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철학자. 프랑스 철학자 가운데 가장 독창적인 철학자 중 한 사람. 1906년 1월 12일 리투아니아에서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가 쓴 자서전적인 글 《서명》 (Signature)에 따르면 그는 히브리어 성서, 푸시킨과 톨스토이의 작품을 읽으면서 자랐다고 한다. 1923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며, 1928~1929년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후설(E. Husserl, 1859~1938)과 하이데거(M. Heidegger, 1989~1975)의 지도 아래 현상학을 연구, 1930년 <후설 현상학에서의 직관 이론>(La théorie de l'intuition dans la phénoménologie de Husserl)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레비나스는 후설 철학을 자연주의적 존재론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제안된 초월론적 존재론으로 해석하였다.
1930년대 레비나스는 파리에 머무르면서 마르셀(G.Marcel), 장 발(Jean Wahl), 모리스 블랑쇼(M. Blanchot)등 당시 파리의 전위 철학자들과 교류하면서, 후설과 하이데거 철학을 프랑스에 소개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군에 입대하여 독일군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존재에서 존재자로》(De I'existence à l'existant, 1947)를 집필하였는데, 이 책은 같은 해나온 《시간과 타자》(Le temps et l'autre)와 함께 레비나스의 초기 철학을 담고 있는 귀중한 문헌이다. 1949년에는 후설과 하이데거에 관한 논문을 묶어 《후설과 하이데거와 더불어 존재를 찾아서》(Endécouvrant l'existence avec Husserl et Heidegger)란 책을 펴냈다.
레비나스가 세계적인 철학자로 주목되기 시작한 것은 1961년에 출판된 《전체성과 무한-외재성에 관한 연구》(Totalité et infini : Essai sur l'extériorité, 이하 'T.I.' 로 인용)부터였다. 1972년에는 《타인의 인간주의>(Humaisme de l'autre homme)를, 1974년에는 그의 두 번째 주저인 《존재와 다른 것 또는 본질 저편》(Autement que'être ou au-delà de I'essence)을 펴냈다. 이외에도 유대교와 관련된 《어려운 자유》(Difficile liberté, 1963, 이하 'D.L' 로 인용), 《탈무드 4강의》(Quatre lectures talmudiques, 1968)를 비롯해 《모리스 블랑쇼에 관해서》(Sur Maurice Blanchot, 1975), 《고유명사》(Noms Propres), 《이념 속에 오시는 하느님》(De Dieuqui vient à l'idee, 1982), 《도피에 관하여》(De I'évasion, 1935, 1982), 《윤리와 무한》(Ethique et infini, 1982), 《초월과 인식 가능성》(Transcendance et intelligibilité, 1984), 《우리 사이에》(Entre nous, 1991) 등 많은 책을 저작한 레비나스는 1995년 12월 25일, 89세로 파리에서 사망하였다.
〔철학의 출발점〕 레비나스 철학은 타자성(他者性)의 의미를 되새기는 데 그 의미를 둔다. 타자성의 철학은 유대인으로서 그의 경험과 관련이 있다. 그는 1930년대까지만 해도 후설과 하이데거를 프랑스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그들의 철학을 해석하는 일에 몰두하였지만 1940년대부터는 이 두 철학자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철학은 충격과 고통의 경험에서 비롯된다' 는 그의 말처럼 참혹한 전쟁의 경험은 레비나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도덕과 인간성을 말살하는 전쟁의 폭력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리스도교의 영향 아래있었던 유럽이 어떻게 인간의 인격성을 그처럼 망각하고 엄청난 살상과 파괴를 자행할 수 있었던가?
