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탑 - 塔

〔영〕The Tower of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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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탑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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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탑 전경.

영국 런던의 템스 강 북쪽 고지대에 세워진 중세 때의 대표적인 성채 유적. 세익스피어가 쓴 《리처드 3세》의 피비린내 나는 사건의 무대로 더욱 유명해진 런던 탑은, 중앙의 화이트 타워(White Tower)와 왕실 보물관, 무기 전시관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것들을 둘러싼 성벽 바깥쪽은 해자(垓字, 성밖으로 둘러서 판 못)로 되어 있다. 1066년 색슨 왕 해럴드 (Harold)와 싸워 승리한 노르망디의 월리엄(William) 대공은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에서 영국 왕으로 즉위하면서, 새 왕국의 중심 도시인 런던에 요새를 짓도록 명령하였는데, 이때 템스 강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성벽과 뜰 사이가 가깝도록 해자와 제방을 쌓았다. 그리고 10년 뒤 이곳을 왕궁으로 만들면서 커다란 돌탑을 세우고 '런던 탑' 이라고 명명하였다.
중앙에 위치한 화이트 타워는 왕과 성주 그리고 부관들을 위한 숙박 시설로 계획된 것인데, 1078년 로체스터 주교이며 수도자인 군둘프(Gundulf)의 지휘 · 감독 아래 착공되어 1189년 사자왕 리처드(Richard) 1세가 십자군에 참가해 있는 동안에 엘리(Ely)의 주교이며 재상인 롱챔프(W. Longchamp)가 탑의 방위(防圍)를 확장하였고 왕위를 계승한 리처드의 형제 존(John)이 1199년에 비로소 이를 완성하였다. 화이트 타워란 이름은 원래 흰 색으로 칠을 한데다가 매년 템스 강의 물로 씻은 데서 유래한다.
예술적 감각을 지닌 존의 아들 헨리(Henry) 3세(1216~1272)는 런던 탑을 확장하여 이중으로 성벽을 만들면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새로운 벽을 탑 주위에 쌓아 왕의 거성(居城)으로 꾸몄으나, 그의 아들 에드워드(Edward) 1세(1272~1307)는 이를 거대한 수비성으로 변모시켰다. 1275~ 1285년 사이에 그는 이전의 해자를 메우고 새로운 해자를 만들면서 그 가장자리에 성벽을 쌓았는데, 이때 육지 가까운 곳에 해자를 가로지르는 출입구를 특별히 만들게 하였다. 이로써 해자와 함께 탑은 18에이커(7.3ha)나 커진 확고 부동한 요새가 되었다.
또한 영국 왕조의 풍요와 힘의 상징인 런던 탑은 병기고 · 보고(寶庫) · 조폐국의 기능도 수행하였다. 에드워드 1세는 탑을 확장하여 왕의 보고와 공적인 문서고를 설치하였으며, 금화와 은화를 만드는 조폐국과 왕국의 중요한 무기를 보관하는 병기고를 두었다. 그러나 헨리 8세의 통치(1509~1547) 후반기부터 런던 탑은 점차로 왕궁처럼 사용되면서 탑의 방어력은 점점 약해져 갔다. 중세에 런던 탑은 전쟁 포로나 폭동을 일으켜 런던으로 끌려 온 외국 왕족이나 귀족을 가두는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많은 죄인들이 탑에 갇혀 고문을 당하고 몇몇은 죽을 때까지 탑에 갇히기도 하였는데, 이 성채가 더욱 유명해진 것은 신분 높은 국사범(國事犯)의 감옥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템스 강으로 통하는 반역자 문(反逆者門)이 바로 감옥 입구로 사용되었는데, 여기에 감금되었던 유명 인사로는 에드워드 5세의 아들인 에드워드 형제를 비롯하여 성 토마스 모어(St. Thomas More) , 볼린(A.Boleyn), 그레이(J.Grey) 등이었고, 엘리자베스 1세도 한때 유폐된 적이 있었다. 헨리 8세의 수상이었던 모어는, 교황에 반대하여 영국 교회의 수장권(首長權)을 주장하는 왕의 견해를 거부하여 15개월 동안 벨 타워(BellTower)의 지하 방에 구금되었었다. 또한 모어의 친구인 로체스터의 주교 존 피셔(John Fisher)는 교황의 수위권 아래 가톨릭 교회의 일치를 위해 죽음을 당하였다. 1935년에 시성된 이 두 성인은 헨리 8세의 통치 기간에 순교했던 다른 사람들과 함께 빈쿨라(Vincula)의 성 베드로 성당에묻혀 있다.
1377년 리처드 2세부터 1661년 찰스(Chales) 2세까지 거의 모든 통치자가 이곳 런던 탑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1660년 추방에서 돌아와 새로 왕으로 즉위한 찰스 2세는 왕조가 회복되자 탑을 수리하고 이곳에서 대관식을 거행하면서, 영국 왕조의 힘과 찬란한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해 국민들에게 역사적 무기와 병기고 관람을 허용하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탑은 여전히 감옥 · 조폐국 · 문서고로 사용되었는데, 이러한 다양한 이용에 대해 불만을 품은 웰링턴(Welington) 대공은 1826년 관리 장관으로 임명되자 탑의 군사적 역할을 강조하였다. 1841년 주요 건물과 큰 창고가 불에 타자 그는 그 자리에 새로운 병영을 만들었다. 그러나 웰링턴이 죽은 후 런던 탑은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 앨버트(Albert) 공에 의해 박물관의 성격을 띠기 시작하여, 오늘날에는 런던의 최고 명소 중의 하나가 되었다. 매년 약 200만 명의 관광객들이 런던 탑을 찾고 있는데, 이곳에는 오랜 과거의 역사를 간직한 채 생활하는 마을의 모습이 아직까지 보존되어 있다.
성채 · 왕궁 · 감옥으로서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런던 탑에는, 옛날의 무기와 갑주(甲胄)를 비롯하여 잔혹한 고문 도구, 단두대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옛날의 낙서가 그대로 남아 있는 감방들이 공개되고 있다. 특히 솔트 타워(SalToower)의 한 방 벽에는 예수의 이름 · 동정녀 마리아 · 십자가 표시와 예수회 표어인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Ad majorem Dei gloriam)가 쓰여 있는데, 이것은 엘리자베스 1세 통치 동안에 갇혀 있던 가톨릭 신자들이 '기도의 도움' 을 구하면서 새긴 것으로 보인다. 또한 경내에 있는 왕실 보물관에는 보석 왕관, 거대한 순금 방패,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 등이 진열되어 있고, 입구에는 16세기의 근위병 복장을 하고 큰 도끼를 든 '비피터' (Beefeater, 보초 근위병)가 방문객들을 맞아 주고 있다. 초기 노르만 양식을 띠고 있는 런던 탑 내의 사도 요한 성당은 노르망디에서 해협을 가로질러 실어 온 재료로 지은 석회암 건물로, 아직도 예배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 참고문헌  《세계 대백과 사전》 8, 동서문화, 1991, p. 4796/ 《동아 원색 세계 대백과 사전》 10, 동아출판사, pp. 397~398/ P. Hammond, The Tower of London, Raithby · Lawrence & Company Ltd., 1990. 〔孫淑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