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싱, 곳홀트 에프라임 (1729~1781)

Lessing, Gotthold Ephra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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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홀트 에프라임 레싱.

곳홀트 에프라임 레싱.

독일 시인. 철학자. 계몽 사상가. 1729년 1월 22일 인구 약 2천 명에 불과하던 소도시 캄렌츠(Kamlenz)에서 정통파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741~1746년 유명한 영주 직설 학교인 마이센의 상트 아프라(St. Afra in Meiβen)에서 기숙 장학생으로 고전어, 프랑스어, 영어와 수학 등 기본 교육을 마친 후 신학 공부를 위해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연극과 문학에 심취하게 된 레싱은, 정통파 프로테스탄트 신학에 염증을 느껴 목사가 될 것을 포기하였다. 학적을 의학부로 옮겼으나, 곧 빚쟁이에게 쫓겨 학업을 포기하고 베를린으로 도피했다. 1749~1760년의 이른바 베를린 시절에는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며 번역가로서, 신문 기자로서, 평론가로서 또는 도서관 사서로서 일당을 받고 일하였다. 그러던 중 저명한 계몽주의 사상가들, 특히 출판업자 프리드리히 니콜라이(Fiedinch Nicolai)와 '독일의 플라톤' 이라고 부르던 유대인 철학자 모제스 멘델스존(Moses Mendelssohn)과의 친교를 통해 문필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1752년에는 비텐베르크 대학에 약 1년 동안 머물면서 의학부 석사 학위를 받았다. 1760~1765년까지는 브레슬라우(Breslau) 사령관의 개인 비서가 되어 그를 따라 직무상의 여행도 하고, 7년 전쟁의 와중에서 전선을 시찰하기도 하였다.
1766년 말 자유 항구 도시 함부르크(Hambug)에 세명의 상인들이 출자하여 독일 역사상 최초로 '국민 극장 (Nationaltheater)이 설립되었는데, 레싱은 이 극장의 고정 평론가 겸 총감독으로 계약을 맺고 무대 연극을 통해 일대 시민 계몽 운동을 전개해 보려던 평소의 꿈을 위해 전력하였다. 이 꿈은 2년 후에 극장이 파산함으로써 끝나게 되었으나, 이 기간에 그는 유명한 《함부르크 희곡론》(Hamburgische Dramaturgie)을 써서 후세에 남겼다. 1770년 레싱은 브라운슈바이크(Braunschweig) 영주에 의해 볼펜뷔텔(Wolfenbüttel) 도서관의 주임 사서로 임명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사망할 때까지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1774년과 1778년 두 차례에 걸쳐 레싱은 함부르크의 고대 동방 언어학 교수인 라이마루스(H.S. Reimarus, +1768)의 유고 <신의 이성적 숭배자를 위한 변론서》(Apologie oder Schutzschrift fiir die vernünftigen Verehrer Gottes)를 입수하여 그 일부를 자기가 편집 발행하던 도서관의 정기 간행물에 발표함으로써 일대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극단적 이신론(理神論, deismus)의 입장에서 쓰여진 라이마루스의 글에 대해 레싱은, 그 내용을 반박하는 자기 자신의 글을 볼펜뷔텔 도서관에서 발견된 책의 제목을 인용해 《어느 무명인의 단편》(Fragmente eines Ungenanten)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기 때문에, 정통파 신학자 진영으로부터 맹공격을 받음은 물론 이신론자들과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이로써 야기된 소위 '단편 논쟁' (Fragmentenstreit)은 오늘날 "종교 개혁 이후 독일 최대의 신학 논쟁"이라 불려지고 있는데, 그 절정은 함부르크의 정통파 교회의 주임 목사 멜키오르 괴체(Melchior Goeze)의 공박과 이에 대한 레싱의 11편에 달하는 《반(反)피체론》(Anti-Goeze)이라 하겠다. 이 논쟁은 브라운슈바이크 영주가 레싱에게 논쟁 금지를 명함으로써 중지되었으나, 이로 인해 레싱은 온갖 중상 모략에 시달리게 되었고 지우(知友)인 멘델스존과 니콜라이 등과의 관계도 소원해져 거의 정신적인 고립 상태에서 만년을 보내게 되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종교 문제를 주제로 한 유명한 희곡 《현자(賢子) 나탄》(Nathan der Weise, 1779)을 썼으며, 그의 신학 사상을 집대성한 것이라 볼 수 있는 《인류 교육론》(Erziehung des Menschengeschlechtes, 1780)을 완성하였다. 그는 1781년 2월 15일 브라운슈바이크에서 사망하였다.
〔사 상〕 엄격한 정통 루터파 교회의 정신적 풍토하에서 성장한 레싱은 라이프치히 대학 시절부터 정통 프로테스탄트 교리와 당시 성행하던 이신론 신학 이론에 비판적 관심을 평생 유지하면서 종교 문제에 관한 많은 논술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신학 사상은 희곡 《현자 나탄》과 《인류 교육론》에 집약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자 나탄》 : 재정난에 빠져 있던 이슬람교 교주(敎主) 살라딘은 현자로 이름나 있던 부유한 유대인 나탄에게 하나의 난제를 제시하여 만약에 답변하지 못하면 그것을 빌미 삼아 금품을 요구하려 한다. 그가 제시한 난제는, 이슬람교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셋 중 어느 것이 가장 좋은 종교인가 하는 것이었다. 나탄은 '반지의 비유'를 들어 "어느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 반지가 있었다. 그 반지는 그것을 소유할 때 가문을 잇게 될 뿐만 아니라 신과 인간의 사랑을 받게 된다는 신통력을 지닌보물로서, 늘 가장 사랑하는 자식에게 상속되어졌다. 어느 대에 이르러 아들 3형제를 둔 아버지가 이들 셋을 똑같이 사랑했던 나머지 공인(工人)을 시켜 똑같은 반지 두 개를 더 만들게 하여 세 아들에게 하나씩 주고 세상을 떠났다. 여기서 누가 가문을 이을 상속자인가 하는 문제가 생겨서 재판까지 하게 되었는데, 그 판결은 세 반지 중 어느 것이 진품인지 구별할 수 없으나 진품의 소유자는 신과 인간으로부터 사랑을 받게 될 터인즉 각자가 노력하여 신과 인간으로부터 진심으로 사랑받게 되면 그가 곧 진품의 소유자라는 것이었다"라고 답하였다. 이 작품에는 모든 종교에 대한 관용 정신과 이론보다는 실천을 중시하는 레싱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하겠다.