레비나스는 전쟁과 서양 철학 전통이 서로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전쟁은 전체주의적이고, 전체성의 이념이 전쟁의 폭력을 낳는다. 전쟁은 개인을 전체에 종속시켜 그것에 복종하지 않는 개인은 무참히 제거해 버린다. 개인을 전체에 환원하고, 전체의 한 부분으로 환원되지 않은 개인은 제거하는 것이 곧 전쟁의 폭력이다(TI, ix). 레비나스는, 전쟁은 전체성의 이념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 온 서양 철학에 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인간을 역사의 산물로 혹은 자연의 일부로, 혹은 사회나 구조의 한 계기로 봄으로써 개인의 인격성을 무시하고 전체의 이름으로 개인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는 이론적인 기반을 서양 철학이 제공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을 '존재 진리' 에 종속시키는 하이데거의 철학조차도 전쟁의 철학이요, 제국주의적 철학이라고 레비나스는 비난하였다.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외재성에 관한 연구》에서 무한자의 이념을 통해 인간 존재와 주체성의 의미를 새롭게 드러냈다. 책의 서두에서 서술 목적이 "무한자의이념에 근거한 주체성을 변호하는 데 있다" (T.I., ix)고 밝히고 있듯이 주체성의 문제는 그의 철학의 중심 주제이다. 이 문제는 《타인의 인간주의》, 《존재와 다른 것 또는 본질 저편》이라는 책에서 더욱더 철저하게 다루어졌다. 레비나스가 이해하는 인간 주체는 홀로 고독하게 자존하는 관념적 혹은 이론적 주체가 아니라 타인과 함께 노동하고 거주하는 세계 내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자기성의 좁은 테두리를 초월하여,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스스로 자기 자신의 존재 의미를 얻는 윤리적 주체이고 이런 의미의 주체성은 후기 저작에서는 '대리자' , '볼모' , '가까움' 등의 개념을 통해 더욱더 발전되었다.
[인간론] 레비나스는 인간의 자기성, 자아의 독립성이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전체성과 무한》에서 치밀하게 추적해 나갔다. 그는 이 책에서 자기 실현의 과정을 분리' (la séparation)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자기 스스로 서는 것, 그것은 자기 자신을 타인과 사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고 자기 자신이 설 자리를 '세계 속에서' 점유하는 것을 뜻하였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인간론과 대립된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사물들이 우리에게 의미를 갖는 것은 우리가 그것들을 생존을 위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임을 강조한다. 사물을 도구로 사용하는 인간의 존재는 근본적으로 염려하는 존재이다. 이에 레비나스는 '염려가 세계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존재 방식인가? 하고 되묻는다. 그는 하이데거와 반대로 염려보다 즐김과 누림, 곧 향유(jouissance)가 세계 내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존재 방식이라고 주장하였다(T.I., 84). 향유는 염려와는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염려하는 존재로 이 세계에서 살아갈 때 우리를 에워싼 사물들은 살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삶을 향유할 때 산다는 것은 주변에 있는 것들, 예컨대 햇볕과 맑은 공기, 바람과 흙 냄새를 즐기기 위해서 사는 것이다. 우리는 먹고, 일하고, 놀이하고, 산책하기 위해 산다. 우리가 산책하는 이유는, 어떤 다른 목적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만족을 주기 때문이다. 사물은 우리의 생존을 위한 수단이기보다 존재의 원천이고 만족으로 체험된다(T.I, 103~107 참조). 즐김은 세계를 우리 밖에 있는 대상으로 체험하기보다 우리를 담고 있는 삶의 요소 혹은 삶의 환경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우리를 에워싼 사물들의 세계는 우리들의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젖줄이고 생활 환경이다. 세계의 이러한 성격을 레비나스는 '요소적' 이라고 부른다(T.I., 104). 물이 물고기에게 삶의 '요소' (l'élément)이듯이 세계는 인간 삶의 '요소' 이다. 요소는 규정할 수 있는 '어떤 것' 이 아니라 사물들이 나타나고 사물들이 다시 돌아가는 포괄적인 환경이다. 공기, 바다, 흙, 바람 등은 '형식 없는 내용' 이고, 이 포괄적인 환경 속에서 우리는 고향을 맛본다. 내가 딛고 서 있는 땅은내가 그것에 관해 생각하는 것과 상관없이 나를 떠받치고 있다.
