당.

유럽 동부에서 시베리아 대평원을 거쳐 극동에 이르는 나라. 슬라브족 중심의 다민족 국가로 현재 외부적으로는 CIS(Commonwealth of Independant states)라 불리며, 내부적으로는 '러시아 연방' (Russian Federation)이라는 국명을 사용하고 있다. 882년 키예프 대공국의 성립에서 시작하여, 10~11세기에는 키예프 공국이 이 지역에서 번영하였다. 13세기에는 몽고인에게 정복되었으나 1480년 모스크바 공국이 이로부터 독립하여 황제(tsar)의 전제권력을 강화하였고, 17세기 이후 로마노프 가(家)의 지배가 계속되었다. 1917년 혁명 후 영토 대부분이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되었다. 러시아라는 이름은 당시 소련을 구성하는 15개 공화국의 하나인 러시아 연방 공화국에 계승되었다가, 1991년 12월 25일 15개 독립국으로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다시 국명으로 채택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면적은 445만 2,385k㎡이고 인구는 1억 6,516만 2,000명(1993)이며, 수도는 모스크바(Moskva) . 공용어는 러시아어이고 주요 종교는 러시아 정교회이다.
〔역 사〕 러시아 역사는 신천지를 향한 끊임없는 개척과 식민의 역사였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지형상 하천의 역할이 매우 컸다. 그러나 대부분의 하구를 다른 여러 민족이 차지하고 있어 러시아는 '바다로의 출구' 를 확보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주변 여러 민족과 투쟁을 계속해야했다. 또한 러시아의 주요 활동 무대가 방어 지형이 전혀 형성되어 있지 않은 유라시아 대평원인 탓에, 남쪽의 스텝 지대로부터는 끊임없이 유목민들의 습격이 되풀이되었으며, 북쪽과 남쪽으로부터는 유럽의 대국들이 침입해왔다.
키예프 루시(Kiev Rus')의 출현 : 러시아의 출현은 루시' 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러시아가 나라 이름으로 쓰이게 된 것은 15세기 말부터였고, 그 이전에는 단지 '루시' 혹은 '루시의 땅' 이라 불렸다. 유럽의 변방 지역에는 9세기부터 무장 해적들이 출몰하기 시작하였는데, 발트해로 흘러 들어가는 강 줄기를 따라 러시아 평원에 나타난 이들은 발자그(Vanjag)라 불리는 종족이었다. 이 들은 무장한 무역 상인으로서 동로마 제국으로 들어갈 수로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평원의 무역 중심지를 차지한 후에는 무역로의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포기하고 그 지역의 군주가 되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공후(公侯)라고 불렀으며,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공국(公國)을 통치하였다. 그중 류리크(Rjunk)와 그의 집안은 862년에 노브고로트를 점령한 데 이어 882년에는 키예프를 점령함으로써 키예프 대공국, 즉 키예프 루시를 이룩하였다. 이 대공국은 동로마 제국을 비롯하여 카프카즈와 동쪽 지방의 소수 유목 민족들, 서유럽과 스칸디나비아에 의해 둘러쌓여 있어, 중세 유럽의 도시 국가들처럼 외부로부터 끊임없는 문화적 영향을 받았다. 이 가운데 러시아 문화의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국가는 스칸디나비아와 동로마 제국이었다. 스칸디나비아는 정치적으로 류릭 왕조의 지배 계층 출신 국가였고, 동로마 제국은 당시 중세 유럽에서 가장 앞선 나라로서 그리스도교 문화를 전파하였다.
동로마 제국에서 키예프 루시로 그리스도교가 유입된것은 10세기 말 블라디미르 1세(Vladimir I 때로, 블라디미르와 그의 아들 야로슬라프(Jaroslav) 시대에 이 공국은 문화적으로 많은 발전을 하게 되었다. 특히 동로마 제국과의 밀접한 문화적 유대 관계에 의해 많은 동방 교회 선교사와 교회 건축 예술가들이 들어왔다. 따라서 키예프 루시의 문화의 특성은 세속적인 요소와 교회적인 요소의 결합에 있다. 동방 교회는 공후의 정치적 권력을 지지하였으며, 또한 일반 민중의 경제 활동과 무역 업무도 지원하였다.
고대 키예프의 가장 중요한 기념물은 소피아 성당이다. 공후 야로슬라프의 주도로 세워진 이 성당은 이교도로부터 러시아 땅을 해방시킨 신의 은총과 대공(大公)의 세속적 권위의 상징이었다. 사원의 겉모양은 12개의 작은 돌들이 서쪽으로부터 4개씩, 동쪽으로부터 2개씩 사원의 구석에 자리잡고, 그 가운데에 하나의 거대한 돔이 솟아 있으며, 내부는 모자이크화와 프레스코화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종교적인 주제와 함께 야로슬라프와 그 가족의 초상화, 공후의 사냥하는 그림, 음악가와 광대들의 그림 같은 세속적인 주제의 그림들을 조합한 것이다. 소피아 사원의 도서관에는 필사본들이 보관되었고, 이것이 다시 재필사되었으며 연대기 편찬 작업도 이루어졌다. 이러한 작업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는 수도원이었다. 수도원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 페체르스키(Pecherski) 수도원이다. 11세기에 키예프 근교의 아테네의 동굴 사원을 본따 지은 것으로 이곳에서 많은 필사본들이 만들어지고 연대기가 쓰여졌으며 많은 선교사와 작가들이 양성되었다. 또한 뛰어난 건축가와 화가들이 이 수도원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키예프 공국은 1054년 야로슬라프가 죽은 후 공후들간의 내분과 적대 관계로 인해 분열되어 멸망하고 말았다. 당시 키예프는 러시아 무역의 중심지로 이곳을 지배하는 사람은 러시아 무역의 중요한 열쇠를 손에 쥘 수 있었으므로, 모든 공후들은 서로 키예프를 차지하려고 하였다. 11세기 말부터 공국의 분열이 시작되어 점차 독립된 작은 도시 국가로 나누어졌다. 여기에 남쪽 초원 지대에 살던 코체프닉(Kochevniki), 폴로베츠(Polovets)와 같은 유목민의 계속된 공격은 공국의 쇠퇴를 더욱 가속화시켰으며, 13세기 초 몽고인의 내습은 쇠퇴해 가는 키예프 러시아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였다.
모스크바 공국의 형성 : 키예프 공국의 쇠퇴 이후 러시아는 1240년부터 240년 동안 몽고의 지배를 받았다. 몽고의 지배하에서 키예프 대신 모스크바가 공후들의 중심이 되었다. 모스크바는 1147년경에 러시아 평원의 한가운데에 있는 평원을 관통한 수로 옆에 건설되었다. 이 모스크바를 관통하는 강을 모스크바 강이라 부르며 이 강은 볼가 강과 오카 강을 이어 주는 평원의 동맥이었다.
