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정교회 - 正敎會

〔라〕Ecclesia Orthodoxa Russiae · 〔영〕Russian Orthodox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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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7년에 세워진 드미트리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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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7년에 세워진 드미트리 성당.

동방 교회 중의 하나로 비잔틴 전례를 따르고 있는 러시아의 교회. 에우세비오의 기록에 따르면, 러시아에 그리스도교를 처음 전한 사람은 1세기경의 사도 안드레아로, 그는 흑해 주변의 시노페와 코르순 지역에서 선교하였다고 한다. 이 지역은 뒷날 키예프와 노브고로트라는 유명한 도시로 발전하였다.
〔정교회의 러시아 국교화〕 988년 키예프 공국의 블라디미르 1세(Vladimir I , 980~1015)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정교회는 러시아의 국교가 되었다. 1015년 블라디미르의 죽음은 왕자들 사이의 권력 투쟁으로 이어졌고, 블라디미르의 아들 스비야토폴크는 자신의 두 형제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차지하였으나 또 다른 형제 야로슬라프(Jaroslav, 1015~1054) 공에 의해 1019년에 축출되었다. 야로슬라프 공은 현자로서 러시아를 그리스도교화하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많은 성당과 학교들을 세웠으며, 사회 사업을 펼쳐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다. 1037년 야로슬라프 공은 키예프에 성 소피아 성당을 건립하기 시작하였는데, 이후 그리스인 대주교 테오펨프스트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부터 임명받아 키예프에 착좌함에 따라 교회 행정적으로도 키예프의 성 소피아 성당은 러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1세기 말경 러시아는 완전한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어 1051년에는 러시아인 주교 힐라리온이 키예프 관구의 대주교(metropolitan)로 임명되었다. 그럼에도 아직 대부분의 주교들은 그리스인이었고, 모든 주교들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에 의해 임명되었다. 따라서 키예프의 관구 대주교는 러시아의 다른 교구의 주교들을 승인할 권리를 갖고 있었지만, 모든 교구를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함으로써 실제적인 권위를 행사할 수 없었다.
타타르족의 침입과 서방 그리스도교의 압박 : 1223년 타타르족은 러시아의 남부에 출현하여 러시아의 동맹 공국들을 격파하였고, 1237년 11월에는 징기스칸의 손자 바쿠가 4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입하여 1240년에 키예프를 점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서 · 북서 · 북동 지방은 타타르족들의 침입을 모면하여 이 지역을 거점으로 러시아인들은 국가를 재건할 수 있었는데, 이때 러시아 교회가 이들 소수 러시아인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다. 한편 러시아는 타타르족뿐 아니라 스웨덴 등의 침입을 받았다. 노브고로트의 대공 알렉산드르 네프스키(1219~1263)는 1240년에 네바 강가에 상륙한 스웨덴군을, 1242년 4월 5일에는 독일 기사단을 격파하였다. 당시 러시아에게는 타타르족들보다 서방 그리스도교인들이 훨씬 위협적인 세력이었다. 타타르족들은 러시아인들을 억압하고 가혹하게 다루었으나 자신들의 문화는 강요하지 않았고 종교 문제에 대해서는 관대하였고, 이와 달리 서방 그리스도교인들은 러시아에서 동방 정교회 전통을 없애고 서방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려고 침입하였다. 알렉산드르 공은 타타르족에 대항하기에는 힘이 부쳤으므로 타타르족들에게 순종하며 저항을 자제하였다. 이리하여 러시아는 안정된 가운데 서서히 힘을 키울 수 있었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공이 죽은 후 계승 문제에 관한 분쟁으로 여러 해 동안 거의 전 러시아가 전란에 휘말렸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공의 막내 아들 다니엘만이 이에 휘말리지 않고 자신이 물려받은 모스크바를 27년 동안 통치하면서 민족 부흥의 중심지로 바꾸어 놓았다. 다니엘의 정책은 그의 둘째 아들 이반 1세가 계승하였는데, 그의 치하에서 모스크바는 전 러시아의 수도가 되었고 러시아의 다른 도시에 대한 정신적인 지배권도 확보하였다. 또한 모스크바 공국은 타타르족에게 협력하여, 국력과 규모의 면에서 급격히 발전하였다. 이러한 이반의 업적은 그의 현명함뿐만 아니라 러시아 정교회의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당시 러시아 교회의 지도자는 표트르 관구 대주교였다. 이처럼 이반이 통치한 시기에 모스크바는 정치적 · 종교적으로 우위성을 확립한 것을 바탕으로 모스크바에 세워진 성 삼위 일체 세르게이 수도원은 러시아 수도원 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 수도원은 뒷날 삼위 일체의 그림으로 유명한 안드레이 루블레프(1370~1430)를 배출하였다.