레비나스는 향유의 경험을 세계 안에 사는 인간이 세계와 접촉하는 가장 근원적인 방식으로 이해하였다. 지적인 측면보다 감성적 · 신체적 측면이 여기서 강조된다. 인간은 감성적인 느낌을 통해, 즉 세계 내에서 편안하게 아무런 걱정 없이 존재한다는 느낌을 통해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주변 환경을 향유하는 가운데 인간은 자기 자신을 확인한다. 물을 마시고, 공기를 들이키는 것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즐김 가운데에서 자기성, 혹은 주체성의 모습이 최초로 드러나는 것으로 레비나스는 보았다(TI., 90~92 참조). 하지만 향유는 순간적인 것에 불과하다. 만족감을 맛보는 순간, 늘 위험과 내일에 대한 불안이 고개를 내민다. 물과 공기와 바람과 흙은 나의 자유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뜻과 상관없이 나에게 혜택을 베풀기도 하고 나의 생활을 위협하기도 한다. 삶의 요소는 이런 의미에서 나를 떠받치고 있는기반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익명성으로, 무규정성으로, 나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세력으로 남아 있다.
요소의 위협은 인간에게 두 가지 반응을 일으킨다. 첫째는 신화적 반응이다. 요소의 무규정적인 불확실성은 신화적 신앙이 뿌리내릴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한다. "불확실성인 요소의 미래는 신화적 요소의 신성으로 체험된다" (T.I., 115). 요소의 어두운 심연은 '얼굴 없는 신들' 이 출현하는 장소이다. 이 어두움은 인간을 다시 익명적인 '있음' 의 영역에 빠뜨린다. 감추어진 힘에 대한 원시적 공포를 벗어나 인간이 자기 스스로의 독립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신론' 의 위협을 감수해야 한다(T.I., 116). 무신론, 즉 신적인 존재와의 '분리' 를 통해서 요소가 지닌 마술적 힘이 상실된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관리하고 지배하고 요소(자연)를 정복하고 싶은 충동을 갖게 된다. 이제 즐김은 내일을 위한 걱정으로 바뀌고, 이 걱정 때문에 인간은 노동하고 집을 지음으로써 자기의 삶을 안전하게 설정한다. 이것이 요소의 위협에 대해서 인간이 보이는 두 번째 반응이다. 집을 짓고 거주하며, 노동을 하는 것은 인간이 자기 긍정, 자기 자신의 독립성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이다(T.I., 102~125 참조).
거주는 요소와의 직접적인 접촉을 단절하고 세계의 위협을 벗어날 수 있는 다른 영역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거주를 통해 인간은 자기의 독립성, 자기의 자립성을 되찾으며, 자기 자신이 되어 그곳으로부터 세계를 지배하고 요소를 다스릴 수 있는 자리를 얻게 된다. 거주는 그러나 되돌아옴, 자기 자신에의 은둔만을 뜻하지 않는다. 거주는 집의 친밀성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집은 타인의 따스함과 가까움을 맛보는 곳이다. 이곳에서 인간은 타인을 만나고 타인과 친밀한 관계를 갖는다. 거주와 달리 노동은 주변 세계를 정복하고 지배하는 방식이다. 노동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지배와 소유의 차원을 열어 준다. 환경 세계가 지닌 무규정성과 익명성은 노동을 통해 해제되고 사물은 이제 분명한 의미와 기능을 갖게 된다. 사물은 노동을 통해 인간의 생존 수단으로, 도구로서 취급되며 사회적 관계에서 교환 가능한 것으로 전환된다(T.I., 131~136).
〔윤리학과 사회 철학〕 타인과의 만남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 질문은 레비나스 철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다. 레비나스의 철학적 사유는 타인의 존재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밝히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그는 타자와의 관계를 '얼굴의 현현(顯現)' 을 통해 접근한다. 얼굴의 현상은 레비나스에게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얼굴의 만남은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물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을 열어 준다. 그는 <윤리와 정신>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얼굴을 통해서 존재는 더 이상 그것의 형식에 갇혀 있지 않고 우리 자신 앞에 나타난다. 얼굴은 열려 있고, 깊이를 얻으며, 이 열려 있음을 통하여 개인적으로 자신을 보여 준다. 얼굴은 존재가 그것의 동일성 속에서 스스로를 나타내는, 다른 어떤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방식이다”(D.L.,20).