모스크바의 유리한 지리적 위치는 모스크바의 발전과 성장을 촉진시켰다. 랴잔, 로스토프, 야로슬라프, 스몰렌스크와 같은 모스크바 주변 공국들은 타타르족의 침략을 받았지만, 모스크바는 1238년의 제1차 대공세를 제외하고는 침탈을 면하였다. 그래서 모스크바 공국은 타타르의 침략을 피해 들어오는 피난민들의 피난처가 되었으며, 13세기 말경에는 이러한 인구 유입이 더욱 증가하였다. 14세기 전반기에는 모스크바를 가속적으로 성장시킨 중요한 사건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모스크바가 러시아 교회의 중심지가 된 것이었다. 타타르족의 침략으로 키예프 루시가 파괴되자 러시아 교회의 지도자였던 키예프 관구의 대주교 막시무스(Maxsimus)는 1299년 블라디미르로 이주하였다. 그의 후계자 표트르(Pyotr)는 자주 모스크바에 들러 이반 1세(Ivan I)와 친교를 가졌다. 1326년 표트르가 죽자 그의 후계자 페오그노스트(Feognost)는 모스크바에 정착하였다. 이렇게 해서 모스크바는 러시아의 정치적인 수도가 되기 전에 교회의 수도가 되었다. 당시 타타르의 조세 의무를 면제받았던 러시아 교회는 막대한 자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모스크바로 교회의 중심지가 이동됨에 따라 모스크바의 부(富)를 증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모스크바의 위상을 높인 두 번째 사건은 이반 1세와 타타르족의 우호적인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이반 1세는 어느 공후보다도 자주 타타르의 칸〔汗)을 방문하여 돈과 선물로 타타르족의 환심을 샀다. 이에 대한 대가로 마침내 이반 1세는 1328년 칸으로부터 대공 칭호를 하사받고 러시아 민족에게 부과된 타타르의 세금을 거두는 조세 징수권을 부여받았다. 이때부터 이반 1세는 세금의 일부로 자신의 재정을 축적하고 그 돈으로 모스크바의 영지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 후 이반 1세의 손자인 드미트리 돈스코이(Dmitri Donskoj) 시대에 이르러 1380년 돈(Don) 강에서의 대치전을 통해 타타르족을 제압하였다. 그리고 1462년 이반 3세는 모스크바 대공이 되었고, 1478년에는 노브고로트 공국을 복속시킴으로써 러시아를 통일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이반 3세는 자신을 '러시아의 황제' (tsar)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자신감은 1472년 이반 3세가 동로마 제국 마지막 황제의 조카 소피아 팔레올로가와 결혼함으로써 더욱 고조되었다. 소피아는 모스크바에 동로마 제국 궁정의 전통과 관습을 전수하였다. 이반 3세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터키에 함락된 이후 자신을 동로마 제국의 후계자로 여기기 시작하여 15세기 말부터 인장에 동로마 제국의 문장(紋章)인 쌍두 독수리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동로마 왕조의 계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1480년에 이르러 마침내 타타르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고 모스크바 공국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러시아 제국의 성립과 발전 : 1547년 이반 4세는 정식으로 '황제' 의 칭호를 얻게 되었고, 모스크바 공국은 본격적으로 '러시아' 로 칭해지게 되었다. 이후 러시아의 근대화는 표트르 1세(1682~1725)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서유럽 여러 국가들에 비하여 후진 상태에 있는 러시아의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18세기 후반의 에카테리나 2세도 기본적으로는 이와 같은 표트르 1세의 정책을 계승하고, 전제 정치와 농노제를 양대 정책으로 표방하는 이른바 동유럽형 절대주의의 확립을 목표로 하였다. 표트르 1세는 전쟁에 치중하였는데, 특히 1700년 스웨덴과의 전쟁은 22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전쟁이 한창일 무렵 신도시 페테르스부르크를 건설하였고,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는 원로원으로부터 '황제' 의 칭호를 받았다. 이때부터 러시아는 러시아 제국으로 불리게 되었다. 에카테리나 2세 때는 농노제가 정비되고, 지주 귀족의 농민에 대한 지배가 강화되었다.
1805년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와 연합하여 아우스테를리츠 전쟁에서 나폴레옹군과 싸웠으나 크게 패하였다. 2년 후인 1807년에 프리트란트에서 또다시 프랑스군에게 패하여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 1세와 굴욕적인 틸지트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후 러시아에서는 나폴레옹 1세의 대륙 봉쇄에 대한 불만이 증대하여 프랑스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812년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원정이 시작되었고, 알렉산드르 1세는 모스크바에 입성한 나폴레옹군의 세 번에 걸친 강화를 번번이 거절하였다. 끝내 나폴레옹군은 닥쳐온 러시아의 겨울을 이겨내지 못하고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나폴레옹 1세의 몰락 후 개최된 빈 회의(1814~1815)에서 알렉산드르 1세는 크게 발언권을 행사하여 신에 의한 유럽의 평화를 내세우며 '신성동맹' (神聖同盟)을 제창하였다. 그러나 국내 문제에 관해서는 소홀하였다.
1825년 알렉산드르 1세가 여행지에서 급사하자, 제위계승을 둘러싼 한차례의 정세 혼란을 거친 후 니콜라이가 즉위하게 되었다. 관례에 따라 그 해 12월 수도의 전 군대가 새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기 위하여 원로원 광장에 집결하였는데, 이때 약 3,000명의 장병들이 선서를 거부하고 반란 태세를 취하였다. 이를 '데카브리스트 반란' 이라고 한다. 그들의 지도자 대부분은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한 경험이 있는 근위 사관들로서,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뒤떨어진 조국의 부흥을 위해서는 우선 전제 정치와 농노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반란은 진압되었고, 주동자 및 찬동자들은 처형과 유배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 전제 제도에 대한 최초의 무장 봉기 기도는 오랫동안 사람들 기억에 남아, 이후 러시아 혁명의 선구적 모델이 되었다.