다니엘, 이반 1세, 그리고 표트르 관구 대주교가 주도한 민족 부흥 운동은 1352년 러시아 전역에 퍼진 흑사병으로 수많은 러시아인들이 죽자 좌절되었다. 이 위기에서 당시 모스크바의 알렉세이 관구 대주교가 모스크바를 구하게 되었는데, 알렉세이는 국가의 통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최초의 러시아 주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반 2세(1353~1359)의 짧은 통치 기간과 이반의 후계자 드미트리가 어려서 통치할 수 없었던 기간 동안에 섭정을 하였으며,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러시아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결과 그 전의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공처럼 타타르족들에게는 복종하고 서방에는 완강히 저항하는 정책을 견지하였다. 알렉세이는 자신의 정치적 · 종교적인 권력을 이용하여 지방의 배타성이 강한 도시들과 공국들을 굴복시키려고 하였다.
직접 통치를 시작한 디미트리 공은 1367년 타타르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367년 모스크바 주위에 돌로 성을 쌓았다. 이에 14세기 초에 이슬람교로 개종한 타타르족은 동방 정교회를 박멸하려는 서방 그리스도교인들의 지원을 받아 공격하였다. 이때 새로운 종교 전망으로 러시아 민족의 문화적 성장과 확장에 기여하였던 라도네스의 세르지오(1314~1392)가 디미트리 공의 자문에 "두려워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 하느님이 도와 주실 것이다" 라고 격려하였다. 마침내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러시아의 공후들이 힘을 모아 전쟁에 임하였는데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1380년 9월 8일, 러시아군은 전투에서 타타르족을 격퇴하였다. 그 결과 러시아는 그리스도교 국가로 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타타르족의 토크타미시는 칸〔汗)에 오른 후 러시아를 다시 기습하여 모스크바 주민을 학살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디미트리는 다시 타타르족 칸의 종주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타타르족과 러시아인들의 관계는 이미 예전과 같지 않았다. 14세기 말 이후 타타르족의 지배는 고작 공물을 받는 수준이었고, 두 민족은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동반자의 관계로 변하였다.
이후 러시아는 점진적 · 평화적으로 영토를 넓혀 갔다. 그것은 군인이나 모험가들이 아닌 농민과 수도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성 세르지오를 본받아 소박한 신념과 의지를 가진 수도자들이 당시 러시아인들이 살던 하천 유역의 협소한 경작지를 버리고 기도와 노동에만 전념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동쪽으로 떠났다. 그러자 수도자들이 어느 곳에 있든 그들 공동체에 가입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나중에는 신앙심이 깊은 노인들이 가족을 거느리고 수도자들의 암자 근처에 마을을 만들었다. 그들은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삼림 지대에 정착함으로써 타타르족의 침략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고, 러시아인 관리들의 간섭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가 계속 늘자, 공후들은 자신들의 조세 대장에 이름이 오른 적이 있는 사람들이 이주한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가혹한 억압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농민들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존엄하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런 의식의 형성에는 교회의 역할이 매우 컸다. 즉 교회는 농노와 영주에게 같은 성작에서 성체와 성혈을 영해 주었으며, 성찬례에 참석하려면 누구나 서로에게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럼으로써 구성원 모두에게 인간의 평등과 존엄 의식을 심어 주었던 것이다.
차르 시대 : 모스크바의 대공들은 러시아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고 난 뒤 자신들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 할지를 생각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모스크바가 콘스탄티노플의 정당한 후계자이므로 모스크바의 차르가 비잔틴 황제의 정당한 후계자라고 주장하였다. 1472년 이반 3세(1462~1505)는 마지막 동로마 제국 황제의 조카 소피아 팔레올로그와 결혼하고, 쌍두 독수리를 문장으로 삼아 동로마 제국의 후계자임을 자처하였다. 이때부터 그들은 차르(tsar)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차르는 다른 어떤 군주로 부터도 간섭받지 않는 자주적인 지배자, 즉 황제라는 뜻이다. 당시 러시아인들은 하느님이 러시아를 선택하여 콘스탄티노플의 몰락으로 쇠퇴한 동방 교회를 세우라는 임무를 떠맡기셨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모스크바가 제3의 로마라는 믿음의 기원이 되었다.
