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L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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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1세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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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1세 교황.

① 레오 1세(?~461) : 성인. 교황(440~461). 교회 학자. 축일은 11월 10일(동방 교회의 축일은 2월 18일). 4세기 말 로마의 토스카나(Toscana) 지방 가문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교회 역사 안에서 교황으로서 막뉴스(magnus, 大)란 존칭을 받는 교황은 레오 1세 교황과 그레고리오 1세 교황(540?~604)뿐이다. 그가 교황으로 재직하였던 시대는 역사적으로 어려운 때였는데, 서로마 제국은 야만족들의 계속된 침입으로 붕괴 상태에 놓여있었고, 교회는 이러한 정치적 · 사회적 불안 속에서 여러 가지 이단 사상들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는 로마 교회의 목자로서뿐만 아니라 보편 교회의 지도자로서 신학적 · 사목적 · 정치적 여러 난제들을 훌륭히 해결해 냈다. 461년 11월 10일 사망하여 베드로 대성전의 회랑에 시신이 안치되었다가, 688년에 교황 세르지오 1세에 의해 성당 내부로 이장되었다. 그 후 1754년 교황 베네딕도 14세에 의해 '교회 학자' 로 선포되었다.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에 그가 선임자들 밑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음은 다음의 사료들로 입증된다. 첫째, 요한 가시아노는 레오의 요청으로 430년에 《네스토리우스를 거슬러, 주님의 육화》를 저술하게 되었다고 서언에서 밝히고 있다(PL 59, 9). 둘째,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 총대주교는 431년 레오에게 편지를 보내어(서간 119, 4), 예루살렘의 유베날(Juvenal) 주교가 팔레스티나 전역에 대한 수위권을 행사하려 하는데 이를 막기 위해 교황 식스토 3세의 권위 있는 경고를 얻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셋째, 440년에 레오는 황제로부터 요청을 받아 에지오 장군과 알비누스 집정관 사이의 충돌을 중재하는 미묘한 임무를 띠고 갈리아에 파견되었다. 이 충돌은 당시 상황으로 보아 로마 제국 내에서 심각한 문제로 발전할 위험이 있었는데, 레오 부제는 이 어려운 일을 원만히 해결하였다. 그가 아직 갈리아에 머무르고 있던 440년 8월 19일, 교황 식스토 3세가 서거하자 로마의 성직자단과 민중은 일치하여 레오 부제를 로마의 주교로 선출하였다. 로마로 돌아온 그는 그 해 9월 29일 주교로 서품되어 교황이 되었다.
로마 주교로서의 레오 교황은 여러 측면에서 사목 활동에 주력하였다. 성직자들과 신자들에게 정규적으로 강론하였으며, 전례 거행을 교회 공동체에 생동감 있게 도입함으로써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생활화하도록 하였다. 당시 성인(成人) 입교자들이 많았는데, 그는 예비자들을 위한 교리 교육뿐 아니라 기존 신자들의 신앙과 윤리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교회의 으뜸으로서 여러 가지 이단들, 특히 마니교를 거슬러, 교회의 정통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신자들에게 이단의 위험성을 명확히 밝혀 주었다. 또한 신자들이 세례를 받은 후에도 이교 시절에 행하던 미신 행위에 빠져 드는 것을 보고 이를 강력히 경고하면서 여러 가지 전례 개혁을 시도하였다. 또 여러 대성전을 수리하고 새 성당들을 신축하기도 하였다. 한편 레오 교황은 로마의 주교로서 외교 문제에도 개입하도록 요청받았다. 451년 훈족의 아틸라(Atila) 왕이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에 쳐들어와 로마를 위협하자 발렌티누스 3세 황제는 레오에게 강화 중재를 요청하였다. 레오 교황은 용감히 나아가 화평을 얻어 내고, 아틸라 왕은 진지를 거두어 돌아갔다. 455년에는 반달족의 젠세리코가 서북 아프리카를 점령한 다음, 이탈리아 반도에 상륙하여 로마로 진격해 왔다. 사람들은 다시 레오 교황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의 이번 중재는 앞의 경우만큼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지만 최소한 로마 시를 방화와 살육에서 보호할 수는 있었다.