개혁과 반동, 전쟁과 혁명 : 1853년부터 만 3년에 걸친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는 오스만 터키 제국과 그 후원 세력인 영국 및 프랑스를 상대로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패배 바로 전해에 즉위한 알렉산드르 2세(1855~1881)를 비롯한 러시아 지배 계급 일부는 패전 원인이 단순히 군사적인 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의 취약한 공업력과 뒤떨어진 근대화에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1861년 농노 해방령이 공포되었고, 지방 행정 개혁을 위해 지방자치회가 설치되었으며, 1864년에는 사법 재판 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 밖에 군제(軍制) · 국가 재정 · 교육 등의 개혁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같은 정부의 위로 부터의 근대화에 반대하는 세력이 생겼는데, 보수적인 지주 귀족뿐만 아니라, 농노 해방령의 내용에 불만을 품은 농민과 러시아 사회 전체의 개혁을 목표로 하는 젊은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zia)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러나 잇따른 농민 소요가 무력으로 탄압되었고, 지식인들의 농촌에서의 계몽 선전 활동도 실패하였다.
테러리즘 전술을 채택한 청년 비밀 결사 조직에 의해 암살당한 알렉산드르 2세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르 3세(1881~1894)가 즉위하였다. 그는 즉위 즉시 임시 조치령을 공포하여 혁명 운동의 단속을 강화하였으며, 알렉산드르 2세 때 개혁되었던 많은 제도들을 도리어 개악(改惡)하고, 유대인 등 소수 민족에 대한 차별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곡물을 비롯한 원료를 수출하여 외화를 획득함과 동시에 외국 자본을 도입하여 공업의 육성을 도모하였다. 그 결과 1890년대 러시아는 전에 없는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루었으나, 이 성장은 농민과 노동자의 희생을 대가로 하였기에 정부에 대한 대중의 불만은 날로 높아만 갔다.
한편 극동 지방에 진출한 러시아는 1858년 애훈 조약, 1860년 북경 조약 등을 통하여 연해주를 획득하고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를 건설하였다. 또 일본과는 1875년에 사할린-쿠릴 교환 조약(페테르스부르크 조약)을 체결하여 쿠릴 열도를 양도하는 대신 사할린 영유권을 획득하였다. 그 이후 러시아는 만주로의 진출을 노려, 1895년 '3국 간섭' 의 형태로 일본에 압력을 가하였다. 중국에서의 의화단(義和團) 사건으로 러시아가 만주로 대군을 파견시켰으나 사건 수습 후에도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자, 일본은 1902년 영국과 동맹을 맺어 러시아에 대항하였다. 이리하여 1904년 만주와 한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양국 사이에 전쟁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러일 전쟁이 일어난 1905년 1월 9일, 당시 수도 페테르스부르크에서는 15만 명 이상의 민중이 생활 향상과 전쟁 중지를 황제에게 직접 청원하기 위하여 시위를 하였는데, 이에 대해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군중에게 발포함으로써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 '피의 일요일' 사건 소식은 곧 전국으로 퍼져 각지에서는 항의 파업이 발생하였고, 그러한 가운데 자연 발생적으로 노동자 대표 기관인 '소비에트' 가 탄생하게 되었다. 같은 해 9월, 러일전쟁 패배 후 10월에 200만 명이 참가한 총파업이 발생하자 니콜라이 2세는 '10월 선언' 을 발표하고 시민에 대한 자유 부여와 국회의 설립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 선언을 거부하고 무기한 파업에 돌입하였던 민중들은 이후 1917년 2월 혁명을 통해 니콜라이 2세를 퇴위시키고, 임시 정부를 조직하였다. 10월 혁명으로 볼세비키가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1918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을 성립시켰다.
1917년 사회주의 혁명 이후 74년 동안 냉전 시대의 동서 대립을 주도하였던 소비에트 연방은 1980년대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로 이어지는 개혁의 실패와 1991년 8월 보수 쿠데타 등을 거쳐 1991년 12월에 해체되었다. 소비에트 연방 체제 붕괴 후 공식적으로 소련을 계승하여 탄생된 독립국 러시아 연방은 현재 체제 전환에 따른 과도기적 진통을 거듭하며 갱생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한국과는 과거 수십 년 간의 반목을 청산하고 1990년 9월 외교 관계를 수립한 이래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방면에서 활발한 교류를 진행시키고 있다.
〔인텔리겐치아의 형성과 사상〕 러시아 정신사에서 인텔리겐치아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지적 활동과 이상의 추구를 근본적인 특성으로 하는 인텔리겐치아는 표트르 대제의 개혁으로 태동되기 시작하여 18세기 후반에는 하나의 계층으로 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독립적인 계층으로서의 인텔리겐치아의 형성은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 인텔리겐치아는 분리주의파 이후 정부로부터 독립적이며 반정부적으로 발전한 제2의 사회적 계층이었다. "인간이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것이 아니라 국가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는 것이 바로 19세기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근본 사상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는 정부로부터 사상의 자유를 주장하면서도 그리스도교 유산으로부터 해방될 수는 없었다. 18세기까지 러시아 문화는 이성이 아니라 신앙이 문화의 근본을 이루는 교회 문화를 바탕으로 하였기에 자유로운 사고를 실천하고자 하는 지적 능력과 이성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하는 계층으로서의 인텔리겐치아가 형성된 뒤에도 이 계층의 의식 속에는 러시아 정교회의 정신적 상황이 깊게 뿌리박고 있었다.