이후 러시아의 수도자들은 소유파와 비소유파로 분열되었는데, '소유파' 는 토지를 소유하고 그에 딸린 농노를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수도원 안에 넓은 농장을 두었으며, 차르의 전제를 옹호하여 일반 백성들에게 차르를 사랑하고 복종할 것을 가르쳤다. 반면에 '비소유파' 는 주로 학식이 풍부한 학자나 신비주의 수도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은 국가와 교회의 지도자들을 거침없이 비판하였다. 그리고 이들 수도자들은 스스로 노동하여 생계를 마련함으로써 정신적인 독립을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국가에서는 어느 누구도 잘못된 교리를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되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쳤다. 이즈음에 차르 바실 3세는 후사가 없자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재혼하려고 하였다. 비소유파가 그 결혼을 반대하자 황제는 그들을 박해하였다. 비소유파의 지도자들은 구속되고, 그들의 추종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수도원들도 폐쇄당하였다. 그 결과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악화되어 한때 러시아는 붕괴 위험에까지 처하게 되었다.
바실 3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이반 4세(1533~1584)가 즉위하였다. 그는 차르의 권력이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소유파의 가르침에 깊은 영향을 받아 자기 자신을 하느님이 임명한 러시아의 지도자라고 굳게 믿고 많은 실정(失政)을 하였다. 그러다가 1547년 대화재로 모스크바가 엄청나게 파괴되고 수천 명이 사망하자, 이반은 이 재앙을 하느님의 벌로 받아들이고 회개하였다. 그는 사제 실베스테르의 조언을 받아들여 광범위한 개혁을 단행하였다. 1547년에 이반 4세는 동로마 제국의 후계자로서 모스크바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였고, 1547~1549년 러시아 각지에서 공경받던 성인 중 45명을 엄선하여 시성식을 거행하였다. 1551년 '러시아 교회 회의' 또는 '백인 참사회' 를 열어 개선된 제도들을 도입하고 아울러 다른 동방 교회에 대한 러시아 교회의 우월성을 천명하였다. 1552년에는 타타르족의 근거지 카잔을 공격하여 타타르족을 패퇴시켰다. 이런 찬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성 바실리오 성당을 세웠다. 이 성당은 러시아 문화가 동양적 요소와 그리스도교적 요소의 독특한 혼합에 있다는 것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모스크바 총대주교좌 확립〕 1584년 이반이 죽고 그의 아들 표트르(1584~1598)가 계승하였다. 아버지와 달리 겸손한 표토르는, 세상의 물질보다는 인간 영혼 구원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있어 항상 기도하며 많은 자선을 베풀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러시아인들의 열망대로 모스크바 관구 대주교의 지위를 총대주교로 격상시켰다. 이에 크리스인들은 완강하게 자기들 교회의 우위성을 내세워 옛날부터 이어져 온 총대주교를 네명으로 한전하는 제도가 신성 불가침의 제도이기에 새로운 총대주교좌를 마련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은 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589년 러시아에 총대주교좌를 창설하여, 모스크바의 관구 대주교 욥(1589~1605)이 전러시아의 총대주교가 되었다. 1593년에는 동방의 네 명의 총대주교(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들은 콘스탄티노플에서 모스크바의 새로운 형제에게 서열상 다섯 번째의 총대주교좌를 부여함으로써 승인 절차를 마무리 지었다.
1598년 차르 표트르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그의 충신 보리스 고두노프가 새로운 차르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그가 통치한 8년 동안은 대기근(1601~1603)과 가짜 디미트리 사건, 그리고 폴란드 등의 침입 등으로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는 평화와 질서 회복에 큰 공헌을 하였다. 특히 모스크바의 총대주교 게르모겐은 어떤 특정한 정치적 주장을 내세우지도 않았으며 러시아인들에게 죄를 회개하고 하느님의 계율에 복종하고 조국의 자유와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단결할 것을 호소하였다. 1610년 게르모겐은 폴란드인들에게 잡혀 크렘린 내의 감옥에 갇혔지만, 그 속에서도 그는 비밀리에 옥중 교서를 작성하여 러시아 전역에 보내 러시아인들에게 희망과 위안을 주었다. 그러자 다른 주교들과 교회 지도자들도 그와 보조를 맞추어 행동하였다. 특히 러시아인들의 종교적 · 민족적인 통합의 구심점이었던 성 삼위 일체 수도원은 폴란드에 반기를 들고 대항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3만 명의 폴란드군이 요새화된 수도원을 공격하였으나, 러시아인들은 16개월 동안의 전쟁 끝에 결국 승리하였다. 또한 니즈니 노브고로트를 중심으로 한 다른 도시들도 합세하여 민족 부흥 운동에 나서, 1612년 3월 러시아인들은 볼가 강 상류의 폴란드인들과 코사크인들을 몰아내고, 그 해 11월 29일에는 폴란드인들에게 점령되 었던 모스크바를 되찾았다. 수도가 해방되자 즉시 국민의회를 소집하여 1613년에는 미하일 로마노프(1613~1645)를 러시아의 차르로 선출하였다.