얼굴이 자기 스스로 내보이는 방식은 계시이다. 레비나스가 여기서 '계시' 라는 종교적 언어를 사용한 까닭은, 얼굴의 현현은 내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타나는 절대적 경험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얼굴의 자기 계시 혹은 자기 표현은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영역에서 오는 것이며, 나의 입장과 위치와 상관없이 스스로 자기를 표현하는 가능성이다. 이것을 레비나스는 '맥락 없는 의미화의 가능성' (T.I., xii)이라고 부른다. 얼굴의 현현은 역사적, 사회학적, 문화적, 혹은 심리학적 지시 체계로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얼굴의 의미는 내 편에서의 의미 부여를 벗어나기 때문에 나의 의미부여 행위보다 얼굴로서 나타나는 타인의 의미가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면 타자가 나에 대해 갖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타자의 얼굴에서 오는 힘은 상처받을 가능성, 무저항성에 근거하고 있다고 답한다. 상처받을 수 있고 저항할 수 없기 때문에 얼굴로부터 도덕적 호소력이 나온다고 생각하였다(TI, 172 이하 참조). 예컨대, 궁핍 속에 있는 인간은 우리에게 윤리적 명령에 직면하게 한다. 그의 궁핍과 곤궁으로부터 이 호소는 하나의 명령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이것은 곧 타자의 곤궁과 궁핍에 대해서 나에게 어떤 자유로운 선택도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나는 얼굴의 호소를 거절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한다면 나는 불의를 저지르는 셈이 된다. 우리의 행위는 타자의 윤리적 호소에 따라 그 의미가 규정된다고 레비나스는 생각하였다.
타자의 얼굴로부터 오는 윤리적 저항은 강자보다 더 강하게 우리의 자유를 문제 삼는다. 강자는 나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고 박탈할 수 있지만 자유 자체를 문제시할 수 없다. 그러나 힘없는 타자의 호소를 인정할 때 그때 나의 자유, 나의 실현은 문제시된다. 타인의 곤궁과 무력에 부딪힐 때 나는 내 자신이 죄인임을, 부당하게 나의 소유와 부와 권리를 향유한 사람임을 인식한다. 타자의 경험은 내 자신의 불의와 죄책에 대한 경험과 분리시킬 수 없다. 이 죄책은 그러나 실패나 좌절을 초래하지 않는다. 실패와 좌절은 내가 나의 계획과 야망을 실현하지 못한 것 때문에 오는 것이지 타자가 당하는 곤궁에 대한 의식, 나의 무책임에 대한 의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T.I., 55~56 참조) .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는 부버(M. Buber)가 말하는 '너' 와 구별된다. 타자는 나와 너의 친밀한 관계 속에 용해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타자는 '낯선 이' 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타자의 출현은 친밀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측면을 보여 준다. 타자는 나에 대해서 완전한 초월과 외재성이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는 내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무한성이다. 무한성은 내가 다른 모든 사람과, 지금 여기에 부재(不在)하는 제3자와 맺는 구체적인 결속을 뜻한다. 가까이 있는 타자는 다른 모든 사람과 결속되어 있기 때문에 타자는 나와 마주한 너가 아니라 제3자, 즉 '그' 이다. '낯선 이' 로서, '고아' 와 '과부' 로서의 타자의 얼굴은 보편적인 인간성을 열어 주는 길이다. 타자의 얼굴에 직면할 때 나는 그곳에서 모든 사람들을 만날 뿐만 아니라, 나의 재산과 기득권을 버림으로써 타자와 동등한 사람이 된다. 타자의 얼굴을 받아들임으로 써 나는 인간의 보편적 결속과 평등의 차원에 들어간다(T.I., 189 참조).
레비나스의 이러한 견해는 매우 급진적이다. 일반적인 생각에 따르면 윤리적 요구란 동등한 관계를 전제로 가능하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윤리적 평등과 형제애는 인간 사이의 대칭적 관계를 통해 구축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타자는 나와 동등한 자가 아니다. 그는 그가 당하는 가난과 고통 속에서 나의 주인이라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나는 내 자신을 벗어나 그를 모실 때 비로소 그와 동등할 수 있다. 타자를 처음부터 나와 동등한 자로 생각할 때 그는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나와 마찬가지로 자기 실현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보게 된다. 이 경우, 나는 나의 풍요 가운데 남아 도는 것을 그에게 나누어 주거나 동정이나 반대 급부 때문에 그를 돕게 된다. 그러므로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비대칭성, 불균등성이 인간들 사이의 진정한 평등을 이룰 수 있는 기초이고, 이런 의미의 평등만이 약자를 착취하는 강자의 법을 폐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T.I., 190 참조).