신앙과 종교심이란 일반적으로 배타적인 성격를 지니는데, 이와 같은 태도가 지적 활동에서도 여전히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를 지배하였다. 즉 인텔리겐치아는 조건 없이 절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관념을 추구하였다.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사고 방식, 실수나 잘못된 결론에 대한 주의 깊은 관찰, 이런 것들은 러시아적 사고와는 맞지않았다. 러시아에서는 '진실' 이라는 단어가 두 가지 의미 - 진실이란 현실에 부합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정의를 바탕으로 한 도덕적 이상과 질서 - 를 갖고 있다는 점이 이를 특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런 점에서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는 도덕적 이상과 질서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그 방법은 이성보다 감정에 의존하였다. 러시아 민중에 대한 깊은 연민의 정, 민중의 구원자가 되고자 하는 열렬한 소망이 그들을 지배하였다. 현실은 절망적이지만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기 위한 희망 속에서 인텔리겐치아는 종교적 성향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인텔리겐치아는 현실과 유리된 삶을 살았다. 그것은 정부와 상호 적대감이 뿌리깊었을 뿐만 아니라 민중들과도 서로 이해할 수 없는 깊은 틀에 의해 가로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속적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이상적인 세계로 가고자 하였으므로 모든 경제 활동, 생산력 배가 노력 같은 것은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저속한 행위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인텔리겐치아는 상인 계급을 정부만큼이나 싫어하였다. 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는 단지 이상에 의해 그리고 이상을 위해 살았다. 그들은 이상을 위해서는 감옥형, 중노동형, 추방형, 사형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텔리겐치아가 어떤 사회적 계급은 아니었으며,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처음 인텔리겐치아는 지주 귀족 출신들로 이루어졌으며, 이 그룹의 초기 사상적 경향은 1840년대에 형성되었는데 그것은 서구주의와 슬라브주의로 대별된다. 서구주의파란 문학 평론가 벨렌스키(Belenski) 모스크바 대학의 교수 그라놉스키(Granovski)로 대표되는데,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러시아는 역사적 발전 단계는 아직 하위수준이나 역시 유럽인이고 따라서 유럽이 발전시킨 문화의 결실을 획득해 가면서 서구가 걸어 나간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실은 바로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에 대한 개념이며 이성의 자유로운 발전에 대한 권리였다. 이와는 달리 호먀코프(Xomjakov), 키레엡스키(Kireevskij) 같은 슬라브주의자들의 주장은 러시아인은 유럽인이지만 동시에 동양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러시아인의 노력으로 개발해야 하는 삶은 러시아 나름의 독특한 기반이 있다는 것이다. 그 기반이란 바로 러시아 정교회와 농민 공동체였다. 따라서 표트르 대제의 서구
식 개혁을 민족적 비극으로 간주하였다. 즉 슬라브주의자들은 표트르 이전의 러시아를 모델로 삼고 서구주의자들은 유럽을 모델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표트르 이전의 러시아도, 서유럽도 그들에게 있어 실제적 표상은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이상적 꿈에 불과하였고, 두 진영 사이의 이러한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격렬한 논쟁은 개인적 유대 관계의 결별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1860년대에는 인텔리겐치아에 '잡계급' 이라는 새로운 사람들이 유입되었다. 이들 중에는 알렉산드르 2세의 농노 개혁에 의해 해방된 하층 계급 출신이 많았다. 이 시대의 사상적 조류는 허무주의(nihilism)였다. 신학교 출신의 인텔리겐치아들이 대거 허무주의자가 되면서 이 시대는 한마디로 개혁 이전의 지주 귀족 문화의 부정과 비판의 시기가 되었다. 대표적 허무주의자 중 한 사람인 피사레프(D.I. Pisarev)는 "부술 수 있는 것은 모두 부셔야한다. 그래야 해로운 것이 사라질 것이다" 라고 하였다. 허무주의자들은 1840년대 귀족들의 생활 양식, 이상주의, 철학적 명제에 대한 끝없는 논쟁, 실생활에 대한 무능력을 경멸하였다. 반면에 그들은 유물론적 성향을 보였는데 유물론을 바탕으로 새로운 인간상을 창출하고자하였다. 이 인간은 강하고 실제적이며, 생각할 줄 아는현실주의자이고, 모든 전통과 권위로부터 해방된 독립적인 인간이며, 삶에 대한 이성의 지배를 믿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인텔리겐치아는 종교적 동의를 벗어날 수 없었다. 허무주의자들이 꿈꾸는 새로운 인간이란 체르니셰프스키(N. Chernyshevskij)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썼듯이 모든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자신의 지혜와 힘과 의지를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기 위해 계발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혁명의 준비에 바쳐야 하는 것이었다.
삶에 대한 이성의 지배와 개인에 대한 관심은 허무주의자와 1840년대 서구주의자들과 비슷하나, 1860년대 허무주의자들은 민중 문제에 대해서는 소홀하였다. 민중문제는 1870년대 인텔리겐치아의 중심 주제였다. 그래서 이때의 인텔리겐치아를 인민주의자라고 불렀는데 이들의 민중 지향성은 1840년대의 슬라브주의자들과 연결된다. 인민주의자들의 사상적 지도자는 라브로프(P.L.Lavrov)와 미하일로프스키(N.K. Milhailovsk)였다.
인텔리겐치아 중에는 잡계급 출신 외에 '참회하는 귀족' 이라고 불린 지주 귀족들이 있었다. 그들은 과거 귀족 문화가 민중의 노동과 땀과 피로 만들어졌다는 데 대한 죄 의식을 속죄하고자 인민주의자가 되었다. 이들 인텔리겐치아는 의사 · 교사 · 노동자로서 민중을 찾아 시골로 내려가서 농민을 돕고 가르치고, 경제적 상황을 개선시키면서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자 하였다. 이를 브나롯(Vnarod, 민중 속으로) 운동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인텔리겐치아의 이상은 현실이 아니라 단지 꿈에 불과하였다. 참회하는 귀족들이 만난 민중은 그들이 상상했던 그런 민중이 아니었으며, 농민들은 그들을 믿지 않았고 도움을 받으려 하지도 않았다. 농민을 주체로 한 사회 개혁을 이루고자 하였던 인민주의자들은 1870년대 말 농민에 대한 실망으로 평화적 · 계몽적인 활동을 포기하고 혁명적 수단을 채택하게 되었다. 그리고 농민 대신 도시와 공장에서 그들의 동맹자를 찾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이 그룹 중 과격파들이 인민주의를 포기하고 마르크스주의를 채택한 것이며, 이는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변화가 되었다. 동정과 연민의 감정, 인간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에 대한 동경은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에서 힘과 강제, 개인의 부정과 무자비한 가혹성에 대한 이유가 되었다. 사회적 집단의 힘과 부를 얻기 위해서 개인에 대한 권리는 아무런 가치도 없게 된 것이다.
〔문 화〕 러시아인은 기원전의 이란계 스키타이 문화이래 각양각색의 외래 문화를 받아들여 동화시켜 왔지만, 특히 중요한 것은 중세의 비잔틴 문화와 근대 서방 문화의 영향이다. 러시아는 10세기 말에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여 그리스 정교권(正教圈)에 속하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몽고의 지배를 필두로 한 유목 문화권과 이슬람 문화권과의 오랜 접촉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문화적으로는 광의(廣義)의 유럽 · 그리스도교권에 남게 된 요인이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서방의 가톨릭 문화와의 교류에 장애가 되기도 하여 근대 러시아의 후진성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중세 러시아는 많은 전승 문학(傳承文學)과 <이고리 원정기> 같은 서사시 및 뛰어난 성화(聖畵)와 교회 건축을 남겼다.