〔로마 주교와 다른 서방 교회들과의 관계〕 레오 교황의 서간집은 5세기 로마 교회와 다른 교회들의 관계를 생생히 보여 주고 있다. 로마의 주교는 그 직분의 세 가지 차원에 따라 다른 주교들의 일에 개입하게 되는 내용과 대응 방법이 달랐다. 로마의 주교는 우선 이탈리아의 중부와 남부 지역에 대한 수도 대주교(metropolita)이고, 둘째 차원으로 로마 주교는 이탈리아 전역에 대한 수석 대주교(primatus)인 동시에, 서방 교회 전체의 총대주교(patriarcha)였다. 또한 셋째 차원으로 동방과 서방 보편 교회에 대한 수위권을 갖고 있었다. 레오 교황은 인근 교구들의 교회 규율 문제에 자주 개입하였다. 예를 들면, 캄파니아, 피체노, 토스카나 지방의 주교들에게 사제 서품 지원자 선정에 대한 교회 규정을 환기시키면서 노예 신분의 사람은 먼저 자유를 얻고 난 다음에야 서품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서간 94). 또 교회 규정에 정해진 시기가 아닌 때에 세례성사와 신품성사를 베푼 시칠리아의 주교들을 꾸짖었다(서간 5). 그 밖의 이탈리아 지역 주교들에게 신앙과 교리 문제에 관한 일로 관여하였다. 북부 이탈리아의 모든 주교들에게 에우티케스주의에 관한 자신의 서간 <토무스 앗 플라비아눔〉(Tomus ad Flavianum)에 서명할 것을 요구하였으며(서간 98), 이단자들이 교회와 화해하기에 앞서 자기 잘못에 대해 공적 고백을 하도록 지시하였다(서간 1). 레오 교황은 갈리아, 스페인, 아 프리카의 주교들과도 이와 비슷한 형태의 편지들을 주고 받은 예들이 많이 있다. 서방 교회의 총대주교로서 레오 교황은 정통 교리를 공고히 하며 이단에 대해 공동 대처하고 교리에 관계되는 실제적인 문제에 해답을 주는 역할을 해왔으며, 이러한 그의 역할은 다른 교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동방 교회들과의 관계에서 교황의 수위권〕 로마 교회와 동방 교회들의 관계는 정통 신앙을 수호하고자 협력하는 차원에서 전개되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에우티케스의 단성설(單性說) 이단이 발생하였을 때 교황은 이 문제를 조정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과 서신 왕래를 하였다. 에우티케스 이단이 발생하면서부터 칼체돈 공의회 이후까지 이에 관해 거론한 그의 서간이 약 90편에 이른다는 사실로 보아, 이 이단이 당시 동 서방 교회에 얼마나 큰 현안 문제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단성설 논쟁은 콘스탄티노플의 플라비아누스 총대주교와 같은 도시의 에우티케스 수도원장 사이에 신학적 대립으로 시작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치릴로의 설을 추종하였던 에우티케스는 네스토리우스 이단을 너무 열렬히 반대한 나머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육화로 인해 일치된 후에는 하나의 성(性)으로 변해 버렸다는 소위 단성설을 주장했다. 448년 11월 에우티케스는 콘스탄티노플 지역 주교 회의에서 단죄받았는데, 이에 에우티케스는 자신의 단죄가 부당하다고 주장하면서 레오 교황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서간 21). 레오 교황은 플라비아누스 총대주교에게 자세한 진상을 속히 알려 줄 것을 요청하였으며(서간 23), 총대주교는 두 통의 편지를 써서 교황에게 진상을 자세히 보고하였다(서간 22, 26). 교황은 449년 6월 13일 그리스도의 육화에 대한 신학 논술을 써서 플라비아누스 총대주교에게 보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플라비아누스에게 보낸 교의 서한>(Epistola dogmatica ad Flavianum)이다. 이 서간을 흔히 <토무스 앗 플라비아눔>이라고도 부른다.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는 449년에 새로운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에페소에 모인 주교들 사이에 음모와 강압이 난무하였으며, 결국 에우티케스의 설이 받아들여지고 플라비아누스 총대주교는 단죄 받아 면직당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레오 교황은 에페소 공의회를 '도적 공의회' (盜賊公議會, Concilium latronum)라고 규정하고(서간 95), 플라비아누스 총대주교를 복직시키고 에우티케스를 단죄하며 새로운 공의회를 개최할 것을 여러 서간들을 통해 요구하였다(서간 43~48). 그 사이에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가 갑자기 사망하자 새로 황제가 된 마르치아누스는 에페소 회의를 무효화하고 플라비아누스 총대주교의 명예를 회복함과 동시에 새로운 공의회를 개최할 것을 선언하였다. 451년 10월 8일에 칼체돈에서 공의회가 개최되었으며, 레오 교황의 서간 <토무스 앗 플라비아눔>에 따라 에우티케스의 단성설이 단죄되고 에페소 회의를 주도하였던 알렉산드리아의 디오스쿠루스 총대주교는 파문되었다. 그런데 공의회의 결정 사항 중 제28조가 문제였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로마의 주교와 동등한 품위를 가진다는 이 조항은 레오 교황에 의해 인정되지 않았다. 반대 이유는 니체아 공의회의 결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서간 104~107, 119). 어쨌든 제28조의 결정은 레오 교황이 예견했듯이 동·서방 교회의 대립과 분열의 한 이유가 되었다.