〔죽음과 생산성의 의미〕 레비나스에 따르면, 진정한 주체성은 타인의 존재를 자기 속에 수용하여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를 형성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타자는 인간에게 새로운 존재 의미를 열어 주고 지배 관계를 벗어나 섬기는 관계에서 다른 사람과의 의사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이다. 그러나 만일 죽음이 삶의 끝이라면, 이러한 윤리적 관계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죽음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레비나스는 죽음을 밖에서부터 오는 폭력으로 이해하였다. 죽음은 우리의 자유를 제거한다. "죽음 속에서 나는 절대적 폭력, 밤의 살인에 내 자신을 내맡긴다" (T.I., 210). 죽음을 우리 존재의 전적으로 낯선 존재로 보는 것은 죽음을 존재 가능성으로 보는 하이데거의 견해와는 정반대의 입장이다. 인간을 '죽음 으로 향한 존재' 로 본 하이데거는, 인간은 죽음을 단지 가능성으로 경험할 뿐 결코 사실로서 경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죽음의 가능성은 불가능의 가능성이요, 무의 가능성이다. 불가능의 가능성에 직면할 때 인간은 비로소 자유를 체험한다고 하이데거는 생각하였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죽음을 불가능의 가능성으로 보지않을 뿐더러, 무의 가능성으로도 보지 않았다. 죽음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은 고통의 경험을 통해서 가능하다. 우리가 고통 속에서 경험하는 것은 일종의 진공(眞空)으로서의 무의 위협이 아니다. 고통 속에서 우리는 우리와 다른것, 우리 밖에서 침입하여 우리를 무력하게 하는 힘을 경험한다. 고통 속에서 느끼는 죽음은 불가능성의 가능성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의 불가능성이다. 죽음은 자유의 기초가 아니라 인간의 무력, 그의 부자유에 대한 경험이다. 죽음에 대항해서 인간은 그가 가진 주도권을 상실한다. 따라서 죽음은 본질적으로 알 수 없는 신비요, 절대
적 타자성으로부터 나를 지배하는 미래이다. 만일 죽음이 나의 존재에, 나의 자기 실현에 종언(終焉)을 고한다고 할 때 그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
그러나 죽음의 위협은 항상 연기되어 있다. 나는 지금 당장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 죽음은 나에게 아직 남아 있는 시간이다. 죽음의 시간의 연기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의 비극성을 잊고 살 수 있다. 내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죽음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타자와의 관계의 연장선상에서 체험되기 때문에, 바로 이 때문에 죽음의 의미는 변경될 수 있다고 레비나스는 생각한다. 타자는 그의 초월성으로 인해 나의 자유를 위협하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그의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과 무력성 때문에 나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타자는 살기 위해서 나의 관심과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이다. 타자의 무력성과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나는 죽음의 한계를 넘어서서 그를 섬겨야 한다는 요청을 받는다.