아버지 미하일 로마노프를 이은 알렉세이 로마노프(1645~1676)는 스테판 보니파티예프 대주교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의 도덕성을 회복하자는 개혁파의 운동을 전적으로 지지하였다. 러시아 전역은 이에 고무받아 정신적 부흥의 징후들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1653년 차르가 옹호한 니콘이 총대주교로 선출되자 분란이 일어났다. 신임 총대주교는 1653년 성호를 긋는 방식(두 손가락이 아닌 세 손가락으로 긋는)을 포함한 예식 절차를 그리스식으로 바꾸는 개혁을 시작하였으나, 열성적인 성직자들과 신자들은 모스크바의 전통이 동방 교회의 다른 분파들의 전통보다 우월하다는 믿음을 갖고 이 개혁에 반대하였다. 이로써 1656년 러시아 교회는 둘로 분열되어 전통을 고수하는 구파 신도들이 박해받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분열된 구파 신도들은 다시 포포비치와 베즈포포브치로 나뉘어졌다. 포포비치는 성직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고 1846년부터 그들 스스로의 주교도 갖게 되었으나, 베즈포포브치는 성직 제도를 부정하였다. 이들 구파 신도들은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황제 치하로 편입된 교회〕 1682년 알렉세이를 이은 차르 표트르(1682~1725)는 러시아를 강력한 군사력과 효율적인 조직을 갖춘 국가로 만들려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개혁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교회를 지배하고자 하였다. 1700년 총대주교 아드리안이 사망하자 그는 새 총대주교의 선출을 연기하였다. 1721년에 발간한 《교회규칙》이라는 문서에서, 표트르는 정교회 성직자들과 러시아 교회의 다양한 관습과 전통을 비판하면서 총대주교좌를 폐지하고, '종무원' 이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종교업무를 관장해야 한다고 포고하였다. 이 종무원은 차르가 임명하는 주교들과 다른 고위 성직자들로 구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종무원의 대리인' 이라고 부르는 세속 관리에 의해 모든 활동이 감시되었다. 특히 종교를 미개하다고 여겼던 에카테리나 2세(1762~1796)의 치하에서는 교회가 더욱 박해를 받았다. 공공연히 무신론을 고백한 사람이 종무원의 대리인이 되었으며, 수도원과 수녀원은 폐쇄되고 교회 재산은 몰수되었다. 그리고 그에 저항하던 이들은 가차없이 처형되었다. 또한 많은 수도자들이 북부 삼림 지대로 추방되고 그리스 등의 이웃 나라로 탈출하여 아토스 산에 정착하거나 피난하였다.
이 수도자들 중에서 파이시 벨리츠코프스키(1722~1794)는 영적 부흥 운동을 시작하여 14세기 라도네스의 성 세르지오 시대와 비교될 만큼 러시아의 종교 생활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벨리츠코프스키는 고대의 교부들과 금욕주의적 수도자들의 가르침을 깊이 연구하여 그들의 저작을 슬라브어로 번역하였다. 그는 필로칼리아(러시아어로 도브로톨류비에)를 소개하였는데, 이 책은 교부들의 저작들 속에서 주로 자기 성찰 · 기도 · 신비로운 하느님과의 친화 등을 다룬 부분을 짤막잘막하게 뽑아 하나로 엮어 놓은 것이다. 후에 그는 루마니아의 니아메츠 수도원 원장이 되어 표트르, 클레오파 등의 제자를 배출하였다. 이 수도원은 18~19세기 차르들이 관대한 정치를 펼치던 시기에 카리(1788~1860) 암브로시(1812~1891), 요시프, 네크타리, 아나톨리 같은 훌륭한 장로(스타레츠)들을 배출하였다. 이들은 자기들을 찾아온 사람들의 정신적 문제는 물론 생활 문제까지도 깊은 관심을 갖고 상담해 주었다. 알렉산드르 골리친(1773~1844) 공은 당시 유행을 좇아 자신의 합리주의를 경건주의로 바꾸고 이것을 러시아 성직자들에게 강요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근대 러시아의 영적 지도자들 중 가장 유명한 사로프의 세라핌(1759~1833)과 크론슈타드의 요한(1829~1908) 신부 같은 성인들이 나왔고 선교의 열정도 되살아나 이교도에게 복음을 전한 유명한 선교사들도 여러 명 나왔다.