〔저 서〕 레오 교황은 서간과 강론에 있어 풍부한 유산을 남겨 주었다. 그의 강론들과 공식 문헌적 성격을 띠고 있는 서간들은 신학적인 의미에서뿐 아니라 라틴 문학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 시대의 교황들 중에서 대부분의 강론이 전해져 오는 유일한 교황이며, 그의 서간집은 그레고리오 대교황 이전까지 가장 광대한 것이었다.
서간 : 레오 교황의 서간집에는 173편의 서간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143편은 그가 쓴 것이고 나머지 30편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것들이다. 그의 서간들이 상당히 많이 보존되어 왔다는 사실은 그의 교황 재직 동안 그리고 그 후에도 이 서간들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컸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레오 자신도 보편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서간들의 전파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 가장 좋은 예로, 에우티케스 이단을 거슬러 칼체돈 공의회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전 제국에 유포되었던 제28편 서간 <토무스 앗 플라비아눔>을 들 수 있다. 전 교회의 신앙의 일치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던 그는 449년 플라비아누스 총대주교에게 이 편지를 보내고 난 다음, 갈리아와 스페인의 모든 주교들에게 에우티케스 문제에 관계되는 모든 문헌들을 보냈고, 같은 해 로마 지역 주교 회의에 참석한 모든 주교들에게도 이 문헌들을 보냈다. 이것이 레오 교황 서간집의 기원이 된 듯하다. 사실 6세기에, 칼체돈 공의회를 지지하기 위한 교의 신학적 목적으로 그의 서간 72편의 모음집이 편찬되었는데 이것을《콜렉시오 라티스보넨시스》(Collection Ratisbonensis)라 부른다. 이외에도 《콜렉시오 테살로니첸시스》(Collectio Thessalonicensis, 6세기), 《콜렉시오 아렐라텐시스》(Colectio Arelatensis)와 《콜렉시오 아벨라나》(Collectio Avellana, 6세기) 등이 있다.
강론 : 카바세(A. Chavasse)가 1973년에 출판한 레오교황의 강론은 모두 97편인데, 레오 시대의 로마 전례 주년에 따라 구분되어 있다. 여기에는 성탄 강론(10편), 주의 공현 강론(8편), 부활 밤 강론(2편), 승천 강론(2편), 성신 강림 강론(3편), 사순 시기 강론(12편), 성주간 강론(19편), 성신 강림의 단식 강론(4편), 12월의 단식일 강론(9편), 집회소(collecta) 강론(5편), 성 베드로와 바오로 축일 강론(3편), 성 라우렌시오 축일 강론(1편), 교황 피선 기념일 강론(5편) 등이 있다. 레오 교황의 강론들은 그 후 교회 안에서 전례적인 용도로 자주 이용되어 왔다. 그래서 강론집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의 강론집의 종류는 강론 숫자만큼이나 엄청나게 불어났다. 그러나 그의 강론집은 전례적인 용도 이전에 먼저 교의 신학적인 성격을 띤 두 개의 모음집으로 시작되었다. 첫 번째 강론집은 재임 초기 5년 간(440~445)의 강론들을 모은 것으로서 특히 로마의 마니교 이단과 아르스의 힐라이우스주 의와의 논쟁을 내포하고 있다. 두 번째 강론집은 454년 이후에 편집된 것으로 보이며 특히 에우티케스 이단을 반박하는 강론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 후 600년경에 이 두 강론집이 하나로 묶여 편집되었다. 한편 또 다른 형태로, 교회 규율에 관계되는 교회법적 성격을 띤 그의 서간과 강론들을 묶은 모음집도 있었다. (→ 그리스도 단성설 ; 칼체돈 공의회)
※ 참고문헌  《PL》 54~56(P. et H. Ballerini, Sancti Leonis Magni Romani Ptificis opera 3, Venezia, pp. 1753~1757)/ 《Clavis PL》, pp. 1656~1661/ 《PSL》 Ⅲ , pp. 329~350/ CChr., 《SL》, 138~138A(강론)/SC 22 bis와 49(강론)/O. Bardenhewer, Geschichte der altkirchlichen Literatur Ⅳ, Freiburg, 1924, pp. 617~623/ P. Batifffol, 《DThC》 9, pp. 218~301/ T.Jalland, The Life and Time ofSt. Leo the Great, London, 1941/ T. Mariucci, Omilie e Lettere di S. Leone Magno, Classici delle Religioni, Torino, 1968, pp. 9~431 B. Studer, Patrologia Ⅲ Roma, 1978, pp. 557~578/ 이형우 역, 《레오 대종, 성탄 공현 강론》, 교부 총서 4, 분도출판사, 1990, pp. 7~27. 〔李瀅禹〕