16세기 러시아 문화의 중심은 교회에서 궁정으로 옮겨졌고, 문화와 사상의 세속화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유럽 근대화의 길을 터준 르네상스 문화의 본격적인 개화와 종교 개혁 운동의 전개를 볼 수 없었다. 서방의 영향은 처음에 미술과 기술에 이어서 풍속과 사상 분야에까지 미쳤다. 그러나 상류 사회의 풍속 · 교양의 급격한 서유럽화는 전통 문화에 뿌리박은 민중과의 유리를 격화하여 근대 러시아 사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문화의 이중성을 이루게 되었다. 푸시킨을 비롯하여 고골리,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체호프, 고리키에 이르기까지 근대 러시아 문학의 거장들의 작품 가운데 많은 것이 이 모순된 현실에 대한 준엄한 관찰 내지 비판에서 나온 것들이다. 1890년대의 러시아 자본주의의 급성장과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의회 정치의 발족 등 러시아의 경제 · 국가 체제의 근대화가 이루어지는 와중에서 서방을 발상지로 한 마르크스주의 사상이 정착하고, 문화계에도 '예술을 위한 예술' 과 같은 운동이 나타난 것은 이런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문학 : 러시아의 근대 문학은 19세기 푸시킨의 등장으로부터 시작된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중심 사상은 당대 사회 구조의 부정에 있었다. 인간의 고통에 대한 연민, 정의와 인간 행복의 추구가 바로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기본적 주제였다.
러시아 근대 문학의 창시자로 손꼽히는 푸시킨(Aleksandre Sergeevich Pushkin)은 1799년에 태어나 1837년 결투에서 받은 상처로 사망하였는데, 젊은 시절 나폴레옹 전쟁을 겪었으며, 후에는 12월 사건에 연루되기도 하였다. 12월 사건 주모자들과의 긴밀한 관계와 그의 자유를 추구하고 반정부적인 시적 경향 때문에 6년 간 추방형을 받고 정부의 감시를 받았다. 그는 문학 작품을 통해 두가지 일을 하였는데, 하나는 당시까지만 해도 통일된 규범을 가진 언어라 말하기 어려웠던 러시아어를 정립시킨 것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예술적 문학의 완성이었다. 그의 작품에서 비로소 러시아 민중의 문학적 재능과 지혜가 깨어나는 듯하였다. 바로 이 점 때문에 19세기 러시아 문학이 푸시킨에 의해 태동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적어도 19세기에는 푸시킨의 영향을 받지 않은 작가가 없었다. 푸시킨은 언어를 조형적으로 그리고 음악적으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그의 문학에서는 조형성과 음악성이 언어의 의미와 소리를 통해 하나가 되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문학의 발전과 함께 음악도 발전시켰으며 19세기 많은 작곡가들이 푸시킨의 작품을 토대로 작곡을 하였다. 또한 푸시킨은 다양한 인물의 유형을 창조하였는데, 그는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을 통해 사회나 국가와 개인의 관계, 이성과 감정 사이의 충돌, 돈과 권력에 대한 맹목성 등을 보여 주었다. 이것은 당시 러시아 작가들에 의해 추구된 기본 명제였다. 대표적인 푸시킨적 인물은 오네긴(Evgenii Onegin)이었다. 냉소적인 그는 러시아적 환경에서 자신의 지혜와 서구적 교육을 어떻게 적용할지를 몰랐다. 그래서 러시아의 민중과는 유리될 수밖에 없었던 인물로서 러시아 문학에서 "잉여 인간"이라 불린 인간상의 첫 번째 주인공이었다.
고골리(Nikolai Vasilevich Gogol', 1809~1852)는 1830년대 낭만주의의 기수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우크라이나의 민중 설화와 노래들을 소재로 우스꽝스러운 것 과 괴기스럽고 무서운 것을 교묘하게 배합하여 시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의 산문을 창조하였다. 고골리는 악을 관찰하고 삶의 부정적인 측면과 어둠의 세력을 묘사하는 특별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악의 형이상학적인 깊이와 그것이 사회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을 직시하였다. 그의 작품 세계는 현실성의 조형이 아니라 러시아적 삶에서 더럽고 추한 모든 것의 형상화였다. 《경찰관》, 《죽은 혼》 같은 작품들에서 그의 문학적 경향이 두드러진다. 고골리는 인간의 내적 심리 묘사보다는 외적 형태 묘사에 대단히 탁월하였다. 농노제 시대를 배경으로 한 《죽은 혼》에서 모든 주인공은 러시아 사회의 어두운 측면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다. 사기성과 감상적 허황, 어리석음과 탐욕, 경박함과 무식, 교활함과 무례함, 인색함 등이 작품의 주인공을 통해 잘 드러나 있다. 인간의 형상속에 심어져 있는 이 모든 결점들을 고골리는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이들이 실제의 인물이 아니라 환상적 허구라는 것을 잊게 만들었다.
투르게네프(Ivan SergeevichTurgenev, 1818~1883)는 생애의 거의 대부분을 서유럽에서 보냈기 때문에 러시아 사회를 보다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으므로 1840~1870년대에 이르는 러시아에서의 변화를 자신의 소설 속에 사실적으로 묘사할 수 있었다. 그는 소설 《루딘》, 《귀족의 둥지》, 《아버지와 아들》, 《처녀지》(處女地), 《전야》(前夜) 등에서 러시아 사회의 운명에 대한 지식인들의 무기력성을 보여 주었다. 1876년의 마지막 작품 《처녀지》에서 자살로 삶을 끝내는 인민주의자를 통해 잉여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는 민중을 알지 못하고, 민중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도 모르면서, 또 구체적인 프로그램도 없이 민중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믿었던 지식인의 허구적 모습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투르게네프와 동시대인으로서 톨스토이(Lev Nikolaievich Tolstoi, 1828~1910)가 있다. 그는 사람들의 삶을 빈틈없이 그리는 인생의 화가였다. 그의 서사적 대하 소설들은 예술성과 사실성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나폴레옹 전쟁 때의 러시아를 묘사한 서사 소설 《전쟁과 평화》에서는 여러 유형의 민중이 등장하고 도시와 시골의 러시아 귀족 계급의 삶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는 농민들을 역사 속의 한개체로서 생생하게 그림으로써 평범한 농민들의 삶을 통해 러시아 역사의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였다. 여기에서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뛰어난 개인이 아니라 군중이라는 톨스토이의 역사관이 제시된다. 톨스토이는 생의 마지막 30년 동안 도덕적 · 철학적인 동기들을 추구하였다. 인간은 공동체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 수밖에 없다는 철학을 실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죽음이 개인의 생명을 끊어 버리는 것처럼 불멸의 영혼이란 존재하지 않지만, 공동체와 민중을 통한 공동체의 삶은 계속되며 인간은 그 가운데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톨스토이의 작품에서 러시아 평원의 광활함이 느껴진다면, 역시 그와 동시대인인 도스토예프스키(Feodor M.Dostoevskii, 1821~1881)는 깊이와 높이를 느끼게 한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인간 내면 세계의 여러 측면을 대변하였는데, 그를 사로잡고 있던 하나의 주제는 극단과 모순으로 가득 찬 나라인 러시아에서 나타나는 현대인의 비극에 대한 추구였다. 이러한 비극의 출발은 현대인이 더 이상 신을 믿지 않으면서 교만하고 자의적으로 행동한다는 데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작가로서 그리고 사상가로서 인간의 외적인 그리스도교적 질서보다는 내적, 정신적 비극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그의 작품은 철학적이며 종교적 이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러한 이념은 인간에게 파멸을 가져다 주기도 하지만, 구원의 실마리가 되기도 하였다. 그의 주인공들은 이념으로 살고, 그 이념을 대화 속에서 토로하였다.