20세기 초 러시아에는 총 65개 교구에 130여 명의 주교, 57,105명의 사제, 15,210명의 부제, 2만여 명의 수도자, 6만여 명의 수녀, 그리고 54,457개의 본당이 있었다. 또 40,150개의 교회 학교와 57개의 4년제 과정의 신학교, 그리고 4개의 신학 아카데미(4년제, 석사 학위 과정 및 박사 학위 전 과정)에서 성직자들을 양성하였으며 1억 명에 달하는 신자를 가진 세계에서 가장 큰 민족 교회였다. 그러나 교회는 침묵을 강요하는 차르 권력의 통제와 감시로 고통을 겪어야만 하였다. 정부는 교회가 그리스도교인의 진정한 여론을 대변하지 못하도록 감시하였다. 종교에 관한 모든 서적은 철저한 검열을 받아야 하였고, 심지어는 설교문조차 미리 국가 관리에게 제출하여 승인을 얻어야만 했다. 게다가 200년 동안 교회 회의는 한 차례도 열리지 못하였고, 대교구와 교구도 이전부터 누려오던 자치 권한을 박탈당하였다. 니콜라이 1세의 치하에서는 경비병 부대의 장교였던 프로타소프 백작에게 종무원이 인계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의 치하에서는 좀더 자유로운 분위기가 교회 행정에 도입되었으나, 이 자유는 포베도노스쵸프(1827-1907)에 의해 억압되었다. 그는 끊임없이 주교들을 이동시켜 신자들과 접촉할 기회를 박탈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자유를 회복하려는 희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1905년 차르는 모든 시민에게 종교적 자유를 허용한다는 칙령을 발표하여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이후 교회 회의를 소집하고 국가의 통제로부터 교회를 해방시키라는 요구가 확산되었다. 이러한 요구에 러시아 정부는 교회에 몇 가지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05년 포베도노스쵸프는 강제로 은퇴하고 교회 회의를 대비하기 위한 위원회가 설치되었으나 이 위원회는 2년 후에 철회되었다. 차르는 끝까지 교회의 자유를 억압하여, 차르가 몰락한 1917년 8월에 이르러서야 러시아 교회 회의는 모스크바에서 소집될 수 있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 제국은 1917년 3월 돌연 붕괴되었다. 얼마 뒤 레닌과 트로츠키 등은 권력을 장악하고서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공산당의 일당 독재를 선포하고 사회 전체를 뜯어고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러시아의 모든 과거 유산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였는데, 특히 종교에 대해서는 비타협적이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혁명이 완료되기 전에 교회는 독립을 되찾아 공산주의자들의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이미 자유로운 자치적인 기관이 되어 있었다. 1917년 8월 15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교회 회의에 278명의 평신도 대표들을 포함한 564명의 대표들이 참석하였고, 같은 해 11월 5일 모스크바 관구 대주교 티콘이 총대주교에 선출되었다. 이로써 250여 년 만에 러시아 교회는 총대주교좌를 복구하였다. 그러나 곧 이어 일어난 혁명으로 교회는 다시 압박을 받게되었다.
무신론자들은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였고, 개별적으로 그리스도교인들을 추방하는 방법만으로는 결코 교회를 파괴할 수 없음을 깨닫고 신자들을 분열시켜 서로 싸우게 하는 방법으로 교회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고 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들은 교회 반대파들에게 특권을 부여하였다. 1918년 2월 1일 총대주교 티콘은 어둠과 빛이 함께할 수 없다고 천명하고 무신론 정권을 따르는 이른바 '살아 있는 교회' 를 단죄하고 무신론 정권을 파문하였다. 그리고 1920년 11월 20일 티콘 총대주교는 자기가 투옥될 것을 예견하고 주교들의 자치적 조직을 인정하여 러시아 주교들의 권위를 공인하는 교령을 발표하였다. 1921년 러시아 밖의 주교들은 세르비아 총대주교 입회하에 칼루프치에서 시노드를 조직하였다. 1922년 서유럽의 엑사르크 에블로기 관구 대주교와 러시아 주교들은 "러시아 밖의 러시아 정교회 시노드"를 재조직하였고, 티콘 총대주교는 이를 승인하였다. 그래서 1922년 8월 5일 공산주의 정권은 모스크바의 총대주교 티콘을 투옥하고, 페테르스부르크 관구 대주교 벤야민 등을 학살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몇몇 성직자들로 하여금 모스크바에서 교회 회의를 열어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선언과 기혼(旣婚) 주교 임명 등의 개혁을 실시하여 스스로 '살아 있는 교회' 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총대주교 티콘의 퇴위를 결의하였으나 1923년 6월 예기치 않게 석방된 총대주교 티콘은 석방 직전 '신앙 고백' 을 발표하여 사도 전통 교회의 분명한 입장을 양심적으로 선언하였다. '살아 있는 교회' (공산주의 정권에 동조한 교회)는 '러시아 밖의 러시아 정교회 시노드' 를 파문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밖의 러시아 정교회 시노드' 는 이를 무시하고 무신론에 대항하였다.
