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브, 뱅상 (1877~1940)

Lebbe, Vinc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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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상 레브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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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상 레브 신부.

벨기에 신부. 중국 선교사. 수도회 설립자. 중국 이름은 '뇌명원' (雷鳴遠, 멀리 울리는 뇌성). 1877년 8월 19일 벨기에의 강(Gand)에서 변호사인 아버지 피르맹 레브(F. Lebbe)와 영국계 프랑스인인 어머니 루이스 바리에(L. Barrier) 사이에서 태어났다. 개방적이고 독립적이며 관용적인 가정 분위기 속에서 자랐으며, 전통적인 가톨릭 신앙을 물려받았다. 6세 때 부모를 따라 파리에서 3년 동안 지낸 것을 비롯하여 영국과 벨기에에서 자주 이사를 하였기 때문에 다양한 문화 생활을 체험할 수 있었는데, 학교 교육은 주로 이프르(Ypres)에서 받았다. 특히 문학과 음악을 좋아하여 성 뱅상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빈천시오 성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연극의 각본 · 연출 · 주인공 역할까지 맡아서 좋은 반응을 얻기도 하였다. 유아 세례명은 프레데릭(Frédéric, Freddy로도 불림)이었으나 빈천시오 성인을 알고 난 후 그를 좋아하게 되어 12세 때 견진 영명으로 뱅상(빈첸시오의 프랑스어 표기)을 택하였다. 그는 부모를 따라 자주 가던 수도원에서 우연히 복자 페르보아르(Perboyre)의 생애를 읽은 다음부터 중국의 선교사로 순교하기를 갈망하게 되었다.
18세 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895년 11월 6일 페르보아르 복자 소속의 파리 성 뱅상 수도회(라자로회로도 불림)에 입회하였다. 그 후 5년 동안 파리와 로마 신학교에서 사제 수업을 받으면서 그의 평생 동지가 될 코타(Antoine Cotta) 신부, 역사 비평학자 푸제(Pouget) 신부, 그리고 마릇수(Maredsous)의 교부학자 동 모랭(Dom Morin)과 친분을 맺었다. 코타 신부에게서 사도 바오로의 선교관에 대하여 알게 되었고, 푸제 신부와 동 모랭에게서는 근대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1897년 마릇수 수도회에 입회한 동생 베드(Béde) 신부와 영국 아우구스티노 수녀회에 입회한 동생 엘리사벳 수녀와도 서로 형제적이고 풍부한 영성적인 나눔을 가졌다.
〔중국 선교〕 레브는 1900년 말 로마를 방문한 북경교구 파비에(Favier) 주교로부터 중국 의화단(義和團) 사건에 관한 진상 보고를 듣고 즉시 중국 선교를 자원하였다. 당시 그는 신학 과정을 이수하던 중이었고 부제품도 받기 전이었으며 건강도 좋지 않은 상태여서 불가능해 보였으나 마침내 수도 장상들의 허락을 받았다. 1901년 2월 10일, 24세로 파비에 주교 일행과 함께 중국행 선박에 올라 3월 16일 상해를 경유하여 3월 말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가 보기에 서방 선교사들이 이끄는 중국 교회는 '물위에 뜬 기름' 처럼 겉돌고 있을 뿐 아니라, 중국 신자들까지 본국에서 이방인으로 길들여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은 유럽에 알려진 것처럼 야만인도 미개인도 아닌, '깨끗하고 예의바른 총명한' 민족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처럼 총명한 백성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불러 주신 하느님께 감사' 를 드리면서 '의화단 사건의 잘못은 99% 유럽측에 있다' 고 생각하였다. '유대인과 있을 때는 유대인처럼, 이방인과 있을 때는 이방인처럼' 행동한 사도 바오로의 선교 정신에 깊은 영향을 받은 그는, 여행 중에 만나는 많은 중국인들과 가까이 지내며 그들의 풍습과 말을 배우기 시작하여 이미 중국행 선박에서부터 '뇌명원' 이라는 중국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북경 신학대학에서 남은 신학 과정을 이수하는
동시에 교회사, 바오로 서간 등을 강의한 후 1901년 10월 28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7개월 동안 중국 신학생들 및 중국 신부들과 동등하게 지내면서 그들의 의복, 음식 등 중국 풍습을 익히고 말을 배우는 데 전념하였으므로 선배 선교사들은 그런 그를 우려하기도 하였다. 서품 전날에는 교구장을 찾아가 중국을 식민지로 취급하며 같은 중국 사제들에게 불평등하게 대하고 있는 선교사들의 태도와 교회의 입장을 비판하면서 유럽 신자들이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등이 중국에서도 베풀어져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고백하기도 하였다.