신을 버린 인간의 운명에서 인신(人神)과 군집성을 발견한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미 러시아에서 공산주의적 혁명을 예언하고 있었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며, 모든 법위에 존재하는 인신은 마침내 인간성을 상실하고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또 그리스도교에서 정신적 자유의 종교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바로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 종교였다. 악과 죄는 자유의 시험 과정으로 존재하며, 악을 선택하여 죄를 범할 때 인간은 고통과 속죄를 통하여 다시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따라서 자유의 길은 바로 고통의 길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가 가장 깊이 있게 다루어진 작품이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1880년대에 들어 장편의 전성 시대가 끝나고 단편 시대가 열렸다. 인민주의 운동이 좌절된 다음 이어지는 '황혼기' 의 절망, 회의와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동경이 이 시기 작품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 작가인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는 주로 단편 소설을 통해 당시 사회에서 소외받거나 변화에 발맞추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썼다. 그의 문체적 특성은 간결성에 있다. 특히 체호프의 문학적 진가는 희곡에서 두드러졌는데 그의 희곡들은 연극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는 무대 위의 분위기만을 만들었고, 무대 위에서 전개되는 사건을 거의 눈에 띄지 않게 진행시켰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관객에게 숨겨진 행위가 전달되도록 하였다. 무대 위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한마디 대사 · 소리 · 행동 · 상황의 선택으로 결국은 모든 것이 변화했음을 보여 주었다. 1903년에 쓰여진 대표작 《벚꽃 동산》에서 그는 구시대의 귀족 사회가 사라져 가고 있음을 잔잔한 우수로 나타내었다.
1890년대에 마르크스주의의 대두를 기해 침체되었던 러시아 문학은 활기를 되찾았다.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작가 가운데 손꼽히는 사람인 고리키(Maxim Gor'k)는 《체르카시》와 같은 초기 작품에서 부랑자들의 생활을 그리는 동시에 부르주아적인 현실에 항거하는 낭만적이고 고고(孤高)한 형상을 창조하였다. 러시아 노동자들의 혁명 운동을 주제로 한 《어머니》 또한 유명한 작품이다.
이후 1917년 10월 혁명과 그에 이어지는 국내전 시기에 구(舊) 문학인의 상당수는 해외로 망명하였고, 국내에 머무른 사람도 혁명에 대한 태도 결정이 촉구되어, 이 시기 문학은 처음부터 일종의 정치적 가치 판단을 포함한 문학으로 출발하였다. 작가를 출신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작가, 농민 작가, 구지식인계의 '동반자 작가' 등으로 구분하는 습관이 1930년대까지 이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1985년 고르바초프 정권의 등장과 개혁, 개방의 시대를 맞아 문학도 새로운 방향의 개방을 맞기 시작하였다. 다년간 금서(禁書)로 취급되었던 작품들이 발표되었고, 많은 작품들이 해금되기도 하였다.
미술 : 러시아 미술의 역사는 키예프 공국의 블라디미르 1세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정한 989년부터 시작되나, 그 이전에도 슬라브 민족이 이교(異敎)를 신봉하며 생활한 점을 미루어 보아 그 기간 동안 그들의 미적 세계를 반영한 창조물이 존재한 것으로 여겨진다.
10세기 말 그리스도교를 수용한 뒤 이 지역에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그리스도교 미술이 생겨났다. 다만 러시아가 수용한 그리스도교는 동방 교회, 즉 그리스 정교회로 비잔틴 미술의 영향하에 놓였으며, 이교 지역에 처음으로 그리스도교 성당이 건립되었다. 키예프의 소피아성당(101~1037), 노브고로트의 소피아 성당(1045~1052)은 그리스인의 지도하에 세워졌다. 11세기 무렵에는 러시아인에 의한 성당이 차츰 건립되어 갔다. 이러한 성당에는 극히 러시아적인 특색이 나타났으며, 또한 그중에는 이교 미술을 장식으로 도입한 것도 있다. 그리스도교 성당 건립과 함께 러시아 중세 미술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동방 교회 특유의 '이콘' (icon, 聖畵)이다. 처음에는 비잔틴의 이콘 화가가 방문하여 지도하였지만 얼마 안가서 러시아인에 의해 만들어진 이콘이 생겨났다. 17세기까지 러시아 미술은 종교 미술이 주를 이루었고, 세속적인 미술 작품은 거의 없었으며, 겨우 민예적인 것에서 당시 러시아인의 미의식을 엿볼 수 있다.
러시아에서 세속적인 미술이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부터였다. 새로 건설된 수도 페테르스부르크와 귀족들의 영지에 세워지는 궁전들의 장식을 위해 그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국으로부터 많은 화가들이 초청되었다. 러시아에서 미술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18세기 중엽 왕립 미술 학교가 세워지면서부터였는데, 이곳에서는 뛰어난 초상화 화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1773년 레비츠키(D.L. Levitskij)는 에카테리나 2세의 초청으로 페테르스부르크에 몇 달 간 머물고 있던 프랑스 철학자 디드로의 초상을 그렸다. 이 초상화는 디드로의 초상화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1710~1720년대에는 낭만주의 초상화의 대가인 키프렌스키(O.A.Kiprenskij)가 활동을 하였다. 그는 여성을 모델로 한 초상화로 명성이 높았는데, 1827년에 그린 푸시킨의 초상화는 특히 유명하다.
19세기 러시아의 미술은 서유럽의 고전주의 영향을 받아, 당시의 주요 주제들이 신화나 성서에서 채택되었다. 19세기 후반 이러한 미술 사조를 주도한 화가는 브률로프(Karl P. Bryullov)와 이바노프(Aleksandr A. Ivanov)였다. 브률로프의 주제가 파괴의 공포를 형상화하는 데 반해, 이바노프는 새로운 역사적 시대의 도래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브률로프는 대표작 <폼페이 최후의 날>에서 베스비우스 화산의 폭발에 의한 폼페이의 멸망을 묘사하였고, 이바노프는 20년 이상에 걸쳐 그리스도의 강림이라는 성서 주제를 묘사하였다.