이후 교회는 이른바 '살아 있는 교회' 로 남게 되었다. 티콘이 사망하고 페트로가 총대주교 대리가 되었으나 즉시 투옥되었고, 1927년에는 총대주교 대리 세르게이가 '새로운 하느님의 교회 선언' 을 발표하여 소련 정부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였다. 1929년에는 반종교 선전이 더욱 강화되어 학교는 무신론 전파의 근거지가 되었고 많은 그리스도교인이 집단 농장으로 추방되었다. 소련 헌법에 반종교 활동의 자유가 있다는 조항을 넣어, 교회의 사회 활동, 사제 교육, 교회 안에서의 종교 교육, 교회의 활동 단체, 성서 및 교회 서적 출판을 금지하고, 교회 내의 도서실을 폐쇄하고, 교회의 토지 · 건물 · 현금을 몰수할 수 있게 하였다.
1941년 9월 독일이 침입하자, 모든 러시아 교회의 성직자들과 신자들은 헌신적인 애국심을 보였다. 이에 스탈린은 교회에 많은 양보를 하여, 19명의 주교들이 교회 회의를 열어 1943년 9월 세르게이를 총대주교로 선출하였다. 이 신임 총대주교는 공석인 주교좌에 새 주교를 임명하고, 사제를 서품하였으며, 교회의 문을 여는 등 교회 조직을 재건하였다. 1944년 5월 그가 사망하고, 1945년 1월 러시아 교회 회의에서 모스크바 총대주교로 선출된 알렉세이는 세르게이의 노력을 계속 추진하였다. 그는 공산주의 통치 초기에 폐쇄되었던 모스크바와 페테르스부르크의 신학 대학 및 신학 아카데미와 지방 신학교에서 성직자를 양성하였다. 그러나 후르시초프가 집권하면서 교회는 다시 박해받기 시작하였다. 1943년 이래 개방되었던 교회의 3분의 2가 폐쇄되어, 교회는 1만 8천 개에서 7천 개로 줄어들었고, 2만 명에 이르던 성직자도 약 7천 명으로 줄어들었다. 1964년에는 8개의 신학교 중 5개교가 폐쇄되었으며, 5천여 명의 신학생도 500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1년 11월 26일 뉴델리에서 열린 세계 교회 협의회(W.C.C) 제3차 총회에서 러시아 정교회가 가입되었다. 페테르스부르크와 라고다의 관구 대주교 니코딤(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외교부장)은 슬라브어 전례서를 러시아어로 번역하고 서방 라틴 교회와의 간격을 메꾸려는 노력을 지지하였다. 그는 300년 동안 박해를 받아온 옛 러시아 정교회를 총대주교청과 화해시켰고, 1,600년에 걸친 이집트 · 시리아 · 인도 등지의 고대 동방 교회들' 과의 알력을 해소하려 하였다. 또한 그는 모스크바 총대주교청과 가톨릭 교회 사이에 우호적인 관계를 맺도록 하였다. 그러나 1971년 알렉세이를 이은 피멘 총대주교와 보수적인 주교들은 니코딤의 제안에 반대하였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소비에트의 정책을 옹호하며 그에 반대하는 이들을 탄핵하였다. 그러나 총대주교의 관할 안에 있으면서도 소비에트 체제를 비판하는 반체제 인사들이 있었다. 모스크바의 사제 니콜라이 에쉴리만과 글레브 야쿠닌은 총대주교에게 편지를 보내 정부의 '정교회 문제위원회' 는 여러 측면에서 교회와 국가의 분리에 관한 소련 헌법을 위반하기 시작하였음을 지적하고, 총대주교는 소비에트의 권력자들과 공모하여 '세속과 타협하라는 배교적 명령을 내렸다' 라고 비난하였다. 또 1975년 야쿠닌과 젊은 평신도 레프 레겔슨은 나이로비에서 열린 세계 교회 협의회 5차 회의에 강력한 내용의 호소문을 보내, 총대주교는 박해가 발생하고 있음을 부정하지만 교회는 실제로 엄청난 박해를 받고 있음을 호소하였다. 1979년 야쿠닌은 체포되었고 수많은 사람이 투옥되었다.