② 레오 9세(1002~1054) : 성인. 중세에서 가장 유명한 독일인 교황(1049~1054) 축일은 4월 19일. 1002년 6월 21일 알자스 지방 에기스하임(Egsheim)에서 태어났으며, 원 이름은 브루노(Bmno)이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크 왕국 콘라트(Konrad) 황제의 친척인 후고(Hugo) 백작이었고, 어머니는 하일레비데(Heilewide)였다. 그의 집안은 성인(聖人)들과 제국의 통치자들을 탄생시킨 귀족 가문이었다.
툴(Toul)의 주교인 베르톨트(Berhold)가 귀족 가문의 남자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학교에 5세 때 입학한 브루노는, 후에 메츠(Metz)의 주교가 된 아달베르토(Adalbertus)로부터 주된 교육을 받았다. 레오 9세 교황의 전기 작가이며 툴의 주교로 재직시 절친한 친구이기도 하였던 비베르트(Wibert)에 의하면, 브루노는 며칠 동안 휴가를 받아 집에 갔는데 잠든 사이에 어떤 동물의 공격을 받아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이 상처 때문에 그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는데, 후에 자신의 친구들에게 말하기를, 이 상황에서 성 베네딕도가 자신의 환부를 십자가로 만져 주어 치유시켜 주었다고 하였다.
1017년 부제로서 툴에 있는 성 스테파노 성당의 참사 위원이 된 브루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베르톨트 주교의 후계자인 헤리만(Herimann)에게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1024년 브루노의 친척 콘라트가 하인리히 2세 황제의 뒤를 이어 새 황제(콘라트 2세)가 되자 브루노는 궁전에 있는 교회에서 봉사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의 덕행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여 '좋은 브루노' 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1025/1026년 콘라트 2세는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롬바르디(Lombardi)로 갔는데, 당시 툴의 주교였던 헤리만은 너무 나이가 많고 병중에 있었기 때문에 동행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헤리만은 당시 부제였던 브루노를 책임자로 임명하여 그로 하여금 군대와 함께 황제를 보필하게 하였다. 헤리만 주교가 사망하자 콘라트 2세는 1027년 9월 9일, 브루노를 툴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주교가 된 브루노는 클뤼니(Cluny) 수도원과 로렌(Larraine) 수도원의 개혁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교구 안에 있는 성 아페르(St. Aper) 수도원, 므와앵무티에(Moyenmoutier) 수도원, 생 디에(Saint-Die) 수도원 등의 개혁을 추진하였고 성직자들의 윤리 규범을 세우는 데 열정적으로 힘썼다. 또한 주교로서 많은 사목 방문을 하였고 교회회의를 개최하였다.
1048년 9월 9일에 교황 다마소 2세가 서거하자, 로마의 성직자들과 신자들은 리용의 대주교인 할리나르트 (Halinard)를 교황으로 추천하였다. 그러나 브루노의 사촌이자 그의 개혁 의지의 진가를 인정한 하인리히 3세 황제는 로마인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1048년 12월 보름스(Woms)에서 브루노를 교황으로 임명하였다. 이제 브루노는 로마 성직자들과 시민들의 재가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할데브란트(Hildebrand)와 함께 순례자의 차림으로 로마에 도착한 그는 로마 성직자들과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교황으로 인정받았고, 1049년 2월 12일 라테란 대성전에서 레오 9세라는 이름으로 즉위식을 갖게 되었다.