19세기 중엽 젊은 화가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비판적 요구가 대두되었다. 그들은 사실주의적 예술을 창조한다는 목표 아래 왕립 미술 학교와 별도의 예술 단체를 만들었다. 여기에 많은 화가들이 가입하기 시작하여 1870년대에는 '전위 전시회' 라는 단체가 형성되었다. 이 그룹의 정신적 지도자는 페로프(Vasilij Grigor'evich Perov)였다. 그는 예술을 사회적 봉사로 인식하였고, 화가의 임무는 민중에게 사회적 · 심리적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들은 많은 도시에서 전시회를 개최하였는데 1871년 페테르스부르크에서의 첫 번째 전시회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때부터 이 운동의 기치 아래 러시아 전위 예술은 발전하게 되었다.
페로프 그림의 주제는 지방 성직자들의 무지, 상인 계급의 무례, 하급 관리의 독선이었다. 그의 대표작 <농민의 장례식>에는 부모를 잃은 가난한 시골 가족의 고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전위파 중 대표적인 화가는 레핀(Il'ya Efimovich Repin)과 수리코프(Vasili Ivanovich Surikov)이고, 전위파 중 풍경 화가로는 시시킨(Ivan I. Shishkin)과 사브라소프(Aleksej K. Savrasov)를 들 수 있다. 이들은 북부 러시아의 침울한 분위기의 풍경을 묘사한 최초의 화가들이다. 전위파의 활동은 1870~1880년대에 정점에 도달하였으나 1880년대 말 예술계에는 새로운 조류가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전위파는 창조하기보다 대화하는 데 주력하고, 그림을 감상하기보다 읽도록 하였으며 객관적 사실성만을 강조하고자 스스로의 손을 묶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유익한 회화' , '객관적 진실성' 의 신봉자인 전위파 대신 창조적 · 개인적 '무(無)유익성' 과 '자유' 를 표어로 내세운 세대가 부상하였다. 당시 극단적인 개인주의 사상은 상징주의라는 이름으로 문학으로도 침투되었다. 화가, 작가, 시인들은 《예술 세계》라는 새로운 잡지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이들 가운데 레비탄(Isaak I. Levitan)은 제일 먼저 프랑스 인상주의 화법을 수용하여 러시아 풍경의 시인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고, 세로프(Valentin A.Serov)는 사실주의 화풍을 유지하면서 인간과 빛으로 가득 찬 주위를 잘 융합시켰다. 그리고 바스네초프(Viktor.M.Vasnetsov)는 고대 영웅 서사시의 주제를 폭 넓게 이용하여 환상적 꿈을 통해 자연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법을 화폭에 담았다. 브루벨(Mixail A. Vrubel' )은 개인주의적 경향이 가장 두드러졌다.
음악 : 러시아에서는 수세기 동안 교회 음악과 민중음악이 서로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고 공존하였다. 그러나 교회가 민중들의 노래를 금기시하였기 때문에 세속 음악에 대한 관심은 18세기에 이르러 나타났다. 러시아 음악의 창시자는 글린카(NMMaaal.cimika)로, 그는 러시아 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음악의 푸시킨이었다. 그의 음악적 활동은 20년에 불과하여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러시아 음악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1804년 시골 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나 고대 교회 음악과 민중 음악을 모두 접할 수 있는 환경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글린카는, 1836년에 작곡한 오페라 <황제를 위한 삶>에서 우수와 격정적인 멜로디로 가득 찬 농민의 노래와 절제된 교회의 노래를 서구적 화음으로 조화롭게 결합시켰다. <황제를 위한 삶>에서는 혼란 시대에 조국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농민 이반 수사닌(Ivan Susanin)의 전설적 역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 이 민중 영웅의 개인적 비극은 민중의 서사시가 되었으며 여기에서 국민악파(國民樂派)가 시작되었다.
글린카가 생존하고 있었던 19세기 중엽 러시아에서는 새로운 음악 운동이 일어났으며, 페테르스부르크에서는 젊은 음악가들이 구성한 발라키레프(Mili A. Balakirev) 그룹이 형성되었다. 이 모임은 음악에 있어서 새로운 방향이 제시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글린카를 러시아 음악의 창시자로 받들고 러시아적 이탈리아주의와 음악적 세계주의에 강력히 도전하였다. 발라키레프는 글린카의 교향곡 원칙을 계승 발전시킨 최초의 러시아 작곡가이며 동시에 러시아 음악에 서유럽의 신낭만주의 특성인 드라마와 회화적 요소를 도입한 최초의 작곡가이기도 하였다. 무소르그스키(Modest P. Musorgski)도 발라키레프 그룹의 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음악을 다른 분야의 인간적사고와 분리시키는 경계를 없애고자 하였다. 다양한 사회적 계층의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언어를 음악에서 찾고자 하였던 그는, 사람들과 생생한 대화를 나누고 인간의 섬세한 내면적 사고를 전달하는 것을 예술가의 사명으로 여겼다. 이러한 목표를 추구하면서 무소르그스키는 음악으로 하여금 말하고 분노하고, 고통을 받으며 웃게 만들었다. 그의 작곡가로서의 재능은 오페라 <보리수고두노프>에서 정점에 이르렀는데, 그는 이 오페라를 '민중극' 이라 부르고, 여기서 군중 속에서 분출하는 강력한 집단 심리를 형상화하였다. 발라키레프 그룹의 작곡가들 중 가장 오랫동안 왕성한 작품 활동을 벌인 작곡가는 림스키 코르사코프(Nikolaj A. Rimskij Korsakov)였다. 그는 음악의 모든 분야에서 탁월하고 독창적인 재능을 발휘하였다. 자신의 작품 외에도 그는 보로딘(Aleksand.P. Borodin)의 미완성 오페라 <이고르공>을 완성하였다. 이 작품의 토대는 키예프 시대의 서사시 <이고리 원정기〉였다. 다른 작품으로는 노브고로트의 상인에 관한 <사드코>, 오페라 <프스코비탄카>, <백설 공주>, <차르살탄>, <황금 수탉> 등이 있다.