이와 같은 교회에 대한 탄압은 고르바쵸프가 집권하여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를 진행함에 따라 어느정도 개선되기 시작하였다. 1987년에는 모스크바 종교 철학 신학교를 설립한 오고르디코프 신부가 석방되었고, 1988년에는 러시아 정교회 전래 1천 년 축제를 거행할 수 있었으며, 1990년 10월에는 소련 연방 최고 회의가 양심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법을 의결함으로써 비로소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게 되었다. 이로써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각 분야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은 동등한 권리를 누리게 되었다. 한편, 1990년 6월 피멘 총대주교가 사망하고 알렉세이 2세가 선출되어 교회를 재건해야 할 막중한 책임을 떠맡게 되었다. 그 해 10월의 통계에 따르면, 모스크바 총대주교 관할에 75개의 교구와 11,940개의 본당이 있었는데, 1991년 1~9월에 1,830개의 본당이 새로 설립되었고, 수도원은 56개(남자 25, 여자 31)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1990년 10월, 정부에서는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몰수하였던 모든 교회 건물을 반환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 약속 이행의 하나로 5개의 수도원과 1개의 신학교가 반환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에는 백해의 소로부엔스키의 수용소로 쓰이던 수도원의 일부도 반환되었다. 이 수도원은 알렉산드로 솔제니친이 쓴 《수용소 군도》의 무대이기도 하다. 이제 러시아에서는 이러한 일련의 변화 아래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서 종교적 행렬을 쉽게 볼 수 있게 되었고, 텔레비전에 사제나 주교가 등장하여도 새삼스럽지 않게 되었으며, 종교 신문이나 종교 잡지 등도 드러내 놓고 팔고 있다. 러시아 정교회의 시급한 과제는 공산주의 정권에 의해 갈라진 해외 러시아 정교회와 모스크바 총대주교청과의 화해와 일치라 하겠다.
〔우리 나라에서의 러시아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발의 : 러시아 정교회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기까지 알래스카 · 중국 · 일본 · 한국 · 기타 극동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국에서의 선교는 구한말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19세기 말엽 조선에는 약 90명의 러시아 군인들, 30명의 민간인, 그리고 30명의 러시아 국적 한국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주일과 축일에 러시아 공사 관저에 모여 사제 없이 기도와 찬양으로 성사를 대신하였다. 그러나 종교 생활이 일상 생활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이들에게는 많은 문제점들이 있었다. 태어나는 자녀들의 세례, 신자들의 성체성사, 사망한 사람의 장례식도 거행할 수 없었다. 이에 1897년 1월 3일 볼랴노프스키 공사는 본국에 사제 파견을 요청하였고, 이 요청에 따라 러시아 정교회 공의회는 1897년 7월 공의회 결정 제2195호로 소규모 선교단을 조선에 파견하기로 하였다. 선교단의 신학 박사 암브로시오스 구드코수사 신부, 니콜라이 알렉시예프 부제, 그리고 송영(送迎)하는 콜라신은 성당 시설물들과 여러 성사에 사용되는 기물들을 가지고 1898년 초에 조선을 향해 출발하였다. 그러나 친러파의 몰락으로 이들의 입국이 승인되지 않았다. 입국이 저지되자 암브로시오스 신부와 콜라신은 귀국하고, 니콜라이 부제만이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 러 국경 지대에서 기다리다 1898년 중순 입국 허가를 받고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보낸 성당 시설물들을 가지고 서울에 도착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니콜라이 부제는 즉시 본국 공의회에 도착 보고를 하고 사제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에 러시아 공의회는 카잔 신학 대학 출신인 신학 박사 크리산토스 스케초프스키(Sketkovsky) 수사 신부와 신학교 출신 송영 책임자로 이오나레프첸코를 선정하여 파견하였다. 이들은 1900년 2월 5일에 서울에 도착하였으나 당시 서울에는 예식을 집전할 수 있는 성당이 없었다. 독실한 신자였던 러시아 공사가 관저의 가장 큰 방 하나를 약 6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임시 성당으로 꾸며, 1900년 3월 2일 한국에서의 첫 성찬 예배를 거행하였다. 이날 예배에는 정교회 신자들뿐 아니라 당시 조선의 정부 대표와 많은 주한 외교관들도 참석하여 경축해 주었다.