〔교황 재임시의 활동〕 교황으로 즉위하자마자 1049년 4월 9~15일 로마에서 열린 첫 교회 회의에서 자신의 개혁 의지를 드러내었다. 이 교회 회의에서 레오 9세 교황은 성직 매매와 성직자들의 부도덕성에 대해 단죄하였다. 즉 성직 매매를 한 여러 명의 주교들을 파면하였고, 성직 매매를 한 주교들에 의해 서품된 성직자들에 대해 교황 글레멘스 2세(1046~1047)가 부과한 벌칙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교황의 소망은 그러한 성직자들을 모두다 파면하는 것이었지만, 그 수효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이를 실행에 옮기기는 어려웠다. 교황은 또한 모든 성직자들에게 독신 생활을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교황은 자신을 도와 줄-대부분이 로렌 출신인-새 인물들을 등용하였다. 후에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된 힐데브란트, 후에 교황 스테파노 9세가 된 로트링겐(Lothrigen)의 프리드리히(Fiedrich) , 후에 실바 칸디다(Silva Candida)의 추기경과 교황의 국무원장이 되었고 또 교황이 낸 주요 문서의 저자이기도 하였던 훔베르트(Humbert)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과 함께 교황은 교황청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아울러 교황은 클뤼니 수도원의 아빠스인 후고(Hugo)와 리용의 대주교 할리나르트, 그리고 베드로 다미아니(Petus Damiani) 등의 지도적인 개혁자들의 조언에 의지하기도 하였다.
레오 9세 교황은 자신의 개혁 의지를 유럽에 실현시키고자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그리고 헝가리까지 많은 여행을 하였다. 그리고 파비아(Pavia), 랭스(Rheims), 마인츠(Mainz, 1049), 로마(1050, 1051, 1053), 시폰토(Siponto), 살레르노(Salerno), 베르첼리(Vercelli, 1050) , 만투아(Mantua) , 바리(Bari, 1053) 등의 도시에서 12번의 교회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교회 회의에서 교황은 성직 매매와 성직자들의 부도덕성을 고발하고 단죄하였으며, 특히 랭스 교회 회의에서는 주교와 대수도원 원장은 성직자들과 신자들에 의해 선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교황에게만 유보되어 있는 사도좌(apostolicus)라는 명칭을 사용한 콤포스텔라(Compostella)의 대주교를 파문함으로써 교황이 전세계 교회에 대한 유일한 수위권을 갖고있음을 재확인하였다. 또한 1050년에 열린 로마와 베르철리 교회 회의에서 교황은 성체성사에서의 변화가 실체변화가 아니라 상징적인 변화라고 주장한 투르(Tours)의 베렌가리우스(Berengarius)를 파문하였다.
그러나 레오 9세 교황의 말년은 실수로 얼룩졌다. 하인리히 3세 황제와의 협조 속에서 일을 하였기 때문에 '황제의 이탈리아 대리자' 라고 칭할 정도였다. <콘스탄틴의 증여>(Donation ofConstantine)라는 문서의 자극을 받은 교황은, 1053년 교황령과 주민들을 노르만족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개인적으로 군대를 일으켰다. 왜냐하면 독일 제국의 재상이며 후에 교황 빅톨 2세가 된 아이히슈태트(Eichstätt)의 게프하르트(Gebhart)의 반대로 독일 제국의 협조를 얻는 데 실패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교황은 남부 이탈리아의 통치자인 아르지로스(Argiros)를 통해 동로마 제국과 연결하고자 희망했으나, 이것이 이루어지기 전에 교황의 군대는 치비타테(Civitate) 근처에서 노르만족에게 패하였고, 교황 자신도 1053년 6월 18일 포로로 사로잡혔다. 노르만족은 교황을 잘 대우해 주었지만, 9개월 동안이나 포로로 지내야 하였다.
교황이 군대를 일으킨 것에 대해 개혁자들은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왜냐하면 전쟁은 교황의 몫이 아니라 황제들의 몫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교황이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역사적으로 가장 인정받는 것 중의 하나는 동로마 제국과의 교류를 시도한 것이었다. 동로마 제국과의 정치적 연합이 긴급히 요구되는 상황 속에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였던 미카엘 체룰라리우스는 1053년 자신의 교구 안에 있는 라틴 전례의 성당이나 수도원 등에 대해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이 때문에 교황은 더 더욱 마음의 상처를 받아야만 하였다. 당시 포로로 잡혀 있던 교황은 1054년 1월 실바 칸디다의 훔베르트를 단장으로 한 사절단을 콘스탄티노플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총대주교의 행동을 <콘스탄틴의 증여> 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한 훔베르트는, 7월 16일 콘스탄티노플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모여 있던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제대에 총대주교와 그의 지지자들에 대한 파문 교서를 작성하여 놓았고, 체룰라리우스 총대주교는 7월 24일 대립-파문문(counter-anathemas)을 선포하였다. 이로써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는 서로 갈라지게 되었다.