《인류 교육론》 : 레싱은 요아킴 데 피오레(Joachim de Fiore)의 종말론적 3단계 모델(Deri-Reiche-Modell)을 원용하여 인류 교육 단계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역사 철학적 발전 모델을 가설로 제시한다. 즉 인류는 신의 계시와 점차 계발되어 가는 인간의 이성이라는 두 힘이 변증법적으로 상호 작용하여 구약의 시대 다음에 예수의 시대인 신약의 시대를 거쳐 또 다른 새로운 시대인 복음의 시대로 향하고 있는 바, 이 세 번째 시대에 이르게 되면 모든 인간이 예수의 형제로서-구약 시대에서와 같은 보상이나 징벌에 상관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선(善) 자체를 위해 선행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에 의하면 이 약속된 복음의 시대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역사에 근거한, 따라서 항상 새로이 해석되어져야 할 신앙은 이제3의 약속된 시대가 올 것임을 말해 주는 것일 뿐, 역사는 항상 열려 있으며 진리는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약속된 진리가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회의는 항상 있으며, 이에 대해 희망의 기도와 구체적인 선행의 실천으로 맞서는 방법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진리에 관하여 레싱이 명쾌한 답변을 할 수 없었던 것은 그의 진리 개념과 관련이 있다. 그의 진리 개념은 '단편 논쟁' 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즉 그에 의하면, 인간의 가치를 만드는 것은 인간이 소유하고 있거나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진리가 아니라,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의 성실한 노력이다. 왜냐하면, 진리의 소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리의 추구에 의해서 인간의 힘은 확대되고 성장하기 때문이다. 소유는 안정과 자부심과 나태함을 가져온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신이 오른손에 모든 진리를 쥐고 있고, 왼손에는 영원히 찾지 못하여 방황하면서도 끊임없이 추구하는 힘을 쥐고 있으면서, 내게 '선택하라!' 한다면, 나는 겸손되이 그의 왼손 앞에 엎드려 말할 것이다. '아버지시여, 왼손에 든 것을 주시옵소서. 순수한 진리는 오직 당신만의 것이옵니다' 라고" (<제2 답변>[Eine Duplik]).
〔의 의〕 레싱에 대한 이해는 대체로 두 주류를 추적해 볼 수 있다. 시인 하이네(H. Heine)는 레싱을 루터의 개혁정신을 이어받은 사회 혁명의 선구자로 보았다. 이러한 시각은 19세기에 라살(F.Lasallle), 메링(F. Mehring) 등의 사회주의 진영의 평론가들에 의해 이어져 갔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구동독의 독문학자들에 의해 사회주의 진영의 정설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에 반해 19~20세기의 보수 경향을 띤 독문학자들은 레싱을, 국민 극장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국민의 정신적 계몽을 위해 노력하였던, 독일 통일 민족 국가 이념의 선구자로 칭송한다. 그러나 그들은 레싱이 국제주의자였고, 특히 타민족 · 타종교에 대해 관용을 강조하였으며, 독일 내의 유대인 차별 현상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했었음을 간과하기 일쑤이다. 오히려 나치주의자들이 레싱의 사상을 옳게 파악하고 그의 저서 대부분을 금서 조치시켰다.
현대적 의미에서 레싱은 그의 개방적 · 역동적 진리 개념,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게 하고 민주 시민으로 육성시키려 한 노력, 변증법적 논증 방법, 관용과 인본주의를 위한 정열적 투쟁 등이 인정받고 있다.
※ 참고문헌  H. Thielicke, Offenbarung, Vernunft Existenz. Studien zur Religionsphilosophie Lessings, 1936, 4. Aufl., 1959/ K. Aner, Die Theologie der Lessingzit, 1929/ 0. Mann, 《EGG》 Bd. Ⅳ, 1963, 4. Aufl.,pp. 327~330/ Willi Oelmuller, Die undefriedigte Aujklärung. Lessing-Kant-Hegel, 1969/ Harald Schultze, L.S. Toleranzbegriff. Eine theologische Studie, 1969/ Arno Schilson, Geschichte im Horizont der Vorsehung. L.S. Beitrag zu einer Theologie der Geschichte, 1974/ Gerhard Freund, Theologie im Widerspuch. Die Lessing-Goeze-Kontroverse, 1989.
〔崔 레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