타자를 선대(善待)하고 보살필 때, 힘없는 타자를 내가 죽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타자에 대한 사랑이 생기게 되고 죽음에 대한 불안은 사라지고 만다. 죽음에 대한 불안은 이기적인 자기 세계에 머물러 있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선한 행위를 통해 나는 나의 존재의 무게 중심을 나에게서 타자에게로, 타자의 미래로 옮겨 놓게 된다. 나의 유한한 존재, 즉 죽음으로 향한 나의 존재는 '타자를 위한 존재' 로 바뀌고 이것을 통해 죽음의 무의미성과 비극성은 상실된다. 죽음은 삶의 마지막 지평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의 존재 의미는 내 자신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 그의 미래에 있기 때문이다. 자기 중심적인 존재 의미 부여에서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죽음에 대한 불안은 타자를 위한 선행을 통하여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나의 유한성의 문제를 타자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통해 해결하는 것은 과연 올바른 것인가? 타자는 나에게 죽음을 뛰어넘어 무한한 미래를 열어 줄 수 있는가? 만일 타자가 죽는다면 나의 선행은 죽음으로 끝나고, 타자로 향한 초월도 하나의 환상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닌가? 레비나스는 이러한 귀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타자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지닌 매우 중요한 측면인 생산성, 혹은 비옥성(fécondité)에서 찾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T.I., 244). 생산성은 남자와 여자의 성(性) 관계를 통해 수태 가능한 것을 뜻한다. 생산성을 통해 시간은 무한성의 차원, 절대적 미래, 폭력과 죽음에 맞서는 무한한 잉여의 차원을 얻을 수 있다.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사랑은 언어와 더불어 타자와 관계할 수 있는 방식이다. 사랑은 욕망과 현실의 욕구, 그리고 그리움이란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사랑은 타자를 나의 욕구와 쾌락의 대상으로 소유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여인과의 관계를 통해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다. 레비나스의 분석은 타자와의 관계가 사랑의 이중성을 통해 생산성으로 완성되며, 생산성을 통해 미래와 시간이 다시 새롭게 출현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사랑은 여성적인 것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된다. 여성적인 것은 신비와 매혹을 지니고 있다. 여성적인 것은 이론적인 인식을 통해 접근될 수 없는 타자성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레비나스는 이 타자성을 여성적인 것의 본질로 보았다. 여성은 스스로 감추고, 어떤 지배로부터도 벗어난다. 바로 이 가운데서 여성적인 것이 지닌 상처 입을 가능성, 이해 불가능성이 여성의 특징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동시에, 여성은 성애(性愛)를 통해 어떤 다른 것과도 비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한다. 성 관계를 통하여 여성적인 것은 구체적인 형식과 의미를 가진 세계를 잊게 하고 스스로 자기 자신은 보이지 않으면서 무엇을 보게 하며, 감추어진 것, 전적으로 타자적인 것을 경험하게 만든다.
레비나스는 에로스를 감추어진 것을 찾으려는 몸짓이라고 보았다. 여자는 남자에게 이 감추어진 것을 보여 준다. 감추어진 것을 찾는 몸짓은 애무로 나타난다. 레비나스는 애무를 무엇인가 모르면서 손에 잡으려고 하고, 그러면서도 계속 미끄러지는 어떤 것을 만지는 행위로 기술하였다. "애무는 있지 않은 것, 무(無)보다 못한 것, 미래에 감추어진 것을 찾는 것이다" (T.I., 235). 이것은 성관계에서 한층 고조된다. 감추어진 것과 접촉하지만 아직 보지 못한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그 '감추어진 것' 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놀랍게도 레비나스는 이 감추어진 것, 전적으로 타자적인 것의 발견은 아이의 출산을 통해서 실현된다고 본다. 감추어진 것은 이제 그 익명성에서 해방되어 이름이 주어지고 구체적인 얼굴을 가진다. 그리고 아이의 출산으로 나와 타자 사이에 일어난 분리와 결합의 끊임없는 운동이 멈추게 된다. 아이는 '타자가 된 나 (moi étrangerasoi, T.1,245)이다. 나는 아버지가 됨으로써 나의 이기주의, 나에게로의 영원한 회귀로부터 해방된다. 자아는 이제 타자와 타자의 미래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초월한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미래와의 관계를 '생산성' (비옥성)이라고 부른다(TI,245)
생산성을 통해 인간은 자기 자신의 유한성으로부터 구원받는다. 아이의 출산으로 완전히 새로운 미래,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내가 홀로 미래를 체험할 때는 내 자신의 존재 가능성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마치 오딧세이가 그 오랜 여행 끝에 결국 자기가 살던 섬 이타카로 되돌아오듯이, 나는 나의 테두리로 되돌아와 결국 늙고 만다. 그러나 에로스를 통해 나에게 감추어진 미래를 찾아나서고 이 미래를 아이와의 관계에서 구체적으로 체험한다. 아이를 통해서 과거는 절대성을 잃게 되고 절대적 미래의 차원이 열린다. 이와 관련해서 레비나스는 시간이란 과거를 완전히 새롭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이요 용서라고 말한다. 용서란 과거를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출산을 통해 과거는 또다시 현재와 미래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은 다시 젊어지고 푸르름을 띠게 된다.