물론 이 상호 파문이 이루어지던 시기에 레오 9세 교황은 생존해 있지 않았다. 교황은 1054년 3월 12일 베네벤토(Beneveno)에서 로마로 돌아왔지만 몸과 마음이 병들어 있어, 결국 한 달 후에 모국어인 독일어로 마지막 기도를 바치면서 4월 19일에 사망하였다. 그의 시신은 성 베드로 대성전에 묻혔고, 곧 성인으로 추앙받았다. 사후 40년 동안 70명이 치유를 받았고 여러 기적들이 일어났다고 전해지고 있다.
〔평 가〕 교황은 자신의 개혁 의지를 통하여 그레고리오 개혁의 선구자가 되었고, 황제로부터 교황권을 독립시키고자 노력한 인물로 평가된다. 또한 교황은 교회 내에 만연되어 있던 악들, 특히 강론에 대한 태만함 등 성직자들 안에 있던 타락된 생활상을 정리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교황은 영국과도 관계를 맺고 있었다. 영국의 에드워드 증거자(Edward Confessor)가 로마로 성지 순례를 가기로 서원하였지만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대수도원을 재건하겠다는 계획을 성지순례 대신으로 받아 줄 만큼 교황은 그와도 친밀한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 그레고리오 개혁 ; 동방 교회)
※ 참고문헌  Donald Attwater, The Penguin Dictionary of Saints,London : Penguin Books, 2nd ed., 1983/ David Hugh Farmer, The Oxford Dictionary of Saints, Oxford : Oxford Univ. Press, 2nd ed., 1987/ E.A.Livingstone, 《ODCC》/ J.N.D. Kelly, The Oxford Dictionary of Popes, Oxford Oxford Univ. Press, reprinted, 1986/ O.J. Blum, 《NCE》 8, pp. 642~643/ B. Sutter, 《LThK) 6, pp. 949~950/ D.D. McGarry, 《CE》 6, pp.347~348. 〔邊宗燦〕

③ 레오 10세 (⇨ 르네상스 교황)

④ 레오 13세(1810~1903) : 교황(1878~1903). 본래 이름은 빈천조 조악치노 페치(Vincenzo Gioacchino Pecci). 1810년 3월 2일 로마 남동쪽의 아나니 부근에서 카르피네토(Carpineto)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1818~ 1824년 비테르보(Viterbo)에서 예수회 교육을 받았다. 그 후 로마 신학교와 로마 귀족 학원에서 철학 신학 · 법학을 공부하였으며 시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1837년에 사제 서품을 받고 이듬해에 베네벤토의 총독, 1841년에 스플레토와 페루지아 총독을 역임하였으며, 1843년에는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벨기에의 교황 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벨기에를 비롯하여 당시 산업 선진국이었던 영국 · 프랑스 · 독일 등지로 시찰 여행을 다니면서 새로운 사회 문제에 접할 수 있었다. 이때 그는 가톨릭 교회의 입지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846년 벨기에에서 발생한 교육 투쟁을 둘러싼 외교 활동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바티칸은 정부의 요구에 따라 그를소환하였다. 이듬해 페루지아의 주교로 임명되어 30년이 넘게 사목 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는 실제 생활에서는 관대하고 화해적이며 진취적이었으나 교의 면에서는 철저한 편이었다. 그래서 그를 알지 못했던 교황 비오 9세와 국무 장관 안토넬리(Antonelli)는 그에게 호감을 갖지않았을 뿐만 아니라, 국무 장관과는 적대 관계에 있었다. 1853년 추기경으로 임명되었고 국무 장관이 사망한 뒤인 1877년에는 교황청 회계원 장관(camerlengo)으로 임명되었다. 교황 비오 9세가 서거하자 그는 공석 기간 동안 교황청을 섭정(攝政)하였고 교황 선거를 주관하게 되었는데, 세 번째 투표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중도파의 지도자격이었던 레오 13세 교황은 정치 · 외교 면에서 능란한 정치적 교황이었다. 당시 바티칸은 유럽의 여러 국가들과 불화 관계에 있었는데 그러한 상황에서 그는 가톨릭 교회의 위상을 격상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의 일환으로 교황은 1879년에 뉴먼(J.H. Newman)을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뉴먼을 '나의 추기경' (il mio cardinale)이라고 친근하게 대하였고, 가톨릭 교회의 쇄신에 기여한 유럽의 위대한 인물로서 높이 평가하고 존경하였다. 교황 즉위 후에 그가 발표한 귀족들과 국가 원수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상호간의 화해와 이해를 희구하는 내용 때문에 교회의 반대자들 가운데에서도 칭송이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와의 관계는 긴장 상태로 머물러 있었는데, 교황을 반대하는 혁명의 위협 때문에 그가 1881년에 잠시 로마를떠나 오스트리아에 보호를 요청할 생각을 한 것은, 이탈리아와의 악화된 외교 관계를 분명하게 보여 주는 예이다. 1886년에 그는 이탈리아 정부에 호의를 표시하면서 교황의 최상권을 완전히 회복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당시 수상인 크리스피(F. Crispi)는 이와 같은 교황의 요구에 맞서 반대 조처를 취하였다. 