정교회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이 늘어남에 따라 초대 선교 사제 크리산토스 신부는 교리 교육을 시작하였다.그는 교리서와 예식서 등을 러시아어와 한국어에 능통한 이들의 도움을 받아 번역하였는데, 이러한 노력으로 신자들이 증가하자, 임시로 사용할 소규모의 성당이 서울 정동 22번지(현재 MBC 문화 체육관 자리)에 건립되어 1903년 4월 17일에 축성되었다. 이곳은 1956년까지 한국에서의 선교 활동 중심지가 되었다. 정동 성당은 고종 황제가 기증한 부지 위에 건립되었으며, 거기에 달린 크고 작은 여섯 개의 종소리는 장차 그 부지 위에 세워질 대성당의 웅장한 모습을 예고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1917년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으로 선교부가 폐쇄되자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고난 속에서도 뿌리내리는 선교 사업 : 1904년 1월에 일어난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 세력이 밀려나자 선교단도 철수하게 되었다. 크리산토스 신부는 성당 기물들을 프랑스 공사관에 보관하고 동역자들을 거느리고 같은 해 2월 2일 귀국하였다. 1906년 러일 전쟁이 끝나고 국내 정세가 다소 안정되자, 고종은 8월 19일 선교사의 재입국을 허용하여 파벨 이바노프스키 수사 신부, 블라디미르 스크리잘리 수사 신부, 바르토로메오 셀레즈노프 부제, 그리고 4명의 평신도로 구성된 선교단이 입국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에 대한 일본의 적대 행위는 종교 활동을 많이 제약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교리 공부를 진행시켜 나갔으며, 파벨 신부는 전임자의 번역 사업도 계승하여 성찬 예배서를 보충 · 완성하였다. 그리고 일반 교육을 위한 학교 7개교에 220명의 학생을 두었고 9개의 공소를 설립하였으며, 남자 192명과 여자 130명이 세례를 받고 정교회에 입교하였다.
1910년 한일 합방으로 일제는 교회에 대한 탄압을 노골화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12년 강탁(요한) 부제가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 동경의 세르게이 주교로 부터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처럼 러시아 정교회에 의해 설립된 한국의 정교회는 1900년부터 1918년 러시아 정교회 선교부가 폐쇄되기까지 블라디보스토크 관구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으로 한국 교회는 러시아와의 기존 관계에서 오는 재산권에 대한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5년 한국의 정교회는 교회의 재산권을 일본 정교회에 위탁하였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해방 후 교회 재산이 적산(敵産) 재산 취급을 받아 국가 재산으로 귀속되었다가 다시 소송 절차를 거쳐 한국의 정교회 신도들의 공유로 환원되었다.
러시아 정교회 공동체 소멸과 부활 : 1945년 8 · 15 해방 후, 김의한(金義漢, 알렉시오) 신부는 위축된 교회를 부흥시키려 노력하다가 6 · 25 동란 때 납북되고, 성당은 전쟁으로 크게 파손되었다. 목자를 잃은 신자들은 사방으로 분산되어 큰 위기를 맞게 되었으나, 유엔군으로 참전한 그리스군의 종군 사제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특히 그리스 종군 사제 안드레아스 할키오풀로스 신부는 1954년 귀국에 앞서 한국 신도들이 천거한 문이춘(보리스)을 일본 동경 주교에게 서품을 받게 하여 김의한 신부의 뒤를 잇게 하였다. 1956년 한국인들의 신도 총회의 결정에 따라, 한국의 러시아 정교회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 관할 아래 들어가게 되었고, 한국에서의 러시아 정교회 선교 활동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1990년 3월, 그리스 정교회 소속 사제 강태용(유스티노) 신부는 러시아 정교회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외교부와 친교 관계를 맺고, 한국에서의 러시아 정교회 선교 사업을 모색해 나갔다. 그리고 1992년 강태용 신부는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초청으로 페테르스부르크 러시아 정교회 신학 아카데미에서 러시아 전통의 예배 형태와 슬라브어 예배 훈련을 받았다. 이어서 1994년 4월에 러시아 정교회 시노드가 강태용 신부를 러시아 정교회 한국 선교부 주관 사제로 임명함으로써, 러시아 정교회 선교 활동은 40여 년 만에 재개되었다. → 동방 교회 ; 러시아)
※ 참고문헌  Nicholas V. Riasanovsky, A History of Russia, Oxford University Press, 1977(이길주 역, 《러시아의 역사》 1, 도서출판 까치, 1991)/Nicolas Zernov, The Russian and Their Church, London(위거찬 역, 《러시아 정교회사》, 기독교 문서 선교회, 1991)/ 《정교회를 알고 계십니까?》, 한국 교회, 1987/ 강태용 편, 《東方正敎會》, 도서출판 익산, 1991/ -, 《올바른 예배 생활-정 교회 신앙 생활》, 도서출판 고려동, 1991/ 이인영 편, 《아바쿰》,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1/ 강태용, 《정 교회(正敎會)》, 러시아 정교회 한국 선교부, 1994/ Helene Iswolsky, Christ in Russia : The History, Tradition, and Life ofthe Russian Church, Milwarkee, The Bruce Publishing Company, 1960/ Nicholas Arseniev, Russian Piety, Wisconsin, The Faith Press Ltd., 1964. 〔張兢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