〔천진 운동〕 사제 서품을 받은 후 레브는 4년 동안 신학 대학 강의와 보좌 신부 생활을 하였고, 1906년 9월 천진(天津)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여 그 지역 지구장과 교구 부주교에 이르기까지 10년 동안 화려한 사목 활동을 펼쳤다. 당시 천진은 외국 공관이 많이 주재하고 있는 중요한 국제 도시였으나, 200만 주민 중 가톨릭 신자는 불과 6천여 명이었고 게다가 거의 신입 교우들이었다. 그는 자신의 천진 사목을 '천진 운동' 이라 불렀는데, 천진 운동의 핵심은 '중국은 중국인에게로, 중국인은 교회로' 인도하는 일이었다. 그 방법으로는 지속적인 강의를 통한 대중 교육과 출판 활동, 그리고 가톨릭 운동(Actio Catholica)이었다. 순수한 선교 활동만 하라는 교구장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국 고전까지 연구하여 유창한 언변과 해박한 지식으로 중국 사회의 저명 인사들과 접촉하였으며 그들로 하여금 천진 운동에 협력하게 하였다. 그리고 우선 중국인들의 애국 정신을 고취시켜 분열된 나라를 통일시키고 외국 세력으로부터 자국을 보호하도록 각성시켰다. 아울러 중국 교회의 토착화를 위해서 중국인 주교단의 창설을 준비하는 동시에 중국 사제단과 신자들의 신앙 교육을 강화하고, 특히 평신도 지도자 양성을 서둘렀다. 8개의 대강당에서 사회 · 종교 강의를 지속적으로 실시하였으며, 강의록 · 소책자 · 여성지 · 주간과 일간의 가톨릭 신문을 발간하여 전반적인 교육을 도모하였다. 특히 1915년에 창간한 일간지 <익세보>(益世報)는 1년 만에 2만 부를 돌파할 정도로 북부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으며, 그 운영권도 처음부터 평신도들 에게 위임하였다. 당시 유럽에서 시작된 '가톨릭 운동'을 도입하여 꽃피웠으며, 본당 사목 위원, 교리 교사회, 청년회 등과 같이 분야별 · 지역별 소공동체들을 구성하여 교육을 강화하였고, '반죽 속에 든 누룩' 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현장 사목을 강조하였다.
〔노서개 사건과 유배〕 '천진 운동' 이 한창 활발하던 1916년에 노서개(老西開) 사건이 발생하였다. 천진시의 노서개에는 당시 프랑스 대사관이 있었는데 인근에 있는 주교관 부지를 프랑스 대사관 영역으로 흡수하려다가 천진 시민들과 충돌한 사건이었다. 천진 시민들은 대대적인 시위로 항의하였고, 레브 신부는 <익세보>에 그들을 옹호하는 기사를 싣고 프랑스 대사에게 부당성을 고발하는 항의서를 보냈다. 그 여파로 그는 6월 24일 천진에서 1,500km 남부에 있는 영파교구(寧派敎區)로 유배되었고, 그의 동료 코타 신부와 중국 신부들도 모두 해산, 이동됨으로써 천진 운동은 중단되었다. 코타 신부는 성무집행 정지를 받으면서까지 항의하였고, 논고 형식의 진정서를 교황청에 제출하였는데, 이 자료는 1919년 발표된 선교사 회칙 <막시뭄 일룻>(Maximum Illud) 초고 작성의 원천이 되었다. 교회 장상에 대한 순명을 하느님께 대한 순명으로 여긴 레브 신부는 영파교구에서 완전히 새로운 사목을 시작하였다. 1917년 8월 15일자로 발표된 영파교구장 레노(Regnaud) 주교의 사목 지침서에 대한 답변으로 작성된 장문의 그의 서한은 레브의 중심 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서간집 69).