또 1889년 브루노(G.Bruno)의 기념비 제막식과 프리메이슨 결사의 폭력적인 시위에서 교황을 반대하는 열기가 드높았고, 교황청 국무 장관 람폴라(Rampolla)로부터 교황의 새로운 도피 계획을 들은 당시의 정부 집권층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크리스피는 교황의 여행은 허용하나 귀환은 불가능하다고 국무 장관에게 통지하였다. 이처럼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 사이의 외교 관계는 레오 13세의 재임 기간 동안에는 호전되지 않았다. 그는 비오 9세의 교회 정책 노선을 고수하면서 소위 바티칸의 수인(囚人)으로 머물렀고, 가톨릭 신자가 정치적 선거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교황은 독일 정부에 문화 투쟁의 종식 가능성을 비쳤고, 비스마르크의 협력으로 악화되었던 독일과의 외교 관계가 호전되었다. 가톨릭 교회를 반대하는 프로이센 국가의 법령은 차츰 폐기되었고, 비스마르크는 1882년 4월에 슐뢰처(Kurt von Schlözer) 남작을 평화 사절로 바티칸에 파견하였다. 1883년 12월에는 훗날 프리드리히 3세가 된 독일 황태자를 교황이 영접하였고, 비스마르크는 그리스도 훈장을 받았다. 1883년과 1893년 그리고 1903년에 세 차례에 걸쳐 빌헬름 2세가 바티칸을 방문하였고 독일의 문화 투쟁은 종식되었다. 반면 교황은 프랑스에서의 국가와 교회의 분리(1905)를 저지하지 못한 채, 보수적인 가톨릭 신자와 공화제를 지지하는 세속주의 사이의 화해를 위해 노력하였다. 결과적으로 볼 때, 레오 13세의 현명함 · 재치 · 화해적인 노력으로 선임 교황들의 교회 정책에 의해 빚어진 개별 국가와의 불화 관계가 새롭게 조정될 수 있었다. 1903년 7월 20일 사망하였다.
〔사 상〕 교황의 사상과 정책의 기본 원리는 메시지나 회칙을 통하여 드러나고 알려지는데, 레오 13세는 수많은 회칙을 발표하였다. 그중 사회 회칙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회칙>(Quod apostolici muneris, 1878. 12. 28), <세속 정부에 대하여>(Diuturnum illud, 1881. 6. 29), <프리메이슨에 반대하여>(Humanum genus, 1884. 4. 20), <그리스도교적 국가 질서에 관하여>(Immotale Dei, 1885. 11. 1), <자유주의에 반대하여>(Libertas, 1888. 6. 20) , <그리스도교적 시민의 의무>(Sapientiae Christianae, 1890. 1. 10), <노동 헌장>(Rerum Novarum, 1891. 5. 15), <그리스도교적 민주주의>(Graves de communi, 1901. 1. 18) 등이다. 레오 13세의 회칙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것은 <노동 헌장>이다. 노동자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룬 이 회칙에서 그는 당시 자본주의자들의 주장에 반대하여 근로자의 노동은 시장의 상품과 같은 것이 아니고 신성하며, 근로자는 언제나 정당한 보수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에 반대하여 개인의 사유 재산권을 옹호하고 사회주의적인 폭력 혁명이 근로자의 처우 개선책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노동 조합은 근로자의 권익 옹호를 위해 필요하며, 근로자라면 누구든지 노동 조합에 가입할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천명하였다. 사회주의가 사회 문제에 대해 잘못된 해결 방안을 제시한다고 비판한 그는, 사회주의적 노동 운동과는 다른 그리스도교적 노동 운동에 관해 언급하였다. 그리스도교적 철학, 정치 및 사회 질서에 관한 레오 13세의 회칙들은 성서와 교부들의 사상을 기초로 하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을 수용하여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개인을 도덕적 구속력으로부터 이완시키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인권이나 종교적 복지를 고려하지 않고 사회 복지만을 강조하여 개인의 자유를 경시하는 사회주의와 함께 단죄되었다. 그는 국가 철학적인 회칙에서 그리스도교적인 국가 형태는 없고 그리스도교적인 국가 질서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국가 질서의 원리는 근원적으로는 하느님의 계시에 근거하며 불변하는 것이고 국가(통치) 형태는 변할 수 있다고 하였지만, 그는 군주제를 바람직한 통치 형태로 생각하였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레오 13세는 공공 질서가 혼란해질 경우 국가의 관여권을 인정하였다. 여기서 국가의 관여는 국가의 절대적인 권력 행사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레오 13세는 전체주의에 대하여 경계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는 가톨릭 신앙에 근거하는 국가를 옹호하였고, 사회 질서로서 서양 중세의 상인 단체였던 동업 조합(guild)을 부활시킬 것을 추천하였다.