〔새로운 주체성의 규정〕 레비나스는 적어도 두 가지 의미로 인간 주체성을 규정하였다. 주체성은 즐김과 누림, 곧 향유를 통해 형성되는 주체성이다. 세계를 향유하고 즐기는 가운데 인간은 '자기성' 의 영역을 확보한다. 물과 공기와 햇볕 등을 즐길 때 인간은 '자기' 에게 돌아가고 전체로부터 자기를 분리하여 '내부성' (내면성)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레비나스는 향유를 개체의 '개별화의 원리' 로 본다(T.I., 121 참조). 거주와 노동을 통해 삶의 지속성과 안전을 확보할 때 내면성으로서의 주체성은 세계를 소유하고 지배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무한히 확장하려는 욕망, 즉 전체화에 대한 욕망을 보여 준
다. 이런 의미의 주체성은 본질적으로 '이기주의적' 이고 자기 자신의 삶에만 관심을 갖는다. 여기에서는 초월이 불가능하다.
이런 의미의 주체성과 구별해서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를 통해 얻어지는 주체성을 말한다. 여기서 타자는 나와 꼭 같은 위치에 있지 않고 거주하며 노동하는 나에게 윤리적 요구로서 임하는 무한자로, 내가 어떠한 수단을 통해서도 지배할 수 없는 절대적 외재성으로 묘사된다. 타자의 출현과 더불어 내가 타자를 영접하고 대접할 때 진정한 의미의 주체성, 즉 '환대로서의 주체성' 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출현으로 첫째 의미의 주체성, 즉 '자기성' 혹은 '내재성' 이 상실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타자를 받아들이는 나는 다른 주체가 아니라 세계를 즐기고 거주하며 노 동하는 주체이다. 그러나 바로 이 주체가 타자의 출현을 통해서 이기적인 욕망을 포기하고 타자에 대한 책임적인 주체로 설 수 있다고 본다.
〔의 의〕 레비나스는 그 어떤 철학자보다도 일상적 경험들이 인간의 존재 질서에서 지닌 의미를 밝혀 준다. 잠, 불면, 음식, 노동, 거주, 타인의 존재, 여자와 아이 등이 인간의 존재를 규정하는 요소들이라는 것이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매우 유물론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유물론과 유심론, 정신과 물질의 대립은 그에게서는 이미 의미를 잃고 만다. 인간은 신체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타자와 윤리적 · 사회적 관계를 갖는 정신적 존재이다. 신체적 존재가 체험하는 존재의 무의미, 잠과 불면은 인간이 단순히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의미를 찾고 의미를 지향하는 정신적 존재임을 보여 주며 타인과의 윤리적 · 사회적 관계는 타인에 대한 사회 · 경제적인 관계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음을 레비나스는 누구보다 더 잘 보여 주고 있다. (→ 가치 ; 가치 철학)
※ 참고문헌 Theo de Boer, Tussen filosofie en profetie. De Wijsbegeerte van Emmanuel Levinas, Baarn, Ambo, 1976/ Luk Bouckaert, Emmanuel Levinas. Een filosofie van het gelaat, Brugge, Orion, 1976/Stephan Strasser, Jenseits von Sein und Sein, Den Haag, Martinus Nijhoff, 1978/ Klaas Huizing, Das Sein und der Andere. Levinas' Auseinandersetzung mit Heidegger, Frankfurt am Main, Athenaum, 1988/ Fabio Ciaramelli, Transcendance et Ethique. Essai sur Lévinas, Bruxelles, Ousia, 1989/ 강영안, <레비나스 철학에서 주체성과 타자>, 《후설과 현대 철학》, 서광사, 1990, pp. 243~263/ -, <존재 경험과 주체의 출현-레비나스의 존재론>, 《哲學研究》 47집, 1991, pp. 47~65. 〔姜榮安〕
레비나스, 엠마누엘 (1906~1995)
Levinas, Emmanuel
글자 크기
4권

엠마누엘 레비나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