〔유럽에서의 활동〕 1920년 드디어 교황청은 중국 교회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게브리앙(Guebriant) 주교를 파견하였다. 그의 권고로 레브 신부는 중국 유학생을 지도하기 위해 유럽으로 갑자기 떠나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유럽 전역에 산재한 중국 유학생들의 문제를 풀어 주며 '천진 운동' 을 재개하였는데, 그들 중에는 주은래(朱恩來)와 등소평(鄧小平)도 있었다. 7년 동안 중국 유학생 200명 이상이 세례를 받았고, 수 명의 성직자도 배출되었다. 또 중국인 주교단 창설을 위해 포교성 장관과 교황을 알현하여 중국인 주교 후보자 명단을 제출하는 등 적극적으로 이를 추진한 결과 1926년 10월 28일
아시아권 최초로 중국인 주교 6명을 탄생시켰다. 이것은 지역 교회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1925년 중국인 주교단을 보좌할 '외방 선교회' (S.A.M.)를 벨기에에서 창설하였으며, 그 후 1937년에는 같은 목적의 '평신도선교회' (A.L.M., 현 A.F.I.의 전신)를 창설하였다.
〔중국과 정의를 위한 헌신〕 동료 선교사들의 방해 공작으로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던 그는 안국교구(安國教區) 손덕정(孫德楨) 주교의 초청으로 1927년 당당히 귀환, 중국인으로 귀화하였다. 50세가 된 그는 중국의 복음화를 위해 일하고 싶어했다. <익세보>와 가톨릭 운동을 부활시키고 대학생 연합회를 조직하였으며, 소외되고 가난한 시골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례자 요한의 작은 형제회' (1928)와 '소화 데레사의 작은 자매회' (1929)를 창립하였다. 이때 그는 전희생(全犧牲) 진애인(眞愛人), 상희락(常喜樂)의 첫 글자를 딴 '전진상(全真常) 정신' 을 복음의 요약으로 강조하여 그가 창설한 4개 단체에 심어 주었다.
1937년 중일전쟁(中日戰爭)이 발발하자, 이 전쟁을 일본의 부당한 침략으로 간주한 레브 신부는 교회의 중립 요구에도 불구하고, 중국 형제들의 죽음을 방관하고 있을 수 없었다. 10여 명의 수사들과 200여 명의 신자들을 이끌고 제3 사단 12연대에 자원하여 위생 부대로 활약하였는데, 그의 부대를 통해 치료받고 후송된 부상병만도 2만 명이 넘었다. 그는 제3 연대장에까지 진급하였고 중국군의 훈장도 받았으며, 하루에도 10여 차례씩 강연을 하며 중국인들의 애국심과 단결을 호소하는 등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다. 일본군은 현상금 3만 달러까지 걸어 놓고 그를 체포하려 하였다. 1940년 전쟁이 뜸해진 후 그 동안 함께했던 공산군이 노선을 달리하기 시작하자 공산주의를 교회의 적으로 간주한 레브는, 그들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결국 그 해 3월 9일 공산군은 여행 중이던 그를 수행원과 함께 연금시켜 버렸다. 장개석(蔣介石) 총통의 주선으로 40일 만에 풀려났으나, 그 동안의 전선 활동으로 지쳐 있던 63세 노사제의 건강은 악화되어 있었다. 석방 즉시 낙양에서 응급 치료를 받고 임시 수도 중경으로 옮겨 치료를 받던 중 1940년 6월 24일 세례자 요한 축일에 사망하였다. 중국 정부는 중국인 이상으로 중국을 사랑했던 그에게 감사하는 표시로서 장개석 총통을 장례 위원장으로 하는 국장을 선포하여 최고의 예우를 다하였다. 현재 그의 유해 일부는 대륙 만신전에 안치되어 백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영웅 대우를 받고 있다. (→ 중국 ; 국제 가톨릭 형제회)
※ 참고문헌  Ch. J. Leclercq, Vie du Père Lebbe, Casterman, 1955(전경자 역,《멀리 울리는 뇌성 - 뱅상 레브 신부의 생애》, 성바오로출판사, 1993)/L. Levaux, Le Père Lebbe, Apotre de la Chine moderne, Edit.Universitaires, 1948/ Choix et présentation de P. Goffart & A. Sohier (S.A.M.), Lettres du Père Lebbe, Casterman, 1960(김정옥 역, 《뱅상 레브신부 서간집》, 수원 가톨릭대학 출판부, 1990)/ V. Thoreau, Le tonnère qui chante au loin, Vie et mort du Père Lebbe, Didier-Hatier, Bruxelles, 1990/ 趙雅博, 《雷鳴遠 神父傳》, 文景出版社, 1966/ 一, 《熱愛中國雨神父》, 台大印刷公司, 民國 68年/ 一, 《雷鳴遠與中國》, 衛道中學, 民國 76年/ 曹立珊, 《春風十年》, 聖化月刊社 民國 66年/ 一, 《雷明遠 神父的神修綱領》, 聖化月 刊社, 民國 71年. 〔金貞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