차이코프스키(Petr Il'ich Chajkovski)는 발라키레프 그룹 못지않게 러시아적인 것을 열렬히 사랑하였으나 그의 음악은 민족적 색채를 전혀 띠지 않았다. 음악적으로 철저한 세계주의자였던 차이코프스키의 주된 관심은 개인의 내면적 · 정신적 경험 을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는 주제를 러시아 민중 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 문학 작품 속에서 선택하였다. 우울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의 작품의 특성은 사색적이고 우수적인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펼쳐지는 조용한 사랑과 시적 분위기를 자주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푸시킨의 사실주의적 운문시인 <예브게니 오네긴>이 차이코프스키에 의해 서정적 오페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종 교〕 고대 슬라브인들에게는 고유한 종교가 있었다. 그것은 최초의 조상인 "츄르"(할아버지)가 후손들을 보호한다는 믿음에 근거한 조상 숭배 신앙이었다. 그래서 어려움이나 위험이 닥치면 "할아버지, 나를 보호하소서" 라는 주문을 외웠고, 축제를 열어 고인들을 추도하였으며, 그들은 무덤에 고기 · 꿀 · 우유 등 음식을 갖다 바쳤다.
한편 슬라브인들의 생활은 자연 조건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심한 가뭄이나 홍수, 태풍 등으로 농작물이 재해를 당하고 흉년으로 고통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비 · 눈 · 바람 · 천등 · 번개 · 우박 같은 자연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 설명할 수 없었던 고대 슬라브인들은 이 자연의 힘을 살아 있는 강력한 존재로 간주하여, 그것을 신격화하고 숭배하였다. 이러한 슬라브인들에게는 많은 신이 있었는데 하늘과 불의 신 스바로그(Svarog), 태양의 신 야릴로(Jarilo), 천둥과 번개의 신 페룬(Pem), 바람의 신 스트리보그(Stibog), 가축의 보호신 벨레스(Veles)가 그것이다. 또한 이들은 숲에는 숲의 신, 물에는 요정을 거느린 물의 신, 집에는 지킴신 등 곳곳에 지배신이 있었다고 믿었다.
10세기 말 블라디미르 1세 때 비잔틴으로부터 키예프루시에 그리스도교가 유입되어 당시의 많은 공후와 귀족들은 동방 교회 즉 그리스 정교회를 접하게 되었다. 988년 블라디미르 1세는 동로마 제국과 평화적인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동로마 제국의 공주 안나와 결혼하고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신하들에게 그리스도교를 믿도록 명령하였고 비잔틴에서 초청된 성직자들은 주민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슬라브인들이 믿고 있던 신들의 목각 형상들은 불태워지거나 수장되었으며 자신들의 신들을 포기하기를 원치 않은 많은 슬라브인들은 세례를 거부하고, 성직자들을 구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정교회가 국교가 된 이후에도 러시아는 많은 점술가들과 마술사들이 돌아다니면서 고대 종교 의식을 행하였지만, 점차 슬라브인들은 그리스도교 의식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고대의 이교도 신앙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많 은 이교도적 요소들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의식 속에 스며들었다. 천둥과 번개의 신 페룬은 일리야(Il'ja)가 되고, 가축의 보호신 벨레스는 성(聖) 블리시(VIasij)가 되었다.
13세기에 러시아 정교회는 몽고의 지배를 받던 러시아인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고, 1589년 모스크바 주교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부터 총대주교의 호칭을 부여받은 이후로는 모스크바가 당시 터키인의 지배하에있던 콘스탄티노플을 대신하여 정교회의 중심이 되었다. 교회를 국가의 지배 아래 두는 데 성공한 최초의 인물은 표트르 대제였다. 그는 1700년에 총대주교 제도를 폐지하고, 12인의 위원을 두어 주교 회의를 관장하게 하였다. 이 제도는 러시아 혁명 때까지 존속되었다.
1917년 소비에트 정부의 지배가 시작된 이후 교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정부는 마르크스 유물론과 반종교 정책에 입각하여 교회가 차르 체제를 지탱한 점을 신랄하게 공격하였고, 교회의 대(對)사회적인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많은 탄압을 가하였다. 교회 재산은 몰수되었고, 성직자는 투옥 · 처형당하였다. 1929년 이후에는 조직적인 반종교 투쟁을 감행하였는데, 이는 1941년 대독일 전쟁 개시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반종교 정책을 완화시켜, 1943년 주교 회의 개최가 허락되었다. 이후 교회는 서서히 힘을 회복하였고 성직자 교육과 신학 연구를 위한 신학교와 대학을 설립하였다. 이후 동서 냉전이 강화됨에 따라 정부의 대종교 정책도 강화되었지만, 신자의 공직 취임 금지 조치 이외에는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지 않는 한 상당한 자유도 인정되었다.
정교회 신자가 대부분인 러시아에서 가톨릭 교회는 일찍부터 자유로운 활동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더욱이 러시아 가톨릭 교회의 정확한 상황을 파악 · 평가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1964년 미국 사법위원회 산하의 조사팀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1917~1959년 사이 옛 소련 지역에서 55명의 주교, 12,800명의 신부 및 수도자와 250만 명의 신자들이 처형되었고, 15,700명의 신부는 성직의 포기를 강요당하였으며, 많은 수의 신학교와 각종 위원회와 조직들이 해산당하였다고 한다. 이후 러시아 정교회의 경우처럼 반종교 정책의 완화로 모스크바 등 몇몇 지역에 교회가 건설되었고, 끊임없는 공산화 시도에도 불구하고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등에는 가톨리시즘의 중심지가 그대로 보존되었다. 그러나 소련 공산당 시절 교회에 대한 통제 정책을 수행했던 종교 문제 협의회가 1995년에 다시 부활되었다. 대통령 직속 자문 기관인 이 협의회는 대통령과 러시아 연방 내에 있는 여러 종교들과의 유대 관계를 목적으로 한다고 하지만, 과거의 행적들로 인해 긴장감을 유발하고 있다.
1991년 통계에 따르면 러시아 연방에는 총 인구의 5.9%에 해당하는 25만 명의 가톨릭 신자가 있으며 교구 2, 본당 29개에 대주교 1, 주교 1, 신부 49(교구 소속 9, 수도회 소속 40), 부제 2, 신학생 4, 수사 1, 수녀 65명이 있다. 1994년 현재 한국 교포 신자는 203명이고, 이들을 위한 본당이 하나 있으며, 서울대교구 소속 고석준(高錫俊,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파견되어 사목을 담당하고 있다. → 러시아 정교회 ; 도스토예프스키 ; 동로마제국)
※ 참고문헌  V. Tschebotarioff, Bill, The Russian People, Chicago and London : The Univ. of Chicago Press, 3rd ed., 1974/ S.N. Syrov, Stranisy istorij-Kniga dlja chtenija na russkom Jazyke, Moskva : Russkij Jazys, 2nd ed., 1979/ 대륙연구소, 《러시아 연구》 창간호, 1994 / 《세계 대백과 사전》, 동서문화, 1991/ 《한국 천주교회 연감》,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41 1994 Catholic Almanac, Our Sunday Visitor Publishing Division. 〔姜德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