레오 13세는 <노동 헌장>을 통해 노동 문제에 큰 기여를 하였으나, 인권 문제에 관해서는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회칙 <그리스도교적국가 질서에 관하여>에서 그는 당시 인권에 관한 주장들이 사회 질서를 전복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에 관한 요청을 단죄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회 안정과 공공 질서를 강조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당시의 정치 체제를 옹호한 셈이 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그의 태도는 민주주의를 반대하려 했다기보다는 무정부주의와 허무주의를 반대한 의도로 보인다. 그는 무정부주의와 허무주의의 이론 뿐만 아니라 사회 질서를 전복시킬 위험을 지니고 있다고 믿은 프리메이슨 단체도 사회주의와 함께 묶어 생각하였다.
〔평 가〕 그는 또한 과학과 예술을 장려함으로써 학술발전에도 공헌하였다. 고고학과 자연 과학의 연구가 촉진되었고, 바티칸 천문대가 처음으로 설립되었다. 문학과 문학 비평을 위한 대학도 설립하였는데, 철학과 신학에 있어서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지도자로 받들어야 한다고 하였으며(, 1879.8.4), 그를 그리스도교 학교의 수호 성인으로 정하였다(, 1880. 8. 4). 또한 로마에 토마스 학원을 세우고 토마스의 저작을 새로 출판하게 하였으며(1879) 성서 연구도 적극 장려하였다 (〈Providentissimus Dei〉, 1893. 11. 18). 뿐만 아니라 보르게세와바르베리네 도서관을 사들여 바티칸 도서관을 확장하였으며, 1883년에는 바티칸의 문서고를 일반 연구를 위해 개방함으로써 새로운 역사 연구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 밖에도 신심 생활(예수 성심 공경, 성모 성심 공경, 묵주 기도 등)의 장려와 선교 사업의 강화에도 역점을 두었다. 그는 유럽뿐 아니라 인도, 중국, 인도지나, 타일랜드, 영국령 말레이지아, 일본, 태평양 제도, 아프리카, 미대륙 등의 선교 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선교구 48, 교구 248개 신설). 교회 일치 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두었으나(, 1896. 6. 29) 동방 교회와 성공회와의 접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말년까지 밤 시간을 베르질리우스, 호라치우스, 타키루스, 치체로의 저술을 읽는 데 보낸 그는, 임종의 침상에서까지도 자신의 시를 정리하였다. 레오 13세는 외교 분야에서 눈에 필 만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가톨릭 교회와 교황직의 도덕적 위신을 크게 높인 교황으로 평가된다. (→ 가톨릭 사회 교리 ; <노동 헌장> ; 문화 투쟁)
※ 참고문헌  K.G. Steck, (RGG) 4, pp. 320~321/ J. Wodka, Leo 13,Katholisches Soziallexikon, Innsbruck · Wien · München, Tyrolia, 1964,pp. 612~614/ H. Kühner, Lexikon der Päpste, von Petrus bis Paul VI, Zürich · Stuttgart · Werner Classen Verlag, pp. 284~289/ 《가톨릭 사전》 박종대, <가톨릭 사회 교리의 발전 과정>, 《가톨릭 사회 과학 연구》 6집(1989. 12), pp. 7~24. 〔朴鍾大〕